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
1부 0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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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부디 소신들의 말을 들어주소서!”
“…알았다. 계속해 보라.”
“전하. 경연 중에 자꾸 딴생각만 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왕 자리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데는 며칠도 안 걸렸다. 젠장,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가 이토록 힘들었을 줄이야. 왕이 가진 금수저가 이렇게 무거울 거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 했다.
일단 생활 리듬부터가 너무나 달랐다. 매일 꼭두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아직 해도 안 떠서 어두컴컴한데 ‘할머니’, 그러니까 대왕대비 침전에 아침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한다. ‘작은할머니’와 ‘어머니’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나서야 내 시간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문안인사도 혼자 다니는 게 아니다. 중전, 즉 내 와이프를 데리고 부부동반으로 다녀야 한다.
이것도 속 터지는 일이었다. 아니, 내가 왜 남의 아들, 손자 노릇을 하는 것도 모자라서 남의 마누라를 데리고 남편 노릇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연산군의 왕 자리를 물려받은 거야 뭐 어쩔 수 없다고 치겠지만 마누라까지 물려받고 싶지는 않았다.
졸지에 유부남이 되어 버리니 영 기분이 찝찝했다. 아, 연애도 거의 못 해 봤는데 느닷없이 유부남이라니. 그것도 ‘남의 마누라’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입장이라니?
차라리 상대가 그냥 과거가 있는 여자, 전남편이 있는 여자라면 상관없다. 문제는 ‘내 와이프’가 나를 보면서 내가 자기 남편 연산군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연산군이 아니라는 거니까. 나를 나로 보지 않고 다른 사람으로 보는 여자한테 어떻게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중전을 만나보기도 전에 혼자서 오만 잡생각을 다 했다. 결국 눈을 뜬지 사흘째 되던 날, 드디어 ‘아내’와 첫 인사를 했다. 아직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중전은 딱히 미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내심 실망하는 마음이 싹텄다.
직접 만나보기 전에는…솔직히 좀 기대를 했다. 명색이 왕비 아닌가. 조선 최고 미인이 아닐까? 물론 중전을 뽑을 때는 인물만 보는 게 아니라 집안 보고 뭐 보고 다 쳐서 뽑는다지만, 설마 못난이를 뽑지는 않겠지. 미인이겠지…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만나본 중전 신씨는 내가 선호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키도 작고, 그냥 옛날식 대갓집 맏며느리 상이었다. 마음씨가 정말 선한 사람이었다고 책에서 본 것 같은데, 여기서도 똑같을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히 인상은 선해 보인다만.
한 번 더 생각하니 이건 어쩔 수 없구나 싶었다. 지금은 15세기다. 서구화된 21세기에서 살다가 온 나한테 15세기 한국적인 외모의 여자가 예뻐 보일 리가 있겠는가.
“전하, 국상을 치르느라 몸이 허해져서 수일간 옥체가 편치 않으셨다 들었사옵니다. 지금은 어떠신지요.”
“괜찮…소이다.”
“조선 땅에 사는 만백성이 전하의 건강을 바라고 있사옵니다.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내관 아저씨가 일러준 바에 따르면 중전 신씨와 ‘내’가 혼인한지는 7년 정도 되었다고 했었다. 자식으로는 작년에 태어나서 바로 죽은 아들이 있고, 지금 태중에 있는 아이가 하나 또 있다고 했다. 과연 언뜻 보기에도 중전은 지금 임신 중인 듯 했다.
“나, 아니 과인…보다는 중전께서 몸을 잘 돌보셔야 하오. 후사가 있지 않소.”
“중궁전 나인들과 어의들이 잘 돌봐 주고 있사옵니다.”
일단 명색이 ‘남편’이니 좋은 말은 해주지만, 사실 자식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가짜 손자 노릇이나 아들 노릇, 남편 노릇까지는 어떻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 노릇은 정말 할 수 없, 아니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아이를 돌보는 보모 역할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도저히 꾸며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연산군에게 아직 자식이 없다는 사실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럼 대비전으로 갑시다.”
“예, 전하.”
내관의 인도를 받아 함께 대비전을 향했다. 아무튼, 이것처럼 내 ‘신상’에 관련된 일들은 차라리 덜 괴로웠다. 처음 눈을 뜨고 만난 내관 아저씨에게 틈나는 대로 지금 ‘내’ 주변 일들에 대해 질문을 하면서 해결해 나갈 수 있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경연을 비롯한 조정 일이었다.
