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3
1부 04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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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신의 누추한 거처에 왕림해주시니 기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대군께서는 종실의 어른이면서 겸허하기도 하시오. 어찌 이리 멋진 저택을 가리켜 누추하다 하시는 게요.”
생일이라든가, 하여튼 뭐 특별한 날이 아니고 제안대군이 그냥 열고 싶어 여는 잔치에 찾아온 건 오늘이 처음이다. 제안대군 쪽에서도 내가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의례적으로 보낸 초청장이었는지, 집안사람들에게서 당황하는 티가 팍팍 났다.
“아니, 상석은 집주인이 앉아야 하는 법이오.”
제안대군은 맨 윗자리를 내게 양보하려고 했다. 하지만 남의 집에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들 딱히 즐거울 것도 없다. 내 생일을 축하하는 잔치라든가 하는 명분이라도 있으면 모른다. 그냥 제안대군이 자기 혼자 놀고 싶어 연 자리가 아닌가.
수시로 열리다 보니 제안대군이 여는 잔치는 사실상 모두가 적당히 무시하는 자리였다. 오늘도 초대에 응한 손님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었다. 이래서야 굳이 상석에 앉아야 할 체면도, 이유도 없다.
“그럼 함께 앉도록 하면 어떻겠소?”
“전하, 신이 어이 그런 황망한 일을 하겠사옵니까?”
“대군께서는 사사로이는 과인의 당숙부이니, 한 상에 앉는다 한들 크게 예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오.”
고매하신 학자들께서는 과연 왕이 당숙부와 겸상을 해도 되는가에 대해서 한 달 동안도 토론을 할 수 있을 게다. 조선에서는 본래 이런 자리에서 각자 독상을 받는 게 관습이기도 하니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바로 지금, 여기서 혼자 상석에 앉기가 싫다.
제안대군은 예종의 적자로서 누군가 역모를 꾸민다면 간판으로 내세우기 딱 좋은 사람이다. 성종의 입장에서 보면 숙청 대상 1순위라는 이야기다. 허나 자신의 즉위가 사촌동생의 왕위를 빼앗은 셈이 된 데 대해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던 성종은 제안대군을 잘 대해 주었다.
나 역시 제안대군은 꽤 좋아한다. 일단 부채의식 따위는 1g도 없다는 사실부터 밝혀둔다. 내가 제안대군을 좋아하는 건 사람이 참 좋기 때문이다. 나이도 젊고, 늘 웃고, 즐겁고 활달하게 인생을 즐기며 살았다. 왕위에 대한 욕심 같은 건, 아예 개념 자체가 없었다.
권력욕에 대한 개념만 없는 게 아니다. 그냥 사람 자체가 개념이 별로 없다. 만인이 인정하는…‘영구 대군’이라고나 할까(…). 아예 사리 분별을 못 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좀 모자란다. 심지어 한자도 몰라 성종에게 이혼을 허락해 달라는 상소를 언문으로 쓸 정도였다.
뭐, 그래도 사람은 참 좋으니 나는 이 ‘영구 당숙’이 마음에 들었다. 궁에서 만날 때나, 밖에서 만날 때나. 그래서 노비도 하사하고, 가끔 불러서 승마를 겸한 사냥도 같이 다니곤 했다. 특별한 날도 아닌데 집에 찾아온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전하께서는 올해 내내 정말 난감한 일이 많으셨지요. 여러 선대왕들께서도 올해 전하께서 겪은 일들을 보시면 기가 막히실 것이옵니다.”
반쯤 억지로 제안대군과 함께 앉았다. 겸상이라고 해 봐야 어차피 대문짝만한 상, 둘이 아니라 열두 명이 둘러앉아도 자리가 남을 정도다. 나란히 앉은 제안대군이 겸연쩍은지 살짝 웃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한숨을 쉬며 답했다.
“전장을 누비시던 시절의 태조대왕께서도 겪지 않으셨을 일들이었소.”
이성계라면 확실히 나 같은 일은 안 겪었겠지. 권문세족들이 ‘니 할애비는 실은 여진족이다’라며 씨부리지도 않았을 거고,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데 화살이 날아들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 양반이 방심이란 걸 한 적이 있기는 할까 모르겠지만.
“오늘은 전하께서 마음 편히 쉬실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가비(家婢, 집에 두는 여자종) 중에서 그 재주가 출중하기에 뽑아 새로 춤과 노래를 가르친 아이가 하나 있으니, 그 춤을 즐기며 편안한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 아이는 가무가 충분히 숙달이 되었소?”
“가르친 지는 얼마 안 되었으나 웬만큼은 합니다.”
왕이라는 내 입장 상 그동안 이런저런 잔치를 궁궐 내외에서 열기도 하고 초대도 받았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조선식 잔치는 내게 있어서 그냥 배터지게 먹는 자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춤이고 노래고 도대체 취향에 맞지 않으니 음식밖에 파고들 자리가 없었던 탓이다.
