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8
1부 038화
– 1 –
배목인 일당의 처리를 마치고 나서 가장 아쉬운 일은 노사신의 장례에 제대로 신경을 써주지 못한 일이었다.
노사신은 무오사화 때 사림들을 변호하다가 스트레스를 너무 심하게 받았는지 여름을 지내면서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졌다. 그러다가 내가 저격당한 직후에 그만 사망하고 말았다.
“신은 오직 전하께서 상벌을 적절히 행하시고 경연을 부지런히 행하시길 바랄 뿐이옵니다.”
그동안 무던히도 나를 위해 노력했던 노사신의 유언을 들으니 좀 미안했다. 상벌 문제야 뭐 나도 나름대로 무난히 하려고 노력했지만, 경연은 의도적으로 빼먹은 게 사실이니 말이다.
아무리 이 시대에는 성리학이 기본 철학이자 지배적인 사회사상이라지만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에겐 어렵다. 게다가 나는 애초에 서구식으로 현대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보니 공자가 어쩌고 맹자가 어쩌고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밖에 안 들렸고.
결국 내가 뭔가 명령을 내렸을 때는 성리학적인 고려 따위 없이 나가는 게 태반이었다. 그게 성리학적으로 정당한가의 여부는 때마다 달라졌다. 결과는 조정에서 벌어지는 현피에서 어느 쪽이 이기느냐에 따라 결정되었으니까 말이다.
현피라고 말하면 당황스럽겠지만 실상은 별 거 아니다. 가급적 내 뜻을 따르는데 우선을 두는 훈구파 대신들과 무조건 성리학적인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사림파 대간들 사이에 벌어지는 논쟁을 이야기하는 거니까.
노사신은 연륜과 지위, 그 능력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인재였다. 또한 조정 고관인 훈구파 영수 중 한 사람으로서 임금의 뜻은 가능한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노사신은 자신이 대간들에게 수많은 탄핵을 받으면서도 언제나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하려고 애썼다.
그 덕분에 그간 일일이 묘사하지 않았던 수많은 소소한 난제들이 비교적 무난하게 넘어갔다. 게다가 노사신은 진정 대인배였다. 사화가 일어나자 그동안 자신을 그토록 공박했던 바로 그 자들을 구하려고 진력하다가 기력을 소모했고, 그만 생을 다하고 말았다.
나로서는 정말 아쉬운 손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제 사림들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만큼, 내게 현실적인 조언을 한층 마음 편하게 제공해 줄 수 있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나마 이 시대에 향년 72세라면 충분히 호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게 위안이지만….
어쨌든, 이로써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권위가 하나 줄어들었다. 또한 내가 기존의 관념과 방식을 따르도록 제약하던 리미터도 하나 사라졌다.
바로 지금 내가 벌이는 이런 일들을 하지 말라고 말리던 사람 하나가 말이다.
– 2 –
“실로 장관이로고!”
눈 닿는 데까지 기치(旗幟)가 펄럭이고 갑옷과 창검이 번쩍였다. 살곶이(箭串)벌판, 평소에는 말을 놓아먹이는 마장(馬場)이지만 지금 이곳은 사열식을 하는 군사교련장으로써 5위 소속 수천 군사가 늘어서 있었다.
여기는 현대 서울 지리로 따지면 성동구 용답동이다.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곳으로, 개간되지 않고 풀과 버드나무가 우거져 있다. 그래서 군마를 방목하거나 군사교련을 벌이는 장소로 쓰고 있었다.
“나라에 정병이 이토록 갖춰져 있으니 뿌듯하기 이를 데 없다. 어떤 적도들이 침노하건 능히 진압할 수 있겠구나.”
“모든 것이 전하의 성덕이옵니다.”
철릭을 입은 나와 달리 관복을 입은 병조판서 이계동이 허리를 굽혀 치사했다. 이 자리에는 주요 대신들이 거의 다 참석했지만 그중 영의정을 비롯해 직접적인 군사적 직책을 맡지 않은 이들은 모두 관복을 입었다.
임시로 설치한 높은 장대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열식은 실로 장엄했다. 전차와 장갑차, 중포(重砲)와 미사일이 줄을 잇는 현대의 군사 퍼레이드와 비교하자면 규모 면에서는 작을지 모른다. 하지만 갑옷과 창검이 보여주는 현시효과는 현대무기와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그럼 진법 훈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사열을 총지휘하는 도총관(都摠管) 유자광이 내게 고했다. 유자광은 미륵 패거리가 나를 저격하는 사건이 생기기 조금 전에 ‘겸도총부도총관’으로 임명되었다. ‘겸’인 이유는 특진관 지위를 유지한 채 도총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자광이 나서서 지시를 내렸다. 지시를 받은 기라졸(旗喇卒, 깃발을 든 신호수)들이 들고 있던 기를 흔들자 들판을 메우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흩어져 대열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좋아, 좋아!”
