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87
2부 165화
– 37 –
해가 밝았다. 천리경을 들어 보니 전장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많이도 죽였구나. 많아 봐야 대략 1만 명 정도일 줄 알았는데.”
내 명령으로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제까지 왕 노릇을 하면서 생사람이 고문당하는 것도 보고 사람이 산 채로 사지가 찢기는 장면도 봤지만, 이렇게 수천수만이나 되는 시체가 골짜기를 메우고 피비린내가 공기 속에 가득한 광경은 처음이다.
“피 냄새에 화약 냄새가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고도 100m가 절대 높은 게 아니군.”
만타이가 거느린 잔존병력이 4만을 넘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긴 했다. 하지만 설마 그게 다 여기로 쳐들어오겠냐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는 틀렸지만, 그 많은 수가 전부 들이닥치리라고 생각하는 게 도리어 비합리적이라는 게 그때 내 판단이었다.
생각해봐라. 누가 보더라도 울라는 분명히 망했다. 게다가 아무리 기습이라지만, 성을 쌓고 들어앉은 조선군을 공격하겠다고 나선 거다. 이런 상황에서 추장이 같이 죽자고 나서는데 그 뒤를 부족원 전원이 순순히 따른다는 게 도리어 일어날 수 없는 일 아닌가?
분명히 이탈자가 대규모로 발생했을 줄 알았다. 우리 진영에 들어와서 투항하지는 않더라도 산속에 숨기만 해도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쭐레쭐레 만타이가 가자는 대로 죽으러 오다니, 여진족 놈들은 다 바보들인가?
어떤 수단을 썼는지 몰라도 만타이가 나름대로 지도력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저 많은 숫자가 이길 줄 알고 따라왔겠지. 덫에 걸린 뒤에 포위를 뚫겠다고 자기네 딴에는 힘을 쏟아 벌인 반격도 두 번이나 되고.
하지만 그 지도력 덕분에 울라 전역, 이번 북방전쟁 제2라운드가 비교적 간단히 끝났다. 저 많은 숫자가 울라 땅 전역에 흩어져 게릴라전을 벌였으면 얼마나 골이 아팠을까 모르겠다.
이번 전쟁은 만타이 놈이 성격이 급하고 생각이 짧은 덕을 확실히 보았다. 부여주를 휩쓸 때만 해도 나름 머리를 굉장히 잘 굴리던 놈이 갑자기 바보가 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본거지를 잃게 됐다는 조급함 탓이 아니었을까?
“기구를 내려라. 땅으로 내려가겠다.”
“예, 전하.”
내가 직접 기구를 타고 올라가서 상황을 살펴보겠다고 하니까 신하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사실 그동안 기구 탑승은 군기시에서 나온 비승군(飛昇軍) 소속 군사들이 전담으로 맡았다. 그 외에는 아예 기구에 손을 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유야 뭐 당연했다. 무서우니까.
나야 뭐 현대에서 비행기 몇 번 정도는 타봤고, 수백 미터 높이 빌딩도 올라가 봤으니 고작 백 미터 올라가는 기구 같은 건 하나도 겁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하들이야 문무관을 막론하고 무서워 보이는 게 당연하긴 하리라.
내 지시를 받은 비승군 군사가 기구를 내리라는 표시인 철제 승강패를 땅으로 던졌다. 이 높이에서 소리를 질러 봐야 제대로 안 들릴 테니 이렇게 하는 거다. 밑에서 신호를 접수하고 녹로를 감아 기구가 내려가면 연결된 끈을 당겨 패를 끌어올려서 회수한다.
내려갈 때 쓰는 패에는 ‘下降’이라고 새겨져 있다. 고도를 더 높이고 싶어지면 ‘上昇’이라고 적힌 패를 던진다. 물론 ‘停止’라고 새긴 패도 있다.
관측보고 같은 더 복잡한 정보나 지시문을 전달할 때는 연필로 적은 연락문을 철제 원통에 넣어서 밑으로 던진다. 밑에서는 통을 열어 문서를 꺼내고, 통에 연결된 끈을 당기면 방울이 울려 위에서 다시 끌어올려 회수하게 한다. 답장이 필요하면 이때 넣어서 올린다.
좀 흔들리면서 천천히 내려가려니, 기구부대 첫 실전 데뷔치고는 나름 괜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이상적인 결과야 주간에 띄워놓고 있다가 접근하는 적을 발견하는 거였겠지만, 그랬으면 만타이가 저 둥그런 놈은 뭐냐면서 의혹을 품고 접근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이번 싸움에서 확인한 건 야간에도 기구를 띄우는 게 어렵지는 않다는 점 ? 이착륙 과정이 비행기랑은 전혀 다르니까 ? 과 더불어서 관측수단으로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는 점이었다.
