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32
2부 210화
– 1 –
봄이 왔다. 봄은 결혼의 계절. 그래서 두 쌍이나 되는 혼인식이 왕실 안에서 치러졌다. 모두 내 딸, 옹주들이다. 하지만 익히 언급했듯이 난 이 옹주들이 내 자식이라는 생각이 안 든다. 내가 받긴 했으나 부담스러운 경성군의 유산 중 하나일 뿐이다.
“그래도 걔들한테 고마워해야지. 덕분에 이순신과 혼맥을 맺었으니. 아, 사나다도.”
항왜가 부마가 되다니, 이런 일은 실제 역사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일이다. 이순신 역시 마찬가지다. 앞으로 이들이 무장으로서 활약하는데 든든한 정치적 배경이 되면 좋겠다.
다만 이런 혼인은 딱 이번 두 번으로 그칠 생각이다. 세력 있는 외척이 너무 늘어나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니 말이다. 나머지 자식들은 전부 그냥저냥 적당한 상대를 골라잡아서 혼인시킬 생각이다.
또한, 올해는 이미 혼사를 치른 이 둘 외에는 더 국혼이 없을 예정이다. 다음 차례인 인빈 조씨 소생 둘째 옹주 ? 전체 자식들 중에는 넷째 ? 가 고작 열두 살인 까닭도 있지만, 지금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올해도 또 비가 안 온다! 게다가 전염병까지!
“충청도와 함경도에 발생한 역질은 그럭저럭 수습되고 있사옵니다.”
“확실하게 해야 한다. 각 향의원에 명하여 아직 종두를 하지 않은 이들에게 접종을 서둘러 병이 더 퍼지지 않게 하라.”
역질(疫疾)은 천연두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이다. 감염이 시작된 근원은 알 수 없지만, 3월 초부터 여러 지방에서 역질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젠장, 어떻게 이렇게 동시에 여러 곳에서 전염병이 발병할 수 있지? 최초 발원지를 중심으로 퍼지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내 탓이 크지 싶다. 실제 조선보다 지역 간 교류가 활발해지니 전염병이 퍼지기도 훨씬 쉬워진 모양이다. 그렇다고 각 지역 간에 교류를 끊고 모두 옛날처럼 자급자족하는 작은 사회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으니, 방역과 치료에 한층 더 노력하는 수밖에.
“헌데, 역질로 인해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서 참언을 퍼뜨리며 나라를 혼란에 빠트리려는 역당들이 있다! 형조와 의금부를 비롯한 각 관청에서는 그런 자들을 보는 대로 잡아 엄중하게 벌할지어다!”
내가 언급한 참언이란 별 게 아니다. 바로 내 첫째 부마, 사나다 노부시게를 놓고 조야에서 품은 불만이 참언의 형태로 퍼져나가고 있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임금이 왜놈을 왕실에 들이니, 하늘이 분노하여 역질과 가뭄을 내렸도다!』
노부시게를 부마로 들이겠다 했을 때 조정에서 어떤 파란이 일어났는지는 굳이 묘사할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팔도에서 올라온 반대 상소가 줄을 이었고, 성균관 생도들마저 소동을 일으켜 대제학이 직접 진정시켜야 했을 정도였다.
부마가 어디 대갓집 아들이었다면 뉴스가 되지도 않았을 거다. 외국인, 그것도 어디 명나라 왕자도 아니고 흘러들어온 왜인 ‘찌꺼기’가 부마가 된다지 않는가. 그러니 양반이고 상민이고 죄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무리도 아니긴 하다.
“전하! 저 왜인들이 받아준 은혜도 잊고 무도한 욕심을 품으니, 이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당장에 저들의 벼슬을 모조리 떼고, 벽지로 귀양을 보내소서!”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조정 중신들 중 80%는 반대의견을 내세웠다. 15%는 의견을 내는 대신에 침묵을 선택했고, 오직 5%만이 소극적으로라도 내 생각에 동의했다. 유성룡, 이항복을 비롯해 정말 몇 안 되는 신하들만 내 옆에 섰다.
“왜인이라 해도, 전하께서 인재로 보셨다면 부마로 삼으심도 가할 것입니다.”
