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81
2부 1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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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은 지금 우리 땅에 성을 아홉 개 짓고 있습니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군사들이 각자 자기가 보고 온 바를 세밀하게 보고했다. 울라 전역에 걸친 정보를 수집한 만타이는 그 내용을 땅바닥에 그림으로 그리면서 취합했다.
“저들이 짓는 성 중에서 가장 큰 성에 임금이 머물고 있습니다. 나머지 여덟 개 중에서 네 개는 상당히 멀리 있어서 상관할 필요가 없으나, 주변을 둘러싼 네 성은 크기도 작은 걸 보면 임금이 자기 신변을 지키려고 만든 게 분명해 보입니다.”
만타이가 보기에도 그런 의도가 확연해 보였다. 성 네 개가 본성에 접근하는 길 하나씩을 맡아 방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국왕이 머무른다는 본성을 공격하려면 주변에 있는 네 성 중에서 하나는 거쳐야만 했다.
“병력은 얼마나 있나?”
“임금이 있는 성에만 1만, 다른 네 성에 있는 병력을 합쳐서 1만 정도 될 듯했습니다. 직접 성안에 들어가서 살피지는 못했지만, 밖에서 살핀 바로는 그러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다는 네 성은?”
“그쪽 성에도 각각 1만 명쯤 있었습니다.”
성의 넓이나 출입하는 인원, 물자의 양을 보면 그 안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정도는 가늠할 수 있다. 이 임무를 맡은 부하들은 모두 그런 계산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만타이가 듣고서 판단하기에도 합당한 규모로 보였다. 다른 네 성에 1만 명 정도씩 병력이 들어가고, 임금 옆에 2만이 있다면 총합 6만이다. 북평과 울라를 오가는 수송대가 4만이라고 하면 조선군 전체 규모 10만에 얼추 맞아들어간다.
“성은 어떤 재료로 쌓고 있나? 통나무? 흙?”
“숲에서 갓 베어 온 통나무 기둥을 세워 벽으로 삼고, 겉에 흙을 바르고 있습니다. 저들이 삼성부에 세운 성과 얼개가 같습니다. 해자는 파지 않았으나 곧 파기 시작하리라 보입니다.”
“삼성부에서는 그 흙벽 때문에 불화살이 효과를 볼 수 없었다고 했지.”
얼어붙은 흙벽에는 화살이 박히지 않았다. 그것만 없었다면 삼성부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성벽이 불타올랐다면, 병사 하나로 이쪽 병사 열 명을 상대해야 했던 조선인들이 어찌 성을 지킬 수 있었겠는가.
저들이 생나무를 박아 성벽을 만들었다고 하니, 불화살이 박히더라도 불이 잘 붙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흙을 바르면 아예 불태울 수 없어진다.
여진족들은 어느 부족이건 공성전에는 서툴렀다. 가지고 있는 공성구라고 해 봐야 사다리가 고작이고, 성벽에다 화살을 퍼부어 방어군이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고 사다리로 매달리는 게 공성전의 전부다. 삼성부에서도 그렇게 공격하려다가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지금까지 모인 우리 군사는 4만…잘만 하면 이길 수 있을 듯한데….”
부하들은 하나같이 두려워하며 이 기도(企圖)를 말렸다. 공연히 위험한 시도를 하다가, 아직 남아있는 군사들만 다 죽게 될지 모른다는 거였다. 당연히 이 반대는 만타이의 격심한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럼 어쩌자는 말이냐? 놈들은 밭까지 갈아 가면서 우리 땅에 눌러앉으려고 하고 있는데? 뭐, 다른 3부에서 보내주는 원군을 기다려? 미친 소리 마라! 네놈들 같으면 명나라 요동군이 예허를 짓부수고 있는데 예허를 돕겠다고 원군을 보내주겠느냐!”
당연히 그런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자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예허가 요동군을 박살냈다면, 그리고 지금 울라가 조선군을 박살낸다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함께 싸우려는, 그리고 그 대열에 동참함으로써 전리품을 얻으려는 자들이 밀려올 것이다.
“그 지원도 이번 싸움에 이겨야만 받을 수 있다. 너희는 가진 힘을 모두 쏟아 이 싸움에서 이길 생각만 해라.”
만타이는 핏발 선 눈으로 땅바닥에 그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중앙에 임금과 함께 있는 1만, 그 주위를 둘러싼 1만. 이쪽은 4만. 제대로 붙으면 분산된 조선군을 그대로 짓밟아버릴 수 있지만, 놈들이 성을 쌓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쳐들어온 적이 저들뿐이라면 포위한 다음 굶겨버리면 간단하다. 하지만 본진만 포위하다가 다른 성에 나가 있는 조선군에게 뒤를 찔릴 수도 있다. 자칫하면 몰려온 조선군에게 역포위를 당해 이쪽이 망할 수도 있다.