빛이 부족하니 병력이 움직이는 모양까지 다 살피기는 무리다. 하지만 화포가 불을 뿜을 때 나오는 발사광을 통해서 어디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지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정도만 해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정보가 아닌가 말이다.
이걸 띄울 때 경악하던 스페인 고문관들 얼굴도 생각하니 재미있다. 원리가 너무 간단하니 알아채기 힘들게 하기는 어렵겠고…이놈들이 유럽에 돌아가서 혹시 열기구를 유행시키려나. 그러고 보니 그놈들, 강선조총 구조도 알아챈 눈치가 보이던데.
사실 강선이야 유럽에서도 이미 발명한 뒤다. 아마 15세기에 나왔던가? 그러니까 그 구조가 새나가도 큰 문제는 아니다. 진짜 중요한 건 미니에 탄 원리인데…이게 골이 아픈 게 총알은 소모품이라 몇 개 없어져도 모르기가 십상이다. 벌써 몇 개 숨겼을지도 모른다.
원리는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유럽에 가져가서 직접 쏴 보고 차원이 다른 명중률을 보면 그대로 복제할 테고, 그러면 우리가 가진 화력 면에서의 우위는 사라진다. 저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총을 만들 수 있으니,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기구에서 내리면서 결심했다. 고문단 스무 명 전부, 무슨 수를 써서든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눌러앉도록 잘 구워삶아야겠다. 후한 보수를 계속 지급하면서, 가정을 꾸리도록 각자 집과 여자도 제공하면 저 녀석들이 눌러앉을 가능성이 커지겠지.
다만 직접 돌아가지 않더라도 우편(?)으로 보낼 가능성은 있는데…그건 다른 방법이 없다. 개항장에서 반출하는 물자에 대한 검사를 철저하게 해서 뒤져내는 수밖에.
전장 가까이 다가가서 맡으니 화약 냄새는 사라졌다. 피비린내가 하도 진해서 묻혀 버렸다.
“적도 중에서 죽은 자가 2만이 넘는다 하였느냐.”
“예, 전하.”
정확히 누가 몇이나 베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전투 중에 수급을 베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명하였으니, 싸움이 끝나고 장수들이 제출하는 보고서를 받아야 누가 얼마나 크게 공을 세웠는지 알 수 있다. 만 단위 격전에서 그게 얼마나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대 짐승들이 올해 내내 먹어도 다 못 먹을 테니 번거롭더라도 묻는 수밖에 없겠지. 얼마나 걸릴 것 같으냐.”
음력 6월이다. 이런 막대한 수의 시체를 방치했다가는 며칠 내로 모조리 썩어들어갈 테고, 이 주변은 누구도 지나가지 못할 더러운 곳이 되고 말 거다. 산짐승이 먹어치운다고 해도 그 양에는 한계가 있다, 묻어야만 한다.
“오늘 중으로는 구덩이를 다 팔 수 있을 것이옵니다.”
붙잡은 야인 중에서 큰 상처를 입지 않은 자 만여 명이 나서서 온갖 도구를 들고 땅을 파고 있었다. 그걸 보니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집단 총살했던 사건들이 생각났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인 셈인가? 하지만 뭐 난 적어도 가만히 있는 민간인을 죽이진 않았다.
“저놈들은 뭐지? 왜 구덩이를 안 파느냐?”
“상처가 심해 연장을 들 수 없는 자들이옵니다.”
일하지 못할 만큼 크게 다친 자들은 들판 한쪽에 눕거나 쭈그리고 앉은 채 방치되어 있다. 그 주변에는 우리 편 보조부대인 와르카 병사들이 서서 감시하고 있었다. 언뜻 보니 상처에서 아직 피가 흐르고 있는 자들도 많았다.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당연하지.
“남만승에게 사람을 보내, 야인 포로 중 다친 이들을 돌보라고 전하도록 하라. 밑에 딸려준 의생들도 함께 데려와서 돕도록 하라.”
“예, 전하.”
