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396
2부 174화
– 5 –
“다친 병사들은 모두 신북성으로 보내 치료를 받게 하였고, 죽은 이들은 어명에 따라 일단 가묘(假墓)를 만들어 묻었습니다. 전하께서 분부하시길, 곧 싸움이 끝날 것이니 그때 파내어서 수습한 후 도성으로 가져가자 하십니다.”
“옳으신 말씀. 그리 하세.”
이순신은 종사관 김성일로부터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에는 시신이 쉬이 상하지 않으니 수로를 통해 바로바로 후송해도 되었지만, 지금은 여름이다. 시신을 방치해두면 금방 벌레가 꼬이고 썩어서 진물이 흐른다.
그럴 바에야 일단 매장하여 험한 꼴을 보지 않게 하고, 나중에 파내어 유골을 수습한 뒤에 가족에게 가져다주는 편이 낫다. 저들이 비록 객지에서 죽기는 했으나, 무덤이라도 고향 땅에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장군. 듣자니 우리는 곧 예허로 진군할 것이고, 이제 우별영과 재합류해서 훈련대장 대감 휘하에서 적과 싸우게 될 거라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지요.”
“그렇네.”
선거이의 질문을 받은 이순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는 좌별영만 따로 움직였지만, 여기서부터는 도감군 전체가 별군으로서 따로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임금은 신립이 지휘하는 북도군과 함께 움직인다. 아무래도 그쪽이 수적으로 주력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도감군이 아예 따로 움직이게 된 배경에는 신립과 유극량 사이에서 공적을 놓고 알력다툼이 빚어지기 시작한 탓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부하 장수들 앞에서 드러내서 말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 이순신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이제 사냥도 더 없을 것이고, 며칠 내로 송화강을 건너갈 것이니 군사들을 잘 먹이고 쉬게 하라. 우리가 진행할 정확한 진군 경로는 어전에서 여는 군의에서 정해질 것이니, 대감께서 와서 알려주실 것이다.”
“예, 장군.”
이순신 휘하 장수들은 군례를 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유독 이억기 한 사람만은 바로 나가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상한 눈치를 챈 이순신이 질문을 건넸다.
“이 파총, 무슨 일인가?”
“그것이…제 군사들 때문에 말이옵니다.”
이억기 휘하 군사들은 원래 도감군 소속이 아니다. 오위 예하 각 군영에서 얼마씩 차출한 병사들, 그리고 역시 오위 예하인 족친위에 속해 있던 ‘높으신 분’들이다.
“전하께서는 이번에 도순변사가 거느리고 있던 오위군 장졸들은 거의 다 도성으로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허나 소관이 거느린 군사들은 모두가 본래 오위 소속인데도 귀환하는 대신 계속 싸움터에 남게 되어 불만이 대단합니다.”
이순신도 알고 있는 문제였다. 형관 이항복이 병사들 사이에 떠도는 공기에 대해 일찌감치 알려주었다. 그리고 왜 임금이 이런 처분을 내렸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도 유극량을 통해서 임금에게 이미 답을 받았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족친위는 만백성에게 모범이 되어야 할 이들만 골라 모아서 편성한 군영인데 어찌 그런 의무가 없는 일반 백성과 같이 집으로 갈 수 있겠느냐 하셨네.”
“하오나, 저들도 법에 정한 복무 기간은 채웠사온데….”
경국대전 병전은 성종 이후 몇 차례 소폭 개정이 있었다. 하지만 전시에 동원한 군사들이 얼마나 복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규정은 없다. 다만 평소에 번을 서는 기한은 정해져 있고, 그동안은 번을 서는 기한만큼만 소집할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병전 어느 조항에 전하께서 친정하시면 몇 달 뒤에는 환궁하셔야만 한다고 적혀 있는가? 전하께서 친정에 나서시어 적을 완전히 토벌할 때까지 귀환하지 않으실 각오인데, 어느 종친이 감히 먼저 집을 그리워하여 돌아간다는 말인가?”
동원 기한이 되면 전쟁이 끝나지 않았더라도 군사들을 중도에 귀향시키는 건 군사들의 생계 때문이다. 정군인 군사들은 모두 양민으로서 생업이 있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 종군하는 동안 나오는 보수는 군사들이 먹고 쓸 정도는 되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는 턱도 없다.