흡족했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도 이런 일사불란한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사실 내 군대 생활은 경계근무와 삽질이라는 두 단어로 축약할 수 있었으니까. 뭐의 약자인지도 기억나지 않는 RCT라는 훈련은 받았지만 이런 대규모 병력이 모이는 일 같은 건 없었다.
물론 21세기 군사적 현실에서 이런 모습은 말 그대로 국군의 날 퍼레이드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 정도로 많은 병력이 한 자리에 모였다간 항공기가 투하하는 집속폭탄 단 한 방에 골로 갈 게 빤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거야 먼 훗날에나 걱정할 일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병력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밀집하고 그 대열을 유지할 수 있는가가 승리를 좌우한다. 19세기까지, 전쟁이란 대열이 먼저 무너진 쪽 군대가 패배하는 것이었다.
지금 조선군 병력 대부분은 매년 정기적으로 복무하는 번상병이다. 우리 시대보다 더하다면 더하다. 우리는 몰아서 2년만 복무하면 전쟁이 나지 않는 이상 다시 군대에 안 가는데, 여긴 16세부터 60세까지 평생 매년 2개월에서 6개월씩 군대에 가니 말이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의 현실에 맞는 제도가 시행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 4년 동안 현재 실시중인 제도에 함부로 손을 대기가 곤란했다.
군역만 해도 그렇다. 왕으로 깨어난 초기에, 기간은 3년 정도로 해서 대한민국과 같은 의무병역제를 실시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마침 군역청에서 군역을 정리하는 작업도 거의 완료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서는 확실히 좋은 제도 같았다. 영감들 대신 젊은이만 뽑을 수 있고, 3년 동안 전투 훈련만 받은 정예병을 확보할 수 있다. 여기에 예비군 훈련 약간이면 전력 유지도 되고. 백성들도 몰아서 복무하는 게 매년 몇 달씩 평생 군대에 끌려가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전하, 군역을 쉬지 않고 3년이나 치른다 하면 평생을 복무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 도망하는 이들이 줄을 이을 것이옵니다.”
“지아비가 3년이나 입역(立役)하게 되면 처자의 생계가 아예 끊기는 바, 가장으로서 도리를 못하게 됩니다. 혼인하지 않은 자라 해도 3년간 가족을 버리게 되면 부모는 어찌 모시겠습니까? 그 폐해가 실로 매년 군역을 부과하느니만 못합니다.”
“군정의 수가 현재 14만 가량 됩니다. 보인이 35만이니 군역을 질 수 있는 남자가 50만인데, 이들을 모두 젊을 때만 동원한다 하면 전국에 군사가 3만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겨우 3만을 가지고 어찌 북변과 남변을 지키며, 왕실을 수호하겠습니까.”
조정에 이 안건을 올리기 전에 미리 승정원에서 토론을 해 보았다. 그랬더니 하나같이 반대했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반대안을 내놓은 이가 내 손위처남이자 당시 좌부승지(군무 담당 승지)였던 신수근이었다.
“게다가 백성들이 한번에 3년이나 군역을 치르고 나면, 죽을 때까지 치를 군역을 이 한 번에 다 치렀다고 여길 텐데 전시에 어찌 대군을 소집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군역을 마친 군정들도 유사시 군사로 충원한다 하시나 심히 어렵습니다.”
“각 지방 관장이 맡아 매년 열흘쯤 소집하여 조련을 실시하고, 언제든 동원이 가능하도록 군적을 관리하면 되지 않는가.”
“지금도 돈을 받고 군역을 빼 주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그 권한이 지방관에게 간다면, 필시 고을의 군사를 소집하여 조련을 실시하는 대신 베나 쌀만 거두는 지방관들이 태반일 것입니다. 이는 많은 군사를 해산하고 그 대가로 탐관(貪官)들의 배만 불리는 거나 같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에 문자 그대로 발생한 일이었다. 삼정의 문란 중 하나가 바로 군정의 문란, 병역 대상자에게 면제세를 물리는 과정에서 발생한 엄청난 비리다. 대한민국 중학생만 되어도 국사시간에 다 배우는 요점사항이기도 하다.
