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72
2부 150화
– 1 –
조선이 나라의 기틀을 세운 지 어언 2백여 년, 그동안 단 한 번도 임금이 친히 전쟁에 나간 적이 없다. 그만큼 도성, 아니 소문을 전해 들은 팔도 백성들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그 관심은 당연히 전쟁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에 집중되었다.
“전하께서 북평을 포위한 야인들을 섬멸하셨다네!”
“부여주 야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던 십만 대군을 모조리 쳐부수고 붙잡혀가던 야인들을 모두 되찾으셨다는군!”
“삼성부를 포위한 십만 대군도 전부 깨트리셨다는데!”
예전이었다면 전선과 가까운 함경도, 그리고 파발이 도착하는 한양을 중심으로 먼저 소문이 퍼졌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전국에서 인쇄하는 조보가 있다. 한양에서 찍은 조보는 며칠 안에 각 도에 있는 감영으로 갔고, 감영에서는 도성에서 받은 조보를 복각해서 다시 인쇄했다.
박문국에서 조보를 포함해서 조정에서 발행하는 모든 인쇄물을 찍어내겠다던 방침이 바뀐 이유는 별 것 아니었다. 전국에 배부할 수천, 수만 부나 되는 조보를 모두 박문국에서 인쇄해 배포하는 작업이 도저히 불가능했을 뿐이다.
처음에 한동안은 억지로 시행해 보았다. 하지만 조보를 찍느라 도성 안팎에서 종이가 동이 나고, 파발은 조보를 산더미같이 실은 말을 끌고 가느라 빨리 움직일 수가 없고, 그러다 보니 기껏 찍어낸 조보도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에 막대한 양이 역참에 쌓였다.
종이 고갈 문제도 분명 심각하지만 해결하려면 해결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파발이 본연의 업무인 신속한 연락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그저 산더미 같은 조보를 전달하는 역부(役夫) 노릇이나 한다는 건 주객이 전도되는 결과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대안은 두 가지였다. 조보를 수송하기 위한 전문조직을 별도로 설립하고 파발은 본래 수행하던 파발 업무만 하게 하든가, 조보를 각 지방 감영이 인쇄하게 하든가. 신하들은 조보 배포 계획을 철회한다는 세 번째 선택도 선호했지만, 임금은 이 방안은 고려하지 않았다.
결국, 시행한 지 두 달 만에 임금도 손을 들었다. 박문국은 경기도 일원에서 배부할 조보만 찍어내도록 했다. 비용과 편의성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보 배포 자체는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제 각 감영에서는 파발이 가져온 박문국 판 조보를 목판으로 복각해서 관할 내 고을마다 배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감영마다 종이 질이나 인쇄 상태가 좀 들쭉날쭉하게 되었지만, 그 정도까지야 감수할 만했다. 조정에서 들이는 비용도 획기적으로 줄었다.
조보 보급 확대는 이번 전쟁이 전국적인 관심을 얻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예전 같으면 머나먼 변경에서 전해지는 소문에 의존해야 했을 소식이, 나라에서 제공하는 정기적인 수단을 통해 전국에 퍼지게 된 것이다. 심지어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도 조보가 갔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연이은 승전보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가뭄이 몇 해째 계속되는 중에 북방에서 전쟁을 벌인다는 사실이 조야에서 좋은 평을 듣지는 못했다.
딱히 전쟁 때문에 세금이 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출정한 군호 외에 일반 백성들은 그나마 반발이 덜했다. 하지만 사대부들은 전쟁에 비판적인 이들이 무척 많았다.
그러나 어느 간 큰 사대부도 드러내놓고 이번 출병이 잘못되었다고 나서지 못했다. 임금이 친정을 결심하고 이미 전장에 나가 있는 이상, 전쟁을 중단하라 청하는 행동은 임금의 권위를 모독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임금은 이미 도성을 비우지 않았는가? 상소를 올린들 읽겠는가?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 틈을 노리는 이들도 있었다. 실로 엄청난 배짱이었다.
“세자 저하! 실로 말씀드리기도 무서운 일이기는 하오나, 전하께서는 군왕으로서 지켜야 할 태도를 마땅히 행하지 않고 계십니다. 이어지는 가뭄 속에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나라 살림을 아껴 하늘에 겸손함을 보이셔야 할 시기에, 무위를 뽐내는 일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사헌부, 사간원의 일부 간관들이 작당하고 나섰다. 나이든 신하 중에는 여기 동조하는 이가 거의 없었고 거의 전원이 30대 이하인 젊은 사대부들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자기들끼리 연통했다가 갑자기 일시에 일어난 것이다.
