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80
2부 158화
– 19 –
“역시 건주위부터 쳤어야 했는데.”
호이파 부장 바인다리가 허공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멍청한 소리를 했던 코르친과 다른 부 부장들, 그리고 회의에서 더 강하게 밀고 나가지 못했던 자신에게 가하는 욕설이었다.
“추장, 저들이 앞에 나서서 계속 우리를 비웃고 있습니다. 그만 결전을 벌이시지요.”
“닥쳐.”
지금 바인다리에게는 기병 1만, 보병 1만밖에 병력이 없다. 그나마 이번에 넘어온 장백여진 병력까지 다 합친 숫자다. 지난번 누르하치를 막으러 나갔다가 패한 일이 결정타였다.
그날, 바인다리는 하다를 약탈하고 귀환하는 누르하치를 잡으려고 출격했다. 적은 겨우 1만, 이쪽은 3만이니 당연히 이기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적을 만만히 보다가 완전히 참패하고 말았다. 나중에 돌아온 자들을 합쳐도 생존자는 전체의 절반을 조금 넘었다.
“지난번에도 싸움을 서두르다가 박살나지 않았나. 장백여진 놈들은 제대로 싸우지를 못한단 말이다. 더구나 상대가 저놈들이라니.”
눈앞에는 왜인여진 2만 기가 당당하게 진을 치고 있었다. 저들은 호이파군의 대열 코앞까지 다가와서 알아듣기 힘든 저들의 말로 도발을 걸어왔다. 왜인여진 놈들이 겁을 주듯이 다가올 때마다 대열 중앙에 있는 장백여진 병사들은 무의식적으로 얼굴에 두려운 빛을 띠었다.
“저놈들이 뭐라고 외치는 거냐?”
“‘이 지저분한 노예들과 더 지저분한 노예 도둑놈들아, 네놈들이 주제를 알면 당장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살려는 주겠다…’고 합니다, 추장.”
왜인여진들은 주변 여진인들과 다른 독특한 자기네 말을 쓴다. 바다 건너 왜 땅에서 건너온 할아버지 조상들의 말과 그들과 혼인한 할머니 조상들의 여진 말이 뒤섞이고, 거기에 관리로서 그들을 통제하는 조선인들의 말까지 섞였다. 그래서 통역 없이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허튼소리! 장백여진은 명백한 자유민인데 어찌 제 놈들의 노예란 말이냐! 그리고 우리를 보고 뭐라고? 저 멍청한 조선의 개들이 감히 해도 되는 말을 가리지 못하는구나!”
바인다리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저 원수 같은 놈들이 이렇게 나를 모욕하다니!
그동안 조선인들은 왜인여진을 시켜 장백여진을 감시하고 호이파를 견제하게 했다. 2만기에 달하는 전사를 가진 왜인여진은 호이파와 세력이 비등했고, 두 세력은 수시로 상대편 영역을 습격해서 약탈과 살상을 일삼았다. 장백여진 통제권도 중요한 갈등 요인 중 하나였다.
이번 전쟁이 터지자 왜인여진들은 병력을 모아 방어에 주력했다. 이쪽에서도 주된 목표가 왜인여진과 싸우는 게 아니었기에 선공을 걸지 않았고, 이쪽 방면이 조용했던 덕분에 건주위 추격에도 나설 수 있었다. 헌데 그 팽팽하던 긴장이 이제 깨졌다.
“추장, 결단을 내려 주십시오. 저놈들이 우리 땅으로 쳐들어 왔습니다. 맞아 싸우려고 군사를 동원하신 게 아닙니까?”
“싸우려고 불렀지. 하지만…!”
지난번 싸움에서 날려먹은 2만 명 가까운 병사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좋았으리라. 그랬으면 두 배에 달하는 숫자로 저놈들을 포위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병력은 같은 수, 그것도 절반은 왜인여진이라면 부들부들 떨며 두려워하는 장백여진 녀석들이다.
“지금 우리가 싸움을 걸면 진다. 그것보다는 저 왜인여진 놈들이 우리를 보고 여기 머물게 해서 진격을 막는 정도가 최선이야.”
저들이 퍼붓는 모욕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부하들도 당장에 적을 쳐부수자고 날뛰었다. 하지만 바인다리는 지난번 싸움에서 성급하게 굴었던 결과를 잊지 않고 있었다.