아마 알라르콘은 자비를 실천하면서 선교까지 할 수 있는 기회를 절대 거부하지 않으리라. 게다가 우리 의관들에게 치료를 명한다면 행여 우리 장졸들이 불만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남만인이 하는 거라면 딱히 큰 불만은 생기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내가 뭐 엄청나게 착한 사람이라 야인들을 치료해주게 한 건 아니다. 죽어 없어지게 하는 것보다는 살려서 어디에라도 써먹는 게 낫지 않겠는가? 살려준 은혜를 알면 내 충성스러운 새 백성이 될 것이고, 은혜를 몰라도 사슬에 묶어 노예로 써먹을 수는 있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 2만 명이나 죽였으면 됐다. 솔직히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를 견딜 수가 없다. 등갑군 3만을 지뢰로 불태워 죽인 제갈량이 느꼈던 심정이 아마 지금 내 기분이랑 조금 비슷하지 않을까?
충분히 죽였다. 나머지는 살릴 수 있는 만큼은 살렸으면 좋겠다.
– 38 –
“행군을 서둘러라. 어서 요동에 도착해야 한다.”
5만 요동군의 선두에 선 젊은 장수가 행군을 재촉했다. 6월의 더운 날씨 탓에 다소 힘겨워 보였지만 군사들은 불평하지 않고 발길을 재촉하고 말을 몰았다.
“형님,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여름이라 군사와 말이 모두 지쳐 있습니다. 다소나마 재촉을 줄이셔서 피로를 덜게 해주십시오.”
“여백, 너는 지금 우리 사정을 모르는 것이냐.”
요동 이씨 가문을 이끄는 장남, 이여송이 눈을 부라렸다. 아버지 이성량이 황제의 칙명으로 북경으로 소환된 이래, 요동에서 가문의 전통을 지키는 주역은 그였다.
“조선이 경계를 넘어 군사를 끌고 왔다. 요동을 책임지는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해서부 놈들이 난리를 일으켰다는 명분인데, 그 진압을 저들에게만 맡긴다면 우리가 어찌 요동에서 얼굴을 들고 살 수 있겠느냐?”
“저희가 요동을 비운 게 어찌 저희 뜻이겠습니까. 발배 놈 탓이지요.”
“지난 싸움에서 발배를 잡아 베었으니 이제 요동을 정리할 차례다. 우리 권역에서 패악질을 부린 자는 마땅히 우리 손으로 처벌해야지, 어찌 남의 손을 빌린단 말이냐.”
해서부는 엄연히 요동에서 관리하는 땅이다. 그걸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조선이 토벌하게 한다면, 조선은 그 땅도 내놓으라고 할지 모른다. 80년 전 목단강 이동 땅을 받아갔을 때처럼 말이다.
“형님, 그래도 나쁠 거 없지 않습니까? 골치만 아픈 야인 놈들 따위는 조선에서 관리하라고 하지요. 아버님께서 보내주시는 황도에서의 동향을 봐도, 아예 조선에 맡기자는 소리가 조정 안에서도 나온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우리가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동안 누대에 걸쳐 이 땅을 관리해 온 우리 가문이, 우리 대에 와서 그 무능함을 드러내야 하겠느냐? 우리는 대명의 신하지, 조선의 신하가 아니다! 조선이 그 위광을 떨치게 두는 건 우리에겐 치욕이란 말이다!”
이여송은 자신이 조선에서 온 조상을 가졌다는 사실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았다. 혈통이 무슨 대수인가? 지금 사는 곳,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황제가 조선을 치라는 명을 내린다면 서슴없이 실행할 준비도 되어 있었다.
일단 지금은 난동을 부린 해서부를 진압하는 게 가장 우선이다. 이여송 형제들이 가진 힘을 보면, 조선도 요동에 욕심을 내다가는 어떤 꼴이 될지 확실히 알게 되리라.
– 39 –
“여기 적괴 만타이의 수급을 가져왔사옵니다.”
이일이 만타이의 머리를 쟁반에 받쳐 들고 가져왔다. 옆을 슬쩍 보니 잔뜩 골이 난 신립이 가까스로 분노를 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해는 간다. 자기는 진두에 서서 수많은 적병을 베었는데, 정작 적괴의 머리는 그동안 구경만 하던 이일이 얻었으니 말이다.
신립과 그 휘하 군사들은 전장 정리에서 빠졌다. 힘들여 싸웠다 해서 쉬게 하고, 그 싸움을 밤새도록 지켜보고 있었던 이일 휘하 군사들이 정리하게 했더니 그들이 죽은 만타이를 찾아낸 것이다.
“잘했다. 누가 베었느냐?”
“분명하지는 않으나, 아무래도 자기 수하에게 살해당한 듯합니다. 신이 시신을 보니 화살에 등을 맞았는데, 그 화살이 우리 것이 아니라 야인들이 쓰는 화살이었습니다.”