“아니 됩니다! 어찌 비천한 왜인을 왕실에 들이신다는 말씀입니까?”
물론 반대의견이 나오는 건 지극히 타당한 일이기에 나도 반대한다고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내 신료들이 판단하기에 반대해야 할 이유는 차고도 넘칠 테니까 말이다.
일단 격이 안 맞는 거, 인정한다. 왜인이라는 데서 오는 감정적인 거부감은 일단 기본이다. 조선 양반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선비로서의 교양 같은 건 담을 쌓았다. 게다가 신분도 낮다. 이에야스 급 대영주나, 하다못해 옛날 오우치 씨 정도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군공이 있다고 해도 어찌 왜인 따위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왕실과 연줄을 만들 수 있는 부마라는 자리를 이방인에게 내주기 싫다, 내가 차지하고 싶다는 생각도 분명히 다들 하고 있을 거다.
“옛일을 되새겨보면, 출신이 미천하더라도 그 재주가 뛰어나면 높은 지위에 올려 중히 쓰고 왕녀를 내려서 치하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때 평원왕이 온달에게 그리하였고, 심지어 고신씨는 사람도 아닌 개에게 딸을 주었습니다.”
고신씨(高辛氏)는 제곡(帝?)이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중국 고대 전설 속 군주인 삼황오제 중 한 사람이다. 고신씨는 왕비의 귀에서 나온 큰 벌레가 탈바꿈한 개를 기르고 있었는데, 이 개가 서융의 장수 방왕(防王)의 목을 끊어 물고 옴으로써 서융의 침략에서 고신씨를 구했다.
이때 고신씨는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다. 방왕의 목에 공주를 걸었기 때문이다! 공주 대신에 좋은 먹이를 주는 것으로 상을 갈음하려 했으나 공주가 반대했다. 군주가 맺은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말에 결국 고신씨는 공주를 이 반호(槃瓠)라고 하는 개에게 시집보냈다.
“비록 전하께서 공을 세운 이를 부마로 삼겠다고 천명하지는 않으셨으나, 공을 세운 이에게 상을 주는 의미로 옹주를 하사하신다면 그것도 좋다고 사료되옵니다.”
“병조참판의 말이 옳도다.”
노부시게를 개만도 못한(…) 존재로 취급한 셈이기는 하지만, 이항복이 갖다 댄 비유는 제법 적절했다. 중국의 옛 성인인 고신씨는 개도 전공을 세우니까 부마로 맞았는데, 노부시게 정도 되는 이를 부마로 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격론이 며칠을 두고 벌어졌지만, 내가 답을 정해 놓은 이상 귀결은 빤했다. 결론이 났다.
“순왜 사노부를 부마로 들임은 내 집안의 일로서, 내가 결정하는 바다. 조정에서는 더 이상 이에 대해 논하는 것을 금한다!”
내 의지가 반석과 같아 반대가 무용함을 깨달은 신하들은 반대를 멈췄다. 하지만 지방에서 폭포수처럼 올라오는 상소문은 산처럼 쌓였고, 시중에서는 뒷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참에 역질이 발생하고 비가 잘 오지 않자 저런 참언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신료 된 자로서 저런 참언을 퍼뜨리는 역적이 있다면 즉시 직첩을 회수하고 가산을 적몰한 뒤 전가사변에 처할 것이며, 어리석은 백성이라 해도 전가사변을 피할 수 없으리라!”
가뭄이 닥칠 징조가 보이는데 질병까지 유행하니 안 좋은 소문이 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비합리적인 소문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명예훼손에, 사회 혼란 유발 혐의가 명백하지 않나 말이다.
“가뭄은 저수지와 보에 채운 물로 막을 수 있다. 역질은 종두로 막을 수 있다. 하늘이 내린 고난이라 하여도 모두 사람이 막을 수 있으니, 어리석은 자들이 전혀 무관한 일과 연관 지어 참언을 퍼뜨리지 못하게 하라!”
“삼가 명을 받들겠나이다.”
휴우, 언제쯤 이런 데서 해방되려나.
– 2 –
“종두 접종한 사람 비율이 몇 %쯤 될까?”
