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93
2부 171화
– 13 –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서 한양에서 혼인을 약속하셨던 그 규수가 낳은 아들입니다. 홍씨 성에 춘섬이라는 규슈를 기억하시나이까.”
“분명 기억한다. 하지만 네가 내 아들인지는 모르겠다.”
비얄바 후작은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나타난 젊은이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젊은 날 조선에서 어떤 처녀와 혼인하고자 했음은 분명 사실이건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비얄바 후작은 본래 3남으로 가문을 계승할 필요가 없었다. 헌데 모친이 급히 보낸 연락을 받고 귀국해 보니 큰형 알폰소는 병으로 죽고, 작은형 페르난도는 잉글랜드를 치는 원정대에 참가했다가 전사했다. 부친인 선대 후작은 그 충격으로 앓다가 사망한 직후였다.
꼼짝없이 가문을 계승하게 된 후작은 후작령에 인접한 영지를 가진 타라소나 백작의 영애와 가문의 격에 맞는 혼사를 맺었다. 후계자가 될 적자도 이미 얻었다. 젊은 날 열정으로 잠시 눈길을 주었던 조선 여인이 낳은 아들을 만난들 반가울 리가 없었다.
“제 얼굴을 보소서. 온전한 조선인도, 온전한 서반아인도 아니지 않사오니까. 한 얼굴에 제 어미 춘섬의 얼굴이 있고 아버지의 얼굴이 있지 않사오니까.”
희동이 울먹이며 고했지만, 비얄바 후작은 모질게 내쳤다. 적자 알레한드로가 이제 겨우 열 살인데, 열아홉 살이나 먹은 정체도 불분명한 서자를 집안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 네 생김을 보니 조선과 서반아 피가 섞였음은 분명하다. 허나 지금 동방에는 서반아 항해가와 선원, 병사가 수없이 많이 가 있다. 내가 아니라 그중 하나가 네 아비라고 단언하지 못할 바가 무엇이냐?”
“어찌 제 어미의 절개를 의심하시나이까!”
“조선 여인들이 절개를 지킨다는 평이 있음은 내 안다. 하지만 네가 진짜 춘섬의 아들임을 어찌 증명하겠느냐? 그리고 춘섬이 네 어미라 해도, 춘섬이 내가 돌아오지 않으므로 죽었다고 여기고 개가하지 않았음은 어찌 확인하겠느냐?”
“소자의 어미는 분노한 외조부에게 핍박을 참고 견디며 아버지께서 돌아오시기만 이날까지 기다리고 계시나이다! 그런데 어찌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위로하는 말 한마디를 않으시고, 저희 모자를 의심하는 말만 계속하시나이까?”
희동이 엎드려 호소했으나 후작은 차갑기만 했다. 어떻게든 핑계를 찾아 이 귀찮은 청년을 뿌리쳐 내쫓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대는 나를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나는 내가 인정한 내 자식들에게만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고 있노라.”
“소자는 분명 아버님의 아들입니다. 소자가 어찌해야 소자를 아들로 인정하시겠나이까.”
“자꾸 우기지 말라. 남녀의 인연이란 실로 장담키 힘들거늘, 어찌 하룻밤 인연으로 잉태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냐.”
“아버지께서 믿지 않으려 하셔도 그 한 밤 인연으로 소자가 생긴 것을 어쩌겠사옵니까.”
호소하는 희동을 보던 후작의 머릿속에 문득 못된 생각이 떠올랐다.
“그대가 정말 내 아들이라면, 그대는 내가 춘섬에게 남긴 정표와 이름을 받았을 것이다. 그 두 가지 증표를 내게 보이라. 그리고 어찌 춘섬이 보낸 편지 한 장이 없느냐?”
희동의 얼굴에 갑자기 먹구름이 돌았다.
“어머님이 서찰을 한 통 써주셨으나 중도에 해적을 만나 잃고 말았습니다. 증표로 주셨다는 반지도 외조부께서 모친으로부터 빼앗아서 강물 속에 던져버렸지만, 지어주신 이름만은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기 전에 어머니께서 디에고라 알려주셨습니다.”
“잃어버렸다? 애초에 없었던 물건이 아니고? 그리고 내가 춘섬에게 남긴 이름은 디에고가 아니다. 엔리케였다.”
후작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희동이 자기가 한 말을 듣고 기막혀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어머니가 춘섬이라면 내가 혹시라도 아들이 생기거든 지어주라고 한 이름을 잊을 리 없다. 그대는 이득을 노려 나를 속이려 하는 중이거나, 혹 아버지를 잘못 찾아온 가엾은 자이리라. 내 후자라 여겨 고이 보낼 것이니, 앞으로 어찌할지 잘 생각하라.”