병력을 소규모로 나누어 이곳저곳에 복병을 심고, 이동하는 적을 배후에서 괴롭히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왜인여진들은 전원 기병으로, 치중대도 없이 자기들이 휴대한 물자만 가지고 바람처럼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그걸 막자면 대군으로 그 앞을 막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놈들과 수가 비슷하다. 그러니 놈들도 함부로 덤비지는 못해. 이대로 버틴다.”
시간을 끌면 그동안에 부녀자들을 피난시킬 수 있다. 저들도 진전이 없으면 물러날 것이다. 비록 절반이 보병이라지만, 2만이나 되는 이쪽 병력을 그대로 두고 우회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흥분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간다면 또 패배가 있을 뿐이다.
“계속 싸우지 않고 시간만 끄시면, 우리 병사들이 먼저 도망할지도 모릅니다.”
측근 부하들의 걱정도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사기는 승리를 위해서 중요한 요소였고, 적이 눈앞에 있는데도 싸우지 않는 추장은 부하들에게 불신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바인다리 역시 그 문제는 알았지만, 질 게 빤한 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적이 공격해옵니다!”
“아니, 저놈들이?”
뜻밖에 적이 정면으로 호이파 군을 공격해왔다. 좀 더 시간을 끌면서 이쪽 대열이 무너지길 기다릴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전원 기병인 적은 절반이 보병인 호이파에 비해 기동력이 우수했다. 이쪽이 제때 움직이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사이에 달려온 적 제1파가 좌우로 갈라지면서 화살비를 퍼부었다. 제2파가 밀려오는 모습을 본 바인다리가 창백해졌다. 뒤늦게 호령이 떨어졌다.
“맞아 싸워라! 기병, 돌격!”
양익에 5천 기씩 배치한 기병들에게 뒤늦게 명령이 내려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한발 늦어 있었다. 이미 화살 세례를 한 번 맞은 데다, 선제공격을 당하는 바람에 달려나가 싸울 시점을 놓쳤다. 기병은 속도가 중요한데, 지금 달려나간들 적과 같은 속도를 낼 수는 없었다.
“보병들은 창을 들어라! 궁수들은 뒤에서 활을 쏘아라!”
제대로 된 장창진을 구성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조선군 보병들이 여진 기병에 맞서느라고 창을 들고 대형을 짜는 모습은 여러 번 보았다. 그 대형이 위협적이었던 건 분명히 기억했다. 바인다리는 정면으로 돌입할 기세인 적의 제2파에게 창을 겨누게 했다.
혹시나 했던 창이 정말로 효력을 발휘했다. 왜인여진 기병들은 장창진에 정면으로 돌입하지 못하고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들과 호이파 병사들 사이에 화살이 오갔고, 몇몇 기병들이 화살에 맞고 낙마해서 바닥을 굴렀다. 물론 이쪽에서도 대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렸다.
잠시 한숨을 돌린 바인다리는 시선을 기병이 달려나간 앞쪽으로 돌렸다. 기병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살필 심산이었는데, 뜻밖이었다. 어느 정도는 백중세를 유지하리라 믿었던 기병들은 완전히 밀려서 당장이라도 전멸할 상황이었다.
왜인여진들이 쓰는 대도가 번쩍이자 호이파 기병들의 목이, 무기를 든 팔이 허공을 날았다. 가벼운 가죽 갑옷은 그 예리한 날에 종잇장처럼 잘려나갔다. 전력으로 달려오면서 힘을 실어 휘두르자 그 위력은 몇 배가 되었다.
화살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에서 하나를 날리면 다섯 개, 여섯 개가 날아왔다. 추장이 적에게 겁을 먹었으니까 오늘 싸움이 없으리라고 생각하던 호이파 병사들, 그리고 잘 벼린 칼날처럼 날이 선 채 싸움 준비를 하던 왜인여진 적병들이 격돌했으니 당연한 결과일 터였다.
게다가 적군 2만 기 중에서 보병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견제하는 역은 2천 기뿐이었다. 진형 중앙에서 호이파 군 보병들을 향해 달려오던 기병들은 대부분 좌우로 방향을 틀어 좌우익에서 적과 싸우고 있는 호이파 기병들을 뒤에서 쳤다. 기병들은 삽시간에 포위되고 말았다.