“글쎄. 지금까지 보고된 숫자를 합치면 전 인구의 10% 정도?”
알몸으로 이불 속에 누워서 나누는 대화치고는 딱딱하다. 하지만 상희가 공식적으로 뭔가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보니, 국사에 대해 상희와 의논할 수 있는 자리가 별로 없었다.
“그 정도 숫자로는 집단 면역은 기대하기 힘들어. 아무래도 사망자가 꽤 나오겠네.”
요즈음 천연두가 유행한 일이 없다 보니 각 도 향의관들이 종두 놓기를 소홀히 한 탓이다. 상희가 한숨을 쉬었다.
“대신 종두를 한 사람들이 병에 안 걸리는 모습을 보고 종두를 해야 할 필요성을 사람들이 크게 느끼기는 하겠지. 연산, 이참에 보건복지부처럼 의료, 위생 문제만 따로 다루는 관청을 하나 따로 만들면 안 돼?”
각 도에 있는 향의원은 관찰사가 관리책임을 맡고 있어서 내의원에만 연이 있는 상희로서는 그 운용에 영향을 미치거나 현황에 관한 정보를 받을 수 없다. 만약 통합된 의료관리 부서가 생긴다면 상희가 손대기 좀 쉬워지겠지만, 아직은 어려웠다.
“육조 체계가 워낙 확고해서 같은 위상을 갖는 일곱 번째 관청을 만들긴 힘들어. 이조 밑에 만들 수는 있겠다.”
내무부나 행정자치부 같은 게 있으면 그 밑에 만들면 되는데, 조선은 지방행정은 지방관이 사실상 전담으로 맡아서 처리하고 나중에 책임만 지는 시스템이다 보니 그에 해당하는 부서가 없다. 그나마 비슷한 거라고, 이조 밑에 넣는 수밖에 없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한 번 더 할까?”
부드럽고 매끄러운 몸에 닿아 있으니, 잠시 늘어졌던 신체 일부가 어느새 슬슬 살아났다. 슬그머니 배 위에 손을 얹자 상희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수긍하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살짝 굴러서 몸을 포갰다.
“누가 애 둘 낳은 애기엄마라고 하겠어. 처녀 그대론데?”
“이제 겨우 스물하나니까.”
내가 농을 하자 상희가 웃으면서 속삭였다. 나도 지지 않고 한 마디 더 보탰다.
“순 늙은 영계잖아. 진짜로는 쉰….”
“거기까지.”
그러고 보니 나는 몇 살인가. 원래 나이 스물일곱, 연산군으로 12년, 경성군으로 8년째. 와, 나도 어느새 마흔일곱인가. 진짜 오갈 데 없는 아재구나. 그래서 아재스러운 영계라는 단어가 입에서 술술 나왔나 보다.
에라, 이런 재미없는 상상은 관두자. 건강한 젊은 몸이 있지 않은가. 있는 거 실컷 쓰자.
실컷 운동하고 나니 몸에 땀이 흘렀다. 잠시 누워서 숨을 고르며 천장을 보고 있으려니, 내 품에 안긴 상희가 속삭였다.
“우리…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만날까?”
몰래데이트 하는 불륜커플도 아닌데 무슨 뜬금없는 소리? 눈을 깜박이는 순간에 그 의미를 알았다. 젠장, 내 눈치가 젬병이 돼가는군.
“나도 모르지…이 짓을 또 할지 안 할지, 다음에 죽어봐야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겠지.”
내 목덜미를 끌어안은 채 입을 다문 상희를 보고 있으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나?
“혹시 말이야, 우리 또 만나고, 그리고 그때도 너 왕이면….”
“왕이면?”
천녀가 약속한 대로라면 또 왕이겠지. 상희를 다시 만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나 중전 시켜줬으면 좋겠어.”
아, 그 문제 때문이었구나. 자기가 낳은 아이들에게 엄마 소리 한번 들을 수 없다고 울던 상희의 모습이 생각났다. 요즘 일에 몰두하면서 진정된 줄 알았는데,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한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럼, 물론이지. 약속할게.”