하지만 족친위에 들어 있는 높으신 분들은 가장으로서 집을 비우더라도 생계에 지장을 받는 가족 따위는 하나도 없다. 창고에 쌓인 곡식과 전답에서 들어오는 지조(地租)가 식솔들을 먹여 살리지, 가장이 일해 얻는 수입이 별 의미가 없는 까닭이다.
“일부 오위 출신 정규 군사들은…덤터기를 쓴 셈이지. 족친위만으로는 군대 구실을 할 수가 없으니, 계속 머무르게 하라는 게 전하께서 내린 분부셨네. 다만 저들에게는 그 대신 도감군 장졸들과 같은 액수로 녹봉을 내리시겠다 하니, 그대가 전하도록 하게.”
도감군 수준의 녹봉이라면 보통 백성들 일가가 충분히 연명하고도 남는다. 오위 군사들도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 기뻐할 게 틀림없었다.
“알겠습니다, 장군. 어서 가서 전하겠습니다.”
“그래, 어서 돌아가 보게.”
이억기를 내보낸 이순신은 책상 위에 펼쳐둔 지도를 다시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지금 예허 일대는 15만을 넘는 군대에 포위되었다. 서쪽에서 다가오는 이여송의 요동군 5만이 있고 남쪽 방면에는 평안도군, 건주위, 왜인여진을 합쳐 4만이 있다. 동쪽에는 조선군 주력 7만이 있다.
상대인 예허, 하다 두 부에 남은 군사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이순신으로서도 알 수 없었다. 우리 편 군세가 삼면을 포위했지만, 아직 북쪽이 열려 있었고 그쪽에는 이번 난리를 배후에서 부추긴 코르친이 있다. 막판에 또다시 저들이 개입할 가능성은 충분했다.
이순신은 여기까지 강을 따라 올라오면서 부잔타이가 알고 있는 이번 난리의 배경에 대해 모조리 들었다. 코르친이 어떻게 해서 4부를 꼬드겼는가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들었다. 이번 난리를 대놓고 조장했던 저들이 마지막 국면에 개입하지 않을 리 없었다.
“우리와 싸우는 걸 돕겠다면서 원병을 보낼지, 피난이라는 명목으로 양 부에 남은 야인들을 자기네 땅으로 데리고 갈지…아직은 확실하게 알 수가 없군.”
이순신이 조용히 지도를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적의 의도를 확인하려면 더 많은 첩보가 필요했다. 그 자신에게 충분한 첩보를 입수할 수 있는 더 많은 수단, 더 많은 권한이 없음이 유감스러울 뿐이었다.
– 6 –
“야, 나가자. 준비는 됐나?”
“예, 소대장 나리!”
임해군은 진영 밖으로 나갈 채비를 갖춘 자기 휘하 소대원들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그와 비슷한 또래, 열다섯에서부터 많아야 스물을 넘지 않는 군사들이었다.
“좋아. 중대장 나리께 보고를 드리고 올 테니 기다려라.”
“자네는 참 열성적이구먼. 오위에서 우리만 도성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됐는데도 말이야.”
“만백성의 모범이 되어야 할 종친으로서, 게다가 군병까지 된 몸으로서 어찌 일신의 평안을 찾겠나이까?”
중대장 홍산군은 그날 적에게 습격을 받고 간신히 빠져 나왔다. 다친 몸으로 눈밭을 기어서 도망치다 힘이 빠져 얼어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수색에 나선 승군에게 발견된 덕으로 치료를 받았다. 이후 부상에서 완쾌되어 이억기가 재편한 족친위에서 중대장을 맡고 있었다.
“허허, 그래서 내가 자네를 아낄 수밖에 없다니까. 장안에서 평판이 자자한 미인 아내에다 첩까지 두고서도 전장에 남게 됨을 기꺼이 여기다니.”
“주상 전하의 신하가 된 몸으로써 어찌 충성을 우선하지 않겠나이까, 나리.”
임해군은 네놈이 내 여편네의 본색을 알고서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나 보자고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차차는 분명 남이 보기에는, 심지어 같이 사는 집안 가족들이 보기에도 나무랄 데 없는 아내다. 둘만 있을 때면 미치도록 임해군을 쥐어짜서 그렇지.