바인다리가 앓는 소리를 내며 통탄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보병들 앞까지 막도록 진형을 넓고 얇게 만들었다면, 적 제1파에게 그대로 돌파당하면서 기병들이 한 번에 몽땅 궤멸당하고 말았을 테니까 말이다.
“후퇴, 후퇴하라!”
뒤늦게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기병들은 완전히 포위당한 상태에서 도살당하다시피 하고 있고, 보병들은 주위를 돌며 화살을 쏘아대는 적 기병들에게 과녁 취급을 받고 있었다. 워낙 몰려 있다 보니 제대로 조준하지 않고 쏘는 화살에도 누군가가 맞아 쓰러졌다.
이대로 당황만 하고 있다가는 전멸이다. 고심하던 바인다리가 결단을 내렸다.
“나를 따라라!”
타고 있던 말 옆구리를 걷어찬 바인다리가 후방에 보이는 숲을 향해 말을 몰았다. 따라오는 건 역시 말을 탄 호위병 약간뿐, 아직 남아있는 보병들을 챙길 여유는 없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화살을 쏘며 보병들을 몰아대던 왜인여진 기병들이 탈출을 깨닫고 뒤를 쫓았다.
“대승리로군.”
왜인여진 전사들을 지휘하는 감왜장(監倭將) 이홍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전장을 살폈다. 정면으로 격돌하여 적병 수천 명을 베었고, 포로도 수천이나 잡았다. 포위를 뚫고서 빠져나간 적도 제법 있긴 하나, 저들에게 다시 모여 저항을 계속할 능력 따위는 없을 터였다.
“저들도 이리 정면으로 패할 줄은 몰랐겠지.”
“그럴 겁니다, 나리.”
왜인여진들도 각자 거주하는 동리에서 속오군으로 편제되어 있다. 당연히 각 고을에서 모인 군사는 향군장이 인솔한다. 하지만 여러 동리에서 모인 군사를 함께 움직일 때는 왜인여진이 아닌 조선인 장수가 지휘를 맡게 되어 있다.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이홍빈은 왜인여진들을 많이 겪어 보았다. 이들은 칼과 활과 말을 능숙하게 다룰 뿐 아니라 싸움에 참여하는 일 자체를 영광으로 여겼다. 그야말로 타고난 용사들이었다.
“중간에 도망친 우두머리는 잡았는가?”
“잡았습니다. 여기 머리입니다.”
도망치는 놈을 뒤에서 활로 쏘아 말을 쓰러트리고, 말에서 떨어진 녀석이 뭐라고 외치는데 그냥 대도로 내리쳐 베어버렸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반쯤 쪼개져 있었다.
“고생했네. 포로들을 시켜서 그놈이 어떤 놈인지, 이름을 확인하게.”
호이파 대군을 지휘하던 놈이다. 호이파 부장 바인다리가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닌가. 명색이 대추장인데 이렇게 쉽게 죽었다고 하면 그건 또 그거대로 쉽게 믿기 힘든 일이니 말이다.
“예, 나리. 포로들에게 보여주고 이놈의 이름을 확인하겠습니다.”
향군장들이 물러가자 이홍빈은 자기 휘하 참모진을 불러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했다. 호이파 내부로 들어가 적 잔당을 소탕할 것인가? 아니면 주상이 거느린 본영에 합류할 것인가?
– 20 –
“쏘아라!”
불덩어리를 위에 실은 쪽배와 뗏목이 강물 위를 잔뜩 메우면서 흘러왔다. 수십 개는 족히 될 뗏목을 보면서도 이순신은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포를 쏘아 뗏목을 부수면 불덩이가 가라앉을 것이다. 그래도 가까이 오는 물건이 있으면 삿대로 밀어 배에서 떨어지게 하라!”
“예, 장군!”
포를 싣고 있는 배에서는 포수들이 연달아 조란환을 쏘았다. 뗏목을 묶은 밧줄이 끊어지고, 위에 실려 있던 불덩어리들은 연달아 물에 빠졌다. 물에 빠진 불덩어리들은 치익거리며 김을 피워올리고는 곧바로 꺼졌다.