자리에서 일어선 후작이 희동을 쫓아내려고 하인들을 불러들이려는데 높은 목소리가 이를 막았다.
“아버님, 무슨 짓을 하시는 것이옵니까!”
나타난 이는 후작의 장녀 비올레타였다. 열여섯 살로, 후작이 결혼하자마자 낳은 딸이다. 훅 불면 날아갈 듯한 가냘픈 몸에 샛노란 금발과 하얀 피부, 푸른 눈을 가진 미녀였다.
“세상 절반을 가로질러 아버지를 만나러 온 사람이옵니다! 왜 그리 각박하게 대하시옵니까? 정녕 아버님의 아들이 맞는지, 더 면밀히 살펴 결정해도 되지 않으시옵니까?”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 끼어드느냐?”
후작이 성을 내며 말했다.
“네 어미가 죽은 뒤로 네가 이 성에서 안주인 노릇을 하고는 있으나, 이 집의 주인은 나다. 내 후계자가 누구인지는 내가 정한다! 교회에서 축복받은 정식 혼인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난 직후에 세례도 받은 네 동생 알레한드로가 내 후계자다!”
“하지만 아버님, 이분은 아버님의 장자일 수 있습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동방에서 온 자가 어찌 내 장자라는 말이냐? 인정할 수 없다. 거기 누구 없느냐? 당장 저놈을 내쫓아라!”
희동은 어쩔 수 없이 일어섰다. 부친의 집에서 힘으로 쫓겨나기 전에 자기 발로 나오는데 비올레타라고 하던 후작의 딸이 급히 따라 나왔다. 무슨 일인가 하여 잠시 발을 멈추니 처녀가 희동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이 진정 내 오빠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세상 반대편에서 아버지를 찾아온 높은 용기에 실로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대의 용모에서 풍기는 기품도 범상치 않은 것이 제 마음을 들어 움직이게 합니다. 솔직한 마음으로…그대가 내 오빠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올레타라는 처녀, 아니 이복누이가 속삭이는 말을 듣고도 희동은 놀라지 않았다. 당연히 환영할 줄 알았던 부친이 매몰차게 자신을 내몰자 그로 인한 놀라움 때문에 다른 어떤 일도 충격이 되지 않았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로구먼. 그건 아마 상속권 때문일 걸세.”
밤늦도록 주막에서 혼자 희동을 기다리고 있던 동료 산도발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다른 친우들은 모두 침실에서 잠에 빠져 있었다.
“서반아 법으로는, 결혼은 한 번에 한 사람과만 할 수 있네. 그리고 부부 중 한쪽이 죽거나, 아주 드문 경우지만 교회가 이혼을 허락하면 혼인이 해소되어 다른 이와 결혼할 수 있지.”
“그게 어쨌단 말인가?”
“자네 모친과 부친은 외조부에게 혼인 허락을 받고 혼인식 날짜까지 분명 정했다면서? 그 혼약이 조선식 정식 혼인으로 인정되면, 자네 부친이 이쪽에서 한 혼인은 무효가 되네. 죽은 아내는 정부가 되고, 자녀들은 모두 사생아가 되지. 사생아는 가문을 물려받을 수 없어.”
“난 딱히 부친에게 서반아 귀족 가문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네.”
“부친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지. 자네 모친도 잊은 지 오래고.”
산도발이 잔에 든 술을 죽 들이켰다. 마카오에서 여기까지 오는 먼 길을 함께 하면서 온갖 위험을 함께 넘었던 친우였다.
“여기서 소문을 모으니, 자네 부친은 자네 이복동생을 끔찍하게 사랑해서 꼭 가문을 물려주기로 결심했다 하네. 하지만 그 아이는 고작 열 살이고, 열아홉 살이나 되는 자네가 나타나 적자임을 주장하면 매우 곤란한 처지가 되지.”
산도발은 한때 법률을 공부한 학도였다. 그때 배운 바를 바탕으로 희동에게 부친의 사정을 설명했다.
“자네를 적자로 인정하고 작위와 가문을 물려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때 자네가 동생들을 잘 돌본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원수가 될 타라소나 백작가와의 관계는? 갑자기 나타난 혼혈 아들이 가문을 물려받는 모습을 본 주변 가문들이 보낼 손가락질은?”
“그건….”
희동이 말을 잇지 못했다. 창밖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탄식을 토했다.
