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45
2부 223화
– 5 –
전라좌수영은 완전히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경기수사로 재직하다가 올해 초 전라좌수사로 전임한 정걸은 70세가 넘은 노장이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태연하기는 힘들었다.
“적의 수가 얼마나 된다고? 다시 말해 보아라!”
임금은 정걸을 전라도로 내려보내면서 ‘조만간 왜적이 대규모로 경상도를 칠 테니’ 유사시 바로 원병을 보낼 수 있도록 전력을 잘 유지하라고 당부했다. 그 뜻을 받들어 전선과 군기를 철저히 관리해 왔는데, 왜적이 설마 전라좌수영 관할 지역으로 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천여 척은 족히 되어 보였사옵니다! 발포진성에서 바다를 보았더니 적선이 바다를 메워서 적선이 가리지 않은 해면을 찾기 힘들 정도였나이다!”
발포진성에서 사후선을 몰고 사도진으로 달려간 발포진 소속 군관은 사도진에 적습을 알린 뒤 배를 바꿔 타고 다시 좌수영 본영으로 왔다. 촌각을 다투는 급보였기 때문이다.
“천 척이라면, 왜적이 한 척에 스무 명만 타고 있다고 해도 2만 명이 아닌가!”
그것도 적이 소선(小船)을 타고 왔을 때나 맞는 이야기다. 정걸은 일본에도 작은 배만 있는 게 아니라 판옥선과 맞먹는 크기를 자랑하는 대선(大船)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적이 타고 온 대선을 보았느냐? 수가 얼마나 되었느냐?”
“적어도 다섯 척 중에서 하나가 대선이었고, 셋은 중선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소선입니다.”
“음, 큰 바다를 건너오느라 큰 배를 많이 가져온 모양이구나.”
왜구가 대개 소선을 타고 다니는 것은 저들이 대마도를 비롯한 조선 연해 무인도를 근거로 삼았기 때문이다. 저들이 좌수영 수역을 가로질러갔다는 보고는 없었으니, 왜적들이 큰 배를 주로 타고 있다는 건 저들이 구주에서부터 남쪽 바다를 곧바로 가로질러왔음을 의미했다.
“발포진은 어찌 되었는가?”
“급습을 받고 미처 군사를 모으지 못하여 배를 움직일 군사가 없는지라, 전선 세 척은 모두 불태웠사옵니다. 만호께서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성을 지키며 백성들이 피할 때까지 버티겠다 하셨습니다. 필시 지금쯤은….”
군관이 미처 말을 마치지 못하고 울먹였다. 아마 모두 최후까지 싸우다 죽었을 발포진 소속 동료들을 두고 혼자 빠져나온 데 대한 죄책감 때문이리라. 을묘왜변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른 정걸은 그런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기운을 차리라! 그대가 나서서 만호와 군사들, 백성들의 원한을 갚으면 되느니라. 여봐라, 사도진은 지금 어찌하고 있느냐?”
사자는 사도진 소속 배를 타고 왔다. 당연히 사도진 소속 군관 한 사람이 같이 타고 왔고, 지금 옆에 서서 자기가 발언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도첨사께서는 정군이 아닌 속오군에 속한 이들까지 모든 군사를 급히 소집하고, 인근에 사는 백성들을 성내로 피난시켜 내습하는 적과 맞설 준비를 하고 계시옵니다.”
“음, 그러하냐.”
열의는 가상하지만, 그래도 군사가 부족하리라. 각 수군 진포에 속한 군사 상당수는 자기가 속한 진포 가까이에 살지 않는다. 인구가 많은 육지 쪽 고을에 살면서 수군에서 번을 설 때만 자기 근무지에 간다. 사도첨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군사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그대는 지금 바로 사도진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첨사에게 내 명을 전하라.”
정걸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 내리는 명령을 휘하 장수들이 어찌 받아들일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좌수영이 이대로 무너지지 않고 싸움을 계속하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적이 뱃길을 끊기 전에, 성내에 불을 지르고 전선과 어선에 모든 군사와 백성들을 태우고 탈출하라! 피난민은 중도에 있는 육지에 내리고, 전선과 군사는 본영에 합류하라.”