아직은 중앙에서 지방관들을 완전히 통제할 수단이 부족하니 신수근의 지적이 전적으로 옳았다. 결국 때 이른 국민 개병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비교적 쉽게 이룰 수 있었다. 바로 내 친위대, 겸사복과 내금위 예하 병력은 대폭 늘리는데 성공했다.
“감히, 한낱 사교의 자객 따위가 궁에 침입하여 궁인을 살상하고 과인의 목숨을 노렸다. 그대들은 이런 사태가 재연되어도 좋다는 말인가? 이에 반대하는 자는 자신이 시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인정한다고 간주해도 좋으리라!”
영의정부터 대간에 이르기까지, 평소라면 내가 무슨 소리를 하건 대개는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보던 자들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겨우 열흘 동안 자객이 두 차례나 나를 노렸다. 아무리 미친놈들이 저지른 짓이라고 해도, 위협은 위협이었다.
그 상황을 직접 보고도 경호를 강화하지 말라고 하는 자는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닌 말로, 그 자신이 궁궐에 침입할 작정이 아니라면 경호부대 강화에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연달아 불상사가 터진 뒤에 말이다.
50명이던 겸사복은 150명으로, 200명이던 내금위는 600명으로 딱 세 배가 되었다. 신입 대원을 뽑기 위한 취재(取才, 시험)가 연이어 열리면서 무과를 준비하던 이들 중 상당수가 이쪽으로 지원했다. 나름 청년실업 해소, 과거낭인 감소에 한 몫 한 듯하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이뤄낸 작업이 이번 사열이다. 흉년이었네, 민심이 흉흉하네 하며 반대하는 의견이 줄을 지었지만 결국 관철시켰다.
“올해가 흉년이었다 하나, 출병도 아니고 사열조차 하지 못할 만큼 어렵지는 않다. 또한 자객이 궁궐을 범하고 역모가 잇달았던 올해와 같은 해일수록 군주가 위엄을 보여야 한다. 마땅히 사열을 하고, 도성 백성들로 하여금 와서 관람토록 하라!”
과연 지금 사열이 벌어지는 벌판 인근 언덕에는 구경거리를 보러 온 사람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다. 엿장수를 비롯한 온갖 잡상인들도 가득했고. 과연 사람 사는 건 언제나 똑같구나 싶었다.
나야 사전에 프로그램 안내를 받았지만 저 관객들은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이 신기할 뿐이리라. 대열을 짠 창병들이 함성을 지르고, 궁수들이 일제사격으로 적진을 제압하면 편곤을 든 기병들이 질주하며 표적의 머리통을 날린다.
아, 편곤은 사실 원래는 임진왜란 이후에야 도입되었고 이 시기에 쓰이지 않은 무기다. 다만 크게 비싸지 않은데다가 사용법도 쉽고, 위력도 막강한 장비기에 내가 고안한 것으로 해서 지급했다.
내가 추가한 무기는 이뿐이 아니다. 창병들 중 절반은 당파창, 즉 사극에 주구장창 등장하는 ‘조선군 창’으로 무장하고 있다. 이 창은 날이 세 갈래라 적의 무기를 막거나 낚아채기에도 좋고, 화전을 얹어서 쏘는 거치대로서도 유용하다. 이것 역시 본래는 임진왜란 이후에 나왔다.
문종이 만들었던 화차가 ‘문종화차’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남았음을 생각하면 아마 이 무기들은 ‘연산곤’, ‘연산창’ 하는 식으로 별명을 갖게 되지 않을까? 아 물론 내가 이렇게 생각할 뿐, ‘연산’이 아니라 뭔가 다른 이름이 붙겠지.
이런 식의 소소한 개선은 반발도 없고, 비용도 비교적 싸다는 면에서 시행하기가 쉽다. 그러면서 부작용도 없고 효과는 확실하다. 확실히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개혁이다. 지난 4년 동안 이런 것들은 웬만큼 해치웠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돈 드는 일들을 벌일 차례다. 다만 그러자면 먼저 돈을 모아야 하겠지? 임금으로서 체면을 구기지 않고 돈을 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자, 저 들판을 메운 병사들에게 충분한 무기와 식량을 쥐어주고 외국으로 원정까지 시키려면 과연 어떻게 돈을 긁어모아야 할까. 어려운 문제다.
들판 저편에 표적으로 세워 놓은 통나무 벽을 향해 총통이 불을 뿜었다. 사람 허리통만한 통나무가 박살나는 모습에 사방에서 탄성이 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