“내 조선에서도 귀신을 어미로 해서 태어났다느니 하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지. 형님이 실은 외숙이고, 늙으신 아버지로 알고 있던 이가 외조부이시며, 별당에 있는 누이가 친모임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졌었네.”
“이미 몇 번이나 들었네. 그래, 조선에 있는 자네 외가에서도 외국 사람과 피가 섞인 자네를 부담스럽게 여겼는데 친가인들 안 그렇겠나. 하지만 자네 부친에게도 사정이 있어. 그리고 그 문제를 가장 간단하고 확실하게 해결하는 방법이 자네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세.”
산도발이 조용히 타일렀다.
“부친이 자네를 서자로라도 인정하려면 복잡해지네. 먼저 자네 모친과 혼인한 적이 없다고 공표해야 하고, 자네가 부친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아들로 받아들임으로써 직접적인 이득이 되어야 하지. 가문에 말일세.”
“가문에 이득이 되는 존재라….”
희동이 한숨을 쉬자 산도발이 크게 웃으며 어깨를 다독였다.
“하하! 이렇게 기죽은 모습을 보이려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그 수많은 고비를 넘기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지 않은가? 힘을 내게. 이 형님에게 맡기면….”』
한숨을 쉰 허균이 석묵필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켰다. 사대부답지 않은 태도일지 모르지만, 한참 글을 쓰다 보면 조금씩이라도 이렇게 몸을 좀 움직여줘야 기분이 편안했다.
서반아 서책을 모으러 다니다 만난 세르반테스라는 글쟁이가 몇 마디 해준 조언을 참고해서 내용을 꾸며 봤지만, 아무래도 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역시 이복누이가 희동에게 연심을 품는다는 내용은 아니 되겠어. 아무리 서반아인이라고 해도 패륜이라고 난리가 날 터이니, 그 기백을 순수하게 존경하는 것으로만 하고 인연을 맺는 상대는 산도발로 해야겠군.”
책 수집이라는 임무를 받아서 다행이다. 덕분에 책 정리를 핑계 삼아 방에 틀어박혀서 자기 글을 쓰기도 좋았다. 마침 만난 세르반테스라는 서반아 글쟁이 덕분에, 서반아 말로도 작품을 쓰게 되었다. 허균이 완성한 원고를 넘기면 세르반테스가 교정해주는 식이었다.
“서반아에서는 이런 이야기책을 파는 시장이 크다 하니 한번 팔아보는 것도 좋겠지. 그런데 내가 조선으로 돌아가면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 어떻게 확인한담.”
허균이 입술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세르반테스를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 14 –
“폐하, 아무래도 우리 함대가 첫 전투에서 패한 모양입니다.”
위원회에는 잠시 침통한 공기가 흘렀다. 일어선 위원 한 사람의 보고 소리만 좌중을 울릴 뿐이었다.
“칼레 앞바다에서 정박한 우리 함대를 향해 잉글랜드 해군이 화공선을 밀어 넣었습니다. 두 척은 막아냈지만, 그 뒤를 이어 여섯 척이 더 돌입하면서 우리 함대가 완전히 혼란에 빠졌고, 급히 닻줄을 끊고 바깥 바다로 도망쳐야 했다고 합니다.”
칼레까지 북상하면서 이미 몇 척의 손실을 보았다. 메디나 시도니아와 합류할 준비를 이미 다 마쳐두고 있어야 할 파르마 공작은 자기 병력을 실어날라야 할 평저선 소함대를 띄워 바깥 바다로 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고, 뒤늦게 호들갑만 떨었다.
그럼에도 펠리페 2세는 성공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잉글랜드 함대가 화공을 펼치니 함대가 외해로 탈출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외해에서 함대를 재편한 뒤 잉글랜드군의 추격을 떨쳐내면, 다시 돌아와서 파르마 공의 군대를 수송할 것이다.
“파르마가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니, 마침 마무리할 시간이 생긴 셈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니 조급하게 굴지 말고 차분하게 준비하라고 명하라.”
몇 단계를 거쳐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함대는 지금 탄약이 바닥난 상태라고 했다. 주위에서 깔짝거리는 잉글랜드 함선들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다가 포탄을 너무 낭비했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은 프랑스 당국에서 포탄을 얻어보려고 미친 듯이 교섭하는 중이라고 했다.
“파리 주재 대사에게 기즈 공과 교섭하여 포탄을 얻어내라고 명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쉽지 않을 듯하다.”