호오, 놀라운 일이다. 이일이 기회가 왔음에도 남의 공을 가로채지 않았다니? 더구나 이번 건은 자기 수하에 있는 장수나 군사가 세운 공을 빼앗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날로 먹을 수 있는 공이 아닌가 말이다.
이일이 신립처럼 군사를 이끌고 돌진하지 않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까 현장에 나가서 보고를 들으니, 시체 무더기 속에 죽은 척 숨어 있던 적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했다. 만타이가 그렇게 숨어 있는 걸 찾아내서 죽였다고 해도 모를 텐데, 곧이곧대로 주웠다고 보고하다니.
역시 이게 다 교육의 효과인 듯하다. 지난번 우을지의 난 때, 이일이 이순신이 세운 공적을 가로채려고 하다가 내게 정의구현을 제대로 당하지 않았나? 아마 그때 얻은 교훈을 뼈에 새긴 모양이다. 이거 참 기특하다고 해야겠네. 확실히 이일은 머리가 있는 장수다.
“그대가 공을 부풀리지 않고 사실대로 보고하니 심히 기쁘구나. 도성으로 돌아가면 내 크게 포상하리라.”
신립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꼴이 보였지만 속으로만 혀를 날름했을 뿐,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게 쳐 죽이는 데만 몰두하지 말고 바닥도 좀 꼼꼼하게 찾지 그랬어. 나중에 시체 정리하던 애들만 저렇게 횡재하게 하지 말고.
음, 어쩌면 이일의 솔직한 보고는 신립에게 공을 넘겨주지 않으려는 꼼수일 수도 있겠다. 만타이가 우리 편이 쓰는 무기에 죽었다고 하면, 신립이 그건 자기 수하들이 세운 공이라고 주장하고 나설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다. 두 장수가 공을 다투기 시작하면 답이 없었겠지?
하지만 야인들이 쓰는 화살에 등을 맞은 게 분명한 이상, 두 군영 중 어느 쪽도 놈을 베지 못했음이 확실하다. 고로 그 시체를 주운 쪽의 공이 클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에 이일은 그 정도 계산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뭐, 그것도 괜찮지.
물론 신립이 품고 있는 불만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뭐 괜찮다. 그것도 풀 기회를 줄 테니까. 아주 충분하게.
“간밤에는 모든 장졸들이 아주 훌륭히 싸웠다. 군사들은 이제 대부분 돌아갈 테지만, 남을 장수들은 앞으로 벌어질 싸움도 그렇게 잘 수행해 주기 바란다.”
오위를 구성하는 번상병들은 이제 동원 기한이 끝났다. 북방 3도에서 선발해 올린 교대병력 5만이 지금 부여주에 모였고, 신북성을 향해 출발했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었다. 그 점을 보면 만타이는 러시를 걸 마지막 기회를 잘 잡은 셈이다.
만타이가 내 병력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실제로 내 옆에 둔 병력은 3만 명이었다. 놈들이 주변을 정찰할 건 빤하기에 주작성을 뺀 모든 성에다 최대치로 병력을 욱여넣고는 외부활동을 최소한도로 줄였다. 아마 놈은 실제보다 내 병력을 적게 보았을 거다.
그래도 지금 부여주에 있는 5만이 더 들어온 뒤에는 뭐…병력을 적게 보이는 게 아무 의미 없었겠지. 놈이 말 그대로 눈이 뒤집혔을 테니까.
“전하, 만타이의 목을 베었고 울라를 완전히 진압하여 위엄도 충분히 떨치셨으니 인제 그만 회군하심이 어떠하실지요.”
진중에 따라온 여러 문관 중에서 일부가 조심스럽게 진언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평온하게 대답했다.
“저들이 홀로 우리 경계를 침범한 게 아니라 해서 4부 모두가 함께 쳐들어 왔다. 당연히 4부 모두를 징벌해야 하건만, 어찌 2부만 치고 돌아간다는 말이냐? 나머지 2부도 마땅히 쳐야 한다. 황제도 적들의 뿌리를 뽑으라는 칙서를 내리지 않았느냐.”
명나라 조정에서 받은 칙서는 우리가 월경해도 좋은 범위를 제한하지 않았다. 게다가 해서 4부가 이번에 저지른 노략질은 원체 규모가 커서, 만약 성공했다면 요동군도 놈들을 제어하기 힘들 만큼 세력이 커질 수도 있었다. 그걸 대신 때려잡아 주겠다는데 명나라가 왜 막겠는가.
“하오나 전하, 원정이 지나치게 길어짐은….”
“아니, 그렇지 않소.”