“전하! 이 문제는 지극히 중요한 일이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래, 지금 바로 이 상황 말이다.
“그러니까…공자께서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셨다, 이 말인가?”
“아닙니다! 공자께서 안회에게 이르시기를, 이런 경우에 처했을 때는…!”
아주 죽을 것 같다. 문안인사야 그냥 새벽에 일어나서 몸만 좀 고생하면 되는 일이니까 괜찮다. 하지만 경연에 참가하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몇 시간 동안 앉아서 경전 공부를 해야 하는데, 다대 일로 이루어지는 이 토론식 수업이 정말 환장할 수준이었다.
기본적으로 레벨이 너무 높았다. 처음 참가했을 때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어 묵묵히 앉아 있기만 했다. 책 이름조차 처음 듣는 경우가 허다했다.
내가 할아버지한테 한학을 조금 배우기는 했다. 한자도 꽤 알고, 한문 해독도 웬만큼은 한다. 하지만 그게 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영감들이 논하는 수준은 할아버지를 아득히 초월했다. 가르치는 양반들이 죄다 조선에서 학문으로 몇째 가는 양반들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전하! 그렇지 않아도 요즘 경연에 너무 자주 빠지시는데, 출석하시는 날까지 이렇게 무성의하게 경연에 임하시면 되시겠습니까!”
“몸이 좋지 않아 경연에 나올 수 없었다 하지 않았소. 과인은 올해 들어 계속 몸이 좋지 않소. 무리해서 경연에 나왔다가 병이라도 나란 말이오?”
진짜 연산군이 왜 그토록 경연을 빼먹었는지 절절하게 이해가 갔다. 원칙적으로는 매일 해야 하는 경연이지만 나는 열흘에 한번 정도만 나갔다. 도저히 앉아서 버틸 수가 없었다.
“몸이 좋지 않으시다는 분이 어찌 말을 달리고 활을 쏘는 일은 그토록 열심이십니까? 일개 무부처럼 검을 휘두르시고 말입니다!”
“그야, 육예(六藝)는 군자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소양이 아니오? 검 역시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는 거요.”
예(禮, 예의범절), 악(樂, 음악), 사(射, 활쏘기), 어(御, 말 타기), 서(書, 글쓰기), 수(數, 수학). 이 여섯 가지는 주례(周禮)에서 규정한 여섯 가지 기예다. 선비라면 마땅히 이 여섯 가지를 익혀야 한다. 검은 아니긴 하다만.
“더구나 내가 요즘 몸이 좋지 않으니 건강을 위해서라도 말을 타야 하겠소. 일찍이 태조대왕과 태종대왕께서도 몸을 보하기 위해 격구를 즐기지 않으셨소?”
사실 내가 승마와 국궁을 시작한 건 이것 말고는 도무지 시간을 보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15세기 조선이다. 책, 영화, 게임 그 어느 것도 즐길 거리가 없었다.
물론 책은 있다. 하지만 죄다 한문으로 되어 있으니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 뭐 읽을 게 없을까 고민하다가 삼국지를 떠올려 구해 오게 했더니, 구하긴 구했는데 순 한문이라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처음 말고삐를 손에 잡은 게 2월이었나 싶은데, 한 달이 지난 지금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적당한 속도로 달리는 정도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아직 말을 달리면서 말 위에서 칼을 쓰거나 활을 잡기는 어려웠다. 물론 격구채를 휘두르는 것도 무리다.
“태조께서 격구를 하신 것은 나이가 들어 손발에 기운이 통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아직 보령이 스물도 되지 않으셨는데 무슨 피가 통하지 않으십니까?”
“과인이 몸이 안 좋다면 안 좋은 거요!”
내가 처음 이 자리에 들어섰을 때만 해도 경연을 맡은 관리들이 이토록 나한테 바락바락 대들지는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상해하는 정도였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고개를 바짝 숙였다. 가르침을 청하는 성실하고 겸손한 학생으로 보이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경연을 자꾸 땡땡이치는데다가, 어쩌다 경연에 나와 문답을 주고받을 때마다 겸손한 게 아니라 정말로 머릿속에 든 게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서 경연을 담당한 신하들과의 사이가 점점 험악해졌다.
젠장, 그나마 과외 격인 경연은 땡땡이라도 칠 수 있다. 하지만 매일 쌓이는 각종 상소문과 서류들, 그리고 국사인 조회는 도저히 땡땡이를 칠 수가 없었다. 난 왕이니까.