펠리페 2세가 주저하는 이유는 우유부단한 성격 탓만은 아니었다. 지금 프랑스가 혼란 속에 빠져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 앙리 3세, 기즈 공 앙리,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 세 사람의 앙리들이 벌이는 내란 때문에 벌어진 혼란이 언제 진정될지 알 수 없었다.
“파르마로 하여금 조달해 보게 하는 이상은 곤란하리라 보인다. 본국에서 보내줄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원정함대는 123,790발이나 되는 포탄을 가지고 출발했다. 배 한 척당 거의 천 발이나 되는 그 많은 포탄을 다 써버렸다니, 정말 치열한 싸움을 치렀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문제는 메디나 시도니아와 파르마가 협력해서 해결하도록 두는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지시를 내린다 한들 현지 상황에 맞게 전달될 리가 없지 않으냐.”
문서가 전달되는 속도를 고려해보면 국왕의 결정이 확실히 옳았다. 펠리페 2세는 잉글랜드 원정함대에 대한 논의는 일단 여기서 끝을 맺었다. 다음 안건은 조선이었다.
“폐하, 앞으로 조선을 어떤 상대로 대우할 것인지 결론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올리베이라 백작이 올린 보고를 보건대, 저들이 보유한 인구와 병사 수를 보면 원정군을 보내 정복하기에는 너무 강합니다. 일단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예수회를 통해 기독교화를 진행함이 어떨지요.”
예수회는 가톨릭의 승리를 위해 매진하며 교황에게 절대 충성하는 조직이다. 하지만 실상은 펠리페 2세야말로 예수회 활동에 가장 큰 후원을 제공하는 군주였다. 예수회 조직원 대다수가 스페인인 성직자들일 정도로 스페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조직이다.
그에 반해 교황청은 교황이 어느 수도회를 가깝게 여기느냐에 따라 예수회에 대한 처우가 극도로 달라졌다. 지금 교황 식스투스 5세는 확실히 예수회를 박대하고 있을 정도다.
“무역을 통한 이득 획득은 어렵습니다. 예수회는 일본과의 교역 독점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권리가 조선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동양에서 무역을 하지 않으니까 상관없는 일이다. 그쪽은 포르투갈인들이 걱정할 일이 아닌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과 사라고사 조약(1529)을 맺어서 두 나라가 지구를 반분했다. 덕분에 인도로 가는 동방무역은 순전히 포르투갈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도 필리핀에서는 중국인들과 교역을 하고 있습니다. 마닐라를 교역 거점으로 삼아서 조선인들과 교역한다면, 포르투갈이 가진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교역을 할 수 있습니다.”
사라고사 조약에서는 향료 산지인 말루쿠 제도 동쪽 297.5리그 지점을 지나가는 자오선을 두 나라 사이의 경계로 했다. 그 서쪽은 포르투갈, 동쪽은 스페인의 영역이다. 다만 필리핀은 기준선 서쪽인데도 스페인령으로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조선도 그 선 서쪽에 있잖소. 포르투갈 쪽이 항의할 수도 있소.”
“우리가 저들을 찾아간다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조선인들이 마닐라로 찾아온다면 포르투갈 쪽에서도 뭐라고 나설 수 없을 겁니다.”
조선인들은 마닐라에 갈레온을 주문할 생각이다. 그리고 지난번 사절단이 조선공을 여러 명 보내주었으니 자체적으로도 유럽식 선박을 건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저들이 지금 보유한 중국식 정크선으로도 마닐라 정도는 방문할 수 있다.
“포르투갈령인 마카오가 아니라 우리 영토인 마닐라를 거점으로 해서 조선과 교류한다면, 선교사를 보내거나 교역을 진행하기에 훨씬 유리해집니다. 조선에 향료와 황금은 없다지만, 모피와 인삼만 가져오더라도 충분히 거래가 됩니다. 도자기도 좋고요.”
펠리페 2세는 조선에서 보내온 모피와 도자기를 대부분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인삼도 절반은 신하들에게 하사해서 맛보게 했다. 모두 썩 평판이 좋았다.
“추후 조선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낼 때, 누에바 에스파냐를 경유해서 마닐라를 거쳐 가게 하면 좋을 듯합니다. 이번에는 중간에 마카오와 고아에 들르느라 인도양 경로를 지날 수밖에 없었지만, 태평양을 통하면 훨씬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음을 알려주는 거지요.”
누에바 에스파냐는 멕시코를 가리킨다. 진언을 들은 펠리페 2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방안이다. 조선 국왕이 우리와의 교류에 대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으나, 자신이 보낸 사절단이 평하는 바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인들이 귀환할 때를 위한 계획을 준비하도록 하라.”
“예,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