“이는 하늘이 정한 이치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일입니다. 도적들이 난을 피운다면 부여주에 있는 군사로 대응하면 됩니다. 저들이 수가 많다 해도 주상께서 직접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출정한 부왕 대신 옥좌에 올라 대리청정을 하던 세자 성은 이런 노골적인 공격에 당황했다. 자신이 크게 기대고 있는 영의정 노수신을 돌아보았지만, 그 얼굴에서도 자기와 같은 당혹한 감정을 보았을 뿐이었다.
“저하께서도 돌이켜 생각해 보소서. 주상께서는 본래 학문을 즐기시며 옛 성인의 도를 몸에 익혀 실천코자 매진하시던 분이셨사옵니다! 그러던 분께서 갑자기 지난 임오년 말부터 무위를 따지기 시작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전하께서 바른 생각으로 결정하신 일이라 하겠습니까?”
“옳습니다. 전하께서는 본래 성군이 될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계셨사옵니다. 하지만 지난 여러 해 동안 전하께서 하신 일들을 보면 오직 패도를 추구할 뿐, 하늘의 이치와 도리에 대해서는 전혀 따르고자 하는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이 어찌 광증(狂症)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임금의 정책을 비판하는 정도가 아니다. 다른 곳도 아닌 조정에서, 대놓고 임금을 미쳤다고 했다. 이런 말을 뱉은 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 난맥을 바로잡고자 하면 저하께서 보위에 오르시어 국정을 바른길로 되돌리시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이는 역모가 아니옵니다. 과거 태조대왕께서도 나이가 들어 판단이 혼미해지시자 공정왕께서 그 보위를 물려받으신 바 있습니다. 저하, 깊이 생각하소서.”
“세자 저하, 통촉하소서! 신들의 뜻을 가납하여 주소서!”
“군왕은 국가지대사에 있어 육친의 정에 휩쓸리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세자 앞에 엎드려 곧바로 보위에 오르라 청하는 신하가 일시에 이십여 명에 달했다. 너무도 놀랍고 당황스러워 정승, 판서들은 경악했고 세자는 파랗게 질렸다.
“저하! 저 역당들이 하는 말에 넘어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부디 진정하시옵소서!”
영의정 노수신이 가까스로 정신줄을 부여잡았다. 지금 이 난리는 곧바로 바로잡아야 했다. 만약 이 소동이 궐 밖으로 새나간다면 엄청난 논란과 더불어 피바다가 몰아칠 게 분명했다.
어쩌면 세자까지 여기 말려들지도 모른다. 금상은 지금 최정예 군사들을 거느리고 북변에 가 있다. 가뜩이나 적과 싸우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을 텐데 조정 일각에서 세자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났다면 어떻게 될까? 혹시 세자가 저들을 부추겼다는 의심이라도 한다면?
자고로 권력에는 어떤 양보도 없다. 저들이 언급했듯이 태조는, 그리고 공정왕까지도 힘에 밀려 태종에게 왕위를 내주었다. 태종 또한 세종에게 양위하기는 했으나, 권력의 진짜 근본인 군사권만은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은 사람이 바로 태종이었다.
만약 저들의 꼬임에 넘어가 세자가 등극을 선언하기라도 하면, 엄청난 재앙이 몰아닥칠 게 빤했다. 친정에 나선 임금은 당장 거느린 군사와 함께 회군할 것이고, 세자가 모은 오합지졸 군사들을 단박에 쳐 흩날려버릴 게 뻔하다. 그 뒤에는 조정 일원이 피로 물들 게 분명하고.
“저하! 간교한 언사에 귀를 기울이지 마소서. 저들은 간악한 말로 저하께 불효를 저지르라 충동질하고 있사옵니다. 저 역도들을 당장 하옥하라 명하시고, 북평에 계신 주상전하께 빨리 사자를 보내 처분에 대한 명을 알려달라 청하시옵소서.”
고위 대신들도 일제히 엎드려 세자에게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아직 지지세력도 없는 세자를 부추겨 찬탈을 시도케 하려고 하다니, 이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성공할 수 없다. 당장 유도대장(留都大將)인 경기수사 정걸조차도 동참하지 않을 게 빤하다.