– 3 –
오늘도 경연은 빼먹었다. 한문 읽는 실력이 좀 늘면서 승지가 가지고 오는 상소문을 읽는 속도가 빨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밀리지 않고 읽기가 벅찼다. 쌓이는 서류더미는 때로 경연을 빼먹는 핑계가 되기도 했다.
왕은 하루 다섯 끼를 먹는다. 하지만 그렇게 밥을 먹어도 에너지가 부족했다. 일단 새벽 5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다가, 밀려오는 일을 모두 처리하고 경연까지 참석하려면 밤이 깊을 때까지 쉴 틈이 없었다. 그리고 겨우 너덧 시간을 자고 또 일과를 시작해야 한다.
“전하, 조회에 참석하실 시간입니다.”
내관이 문밖에 서서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게 아픈 곳은 없지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입에서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아, 출근하기 싫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가는 나도 연산군처럼 폭군이라고 쫓겨나겠지? 참자. 참자. 조금만 참자. 적어도 내가 이 세계에서 왕 노릇에 완전히 익숙해지고, 확실한 권위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그 뒤에야 뭔가 일을 좀 계획해 볼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서류 때문에 파김치가 된 몸으로 조회에 참석하고 들어왔다. 편전에 앉아 있으려니 오늘도 역시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만 오갔다. 매일 승지들에게 지금 국정 상황에 대해 조언을 듣기는 하는데, 워낙 기반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뭔지 모를 소리가 더 많았다.
“전하, 성종대왕의 산릉을 조성하는 데 동원된 역군(役軍)들 중에서 병들어 죽은 자가 많습니다. 조치를 취하셔야 하리라고 보이옵니다.”
늙수그레한 신하 한 명이 고개를 조아린 채 진언했다. 저게 누구더라? 그래도 뭐 이런 일은 상식적으로 대응하면 되니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마땅히 살펴 다스려야 할 일이다. 산릉 현장에 의원이 나가 있지 않으냐?”
“전의감 참봉 설의손이 산릉 역군들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자를 당장 소환하여 의금부에서 국문토록 하라. 의원이 환자를 제대로 살폈다면 그토록 많은 이가 목숨을 잃었겠느냐.”
승지가 급히 내 명령, 교지라고 하던가? 하여튼 받아 적었다. 다른 신하가 의견을 보탰다.
“다른 의원을 보내어 역군들을 새로이 살피게 하고, 혹 잘못된 사항에 대해서는 조사관을 보내어 엄히 살피도록 하심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그 또한 마땅한 일이다. 적절한 이를 천거하라.”
난 아직도 조정 신료들 이름도, 얼굴도 다 모른다. 그러니 저런 데 현장 조사관으로 보낼만한 사람을 알 리가 있나? 이렇게 해 놓으면 적당히들 추천하겠지.
이 사람 저 사람이 자기가 좋다고 보는 사람을 추천했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민상안, 이의무 등 6명이 추천을 받아 검찰관으로 선정되었다.
“그대들은 일하는 자들 중 굶주린 자에게는 음식을 주고 지친 자는 쉬게 하라. 병든 이에게는 약을 주고 일을 게을리 하는 의원은 보고하라. 작업을 관리하는 사령들이 일하는 자를 괴롭힌 사실이 있으면 벌을 주도록 하라.”
“예, 전하.”
“아바마마의 능을 조성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는 하다. 허나 백성들을 괴롭게 하면서 일을 빠르게 진행한들 아바마마께서 기뻐하시겠느냐? 마땅히 백성들의 상태를 살필 일이다.”
적당히 좋은 말로 처리를 마무리하면서 한 가지 일이 끝났다. 아니, 사실 말이 바른 말 아닌가? 나라에서 일하라고 끌어냈으면 일당이랑 숙식 챙겨 주고 건강을 관리해주는 건 당연한 거 아니냐 말이다.
다음으로 올라온 일은 성종의 묘지문을 검토해 달라는 청이었다. 죽 읽어보다가 지난 두 달 동안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 있기에 무심코 반문했다.
“여기 판봉상시사 윤기견(尹起?)란 사람이 나오는데, 이게 어떤 사람이냐? 혹시 영돈녕 윤호(尹壕)를 기무(起畝)라 잘못 쓴 것이 아니냐?”
순간 편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보라, 도승지. 윤기견이 누구라 하였느냐?”
머뭇거리던 도승지 김응기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는 실로 폐비 윤씨의 아버지인데,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폐비…윤씨? 그거, 연산군 친엄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