예상대로 주변에 있던 군관들이 난리가 났다. 심지어 명령을 수행할 당사자인 사도진 소속 군관도 마찬가지였다.
“수사또! 어찌 임지를 지켜야 할 장수와 군사에게 도망하여 목숨을 구하라 명하시나이까? 나라에서 주는 녹을 먹는 자로서 전하께서 베푸신 은덕을 잊고 도망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값없이 죽는 만용보다 다음에 싸울 곳을 찾아 물러서는 용기가 더 존귀하도다!”
정걸은 자신이 내린 선택에 확신이 있었다. 경기수사로 있는 동안에 수없이 여러 번 상감을 만났다. 상감께서는 물러나서 다음 싸움을 기약하는 편이 현명한데도 오기를 부리며 싸우다가 죽는 것만큼 무가치한 행동도 없다며 비난을 퍼부으셨다.
임금이 지금 이 상황을 본다면, 분명 사도진을 포함한 흥양 일대 진포들을 모두 철수하라고 명할 것이다. 틀림없었다.
“장수란 나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아야 한다. 전하께서 책임을 물으신다면 내가 모든 죄를 받을 것이니, 그대는 즉시 사도진으로 가서 사도첨사에게 철퇴하라 전하라! 또한, 여도진에도 즉시 사자를 보내어 여도만호에게도 전선과 군사를 모두 이끌고 본영으로 오게 하라!”
전라좌수영은 예하에 5관 5포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4포가 흥양현에 있다. 머뭇거리다가는 왜적이 그 4포를 모조리 휩쓸어서 전라좌수영이 보유한 전력 중 7할을 날려버릴 수도 있다. 예하에 전선이 열 척도 안 되는 이름뿐인 수군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사또 나리, 적이 발포진을 무너뜨렸으니 분명 다음에는 흥양현을 노릴 것입니다. 사도진과 녹도진, 여도진에 있는 군사로 하여금 흥양현으로 가 돕게 하면서 전라병사가 보내는 원군을 기다리라 명하심이 더 가하지 않겠습니까?”
수하 군관의 진언에 정걸은 고개를 저었다. 마음속으로는 그 역시 피를 토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나, 수만 명이나 되는 적이 이미 육지에 내렸다면 때가 늦었다. 세 진포에서 고작 천 명도 안 되는 군사를 보내 합세한들,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또한, 군사들이 전부 흥양현에 모인다면 전선은 어쩐단 말이냐?”
흥양현령과 그 수하 군사들, 그리고 백성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군관과 군리(軍吏)들이 울분으로 눈물을 흘렸다. 정걸 역시 목소리가 탁해졌다.
“우리는 수군이다! 전선을 타고 적을 막아야 한다. 나도 심장이 찢어질 듯 마음이 아프지만, 도리가 그러하니 어쩌겠느냐? 어서 두 진포에 철수를 명하라. 녹도만호는 스스로 판단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발포진은 흥양현 남쪽 끝, 사도진과 여도진은 그 동쪽에 있다. 녹도진은 홀로 흥양 서쪽에 있으니 좌수영에서 직접 연락할 수가 없다.
사도진 소속 군관이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나가자 정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역시 그 자리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좌수영 군관들에게 호통을 쳤다.
“너희는 무엇을 하느냐? 어서 군사를 모아 전선을 띄울 준비를 하지 못할까! 그리고 군리는 즉시 장계를 쓸 준비를 하라! 전라병사에게 원병을 청하고, 또한 주상께 상황을 알려야 하지 않느냐! 경상우수영에도 급히 구원을 청하는 사자를 보내라!”
“예, 사또!”
– 6 –
음력 4월 13일, 앞으로 몇 번을 전생하더라도 이날을 나는 잊지 못할 거다. 왜냐고? 이날이 바로 임진왜란, 아니 이쪽 세계 기준으로 경인왜란(庚寅倭亂)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내가 처음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라? 왜적이 전라도로 쳐들어 왔다고? 대마도, 경상도가 아니란 말이냐?!”