운 좋게 포탄을 피한 몇몇 뗏목은 선단 바로 앞까지 흘러왔다. 하지만 이미 대비하고 있던 군사들은 삿대로 막아 뗏목을 옆으로 밀어냈다. 뒤에 있던 배들도 연달아 뗏목을 밀어내어 단 한 척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
“진격하라!”
준비한 뗏목에 불을 질러 화공을 시도했던 야인들은 자기들의 공격이 모조리 실패하자 크게 당황했다. 타고 있던 쪽배를 급히 저어 마을을 향해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고, 그 뒤를 향해 화포가 연달아 불을 뿜었다. 물보라가 치솟으면서 야인들이 탄 쪽배가 줄줄이 뒤집혔다.
“미리 경보를 전한 놈이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앞에 있는 마을을 공격할 때 빠져나간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출타했다가 돌아와서 마을이 쑥대밭이 된 것을 보고 상류 쪽 마을에 알렸는지도 모른다.
“방비도 튼튼하군.”
이번 마을은 평범하게 강변에 위치하지 않았다. 강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통과세라도 걷을 작정인지 강가 절벽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무사히 강가까지 도착해서 쪽배를 대고, 절벽 틈에 난 샛길을 뛰어 올라가는 몇몇 야인들이 보였다.
“육지 쪽에서 들어가는 진입로는 너무 좁고, 이미 막혀 있어서 들어갈 수 없다 하였지?”
“그렇습니다, 장군.”
선거이가 보낸 보고에 따르면 적은 돌과 통나무를 쌓아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막아버렸다 했다. 게다가 장애물을 치우려고 접근하기만 하면 화살이 구름처럼 날아온다고 했다.
육지에서는 공격이 잘 안 된다는 보고를 받고 강에서 공격할 생각으로 선대를 전진시켰더니 화공용 뗏목 세례를 받았다. 이쯤 되면 확실히 적이 대비를 철저히 한 셈이었다.
“총통위에서는 방포 준비를 마쳤습니다.”
“각 포에서 준비를 마치는 대로 쏘아라.”
“예, 장군!”
적이 절벽 위에서 독을 뿜으며 기다리고 있는데, 그걸 빤히 보았으면서 맨몸으로 기어오를 필요는 전혀 없다. 이럴 때 쓰라고 화포가, 그리고 신기전이라는 물건이 있다.
잠시 후 대완구가 불을 뿜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대신기전과 화차에 탑재하는 신기전기 틀이 연달아 구름 같은 연기를 뿜었다. 지금 배가 흔들린다면 기껏 쏜 화포가 모조리 빗나갈 것이므로, 타공과 격군들은 배가 흔들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역시 흔들리는 배 위에서 쏘는 포는 잘 안 맞는군.”
이순신이 안타까운 기분을 표했다. 공격 목표인 울라 마을까지 거리는 약 4백 보, 충분히 맞힐 수 있는 거리건만 대략 반 정도는 표적을 완전히 빗나갔다. 배 한 척, 집 한 채를 노려 쏘는 것도 아니고 마을 하나라는 큰 목표를 겨누고 쏘는데도 말이다.
“배가 너무 작은 탓도 있을 겁니다, 장군. 배가 클수록 흔들림이 덜해서 포를 쏠 때도 훨씬 안정되지요.”
요즈음 들어서 왜구는 거의 사라졌다. 덕분에 지금 이순신 휘하에서 수전, 그것도 화포를 사용하는 수전을 가장 많이 치러본 사람은 뜻밖에도 로드리고 대위였다. 아직 젊지만, 레판토 해전까지 경험한 노병인 것이다.
“포격을 정확하게 명중시키려면 큰 배, 정밀한 대포, 숙련된 포수라는 세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춰져야 합니다. 장군께서 강력한 함대를 양성할 생각이시라면 그 세 가지를 유념하십시오.”
“고맙네. 잊지 않도록 하지.”
이순신은 발포 만호로 수군에 재임한 경력이 있었다. 그리고 육군과 수군을 수시로 오가는 조선 무관들의 보직 변동을 생각하면, 이번 전쟁이 끝난 뒤에 그가 수군으로 가게 될 공산도 얼마든지 있었다.
이순신 자신은 육군으로 가건 수군으로 가건 별 상관이 없었다. 어떤 자리를 받든, 상감과 백성들을 위해 충성을 바쳐 최선을 다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