정말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로 지장까지 찍었다. 머리는 이건 유치한 행동이라고 하는데, 손은 그냥 상희를 따라 움직였다.
“우리 나이 거꾸로 먹나 보다. 뭐야, 이거. 애들처럼.”
내가 투덜거리자 상희가 내 품을 파고들면서 종알거렸다.
“뭐 어때. 매일 이러는 것도 아닌데.”
비빈들 처소에 골고루 다니느라 상희 방에 오는 건 사흘에 하루 꼴이다. 피곤하면 이야기만 나누다 그냥 잘 때도 많으니, 오늘처럼 관계를 갖고 잡담까지 길게 나누는 날은 드물긴 하다.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들 법도 하지.
그런데 상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낮에 인빈 처소에 갔었어.”
“인빈? 거기는 왜?”
“당연히 위로해주러 갔지. 지난달에 정신옹주 혼인하고 난 뒤로 내내 울고 지내는 거 몰라? 내가 비빈들 중에 명색이 막내니까, 손위 형님 좀 달래주러 갔었어.”
‘왜놈’한테 딸 시집보낸 게 그렇게 마음이 아팠나. 인빈은 경성군이 세자 시절부터 궁궐에 들어와 있었던 최고참 후궁이다. 거의 20년을 함께 지낸 ‘남편’이 새 후궁 처소는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자기한테는 오지 않으니, 그동안 참 속이…어어?
“야, 네가 인빈한테 가면 놀리는 것밖에 안 되잖아? 겉으로는 티 안 내도 속으로는 너 무지 원망하고 있었을 텐데.”
“지금 인빈은 그런 생각 떠올릴 여유도 없어. 그냥 울면서 고맙다고만 하더라.”
그래서 며칠 전에 인빈한테 갔을 때 ‘오늘은 모시기 힘들다’고 한 거였나? 할 말이 없어서 입맛만 다시는데, 상희가 내 품에 안긴 채 한숨을 쉬었다.
“혹시 말이야…너 우리 애도 그렇게 정략결혼 시킬 거야?”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담배라도 물어야 할 것 같았지만 아직 담배는 시험농장에만 있다. 더구나 필터도 없이 생담배를 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애결혼은 시켜주고 싶어도 시켜줄 수가 없어. 알잖아.”
상희라고 왕실에서 하는 결혼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아주 조금, 약간의 여지라도 없을까 하는 기대는 있었던 모양이다.
“어쩔 수…없겠지?”
“응.”
일부러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나니 아직 돌도 안 지난 우리 딸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상희를 닮은 예쁜 아이. 장차 그 아이를 누구와 결혼시킬지 고심한 결과를 상희에게 들려주면 뭐라고 할까?
“상희야. 우리 딸이 중국 황후가 되면 어떨 것 같아?”
농담처럼 건넸다. 상희는 내 이야기를 듣고 웃었다. 확실히 농담이라고 여긴 모양이다.
“명나라 황후? 공녀로 보내려고? 우리가 그럴 만큼 약하진 않잖아?”
“아무려면 내 딸을 공녀로 보낼까. 정식으로 혼인해서 들어가는 거 말하는 거야.”
웃고는 있지만, 내 어조에 진심이 들어 있다고 깨달은 모양이다. 상희도 표정이 진지해졌다.
“명나라 황제들이 조선 여자를 데려가서 후궁으로 삼은 적은 있다고 했지. 청나라 시대에도 어느 유력 왕족이 조선 공주를 여러 부인 중 하나로 맞이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었어. 하지만 황후라는 건…너무 비현실적인데.”
“뭐, 꿈이 커서 안 될 건 없으니까.”
내가 품고 있는 계획은 아직 상희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미 말했지만, 돌도 안 된 애기를 가지고 너무 거창한 계획 세운다는 것도 우스워서. 아닌 말로, 얘가 무사히 성인이 될 확률이 50%나 되냐 말이다. 한껏 계획을 떠벌려 놓고 애가 자라다 죽으면 눈물만 더 쏟을 뿐이다.
“자, 그럼 우리 셋째 만들어 볼까?”
“어머, 또?”
깜짝 놀라는 상희의 입을 내 입술로 덮었다. 밤은 아직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