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94
2부 172화
– 1 –
어느덧 세자 성이 대리청정을 맡아 수행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올해 열일곱, 아직 어리다면 어린 나이다. 하지만 중전과 영의정 노수신의 든든한 보좌를 받아 국정을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이끌고 있다.
“올해는 비가 넉넉히 내려 농사가 풍년이 들 전망이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로다.”
4년 동안이나 비가 제대로 오지 않았다. 영 인색하던 하늘이 비로소 마음을 풀고 이리 비를 내려 주다니, 조정 전체가 어느 정도 들떠 있었다.
“세자 저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마음을 아시어 하늘에서도 비를 풍족하게 내려 주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슬쩍 세자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영의정 노수신이 호통을 쳤다.
“어허, 말을 삼가시오! 어디 감히 무엄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오!”
삽시간에 무서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단지 호통 때문이 아니었다. 올해 초에 있었던 역모로 인한 피바람이 아직도 냄새를 남기고 있는데, 세자의 덕을 띄운다는 것은 자칫 엄청난 의도로 해석될 수 있는 일이었다.
“이 나라를 다스리는 이는 분명 아바마마이시오. 하늘이 이 강산과 백성을 어여삐 보신다면 그것이 모두 아바마마께서 덕을 베푸신 탓이지, 어찌 이 미숙한 몸이 한 일 탓이겠소?”
세자가 약간 긴장한 목소리이기는 했으나 막힘 없는 언변으로 쐐기를 박았다. 다른 소리가 나오기 전에 영의정 노수신이 얼른 나서서 고개를 조아렸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세자 저하. 지극히 높으신 주상 전하의 덕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평화를 누리고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전하께서는 저 먼 북방까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군사들과 고락을 함께하고 계시니, 어찌 성군이시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실로 영의정의 말이 옳사옵니다!”
편전을 채운 신료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세자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위는, 확실히 아바마마의 것이지.”
세자 성은 향원정 정자 위에서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국사를 돌보게 되면서 스승들과 함께 학문을 닦는 시간은 확실히 줄어들었지만 혼자 생각에 잠길 시간도 거의 없어졌다. 지금 여기 있는 것도 가까스로 짬을 낸 결과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부왕이 돌변한 건 6년 전 임오년부터였다. 성현의 가르침을 몸에 익혀 그 뜻을 실천하는 데 매진하라고 늘 말하던 부왕이, 어느 순간 갑자기 그런 건 크게 중요하지 않으니 현실적으로 쓸모 있는 정책에 관심을 가지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부왕은 틈만 나면 글을 읽었고 세자에게도 글 읽기 외의 유희는 허락하지 않았다. 헌데 그날부터 부왕은 책 대신 말과 활을 가까이했고, 세자에게도 최소한 하루 한 시진은 꼭 말을 타게 했다. 선비라면 육예에 모두 능숙해야 한다고 했지만,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뜻밖에 중전께서도 그런 조치에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는커녕 몸소 사복시까지 가서 승마에 서투른 세자가 탈 만한 양순한 말을 골라다 줄 정도였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 뒤로 6년, 부왕은 매일 아침 문안 때마다 온갖 난해한 질문을 던졌다. 그전에 유학 문답을 주고받던 것과 달리 실제 국정 운영이나 이웃 나라와의 관계, 옛 고사에 대해 논하면서 법가나 병가, 종횡가에 더 가까운 내용의 답을 요구하곤 했다.
유가에 치중한 스승들의 교육과 너무도 배치되는 내용이라 세자로서도 부왕이 원하는 답을 바로 내놓을 수가 없었다. 수년 동안은 매일 문답 때마다 혀 차는 소리와 한숨 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부왕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유학을 공부한 신하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은 요순시대다. 그 꿈과 같은 시대는 과거 한때 있었지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아니, 과거에 ‘요순시대’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도 사실은 알 수 없다.