헌데 조선 땅에 떨어지고 만으로 3년을 지나고 보니 취향도 변했다. 계속 듣고 보고 하다 보니 익숙해지고, 잘은 몰라도 조금씩은 즐기게 되더라.
옛날 취향? 점점 사라졌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는 여전히 90년대 발라드 같은 걸 흥얼거리곤 한다. 하지만 시각적으로 기억하는 걸그룹 공연 모습 같은 건 점점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기억을 유지할 사진도, 동영상도 없으니 잊는 건 금방이었다.
‘숙녀시대 공연 같은 걸 여기서 기획했다간 당장에 탄핵당하겠지?’
진짜 연산군이 전국에서 미녀들을 뽑아 흥청(興淸)이라고 이름을 짓고 춤과 노래를 하게 했다는 사실은 나도 안다. 미녀 수천 명을 강제로 모으느라 원성이 들끓었고, 이들을 유지하는 돈까지 엄청나게 든 게 결국 정권이 망하게 되는 계기 중 하나였다.
내가 그 흉내를 ‘조금만’ 낸다고 쳐도 어차피 21세기 걸그룹 같은 외모를 갖춘 여자들은 구할 수 없을게 분명하다. 게다가 그 옷이나 안무를 보면 퇴폐적이고 음란하다고 단박에 조야가 들고 일어날게다. 아마 은나라 주왕, 백제 의자왕의 재림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자, 나옵니다!”
아마 전형적인 조선 미녀 하나가 나와서 악공이 연주하는 음률에 맞춰 적당히 몸 움직이다가 들어가겠지. 적당히 보고 제안대군에게 무희의 솜씨를 칭찬해 주면 그걸로 끝이다. 무대에 오를 주인공을 기다리며 눈앞에 있는 술로 살짝 목을 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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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한편에 자리를 잡은 악공들이 흥겨운 음률로 청중들의 귀를 만족시켰다. 연주 소리가 주변을 채우는 가운데, 길고 하얀 소매가 물 흐르듯 움직이며 시선을 끌었다. 목소리도 매우 맑고 청아해서 귀를 끌 만했다.
마당 한가운데서는 제안대군이 그토록 자랑하던 무희가 한참 신나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중이었다. 크지 않은 체구에 버들가지 같은 몸, 눈 같이 하얀 얼굴에 까만 눈동자와 긴 속눈썹, 붉은 입술이 인상적이었다.
저 정도면 확실히 엄청난 미인이다. 노비라는 신분이 안타까울 정도다. 다만 내가 원체 ‘풍류’를 즐기지 않다 보니 저게 무슨 춤인지, 무슨 노래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넋이 나간 채 쳐다보고 있는데 어느덧 공연이 끝났다. 조용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무희가 마당에서 나가고서야 입을 열어 말을 할 수 있었다.
“참으로 재주가 뛰어난 아이구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저만한 솜씨라니, 이후 더 가르치면 도성을 주름잡는 무희가 될 것 같소.”
십대 소녀로서는 정말 훌륭한 솜씨였다. 국악 명창 어쩌고 하면서 유명해진 그 여자애 솜씨도 저 아이보다 낫지는 않았던 것 같다. 헌데 내 말을 들은 제안대군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어린아이라니요! 전하, 저래 보여도 저 아이가 벌써 서른 살이 넘었습니다!”
“서른 살이 넘어?!”
깜짝 놀랐다. 현대보다 빨리 어른 구실을 시작해서 죽는 것도 빨리 죽는 세상, 평균수명도 짧은 조선이다. 조선에서 여자 나이가 30대라면 대한민국에서 40세는 넘은 거나 같다. 하지만 그 얼굴은 분명 15세인 상희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인물은 그저 못나지 않은 정도입니다만, 목소리가 원체 좋고 몸놀림에 재주가 있어 가무를 가르쳐 보았는데 보시다시피 솜씨가 꽤 괜찮습니다. 앞으로 제 집의 자랑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하하.”
제안대군은 속 편하게 웃어 댔다. 이 양반이 아마 서른 세 살일 텐데 이렇게 잘 웃는 것도 아마 타고난 성격 탓이겠지?
시대가 다르면 미적 기준도 다르다지만 저 정도로 예쁜 애가 ‘못나지 않은 정도’라는 소리를 듣는 건 정말 충격이다. 저 어수룩한 영구 당숙이 겸손한 모습을 보이려고 일부러 자기 여종을 ‘못생겼다’고 표현할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전하께서 보시기에도 재주가 괜찮아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한번 인사를 올리게 할까요?”
“아…그래주시겠는가?”
살짝 넋이 나가 있는데 제안대군이 뜬금없이 제안을 했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이니 제안대군이 씩 웃고는 고함을 질렀다.
“여봐라, 가령! 가서 녹수를 데려오너라!”
가령(家令)은 집안일을 책임지는 일종의 집사 격 하인을 말한다. 하지만 나를 놀라게 한 건 그 여종의 이름이었다.
