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48
2부 2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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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합쳐야 2만을 좀 넘는 전라도 관군이 현재 보유한 전력으로 만 단위를 넘어가는 왜군과 회전을 벌이기는 어렵다. 과거 나름 선발한 정예병들을 가지고 왜별기랑 모의전 붙었을 때도 참패했었다. 속오군이 더 붙더라도 분명히 야전에서 박살이 나고 성으로 쫓겨 들어갈 거다.
물론 방어도 중요하다. 하지만 적을 궁극적으로 격퇴하자면 야전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고, 지금 조선군 전력 중에서 일본군과 정면으로 회전을 벌일 수 있는 군대는 경군 밖에 없다. 내 도감군, 그리고 오위군뿐이란 말이다.
“속말주에 있는 도감군 보병 4위와 기병 1위를 즉각 도성으로 소환하라. 도성에 있는 보병 6위 중 3위와 기병 1위는 우별장 선거이로 하여금 전주로 데려가게 하고, 이원익을 체찰사로 명하니 함께 내려가라. 나머지 3위는 훈련대장 신각과 함께 도성에서 잠시 대기한다.”
본래 북방에 갔던 도감군은 7위다. 하지만 권율과 유극량이 지방군 편성과 훈련을 원활하게 진행해준 덕분에 치안 유지 임무를 점차 현지 병력에 넘기고 도감군 병력은 조금씩 도성으로 불러들일 수가 있었다. 철수는 6월에 완료할 예정이었지만 이번 일로 급하게 당기게 되었다.
“전하, 오위군은 소집이 끝났습니다. 장비도 모두 확인하고 부족한 수량을 보충했으니 당장 전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아직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겸하고 있는 신립이었다. 신립의 얼굴을 보니 두 눈에 빛이 나고 콧김을 뿜는 것이, 마치 이참에 여포의 목을 베러 가겠다고 날뛰는 장비를 연상하게 했다.
당연한 일이리라. 북방에서 대공을 세우고 근 1년이다. 그동안 푹 쉬었고, 이제 슬슬 몸이 근질근질해지던 참이었겠지. 어디 한 번 또 들쑤시러 가고 싶었을 참에 왜적이 쳐들어오다니, 이 얼마나 환영할 일이겠는가.
아, 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기지만 신립이 매국노라서 일본군을 환영한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니다. 공을 세울 기회를 환영한다는 것이지.
“아니다. 적세가 아직 분명하지 않으니 그대는 도성에서 움직이지 않음이 좋겠다. 도적들이 지금 크게 설친다 하나, 전라도에도 군사가 있으니 일단 그 앞을 막지 않겠는가. 더욱 상세한 사정을 알게 되고 난 연후에 그대가 나가도 늦지 않다.”
내가 신립을 당장 내보내기를 꺼리는 이유야 간단하다. 탄금대. 그 한 마디 이외에 도대체 무슨 핑계가 필요하겠는가.
물론 이쪽 세상 신립은 다르다. 일신에 출중한 무예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전술적으로도 꽤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장수다. 전략적 식견은 좀 부족하고 눈앞에서 적을 보면 돌아버리는 전투광적인 면이 있긴 하지만, 멀쩡한 조령을 두고 탄금대에 진을 칠 사람은 아니다.
문제는 그래도 내가 불안하다는 거다. 오다가 조선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모습을 보고 ‘어쩌면 왜란을 피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전쟁을 회피할 수 없겠다고 깨닫는 순간 탄금대라는 이름도 내 머릿속에서 되살아났다.
가뜩이나 무모한 성격이다. 만에 하나라도 여진족 토벌하러 다닐 때처럼 정면으로 말 타고 돌격하다가 죽어버리면 엄청난 타격이 온다. 되도록 신립이 안 나가게 하고 상황을 끝내보고 싶었다. 그래서 아직 다 모이지도 않은 도감군부터 보내는 거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이제 왜적이 선발대를 보냈을 뿐이다. 명나라를 도모한다던 자들이 어찌 그 정도 군사만 보냈겠는가? 저것은 의병(疑兵)이고 본대가 따로 올지도 모른다. 그대는 상황을 좀 더 정확히 파악한 뒤에 오위군을 끌고 내려가도록 하라.”
그저 신립을 붙들어 놓으려고 지어낸 드립은 아니다. 정말로 지금 상황을 보니 지금 흥양을 점령한 고니시는 버리는 돌일 공산이 커 보였다. 왜냐고? 조건이 그러니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부산을 친 이유는 그게 가장 합리적인 진격로였기 때문이다. 해로도 짧고 도성으로 가는 길도 그동안 사신들이 왕래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이쪽 세계도 마찬가지다. 적이 지금 흥양을 쳤다지만, 규슈에서 흥양을 왕복하려면 부산에 왕복할 때보다 적어도 3배는 오래 항해해야 한다. 게다가 중간에 대마도 같은 기착지도 없다. 당연히 사고율이 급증하고 보급로 유지가 힘들다. 우리 수군의 방해는 말할 것도 없다.