부왕의 가르침을 통해 비로소 알았다. 요순시대라는 실존하지 않는 이상향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난세를 살아가던 이들이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 대신 과거에 눈을 돌린 결과였다고 말이다. 현재가 만족스럽다면, 희망찬 미래가 있다면 과거를 왜 돌아보겠는가?
현재가 끔찍하니까, 장래가 암담하니까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데 힘을 쏟기보다는 지나갔던 과거에서 좋은 모습을 찾고, 괜히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헛된 꿈만 꾸게 된다. 그게 요순시대, 이상향의 진짜 배경이다.
“그리고 그 이상향은 이제 되돌아올 수 없지, 절대로.”
부왕은 똑똑히 가르쳐 주었다. 힘을 행사하지 않고도 몇 조 안 되는 간단한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생산물을 골고루 나누며 모두 평화롭게 살 수 있었던 건, 그 옛날 있었던 나라들이 고작해야 고을 하나 정도 크기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옛날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비어있는 땅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선이건 중국이건 왜 땅이건 비옥한 땅에는 모두 사람이 몰려 산다. 심지어 바다 건너 서양에서까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몰려온다. 그런데 어떻게 요순시대처럼 오순도순 평화롭게 살 수 있겠는가.
“도덕으로는 포탄을 막을 수 없다.”
참으로 자명한 진리다. 스승들은 예의와 도리야말로 세상을 이끄는 기본 이치라고 하지만, 그것도 같은 주관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나 통하는 이야기다. 당장 바다 건너 왜인들만 해도 이쪽이 도리를 지키기 때문에 따르는 게 아니다. 현실적인 사정 때문에 우호를 지킬 뿐이다.
과연 무종 때 대규모 원정이 없었다면, 명종 때 파병이 없었다면 왜인들이 지금처럼 유순한 태도를 보였을까? 성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저들은 조선이 가진 전력을 알고, 자기들 내란이 끝나지 않았기에 먼저 덤비지 않았을 뿐이다.
과거는 한때 존재한 모범으로서, 전례를 감안하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참고할 대상은 된다. 하지만 그 자체가 추구할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앞으로 이 나라는 계속 바뀔 것이다. 과거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모습으로 말이다.
그 변화를 어서 이끌고 싶었다. 가능하면 백성들의 삶과 바로 이어지는 부분에서부터 직접 나서서 살피고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앉은 자리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부왕이 원정을 떠나면서 임시로 맡긴 자리일 뿐이다.
몇몇 신하들이 보위를 차지하라고 권했을 때,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절대 성공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딱 잘라 거부했다. 그리고 일당을 모조리 추포하고 부왕에게 몽땅 보고했다. 그로써 한층 더 든든한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그 신임이 무슨 소용일까. 최근 북에서 온 전갈에 따르면 곧 북벌은 끝날 모양이다. 남도에서 동원한 3차 투입병력도 북으로 올라가고 있다. 가장 약한 병력이지만, 이미 박살이 난 적을 끝장내는 정도 임무는 할 수 있으리라.
해서를 완전히 쳐부수고, 부왕이 세운 계획대로 예허까지 실컷 혼을 내주고 나면 원정군은 귀환할 것이다. 당연히 부왕께서도 개선하실 것이고 국권도 다시 부왕께 돌아갈 것이다. 그럼 나는 뭐가 되는 걸까.
성은 권력의 맛을 보았다.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에 걸친 모든 백성을 다스리고, 군권까지도 일부 쥐고 있다. 자기 뜻에 따라 조정이 움직이고 천만 백성의 삶이 좌우되는 모습을 보았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따분하고 지겨운 공부가, 그 변함없는 나날이 돌아올 것이다.
공부가 아직 부족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공부는 부왕께서도 여전히 하고 계시지 않은가. 국사를 돌보면서도 공부는 계속할 수 있고, 가능하기만 하면 일부라도 좋으니 지금 돌보는 국사를 계속 맡아 수행하고 싶었다.