“작은 성 네 개에 있는 인원이 합쳐서 1만이면 성 하나에 들어가 있는 병력은 2천 5백이란 말이겠지? 아무리 조선군이라도, 그 정도 숫자밖에 안 된다면 쉽게 함락할 수 있지 않겠나?”
조선군은 옛날부터 성을 지키는 싸움을 잘했다. 더구나 요즘은 화기(火器)를 많이 보유해서 한층 더 공략이 어렵다.
“추장, 진입로를 여시겠다는 생각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떠들썩한 싸움을 벌이면 조선 임금이 있는 본성에서 바로 알게 됩니다. 당연히 싸울 준비를 할 것이고, 다른 세 길을 통해 원군을 부를 겁니다.”
“물론 그렇겠지. 그럼 네 길목을 모조리 쳐서 구원 요청을 보내지 못하게 하면 어떻겠나?”
“그래도 소용없을 겁니다. 조선 국왕이 보내는 밀사 하나만 빠져나가면 당장에 등 뒤에서 대군이 밀어닥칠 텐데, 그런 부담을 어찌 무릅쓰겠습니까? 게다가 우리 병력 역시 분산되니 성을 쉽게 떨어트리지도 못할 겁니다.”
2백 년 동안 조선인들과 싸우면서 체험해왔다. 겨우 4대1 정도의 수적 우세로는 야전이라면 모를까, 성에 틀어박힌 조선인들을 이기기는 불가능했다.
“새끼성에 있는 조선군을 격파할 때쯤이면 적 원군이 우리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있겠지요. 우리는 조선 임금에게는 손도 못 대 보고 도망쳐야 할 겁니다.”
만타이가 뿌드득거리며 이를 갈았다. 정말 이길 전망이 하나도 없을까? 조선 놈들이 울라를 차지하게 내버려 둬야 하는 걸까?
“추장, 일단 물러나서 하다로 피하면 어떻겠습니까?”
“뭐라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분명 명나라 황제의 신하입니다. 우리가 다소 멋대로 굴기는 했습니다만, 북경에 계시는 폐하의 어전에 꿇어엎드린 다음 잔악한 조선 임금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십사 간청하면 보호를 받는다는 이야깁니다.”
“황제께서 조선군을 쫓아 주실 거라는 이야기냐?”
“그렇습니다. 분명 요동군을 보내 조선군을 내쫓아 주실 겁니다. 우리가 멋대로 군 데 대한 벌을 내리겠다 하실 수는 있겠지만, 그거야 우리가 요동도사를 잘 구워삶으면 해결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귀가 솔깃했다. 명나라 황제가 물러나라고 종이 한 장만 보내 명령해도 조선 국왕은 목단강 너머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모험을 걸어볼 만한 제안이긴 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좋다. 그런데 과연 조선 국왕에게 칙서가 오기까지 도대체 얼마나 걸린단 말이냐?”
“빨라야…석 달은….”
“이런 개 같은!”
석 달이나 더 떠돌이 신세를 견뎌야 한다면, 지금 있는 병사들도 다 도망갈지 모른다. 아니, 옆에 남은 병사들에게 식량이나 대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몽땅 하다 부로 넘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나마 그 석 달도 최소한으로 잡은 기간이라지 않는가.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한 총공격을 벌일까? 성공할 가능성은 크지만, 만타이 자신은 확실히 세력을 잃고 망하게 될 외교 교섭을 시도할까?
이렇게 고민하는 와중에도 조선 국왕이 들어앉은 성은 점점 더 견고해져 가고 있었다. 이를 악문 만타이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 21 –
“여자와 아이 2만이라. 좋아, 감사히 잘 받았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그럼 병사는 언제 보내주시겠습니까?”
기대에 찬 목소리를 들은 예허 부장 부자이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병사? 무슨 병사?”
“연맹을 맺으시지 않았습니까! 함께 부여주를 쳐서 조선에 사는 여진인들을 몽땅 빼앗아다 나누기로 하시지 않았습니까?”
울라에서 온 사자가 부르짖었다. 하지만 부자이는 너털웃음을 웃으며 몸을 뒤로 젖혔다.