왜어로 시녀들과 웃고 떠들 때면 저게 다른 일로 웃고 있는지 남편인 자신을 비웃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호기심에 왜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 봤더니 ‘섬나라 야만인들이 지껄이는 말 따위’를 왜 배우려 하느냐면서 한 마디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시녀들을 번갈아 가며 얼러 봤지만 소용없었다. 심지어 첩으로 들인 왜녀, 동선(東璿)이라고 이름을 붙인 그 아이도 왜어라고는 한 마디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마님께서 절대로 가르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라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 집에는 돌아가지 않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보다 실컷 활개를 칠 수 있는 여기가 훨씬 낫다. 마음껏 죽이고, 태우고, 범해도 그게 다 전공으로 변한다. 어차피 집에서 그를 기다릴 차차도 남편이 빨리 돌아오기보다는 전공을 세워오기를 더 바랄 거다.
“자네 수하들은 다들 너무 어리지 않은가? 노련한 군사를 좀 섞는 편이 좋아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너무 원숙한 군사들은 제가 대하기가 힘듭니다.”
“하긴, 그대보다 나이만 많은 게 아니라 왕통에 가깝거나 품계가 높은 이들도 있으니 그런 이들을 휘하 군사로 쓰기에는 부담스럽겠지. 그러고 보니 자네.”
“예, 나리.”
“내가 들으니 도성에서 소싯적에 알고 지내던 이들을 찾아서 전부 자네 소대에 모았다며? 혹시 옛날에 도성에서 왈패 노릇을 하던 시절의 버릇을 다시 불러일으켜 북변을 마구 휩쓸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하, 아무려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관은 전하를 위해 충실히 싸우고 있을 뿐입니다.”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등줄기에는 진땀이 흘렀다. 홍산군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저 말이 정확히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임해군이 지휘하는 소대에는 군사 서른네 명이 있었다. 사실상 이들 전원이 부랑당패 시절 밑에 거느리던 똘마니들 혹은 그 동패들이었다. 선단이 송화강으로 진입하기 전 이억기 주관으로 재편성이 있을 때, 샅샅이 찾아내어 자기 밑으로 모은 것이다.
그전에 지휘하던 군사들은 군영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아무 안면도 없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소대장이면서도 부하들 앞에서 행동을 조심해야 했다. 계집을 잡아 범하고 집에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목을 베고 싶어도 최대한 자제하면서 드러나지 않게 저질러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열 살 남짓할 때부터 도성에서 패거리를 지어 저자를 휩쓸었던 바로 그놈들을 졸개로 거느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왈패 짓을 하면서 간도 쓸개도 서로 다 바닥까지 들여다본 이놈들과 함께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해치울 수 있었다.
“차차를 이놈들한테 넘겨줘 볼까…?”
임해군은 홍산군에게 출동 전 보고를 마치고 군막을 나서 자기 소대로 돌아가던 길에 문득 떠오른 착상에 두 눈을 빛냈다.
“도성으로 돌아간 뒤에…날을 정해서 저놈들을 도적으로 위장시켜 내 집을 털게 하고…나를 결박한 뒤에 내 눈앞에서 차차를 범할 듯 위협하게 하고…그때 내가 결박을 확 풀면서 놈들을 쳐서 쫓아내면 그 년이 서방님의 위엄을 깨닫고 좀 고분고분해지지 않을까.”
보통 부부 같으면 자기 아내가 기가 세다는 이유로 그 기를 꺾기 위해 졸개들을 도적으로 위장시켜 집에 침입하게 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임해군과 차차는 그런 평범한 부부가 아니었다.
그나마 임해군도 차차를 아예 죽여 없애서 그 압박에서 ‘영원히 해방되겠다’는 어린애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왜국 공주나 마찬가지인 차차를 죽였다가 무슨 후환이 닥칠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성에 돌아갈 때가 되면 한번 진지하게 계획을 꾸며 보자.”
임해군은 자신이 거느린 졸개들이 신뢰할 만큼 입이 무겁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일찍 모의했다가는 누설될 공산이 높다. 설사 누설되지는 않는다 해도, 중요한 역할을 맡은 부하가 야인들과 싸우다가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 다 도로아미타불이다. 모의는 돌아갈 때 하자.