문제는 그 소망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거다. 통치권은 임금만 가지는 권리다. 세자라 해도, 그 일부라도 욕심을 내는 순간 역적이 된다. 아무리 태평성대, 부국강병을 이룰 자신이 있다고 해도 선왕이 죽고 보위를 물려받는 그 순간까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자신의 나이는 열일곱, 부왕은 아직 서른여섯밖에 되지 않았다. 앞으로 20여 년은 기다려야 국정에 관여할 기회가 다시 돌아올 것이다. 설마 부왕이 매년 군대를 데리고 친정에 나서서 도성을 비우지는 않으실 것이 아닌가.
세자 성은 말없이 한숨을 쉬고 다리 위로 발을 내디뎠다. 이 복잡한 심경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사정이 더 구슬펐다.
– 2 –
“시중에 아주 소문이 자자하오! 우리가 요동까지 전부 조선에 내준다고 말이지!”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요?”
깜짝 놀란 병부상서 왕일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부상서 석성(石星)이 그런 그를 쓰게 바라보며 거칠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본관은 여러 달 남경에 다녀오느라 몰랐소만, 지금 북경 시중에는 조정이 관리하기 귀찮은 요동 땅을 전부 조선에 줘버린다는 소문이 돌고 있소. 과연 그게 정말인지 상서 제위(諸位)께 직접 듣고 싶소.”
옆에 있는 형부상서 이세달(李世達) 역시 마찬가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석성과 달리 그는 계속 북경에 있었지만, 요동 건은 그가 맡은 직책과 별 상관이 없다는 이유로 다른 네 상서만 따로 모여 논했기에 그 세부를 알지 못했다.
“일단 두 분 상서께 사과를 드리오. 조정에서 논의된 모든 사안은 마땅히 두 분 상서께도 결과를 알려드렸어야 했건만, 이 건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하여 바로 알려드리지 않았소. 이 늙은이가 정신이 흐려진 탓이니, 양해를 부탁하겠소.”
이부상서 양외가 고개를 숙여 유감을 표했다. 다른 세 상서도 헛기침을 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사태는 이렇게 수습되었다.
“그래, 그럼 정확한 사실을 들려주시오. 정말 요동을 조선에 넘길 거요?”
“그럴 리가 있겠소. 전혀 그런 고려를 한 바 없소.”
요동 문제를 논하던 네 상서가 시중에 도는 헛소문에 대해 알게 된 때는 두어 달 전이었다. 황당한 이야기에 놀란 조정에서도 그 근원을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논한 바는 오직 이번에 설친 해서부 영토 일부를 조선에 내주어 보상으로 삼자고 한 것뿐이오. 조선은 이번에 상당한 피해를 보았으며, 해서와 달자들을 쳐서 큰 타격을 주어 천조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소. 그만한 보상은 주어도 되지 않겠소.”
병부상서 왕일악이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여섯 상서가 모여들어 시선을 지도 위에 쏟았다. 왕일악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우리가 고려한 건 여기, 송화강 이동을 조선에 넘겨주어 관할하게 하는 거요. 요동 전체가 아니고 말이오. 그것도 결정한 게 아니고 그저 고려했을 뿐임을 분명히 말씀드리겠소.”
“알겠소. 헌데 그런 짓을 해도 괜찮은 거요?”
“어차피 울라는 이번 전쟁으로 박살이 났으니까, 저들이 차지한다 해도 별로 득을 볼 일은 없소. 거기 사는 여진족들 태반은 죽거나 도망쳤을 테니, 사람도 없는 빈 땅을 얻은들 조선이 무슨 이득을 보겠소.”
더구나 울라 땅은 코르친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다. 코르친은 해서 땅을 자기 영역으로 보는 지금도 수시로 약탈을 벌이고 있는데, 조선이 그 땅을 차지하면 어떻게 움직일지 불을 보듯이 빤했다. 분명 조선인들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정도로 노략질을 벌이리라.
“울라는 확실히 폐허가 된 거요?”