“저하! 결단을 내리시옵소서! 나라와 만백성을 위한 일이옵니다!”
“저하! 천륜을 저버리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언젠가 자신이 물려받을 게 확실한 자리라고 해도, 하루라도 더 먼저 물려받고 싶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절대 안 될 일이기도 하다. 수염도 거의 자라지 않은 세자의 앳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갔다.
– 2 –
“그리하여 어찌 되었사옵니까, 중전마마?”
“어찌 되기는. 세자가 명을 내려 역적들을 모두 의금부에 하옥하고, 주상께서 난을 진압한 후 환궁하실 때까지 가두어 두라 하였지.”
중전 김씨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왕에게 효도하고 절대 욕심을 품지 않는 효성이 지극한 아들을 둔 데 따른 자연스러운 자부심이었다.
“또한, 그자들의 일가로 관직에 있는 자들은 모두 물러나게 하고, 연루 여부를 의금부에서 엄히 따져 밝히도록 하였지. 주상께서 친정에 나서신 틈을 노려 세자에게 반역을 부추기다니, 실로 맹랑한 자들이 아닌가.”
행여 임금이 명분도 없이 세자를 폐하고 다른 왕자를 세우려 한다면, 도성을 비우고 외지에 나간 지금이 정변을 일으키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인 건 맞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가만히 있어도 용상은 세자에게 돌아올 테니 말이다.
후계자로서 세자의 지위는 확고하다. 금상은 평소에도 세자의 권위를 훼손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허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친정에 나서면서 대리청정까지 수행하게 함으로써 장차 자기 자리를 이을 사람은 세자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데 왜 찬탈이라는 모험을 한단 말인가?
물론 이런 속내를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지는 않았다. 세자가 효심이 깊고 현명하게 판단을 내렸다고 뿌듯해하면 그걸로 족했다.
“금상께서 친정까지 하시는 의도가 다 어디에 있겠는가? 모두가 세자로 하여금 평화로운 나라를 물려받아 성군이 되게 하고자 그런 험한 일을 몸소 다 해결해 두려 하시는 게 아닌가. 이제 혼이 난 외적들은 다시는 이 조선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중전마마.”
임해군의 아내, 군부인 천정씨 ? 차차의 친부 아자이 나가마사(?井長政)의 성인 아자이를 조선식으로 읽으면 천정이 된다 ? 가 바닥에 닿도록 고개를 숙이며 찬동했다. 이제는 조선에 좀 적응이 되었는지, 조선말도 아주 능숙하게 구사했다. 입궁할 때도 조선 옷을 입었다.
“모두 마마께서 세자 저하를 잘 가르치신 덕입니다. 마마께서 전하를 받들어 모시며 한 점 그르침이 없으시니, 어찌 저하께서 좋은 점을 배우지 않으시겠습니까.”
후궁 이씨도 웃으며 덕담을 했다. 아직 핏기가 없이 파리한 얼굴이지만 큰일을 치러냈다는 뿌듯함이 얼굴에 크게 비쳤다. 중전도 마주 웃었다.
“호호, 너무 띄우지 말게. 부끄럽네.”
오늘은 최근에 딸을 낳고 정2품 소의가 된 후궁 이씨를 중전이 위문하는 자리였다. 중전은 이씨와 매우 사이가 좋아서 오늘도 선물 보따리를 안고 만나러 온 참이었다. 군부인 천정씨는 종종 하는 대로 중전을 만나러 왔다가 멋대로 따라붙은 것이다.
애초에 중전 스스로가 다른 후궁들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이씨를 임금 옆에 꽂아 넣었다. 그 의도대로 임금은 이 아이에게 깊이 빠져 장성한 아들이 있는 다른 후궁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당연히 세자를 위협할 왕자가 나타날 일이 줄어들었다.
물론 이씨도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영특하긴 해도 너무 어려서 세자를 위협할 만한 힘이 없었다. 중전으로서는 이씨를 경계하기보다 아끼고 귀여워해 줄 필요가 훨씬 컸다.
“다만 도적을 토벌하는 일에 대군을 투입해서 싸운다 하니 불만이 있는 사대부나 백성들이 꽤 있음은 사실이지. 나도 아네. 하지만 이를 기화로 세자를 부추기려 하다니, 그건 용서하지 못할 역적질이 아닌가.”
