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7
1부 0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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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신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이극균 아뢰오. 명하신 바에 따라 역적들을 국문한 바 그 결과를 삼가 아뢰나이다.”
이극균은 지난번 사화 때 실록청 당상으로 책임을 떠맡았던 이극돈의 동생이다. 가능하면 이극돈에게 죄를 묻지 않으려고 했지만, 책임이 책임이다 보니 이극돈이 아무 불이익도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만 본인이 대역죄에 관련된 것은 아니므로 벌은 비교적 가벼웠다.
지금 이극돈은 벼슬을 내놓고 쉬고 있다. 형제들도 연좌를 당하거나 하지는 않아서, 이극균이 이렇게 승진할 수 있었다.
“참으로 고생하였다. 전조인 고려 때는 망극한 짓을 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이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는 그런 일이 없다가 과인의 대에 그런 역당들이 나타나다니, 참으로 열성조께 부끄러운 일이다.”
고려는 조선에 비해 왕권이 불안했다. 초기부터 호족이 강했고, 말기까지도 사병을 가진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왕을 암살하려드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이에 반해 조선에서는 건국 초기 행해진 사병 혁파 조치로 인해 신하들이 결정적으로 힘을 잃었다. 유교 정치를 표방하다 보니 왕들이 폭군이 되지 않으려고 신하들의 말에 잘 따라서 그렇지, 하려고만 하면 무력으로는 왕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었다.
“적당들의 정체와 그 소재를 낱낱이 밝혀 낸 의금부 도사 정호찬에게 저화 천 섬을 하사한다. 또한 정호찬에게 고변하여 적당들의 신원 및 위치를 알린 의원 김 모에게도 적당한 상을 내리겠다.”
이번 일 때문에 내가 미복잠행을 다니며 사당패에게 직접 정보를 수집했다는 이야기는 차마 신하들에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희로부터 입수한 정보는 모조리 정 도사가 돌아다니며 노력한 끝에 얻은 것으로 했다.
“의금부 도사 정호찬은 역적들의 소재를 밝혔을 뿐 아니라 일일이 추포하기까지 했다. 이 어찌 가상하다 아니할 수 있겠느냐? 이에 품계를 종4품 선략장군(宣略將軍)으로 올린다. 벼슬은 일단 종4품 경력으로 올리고, 추후 가늠하여 더 옮길 것이다.”
“전하, 두 등급을 가자함은 공에 비해 과도한 포상이라 생각되옵니다만….”
대사헌 김영정이 주저주저하면서 반대 의사를 표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일갈했다.
정호찬이 펼친 활약은 대단했다. 그날 의금부로 복귀하자마자 의금부 나장들을 이끌고 상인 박 모의 집부터 덮쳤다. 헛간 안에 있던 자객들은 낌새를 눈치 챘는지 담을 넘어 도망치려 했지만 담장 밖은 포도청 군사들 수백 명에게 이미 포위되어 있었다.
이를 본 두 자객들은 서슴없이 스스로 목을 그었다. 아마 이들은 단지 혹형(酷刑)을 두려워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보다는 고문을 당하다가 버티지 못하고 ‘미륵’을 배반하여 그 죄상을 자백하게 될까봐 더 두렵지 않았을까.
정호찬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팔을 걷고 저고리 솔기를 찢었다. 역시 둘 다 팔오금에 끝 말자 문신이 있었고, 저고리 천 사이에는 미륵이 새겨진 목패가 들어 있었다. 이로써 상희의 증언은 확실한 사실로 입증되었다.
즉시 군사 동원을 명하는 파발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를 향해 날아갔다. 정호찬 역시 의금부 나장 10여 명을 거느리고 구례를 향해 곧바로 말을 달렸다. 도성에서 거사가 성공했다는 소식만 기다리던 자칭 미륵은 오랏줄을 받고 체포되었다.
이 모든 과정이 닷새 만에 완료되었다. 그리고 지금 미륵 일당은 모조리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고 있었다.
“이번 역모에서 정 도사만큼 큰 공을 세운 이가 누가 있소? 과인은 두 등급이 아니라 네 등급을 올려도 가하다 생각하오!”
신하들이 불만스러워하는 눈치가 보였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연이은 역모 때문에 다들 내 눈치를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자칫하면 언제 그 일당으로 얽혀 들어갈지 모르기 때문이리라.
“미륵이라 자처하는 수괴 배목인 이하 저 일당들은 지난 역모 건으로 인하여 도성이 어지럽다는 풍문을 듣고, 이 기회에 세상을 완전히 흔들어 놓음으로써 자신들이 원하는 미륵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고 판명되었습니다.”
이극균이 조심스럽게 보고를 마저 이어갔다. 나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역은 잔악무도한 일이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 어찌 자신들이 천하 만민의 지지를 받아 대업을 이룬단 말인가?”
“지난번 역모 건으로 한을 품은 이들이 세상에 꽤 있으니 그중 하나가 혐의를 받을 것이고, 도성 사정과 무관한 자신들이 죄인으로 몰릴 리는 없다 여겼다고 하옵니다.”