“녹수라고?”
깜짝 놀랐다. 녹수? 혹시 장녹수? 그 장녹수인가?
“예, 그 아이 이름이 녹수, 장녹수라고 하옵니다. 천것인데 성이 있어 신기하시지요? 아비가 어떤 현령인데, 돌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성은 물려주어 성은 있습니다.”
햐, 그 장녹수, 역사에서 연산군이랑 붙어서 나라를 말아먹은 요녀로 유명한 그 장녹수가 바로 제안대군이 거느린 여종이었단 말이지. 도대체 얼마나 미인이기에 연산군이 그토록 빠졌는지 궁금했는데, 저렇게 생겼었나.
멍하니 앉아있는데 가령이 고개를 숙인 장녹수를 데리고 왔다. 고운 화장을 지우지 않은 장녹수가 얌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올렸다.
“천한 몸이 전하를 뵈옵니다.”
장녹수의 목소리를 코앞에서 들으니 아까 노래를 할 때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달콤하고 은은하게 귓가에서 울렸다. 순간적으로 대뇌가 생각하기를 멈췄다.
미인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대한 고전적인 표현이 몇 가지 있다. ‘옥구슬이 은쟁반을 굴러가는 목소리’라거나, ‘꾀꼬리처럼 청량한 목소리’같은 문구들 말이다. 그런 표현들이 무질서하게 머릿속을 마구 오갔다.
“네 이름이 녹수라 하였느냐.”
“그렇사옵니다.”
잠시 내려앉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헛기침부터 한 번 하고 이름을 물었다. 장녹수는 얌전히 앉은 채 고개를 들지 않고 답했다. 일단 입을 여니 두 번째는 좀 더 쉬웠다.
“나이가 몇이냐?”
“서른둘이옵니다.”
서른둘…어떻게 봐도 연상이구나. 연산군으로서의 내 나이는 스물두 살이고 진짜 내 나이는 연산군으로 산 기간까지 합쳐서 서른 살이니까. 사실 난 원래 연상은 별론데….
“네 가무 솜씨가 매우 좋구나. 다음에…궁으로 불러서 노래를 시켜 보고 싶은데 어떠하냐.”
큰 맘 먹고 하는 질문이었다. 헌데 반응이 예상 밖이었다. 궁궐로 부른다는 소리를 들으면 평범한 여자라면 일단 긴장해서 얼굴이 파래질 듯한데, 전혀 변화 없이 태연했다. 아니, 창백해지기는커녕 일순간 안면에 홍조가 보인 듯했다.
“천한 몸이 어디인들 가지 않겠습니까. 주인이신 제안대군께서 금하지만 않으신다면, 기꺼이 어명에 따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제안대군을 바라보았다. 생글생글 웃으며 장녹수를 보고 있던 제안대군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허락했다.
“전하께서 녹수를 궁으로 부르신다면 어마마마께서도 함께 그 춤과 노래를 즐기실 수 있겠습니다! 전하께서 베푸시는 은혜가 하해와 같으니 신으로서는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 제안대군 엄마인 예종의 왕비가 아직 왕대비로 살아있었지 참. 그래, 그분이 요즘 몸이 안 좋으시니 효도잔치를 한다는 명목으로 제안대군과 장녹수를 모두 궁으로 불러서 잔치를 열면 되겠구나. 그 자리에서 녹수한테 공연 좀 시키고.
“녹수 너는 그만 물러가거라. 오늘 참 잘했다.”
제안대군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장녹수를 들여보냈다. 다소 아쉬운 기분으로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사내종 하나가 달려 나와 장녹수를 부축해서 데리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갑자기 역사를 내가 바꾸긴 바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연산군처럼 여자라면 환장하는 캐릭터로 놀았다면, 아무리 영구 당숙이라지만 제안대군이 이리 선뜻 장녹수를 소개해주고 궁에 들여보내도 좋다고 말할 리가 있겠는가.
그래도 어쩌면, 나한테 넘겨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이제까지 제안대군에게 하사한 노비만 해도 서른 명은 되는데, 여종 하나쯤은….
“금슬이 참 좋아 보이지 않습니까? 저리 볼 거 없는 얼굴인데 그래도 제 서방한테는 예뻐 보이나 봅니다.”
욕심이 생기려는 참에 제안대군이 초를 쳤다. 순간 실망감이 확 몰아쳤다.
“에, 서방이 있는가?”
“방금 부축하러 나온 가노가 서방입니다. 녹수는 그 가노와 혼인을 하면서 얼마 전에야 저희 집에 들어왔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 혼인이라던가, 세 번째 혼인이라던가? 본래 저희 집 아이였다면 더 일찍 가무를 가르쳤지 저 나이가 되도록 놓아두었겠습니까. 하하하.”
하긴 그렇다. 하지만 임자 있는 여자라고 해서 눈 감고 잊어버리기에는…아쉽다. 적어도 더 두고 보기라도 하고 싶다. 으음…머리를 좀 굴려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