어째 본래 방문 의도는 그게 아니건만, 자꾸 대화 방향이 정치적인 문제 쪽으로 흘러갔다. 왕이 도성을 비우고 친정 중이다 보니 후궁에서도 그런 대화가 안 나올 수 없는 모양이었다.
“왕좌에 앉고 싶다면 그렇게 뒷전에서 음모나 꾸밀 게 아니라 전장에 나가 당당히 공적을 쌓아야지요. 자랑삼아 한 마디 말씀드리자면, 제 부군이신 임해군은 이번 출정에서 수천이나 되는 도적들 사이를 단기필마로 뚫고 나와 구원을 청했습니다. 어찌 용사가 아니겠어요?”
차차는 기회만 있으면 임해군이 얼마나 용감한 무사인지, 포위를 뚫을 때 얼마나 많은 적을 베었는지 등을 만나는 사람마다 설파했다. 중전뿐만 아니라 다른 종친이나 관리들을 만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호감을 얻으려고 기를 쓰는 듯했다.
중전은 소의 이씨가 혐오하는 눈빛으로 차차를 노려봄을 알았다. 차차는 모르는 것 같지만 말이다. 노려보는 이유도 알 듯했다. 출산 이후 몸이 다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자기 마음대로 쳐들어 와서는 남편 자랑이나 하고 있으니, 어찌 밉상이 아니겠는가.
한편으로 차차가 저렇게 방정을 떠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과거에 임해군은 정말 세간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 개망나니를 개심시켜서 어느 정도 사람 구실을 하게 키워낸 장본인이 바로 차차 본인이니,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마마, 듣자 하니 드디어 가뭄이 끝난 모양이옵니다. 소녀가 궐 밖에 있는 일가에게 전해 들었는데, 팔도에 모두 봄비가 알맞게 내려 봄 농사에 지장이 없을 모양이라 하옵니다.”
과연 이씨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꿔버렸다. 순식간에 화제가 임해군에서 날씨로 넘어갔다. 중전도 화답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바닥이 다 드러났던 저수지 바닥에도 다시 물이 고이고 있다지. 너무나 힘든 가뭄이었네. 비록 남만인들을 통해 새로 들어온 신작물과 강남에서 실어온 곡식 덕분에 기근은 겪지 않았지만, 힘든 시절이었네.”
가뭄은 갑신년(1584년)부터 4년이나 계속되었다. 처음 두 해는 아껴둔 물로 버텼지만, 나중 두 해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때맞춰 금상이 남만인들에게 옥수수와 담저를 받아오지 않고, 대국으로부터 쌀을 들여오지 않았다면 백성들이 굶주리는 참상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올해는 하늘도 우리 전하를 도우시니, 필경 전선에서도 좋은 소식이 올 것입니다. 소녀는 오직 중전마마를 따르며 전하께서 개선하실 날을 기다릴 뿐입니다.”
이씨가 칭송의 말과 함께 고개를 숙여 중전에게 예를 표했다. 고개를 숙이는 통에 이씨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중전은 그 뜻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주 미소를 지으며 그 인사를 받았다.
“그대가 이토록 충심으로 전하를 받드니 전하께서도 꼭 무사히 돌아오실 걸세. 다른 생각은 말고 몸조리만 열심히 하게. 그래야 전하께서 돌아오시자마자 또 모실 수 있지 않겠는가.”
이씨가 얼굴을 붉혔다. 그 옆에서 차차가 또 설레발을 쳤다.
“저희 부군도 큰 공을 세울 겁니다! 나중에 중전께서도 부군이 공을 세우면 크게 보아 국왕 전하께 부디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
“알겠네, 내 잘 말씀드려 보지.”
일전에 소의 이씨가 ‘천정씨는 겉과 속이 다르다’고 몰래 일러준 적이 있었다. 중전도 그때 들은 말을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자 몸으로 이국에 와서 살자면 어찌 속을 다 드러내고 살 수 있겠나 싶어 크게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볼모로 온 처지, 친구도 시녀들뿐이지 않은가.
중전은 차차를 별로 경계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남편인 임해군도 발길에 차이는 여러 종친 중 하나일 뿐인데, 왜인이기까지 한 차차 따위가 신경이 쓰일 게 뭐란 말인가. 적당히 귀엽게 봐주면서, 외숙에게 악담을 써 보내지만 않게 하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