빤한 레퍼토리가 길어지기 전에 도체찰사 유성룡이 끊고 나섰다. 역시 저 양반에게 내 뜻을 일찌감치 전하고 확실한 내 편으로 만들어두기를 잘했다. 이럴 때 나 대신 싸워주니 말이다.
“네 도적이 있는데 단지 둘만 징치한다면, 나머지 두 도적은 죄를 뉘우치는 대신에 오히려 자신들은 운이 좋다 여기고 다음 기회에 다시 패거리를 모아 도적질을 할 거요. 그런 버릇을 없애자면 몽둥이를 들었을 때 때려서 충분히 혼을 내야 하오.”
내가 틈날 때마다 하던 이야기다. 이것만 봐도 유성룡은 확실히 내 편에서 내 뜻을 따르는 충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대가 말하려 했듯이, 대군을 움직이자면 막대한 군비가 소모되는 법이오. 우리가 언제 또 이만한 군사를 일으켜 출정하겠소? 그러니 한번 움직였을 때 적을 호되게 토벌하여 다시는 헛된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오.”
그래서 삼남 지방에서는 3차로 투입할 교대병력 5만을 또 준비하는 중이다. 분명히 전력은 가장 떨어지는 병력이겠지만, 3차 투입부대가 올 때쯤이면 전쟁이 정말로 다 끝났을 테니 큰 문제는 없다.
보고에 따르면 나머지 2부도 우리 편에게 밀려나고 있다. 예허는 건주위와 평안도군의 콤비 플레이에 걸려 꼼짝도 못 하고 있고, 하다는 호이파를 한 번 싸움으로 박살을 내버린 용맹한 왜인여진에게 맞서지 못하고 흩어져서 피해 다니고만 있었다.
상황을 보니 지금 내가 밀고 들어가면 나머지 2부는 대책이 없다. 놈들은 우리가 만타이를 해치운 다음 물러가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히 대혼란에 빠지리라.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거다. 항복할지, 항전할지.
나야 어느 쪽이건 환영이다. 항복하면 노예로 삼아 죗값을 치르게 해주고, 항전하면 시체로 만들어 만력제한테 우리 조선군이 얼마나 유능한지 자랑할 표시로 쓸 테니까.
“게다가 놈들은 울라가 부여주에서 약탈한 야인 아녀자들을 나눠 가졌소. 그들도 모두 우리 백성일진대, 마땅히 되찾아야 하지 않겠소!”
그럼. 여진족도 전부 다 내 백성이고말고. ‘타의에 의해 잡혀간’ 이들을 구해내는 건 임금이 된 몸으로서 내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의무다. 위기에 빠진 이들을 구하고 공을 세운 이들을 포상하는…아, 그러고 보니 아까 보고받은 다음 꼭 조치해야지 하고 잊고 있던 게 있었네.
“주작성을 지키다가 전멸한 와르카 부족 병사들 전원에게 벼슬을 내리고, 그 일가에게 이번 싸움에서 얻은 재물을 내려 포상하도록 하라. 저들이 도적에게 합세하지 않고 죽음으로 맞선 덕분에 본성에서 그 접근을 알고 때맞춰 대응할 수 있었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맞서긴 개뿔. 현장에 가서 보니 마음 푹 놓고 있다가 기습당해 전멸했더구만. 내가 숙련된 군인은 아니다만 내 눈으로 봐도 알겠더라. 비둘기 담당 연락군관이 목숨을 건진 것도 순전히 운이었고.
하지만 프로파간다라는 건 때로는 명백한 거짓도 그럴법한 사실로 바꾸어야 할 때가 있다. 조선에 충성하는 야인 부족이 오도리 외에도 있다는 점을 세상에 강조하고, 그 부족들이 죽은 자기네 전사들이 미끼로 억울하게 희생당했다고 여기지 않으려면 어느 정도 연극은 필요하다.
“교대할 2진이 도착하면 바로 하다를 향해 진격한다. 하다가 나와 항복하면 좋겠지만, 만약 거부하고 도망친다면 끝까지 추격하여 징치한다. 예허 역시 마찬가지다.”
“주상께서 결심하신 대로 행하시옵소서.”
무장들이 먼저 군례를 올리고, 잠시 틈을 두고 문관들이 허리를 숙였다. 원정을 계속한다는 내 뜻에 대놓고 반대하는 신하들은 하나도 없었다.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어 미소를 지으려니 갑자기 지구 반대편에 있을 사람들 생각이 났다. 이덕형은 지금 어디쯤 갔을까. 이젠 스페인에 도착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