“조선군이 울라 군사를 모조리 격파하고 부장 만타이의 목을 베었소. 호이파도 격파당했고 하다, 예허도 모두 몰리고 있소. 요동도사가 알려온 바에 따르면 하다 놈들은 조선군에 밀려 예허 땅으로 도망치고 있다고 하오.”
요동도사는 휘하에 병력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해서부 토벌전에 동참하지 않았다. 다만 그쪽 방면 정보만은 열심히 수집해서 북경으로 보냈다. 그 정도 일에서라도 성과를 보여야 자기가 아주 무능하지는 않다고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발배 놈을 잡아 죽이고 난을 끝낸 덕분에 우리도 요동으로 군을 보낼 여유가 생겼소. 전 요동총관 이성량은 북경에 있으나, 이여송을 비롯한 그의 아들들과 요동군 주력은 발배 놈이 일으킨 난을 진압한 뒤 지금 예허로 가는 중이오.”
해서부가 일으킨 난동은 명나라로서도 책임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해서부가 명목상 명나라 신하이고, 그들이 사는 땅도 명나라 영토이기 때문이다. 명나라로서는 자기 수하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책임을 아예 외면할 수는 없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이제라도 이여송이 예허를 토벌하면 되오. 우리가 일을 끝내려는데 조선군이 그에 조력하는 형태로 잘 만들면 되니까. 조선군이 이제까지 싸운 거야 우리 천병이 마지막에 나설 수 있도록 사전에 터를 마련한 거고 말이오.”
해서 4부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 예허다. 예허를 부수는 주역만 명군이 맡으면 체면치레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울라나 호이파는 인구도 재력도 예허만 못하니까.
“굳이 땅을 내줄 필요가 있소? 황제께서 내리는 치하의 칙서와 벼슬, 하사품이면 충분하지 않소. 더 준다고 해 봐야 포로나 좀 나눠주면 충분할 텐데 말이오.”
이세달은 별로 납득이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선이 가진 땅이 이미 너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찍이 정덕제께서 목단강 이동 땅을 전부 조선에 넘겨주셨소. 거야 뭐 워낙 멀고 관리도 제대로 안 되는 땅이니까 그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송화강이라면 요동에 바로 면하는 곳이잖소. 만약 조선이 못된 마음을 먹으면 어쩔 거요?”
“송화강 이동을 조선에 준다고 해도, 뭐 저들이 먼저 달라고 청하지 않으면 그것도 안 줄 거지만, 해서 4부 중 울라 하나만 넘어갈 뿐이오. 나머지 3부는 여전히 우리 손에 남아 있을 테니, 행여 조선군이 역심을 품더라도 요양에 도달하기 전에 내세울 방패는 충분하오.”
왕일악은 조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다른 다섯 상서도 차분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더구나 그 3부도 모두 이번 전쟁에서 괴멸적인 타격을 입게 될 테니, 놈들은 앞으로 한참 동안은 역심을 품을 엄두도 못 낼 거요. 더구나 울라 땅에 있는 조선군과 우리 요동군 사이에 끼게 되었으니 여차하면 곧바로 밟아버릴 수도 있고.”
이부, 예부, 병부, 호부 네 상서 사이에는 이미 합의가 끝난 이야기다. 다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로 한 조건이 달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조선이 먼저 청하기 전에는 땅을 내주지 않을 거라던 말씀에는 틀림이 없는 거요?”
“물론이오. 우리가 능력이 없어서 영토를 포기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조선이 과연 우리를 어떻게 보겠소? 그 땅을 넘기는 조건은, 조선이 우리가 해서부 통제를 소홀히 한 탓으로 이번 난리가 일어났다고 항의하며 보상을 청하는 거요. 그때 가서 못 이기는 척 슬쩍 넘길 거요.”
“음…알겠소. 대국으로서 체면은 차리자는 거로군요.”
“까놓고 말하자면 그렇소. 그것도 무척 중요한 일이 아니겠소.”
예부상서 심리에게 설명을 들은 석성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집에 도착한 인삼 오십 근에 대한 값은 충분히 해준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