이극균은 진중하게 보고를 계속했다. 사실 실무자인 정호찬과 둘이 마주앉아 보고를 듣는 편이 나한테는 더 재미있겠지만 다른 조정대신들을 배려하자면 이런 형식은 어쩔 수 없다.
“또한, 생각하기도 망측한 일이오나, 만약 전하께서 지난 역모의 잔당에게 해를 입으시면 후사가 없으므로 필시 조정에서 후계를 놓고 분란이 일어날 것이고, 이를 틈타 자신들이 난을 일으켜도 조정이 제대로 진압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고 하옵니다.”
“허허, 거 참 맹랑한 자들이로다.”
절로 고개가 내저어졌다. 물론 내가 아직 아들이 없긴 하지. 하지만 동생 진성대군이 있지 않은가. 왕 자리를 물려받을 확실한 후보가 있는데 무슨 분란이란 말인가.
“덕풍군이나 제안대군이 원래 왕위에 올라야 했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동조하여 그쪽에서도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길 생각이었음도 밝혀졌습니다. 다만 실제로 별다른 연계를 이뤄내지는 않았고, 일단은 저들끼리만 모의를 꾸몄다고 사료되옵니다.”
이건 좀 날카롭구나. 세조가 죽은 뒤, 왕위는 죽은 장남 덕종(의경세자)의 후손이 아니라 차남인 예종에게 넘어갔다. 예종 사후에는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아니라 덕종의 차남 성종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성종의 장남이고.
여기서 유교적인 정통성을 따지면 가장 우선권이 있는 이는 애초에 덕종의 장남이었던 월산대군과 그 아들 덕풍군이다. 그리고 예종의 원자 자리까지 올랐던 제안대군도 본래는 당연히 예종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를 사람이었다.
내 ‘증조할머니’인 정희왕후(세조의 비)가 예종 사후 덕종의 차남 성종을 다음 왕으로 골랐기에 내가 이 자리에 올랐다. 그렇다고 저 두 사람의 존재가 불안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진성대군이야 어머니는 달라도 어쨌든 내 ‘동생’이지만, 이들 두 사람은 사촌, 오촌이다.
물론 나는 진짜 연산군이 아니니까 저들 두 사람에게 부채의식 따위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저들을 내세워서 역모를 꾸밀 가능성에 대해서는 늘 경계했다. 역모 표적은 당연히 나일 테고, 만약 성공한다면 죽거나 어디 먼 섬으로 귀양 가서 평생을 살게 될 테니까 말이다.
“월산대군과 덕풍군, 제안대군 등 그 어느 왕손도 저들과 연통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만큼 이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이시고, 배목인 이하 역도들에 대해서만 처벌하심이 어떠할까 하옵니다.”
“당연한 일이다. 역도들 중 그 죄가 중한 자를 골라 능지처참하고, 나머지 일당들은 모두 관노로 하여 북변으로 보내게 할 것이다.”
내 지시를 들은 신하들이 일제히 입을 모아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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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일세, 하나 의문 나는 점이 있네. 정말 이 자칭 미륵이 자기 뜻으로 시역을 도모했겠는가? 다른 진짜 배후가 있는 건 아닐까?”
사건은 다 끝났다. 배목인 일당 전원은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고, 한 해 동안 두 번이나 역모 소동을 겪은 도성 분위기는 싸하게 내려앉았다. 헌데 내 마음 속에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그 미친놈들은 그저 깃털이었던 게 아닐까? 몸통은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 파악된 바로는 없습니다. 마침 자리를 뜬 놈의 수하들 몇을 잡지 못했는데, 혹 그들이 누군가 다른 이와 연결되어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내 미복잠행에는 요즘 친구가 하나 늘었다. 이번에 대활약을 펼친 금부도사 정호찬이다. 정호찬은 내 불안감을 가라앉히려는 듯 단호하게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보다 나…리께 말씀드릴 일이 하나 있습니다. 미륵을 자칭하던 그 자가 역모를 실행하는데, 그 상희라는 의원 아이가 본의 아니게 한 몫을 한 모양이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깜짝 놀랄 이야기였다. 무의식적으로 두 눈이 동그래졌다.
“판의금부사가 내게 올린 공초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는데.”
“큰 의미가 없는 이야기라 나리께 올리는 공초에는 적지 않았사옵니다. 상희 그 아이가 의도적으로 한 일도 아니었고 말입니다.”
내가 발걸음을 옮기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정호찬이 설명했다.
“사실, 역적 배목인은 올 초여름부터 허리가 아파 거동을 하지 못했다 합니다. 그러던 차에 상희가 놓아준 침 한 번에 통증이 사라져 산천을 활보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 소변을 보니 보통 소변이 아닌 진한 피가 나왔다 하옵니다.”
피오줌 이야기는 공초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상희는 분명히 그 자칭 미륵이 신장병을 앓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신장병을 앓는 사람이 피오줌을 눴다면, 그건 신부전증이다. 그것도 매우 증세가 심하다. 얼른 치료하지 않으면 신장이 기능을 상실해서 죽는다.