제기랄! 분명히 경상도로 쳐들어올 줄 알았는데! 진짜 임진왜란 때도 고니시가 선봉에 서서 경상도로 쳐들어 왔잖아!
“그러하옵니다! 전라도 방면으로 이어진 봉화가 올랐사옵니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하는 우리 경계망은 적의 침략 낌새를 이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정찰선을 내보내서 나고야성 코앞까지 접근하기도 했지만, 침략을 위해 집결한 대함대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고작 백여 척 정도가 모여 있는 광경을 확인했을 뿐이다.
작년 겨울에 금위사에서 잠입시킨 일본인 첩자들도 그다지 신통한 연락을 보내오지 않았다. 쉰 명쯤 잠입시켰는데, 돌아와서 보고를 올린 건 고작 여덟 명밖에 없었다. 규슈 전역에 있는 영주들이 겨우내 군사훈련을 하고 배를 만들고 있다는 이야기가 다였다.
몇몇은 정체를 들켜서 잡혀 죽은 게 확실했다. 합법적인 스파이로 이키섬을 방문한 이들이 입수한 정보였다. 그 외에는 통 소식이 없다. 잡혀서 죽었는지, 마음이 바뀌어 전향했는지, 혹 만사가 귀찮아져서 집어준 공작금을 쥐고 집에 갔는지. 그나마 최근에는 귀환자도 없었다.
비변사에서는 이제까지 들어온 정보만 가지고 토의한 끝에, 적이 여태껏 규슈 북부에 배를 모으지 않는 걸 보니 6월쯤 침공이 시작되리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왜적들도 농사는 지어야만 할 테고, 논에 모내기까지는 해놓아야 움직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도 덧붙었다.
생각해 보니 그것도 그럴듯했다. 일본도 조선과 같은 농업국이므로 당연히 병사들은 대부분 농민이다. 전국시대에도 전투를 벌이는 때는 일반적으로 농사철이 다 끝난 다음이었다. 이번 전쟁을 치르느라 농사를 아예 거를 생각이 아니라면 그놈들도 파종이랑 모내기는 마쳐야겠지.
한국사에도 비슷한 전례가 있다. 뭐냐고? 한국 역사상 최대규모로 시도한 대외원정, 제2차 요동 정벌…즉, 위화도 회군이다.
당시 고려군은 5월 24일에 서경(평양)을 출발했다. 날짜를 보면 이때 고려군도 파종을 마친 뒤에 병력을 소집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럼 노부나가라 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히데요시는 4월에 왔지만, 주체가 바뀌었으니 노부나가는 6월에 올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6월에 온다고 쳐도 일본군 입장에서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왜냐고? 신하들은 모르는 일이지만, 내게는 실제 역사가 입증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조선을 공격해서 쓰러트리는 데는 단 두 달이면 충분했다고 말이다.
부산에 왜군이 상륙하고, 바로 다음 날로 부산이 함락됐다. 한양 함락에 20일이 안 걸렸다. 개성은 45일만인가, 하여튼 50일이 안 돼서 함락당했고 평양은 전쟁이 터지고 딱 60일 만에 일본군 손에 들어갔다. 일본군이 6월에 쳐들어 와도 8월에는 평양까지 먹는다는 소리다.
그래서 적이 6월에 경상도로 쳐들어올 개연성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동안 했던 그 모든 분석과 결정은 몽땅 쓰레기통에 처넣어야만 하게 되었다. 제기랄! 적군이 지금, 4월에 전라도로 쳐들어오다니!
“적이 처음 나타난 곳이 전라도 어디냐? 그리고 어디를 거쳐서 왔느냐?”