“물론 우리 4부가 함께 그런 연맹을 맺었지. 하지만 그 연맹은 그대가 방금 스스로 말했듯 부여주에서 사람을 빼앗아오기 위한 연맹이었다. 조선군이 경계를 넘어서 쳐들어 왔을 때까지 병사를 내어 도와준다는 연맹은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 눈에서 당혹감과 분노가 넘쳐흘렀다.
“그 무슨 말장난입니까! 넘어갈 때도 함께였고, 전리품도 함께 나누었는데 정작 적과 맞설 때가 오니 꽁무니를 빼다니요!”
“아, 애초에 그리 약속을 해버렸으니 어쩌겠는가? 나는, 그리고 우리 예허는 약속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애초에 포로를 정확히 넷으로 나누자던 약속을 안 지킨 만타이 부장부터가 잘못한 게 아닌가? 어쨌든 도움을 못 주게 되어 유감이다. 가는 길 조심하라.”
“그래서 그 사자는 무사히 돌아갔소?”
“지금 예허 땅은 안전하오. 무사히 잘 돌아갔소.”
부자이는 느긋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이번 원정에서 예허는 상당한 손실을 겪었다. 먼저 하다 부장 후르한 밑에서 북평 포위에 종사하던 전사 1만 명이 호랑이 병마사 신립에게 걸려 궤멸당했다. 삼성부 공략에서도 상당한 사상자가 났고, 건주위에게 입은 피해도 제법이다.
그나마 건주위가 주목표로 삼은 대상이 하다였던 덕분에 예허는 피해가 적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뒤, 하다가 몇 배나 더 막심한 손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부자이는 맹약을 맺은 동료를 배반한 대가라고 고소하게 여겼다.
“뭐, 군사를 보내주고 싶어도 정말로 여유가 없소. 후르한 그 애비 없는 개 같은 놈이 우리 병사 1만 명을 호랑이 아가리에 처넣었고, 삼성부에서도 아바하이 놈이 멍청한 탓에 2천 명은 족히 잃었소. 그리고 만타이 놈은 기껏 잡은 포로도 몇 달을 제 놈이 혼자 틀어쥐고 있었지.”
앞에 놓인 술잔이 연거푸 비워졌다.
“아마, 이번에도 조선 국왕이 직접 쳐들어오지 않았으면 2만은커녕 2백 명도 내놓지 않았을 거요. 맹약을 그따위로 여기는 자를 위해 왜 내가 남은 병력을 긁어 보내겠소?”
“그 점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은 것만 해도 그대가 자비를 베푼 거요. 저 사자가 얼마나 부끄러워했겠소.”
코르친에서 나온 에센타이시가 느긋한 태도로 찻잔을 들었다. 코르친은 조선이 세력을 뻗쳐 자기네 속령인 시버를 건드릴 게 두려워 이번 원정을 부추겼다. 조선 세력에게 타격을 주어 물러나게 하고, 덤으로 붙잡아온 포로들은 해서와 시버가 나누게 할 생각이었다.
원래 예로부터 코르친은 해서부와 건주위를 모두 자기네 속령으로 여겼다. 가끔 쳐들어 와 약탈을 벌이는 것도 ‘알아서 스스로 바쳐야 할’ 세공을 여진인들이 바치지 않으니 직접 와서 걷어가는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헌데 욕심 많은 만타이는 코르친에게조차 포로를 바로 나눠주지 않았다. 코르친은 자신들이 직접 병력을 보내지도 않았던데다, 대신 파견했던 시버와 구왈차 병사들은 삼성부만 적당히 위협하다 물러난지라 만타이의 약속 위반에 강하게 항의하기도 곤란하다는 점을 노렸다.
“그 괘씸한 것들은 실컷 혼나 봐야 하오. 조선군한테 신나게 두들겨 맞고,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체험해야 다시는 그런 짓을 안 하겠지.”
“하다도 원군을 보내지 않을 거요. 건주위가 끼친 피해가 워낙 커야 말이지. 호이파 역시 마찬가지고. 게다가 호이파는 왜인여진과 일전을 벌였다가 패해서 부장 바인다리가 죽기까지 했으니, 정말 보내고 싶어도 보낼 수도 없소.”
호이파가 패했다는 소식은 바람처럼 숲과 산을 건너 전해졌다. 하지만 이들 입장에서는 그 소식도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다. 조선이 설마 예허까지 쳐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국경에 바로 접한 울라와 호이파 정도야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가 입은 손실이 크긴 하나, 이번에 받은 여자와 아이 2만이면 그럭저럭 메울 수 있을 것 같소. 다만 코르친에서 너무 남는 것이 없겠기에 유감이 크오.”