“기억나네. 자신은 신성한 미륵인데 몸에서 피가 나오니 이는 상서로운 표시라, 지금 이때 보위를 차지하면 극락정토를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였지.”
한심한 일이다. 몸에서 피가 나오는데 그게 정상인가? 아무리 신장이나 간장이 완전히 망가지기 전까지는 통증이 없다지만, 피가 나오는데도 무시했다니 정말 무식에는 약도 없다.
“그 피가 나오는 때가 문제였습니다. 몇 달을 거동하지 못하게 하던 통증이 씻은 듯이 나아버렸는데, 딱 그때 피가 나오기 시작했기에 더더욱 상서로운 징조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그럼 굳이 자객들을 사당패에 딸려서 보낸 이유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질문을 던지자 정호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희가 자기 요통을 간단히 고쳤으니, 천운을 가져온 복덩이라고 여긴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기운을 받을 셈으로 일부러 사당패와 함께 도성에 가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객들은 절대 배신하지 않도록 자기 아들과 조카 등 진짜 수족으로만 골라서 보냈습니다.”
“거참.”
기가 막힌 일이다. 자칫했으면 상희를 비롯한 사당패 전부가 배목인 일당과 한패로 취급되어 처형당할 뻔 했다. 정호찬이 손을 써서 상희가 먼저 나서서 고변한 형식을 취했기에 다행히 상희는 별 일 없이 넘어갔지만 말이다.
상희 외에 다른 사당패들은 의금부가 상인 박 아무개네 저택을 들이치자마자 쏜살같이 자취를 감추었다. 구례로 군사를 보낸다 어쩐다 난리를 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문득 생각나서 확인하니 단 한 명도 도성 안에 남아있지 않았다.
필시 뭔가가 있었다. 꼭두쇠 놈은 한패는 아닐지 몰라도 그놈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는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분명히 그 직전까지 종로에서 판을 벌이고 있던 놈들이 그렇게 빨리 튈 수가 없었다.
“어쨌든, 상희가 ‘고변’한 덕분에 놈들 뿌리 뽑았으니 그 아이가 참으로 큰 공을 세웠습니다. 나리께서 저화를 내리시는데 그치지 않고 도성에 집과 관비까지 하사해 주시어 그 아이가 평안히 살아가게 해주신 일은 적절한 배려이시옵니다.”
도성에서 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 집부터 마련해 주는 건 당연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홀로 있는 남자애다. 살림을 대신 해 줄 아낙네가 필요하다. 엄마 노릇이라면 좀 과장이려나.
“헌데 왜 하필 혜민서에 넣으셨는지요? 그토록 용하다면 내의원에 넣으셔도….”
“아니,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하는 일에서 그토록 기쁨을 느끼는 아이가 아닌가. 내의원에서는 왕실의 건강만 관리하는데 그보다는 원하는 대로 일하게 해주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말이 끝났을 때 마침 혜민서에 도착했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대문을 들어서자 늙수그레한 하인 하나가 다가와 굽실거렸다.
“나리님네들께서 무슨 일이신지요?”
“여기 새로 들어온 의원을 만나러 왔네, 아직 어린 소년인데.”
“아, 김 의원님 말씀이시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하인은 곧 사라졌다. 잠시 후 호리호리한 몸에 의원 옷을 입고 관을 쓴 상희가 나타났다. 두 눈에서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도련님, 이제 오셨군요!”
“그래, 잘 있었느냐? 좋은 곳에 있게 되었구나.”
“예! 나라님께서 집도 주셨고, 녹봉까지 받으면서 아픈 이들을 대가 없이 치료해 줄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저를 사당패에서 빼내 주신 도련님을 자주 뵙고 은혜를 갚지 못하는 건 아쉽습니다만….”
상희가 볼을 붉혔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가끔 보러 오마. 정 은혜라고 여긴다면 내가 왔을 때 말동무나 해주면 되지 않겠느냐.”
“하지만, 그러면 언제 오실지도 모르고 기다리기만 해야 하지 않습니까. 도련님께서 싫은 게 아니시라면, 가끔은 제가 찾아뵙고…싶습니다. 댁에 혹시 환자가 있다면 봐드리고요.”
잠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얘는 아직 내가 임금인줄 모르는데, ‘집’에 데려간다…?
“그게…사정이 있다. 대신, 정 내가 보고 싶으면 여기 정 군관에게 청하거라. 그러면 정 군관이 내게 연통을 줄 테니까. 정 군관 집은 물어보면 가르쳐 줄 게다.”
“알겠습니다….”
약간 실망한 듯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귀여웠다. 그래도 이 시대에 그러면 안 되겠지. 이만 돌아가자.
“그럼 잘 있거라, 또 오마.”
“조심해 가세요, 도련님!”
허리를 꾸벅 숙이는 상희를 두고 돌아서며 생각했다. 이젠 정말로 이 나라를 좀 뜯어고치는 길로 가 보자고.
무오사화도 끝났고, 역모도 하나 때려잡았다. 이만큼 했으니 이젠 정말 발목 붙들고 늘어지는 놈들이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