예전 왜구가 나타났을 때의 기록을 보면, 전라도를 덮친 왜구 중에도 대다수는 일단 경상도 일원에 도착한 다음 육지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먹이를 찾아 습격을 벌였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지면 지표(指標)가 없어 항해 자체가 불가능한 놈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 어딘가에서는 분명히 왜구 선단이 목격된다. 만약 이번에도 그랬는데 중간에서 보고를 씹은 거라면, 그 씹은 놈에게 이 세상에 태어난 걸 후회하게 만들어줄 테다.
“봉수대를 통해 급보가 먼저 온지라, 아직 상세한 결과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전라도에서 보낸 장계가 곧 올라올 터이니, 파발이 오기까지 잠시만 기다리소서.”
분노를 참기가 너무 힘들었다. 되지도 않은 헛꿈을 꾸면서 대륙정복에 나서는 노부나가에 대한 분노, 현재 상황조차 바로 파악할 수 없는 시대적인 한계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일본군이 전라도부터 공격할 수도 있다고 예상하지 못한 나에 대한 분노.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쥔 나를 보고 조정 신하들은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영의정 노수신이 책임감을 느꼈는지 엎드려 죄를 빌었다.
“전하, 신을 죄주소서. 신은 조정의 영수이자 비변사 도제조로서 다른 중신들을 이끌어야 하는 중임을 맡아서 수행하였으면서 적이 지금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큰 죄이니 신을 벌하소서. 하지만 다른 중신들은 용서하시고 적에 대처케 하소서.”
“신을 벌하소서!”
“신 또한 죄가 있나이다!”
아 젠장 지금 필요한 건 이딴 쇼가 아니라고! 진짜 임진왜란 때처럼 서로 이게 누구 탓이네 어쩌네 하는 싸움이 벌어지는 것보다는 낫지만, 지금 필요한 건 책임 추궁이 아니라 침입하는 왜군에 맞서 방어책을 수립하는 거란 말이다.
어차피 오판은 신하들뿐만 아니라 나도 했으니까, 따지자면 나도 책임이 있다. 그러니만큼 지금 자기를 벌해달라고 외치는 저 많은 목소리를 다 벌줄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물론 상징적인 조치는 취해야겠지. 그리고 그 김에 조정도 전시체제로 개편하고.
“비변사가 적의 침입 시기와 방향을 잘못 판단한 것은 분명 큰 과오다. 하지만 이는 비변사 전체가 판단을 잘못한 것이지, 누구 한 사람이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에 책임을 져야 하니, 영의정 노수신이 물러나는 것으로 모든 잘못을 갈음하고자 한다.”
조정 전체가 범한 실수, 여기에 내가 범한 실수까지 노수신이 덤터기를 쓰는 셈이다. 물론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자리가 그런 책임을 대신 지라고 있는 자리지만, 좀 미안한 일이다. 다행히 노수신 본인은 별 불만이 없어 보였다.
“신 한 사람에게만 죄를 물으시니 전하의 높으신 은덕에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제대로 된 책임자라는 건 이런 거지. 문제는 거기 따라붙는 이런 놈들이고.
“전하, 영상 한 사람의 죄가 아니옵니다. 신들에게도 죄를 주소서!”
“대적이 쳐들어 왔는데 그대들을 모두 조정에서 내보내면, 전쟁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눈치 없는 밥통이라도 쓸 놈은 써야 한다. 더구나 지금 조정이 밥통으로만 찬 것도 아니다. 지금 ‘내각 총사퇴’ 같은 짓을 하면, 유성룡이나 이원익, 이항복까지 다 쓸어내라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러면 이 전쟁 확실히 망한다.
“좌의정 유성룡으로 하여금 도체찰사를 겸하면서 노수신의 뒤를 잇게 하겠으니, 지금 당장 임무를 수행하라. 그리고 병조에서는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확인하고 병기를 점검하여 원병을 청하는 장계가 올라오면 바로 내려보낼 수 있도록 준비하라!”
아아, 실시간 보고가 받고 싶다. 스마트폰은 아니더라도 유선전화, 하다못해 전보라도 받고 싶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볼타 전지를 사용하는 전신기라도 만들어볼까 싶지만…개발에 드는 비용은 둘째 치더라도, 그게 당장 써먹을 만큼 실용적인 물건일 가능성은 별로 없겠지, 휴우.