“뭐 우리야 시버를 챙겨줄 생각으로 꾸민 일이니 직접 입은 손해는 없소. 건방지게 약속을 배신한 울라가 호되게 혼이 나면 그것으로 족하오. 조선군 전력이 생각보다 세더군.”
시버 병사들에게 받은 보고를 보니, 가능하면 조선과 직접 싸우지 않는 편이 좋을 듯했다. 화력도 화력이지만, 조선이 이번 전쟁에 동원한 병사들은 그야말로 최정예였다.
“놈들은 울라를 두드려 부수고, 울라를 노략질해서 포로와 재물을 끌고 돌아가겠지.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도망친 놈들을 주워 챙기면 그만이오.”
부자이도, 에센타이시도 조선군이 울라보다 더 멀리 오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엄연히 명나라의 신하인 조선이 국경을 넘어봤자 얼마나 멀리 오겠는가? 부여주 침입을 가장 앞서서 주도한 게 울라였으니 울라를 두들겨서 화를 풀고 난 뒤에는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리라.
– 22 –
“이 편지를 읽은 사람은 영상, 좌상, 좌참찬 세 대신과 세자, 중전뿐이란 말이지.”
그놈의 괘씸한 유서! 생각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갈가리 찢어발긴 뒤 불태워버리고 싶지만, 일단은 증거물로 보존해두어야 할 문서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뭐? ‘내 몸에 무종의 피가 섞이지 않아 다행’이라고? 아니, 그 부분 앞에서는 ‘무종대부터 이 나라가 타락하기 시작했다’고 했지?
경성군 이 새끼는 정말 미친놈이었구나. 조선은 성리학을 신봉하는 나라다. 사회 시스템도 당연히 성리학 기반으로 돌아가고, 종법이라는 게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경성군 자신도 그 시스템의 일원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가문의 계승을 통해 전해지는 정통성이다.
까놓고 말하면 실제로 피가 섞이고 말았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경성군은 환이에게 양자로 들어갔고, 이 관계를 통해서 보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무종, 즉 나는 경성군의 명백한 법적 조상이다. 생물학적인 혈연 여부는 따지고 드는 행동 자체가 무용하다.
조상이 한 일을 대놓고 비난할 수는 없다. 사정이 바뀌었으니 운운하면서 체제를 바꿀 수는 있지만, 경성군이 했듯이 대놓고 선대왕, 그것도 먼 조상도 아닌 증조부를 욕하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연산군 때 내가 세조를 욕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진짜로 경성군이 그런 말을 했다면 왕위에서 쫓겨나도 할 말이 없다. 선조를 부정하는 자가 유산만 누리려 들다니, 그런 도둑놈 심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말 경성군이 그런 헛소리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시절 기억은 나한테 없으니 말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공식 기록도 없고,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자가 혹시 증언한다 해도 그 말이 과연 신빙성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이 사실이 시중에 퍼진다면 내 권위는 급전직하한다. 중신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날 비웃고 욕할 거다. 그 사실을 빤히 알기에 판의금부사를 겸하고 있던 좌참찬도 세자 이외에는 영의정, 좌의정에게만 이 유서를 보여주었겠지. 세자도 자신에게 조언할 중전에게만 보여주고.
중전은 따로 보낸 서한에서 이렇게 적었다. ‘전하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시다’라 적힌 그 한 줄이 내게 확실한 메시지를 주었다. 그래, 다 없던 일로 해야 한다. 나, ‘경성군’은 그런 불경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는 것이다.
해결책은 하나다. 유서를 남긴 그 대간 놈을 미친놈으로 만들고, 지금 의금부 감옥에 갇혀 심문을 받는 중인 동료 죄수들로 하여금 그 유서에 적힌 내용을 부인하게 한다. 그리고 ‘비록 광증에서 비롯되었다 하나, 그 죄가 너무도 크므로’ 일가를 모두 처형한다.
그 정도 조치면 그 발언이 설사 사실이라 해도 관련자 전원이 입을 다물게 만들기에 충분할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 웬만하면 전가사변으로 끝나던 역적 처벌이 일가족 전원의 참수형으로 올라간다면, 앞으로 누가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있겠나 말이다.
이 일은 일단 먼저 해치워두게 하는 편이 좋겠다. 너무도 불경한 일이니 내가 직접 사건을 처결하기도 난감하다. 세자에게 맡기자.
붓과 종이를 잡고 세자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쓴 뒤, 영의정 노수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분명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지시지만, 두 사람에게 따로 보내는 편이 훨씬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