“즐거운 꿈이 하나 늘었군.”
“그게 뭡니까? 소대장 나리.”
“너희들은 알 거 없다.”
옛 왈패 시절 부하들이지만 임해군은 소대원들에게 자신을 부를 때 꼬박꼬박 ‘소대장 나리’라고 부르게 했다. 왜냐고? 여기는 군영이 아닌가. 군영에서 저잣거리에서 부르듯이 자기를 부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은 그동안 안 가본 쪽으로 가자. 많이는 필요하지 않고, 한 열댓 명 정도 되는 조그만 무리를 만나면 가장 좋겠는데.”
너무 많으면 붙잡고 감시하기 귀찮다. 모가지만 잘라가면야 간단하겠지만, 여자나 어린애 머리를 가져갔다가 들키면 호되게 벌을 받았다. 다른 군사들 몇이 그러다가 장형을 받는 꼴을 본 임해군은 절대 수급 속이기는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열댓 명이 가장 좋다. 적당히 가지고 놀다 끌고 와서 포로를 잡았다고 보고하면 된다. 야인 계집들은 싸움에 져서 잡히면 욕을 당하는 걸 당연하다고 여겨서인지, 당할 때는 반항하지만 나중에 끌려와서 그런 걸 고변하지는 않았다. 참으로 좋은 놀잇감이다.
“저기 말을 탄 야인 놈들이 옵니다!”
“뭣?”
이 벌건 대낮에 공공연하게 말을 타고 오는 야인이 있다고? 죽으려고?
임해군은 부하가 가리키는 쪽으로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야인 사내의 수급이라면 포로만큼은 못해도 훌륭한 전공이다. 아니, 솔직히 수급이 전공으로서는 훨씬 격이 높다고 생각했다.
“어째 상황이 좀 이상한데?”
상대편 숫자는 서른 명가량. 게다가 분명히 이쪽으로 곧바로 달려오고 있다. 충돌을 피해 지나가는 게 아니고, 임해군이 이끄는 소대원들을 똑똑히 보면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모두 싸울 준비를 해라! 적의 규모가 상당하니, 각오하라!”
싸움이 어떻게 되든, 자기는 한 몸 빼낼 자신이 있었다. 다만 졸개들을 너무 잃으면 한 개 소대를 편성하여 독자적으로 돌아다닐 수 없을 게 걱정될 뿐이었다.
시위에 화살을 얹으며 마주 달려나갈 준비를 하는데 눈 좋은 부하 하나가 갑자기 목청 돋워 크게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목소리였다.
“소대장 나리! 놈들이 백기를 들고 있는뎁쇼? 사자인 모양입니다!”
“백기를 들었다고?”
무종 때부터 조선에서는 백기를 싸움을 멈춘다는 의미로 쓴다. 그래서 야인들이 토벌군에게 항복할 때나 교섭을 하고자 할 때면 백기를 들고 오라고 요구했다. 이쪽에서 교섭하러 갈 때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제는 요동 일원에서는 백기가 협상의 의미로 자리를 잡았다.
만타이도 죽고 호이파도 망했는데 협상을 하러 온다? 그러고 보니 달려오는 놈들이 걸치고 있는 복색도 일반 야인들이 입는 복색이 아니었다. 본 기억은 분명히 있었기에 임해군은 한참 머리를 썩였다.
“저놈들, 코르친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 코르친!”
생각났다. 삼성부에서, 송화강 건너 숲속에 진을 치고 있던 코르친 놈들. 놈들이 진을 쳤던 숲을 나중에 뒤져보니, 삼성부 군사들이 숨어들어 죽인 듯한 방치된 시신이 몇 구 있었다. 그 시신들이 입고 있던 복장이 지금 저들의 옷차림과 비슷했다.
“저놈들, 코르친에서 오는 항복 사절이다! 당장 화살 거두고 영접해!”
전쟁이 끝난다! 차차 곁으로 돌아가는 건 유감이지만, 그것도 이제 벗어날 궁리가 생겼으니 상관없다. 자유를 얻게 되면, 도성에서 다시 한번 신나게 놀아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