– 7 –
성벽 위에는 싸움에 나섰던 군사와 백성들의 시신이 즐비했다. 흥양현령 원전은 성벽 위를 돌면서 남아있는 군사들을 격려했다.
“조금만 버텨라! 곧 원군이 오리라.”
발포진에서 보낸 파발을 받고, 급히 군사를 모으면서 사도진, 여도진, 녹도진에 적습 사실을 알렸다. 보다 후방에 있는 낙안군에도 파발을 보냈다. 하지만 예하 각 진포에도 군사가 없는 건 마찬가지다. 이 시기, 이 장소에 왜적이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설사 원병이 온다고 해도 성을 둘러싼 포위를 뚫기는 버거우리라. 지금 성을 둘러싼 적병은 언뜻 보아도 7천에서 8천 명은 충분히 되었다.
“비장, 남은 군사가 얼마나 되는가?”
“속오군을 합쳐서 2백이 고작입니다.”
왜군은 무엇이 두려운지 얼른 성벽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앞에 나무와 대나무로 만든 방패를 세워서 시석(矢石)을 막게 하면서 성벽 위에 있는 군사들에게 총탄과 화살을 퍼부었다. 이쪽에서는 수군에서 쓰려고 준비한 총통을 꺼내다가 성벽에 올리고 쏘아 방패를 부쉈다.
“군사가 부족한 것이 한이로구나.”
적이 흥양현 성문 앞에 나타난 건 신시(申時, 15~17시)였다. 새벽녘에 발포진에 나타났다던 적이 50리 길을 걸어 신시에 나타나다니, 발포진은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무너진 모양이었다.
“궁시도, 총통도, 화약도 넉넉히 있건만 들고 쏠 군사가 없다니.”
흥양현은 예하에 있는 4개 진포를 지원해야 한다. 당연히 수군이 쓸 무기를 넉넉히 비축해두었다. 제대로 준비한 뒤였다면 적을 얼마든지 막아낼 수 있었겠지만, 만시지탄일 뿐이었다.
군사들을 살피는 동안에도 적이 쏘아대는 총탄과 화살이 계속 날아들어 성벽에 맞고 튀는가 하면 귓가를 스쳤다. 아무래도 원전이 입은 두정갑이 군사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 같았다.
“사또! 몸을 더 낮추십시오. 아무래도 왜놈들이 사또를 노려서 쏘는 모양입니다.”
“잘 맞지도 않는 왜놈들 조총 따위로 노려 쏜들 내가 죽겠는가?”
경군이 보유한 강선조총이라면 모를까. 원전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죽어가는 군사들을 놓고 할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이때 군사 하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적이 사다리를 들고 옵니다!”
적은 아군 숫자가 너무 줄어들어 사다리를 밀어내지도 못할 때까지 기다린 게 분명했다. 곧 성벽 여기저기에 왜병들이 기어올랐고, 아직 남은 군사들이 창과 칼을 들고 적에게 덤볐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길고 예리한 왜검이 번쩍일 때마다 목과 손발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장수가 되어 임금을 위해 죽을 수 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소냐! 문루에 남은 모든 군사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김 군관은 당장 가서 화약고와 군량고에 불을 지르라!”
원전은 이제 성을 더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남은 군사들과 함께 장렬하게 죽는 일, 그리고 적에게 치중을 넘기지 않는 일뿐이었다. 원전은 명령을 내린 뒤 마지막 충심으로 북쪽으로 네 차례 절을 올렸다.
“그동안 전하께 일가가 받은 은혜를 비로소 갚나이다. 왜 땅에 잡혀 있어서 꼼짝할 수 없는 가형(家兄)이 세울 몫까지 공을 세우지 못함을 부디 용서하소서.”
절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원전은 문루로 밀어닥치는 왜병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남은 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칼 부딪는 소리와 비명이 문루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