기습적으로 한번 드랍하는 거야 어렵지 않다. 하지만 안정적으로 보급로를 유지하면서 부산 이외에 다른 곳에 영구적인 교두보를 형성해서 진공한다는 건 생각하기 너무도 힘든 일이다. 입안자가 작전을 세울 때 미쳐 있지 않은 다음에야 말이다.
그 말인즉슨 노부나가의 본대 ? 그놈이 ‘친정’을 할지 안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 가 내릴 상륙예정지는 여전히 부산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대마도 방면 경계망은 여전히 유지해야 하고, 이순신에게도 주력을 경상도에 남겨두라고 해야 한다.
다행히 정걸이 제때 진포 두 곳에서 병력을 빼낸 덕분에 전라좌수영은 아직 판옥선 17척, 거북선 1척을 보유하고 있다. 그만하면 좌수영을 자체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전력은 되니까 경상우수영에서 보내는 지원은 최소한이면 될 듯하다.
“전하, 저들이 혹 다른 곳에 또 침입할 우려가 있지 않겠사옵니까?”
윤두수가 지적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러하다.”
아무래도 노부나가는 실제 역사에서 히데요시가 만든 것보다 배를 더 많이 만든 모양이다. 노부나가가 나한테 제시한 계획에서도 내가 요동을 치면 자기는 강남을 치겠다고 했었으니까, 수십만 병력을 끌고 정말로 강남에 가려면 최소한 수천 척은 만들었을 게 아닌가.
내가 방심한 점은 당연히 그 배들이 규슈 북부에 모여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오리라고 생각한 데 있었다. 고니시가 예고 없이 흥양에 나타난 걸 보면 놈은 규슈 남부에서 외양으로 돌아 흥양을 곧바로 찌른 거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불안감이 든다. 그 많은 배가 있고 역시 히데요시보다 많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있으니, 노부나가가 결심만 하면 교두보를 몇 개쯤 더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충청도라거나, 경북이라거나, 강원도라거나?
내 우려에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충청도야 뭐 옛날에도 왜구가 많이 덮쳤고, 경상북도나 강원도에는 표류한 어부들이 종종 떠내려오곤 했다. 오키섬, 그러니까 독도가 지들 땅이라고 우기는 시마네현 놈들 말이다. 심지어 이놈들은 출어해서 종종 무릉도에 들러 물도 얻어간다.
“호조판서의 말이 옳습니다. 바닷길이 너무 길어지는 충청도는 비교적 적이 들어올 위험이 적으나, 경상도 동쪽 바다는 적이 어부들을 길잡이로 세워 들어올지 모릅니다.”
유성룡의 지적대로다. 정말 노부나가가 작정만 하면 들어올 길이 정말 많다.
물론 그 많은 분견대에 보급지원을 제공하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갈라 보내는 부대들은 정말로 버리는 돌이고, 우리가 제대로 토벌에 나서면 어렵지 않게 분쇄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 병력을 분산시켜 정작 부산으로 들어올 본대에 대처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거다.
“그러니 평양군에게 오위군을 이끌고 전라도로 내려가라 명할 수 없다. 적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리라.”
“예, 전하!”
신립이 내 논리를 수긍한 듯해서 다행이다. 속셈을 보면 수긍했다기보다는 잔챙이 왜군보다 적 본대와 싸우는 게 더 좋아서 선뜻 받아들인 듯해 보이지만. 아마 신립은 지금 머릿속에서 노부나가의 모가지를 백 번도 더 따고 있겠지.
아, 젠장.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전주성을 보수하라고 하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전주성이 전투를 치를지 모르는 상황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일본군은 당연히 보급로 유지하기 편한 경상도로 들어올 줄 알았고, 그러면 이순신이 다 해치워주리라고 생각했으니까.
원양으로 초계를 나갈 능력이 없는 것도 아쉽다. 다 알다시피 판옥선을 비롯한 수군 전선은 원양 항해 능력이 매우 낮다. 한 척 더 완성해서 이제 4척이 된 동해수영 갈레온은 전부 훈련 중이니 아직 실전 투입은 난망이다. 제노바 출신 항해사만 있으면 뭐하나, 선원들이 미숙한데.
그 외에 내수사 소속 정크선이 원양 항해가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은 산동까지 가는 교역이나 연안항로를 이용한 수송업무만 했기 때문에, 선원들이 장거리 해상초계를 해낼 만한 경험이 없다. 억지로 돌릴 수야 있겠지만, 그것도 필요하다고 느꼈어야 시키지 않았겠나.
지금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문제는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아무리 서둘러도 내가 장계를 받을 때 이미 상황은 바뀌어 있다. 역시 친정을 나가 현장에서 빠르게 결단해야 할 듯하다.
물론 오위군 출동 여부와 마찬가지로 내 친정도 적 주공이 어디인지 확실하게 판명된 뒤의 일이다. 일단은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지시를 하면서 상황을 정리할 때다.
“전라우수영 전선들은 좌수영을 도우러 가야겠지만, 예하에 거느린 탐망선은 최대한 연해에 풀어 적이 혹시 외해로 도는지 탐지하라. 우수영 관할에는 섬이 많으므로 행여 놓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충청수영과 경상좌수영도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 이르라.”
“지난달부터 전주에서 이일이 창설을 준비하던 전라 좌병영은 어찌하시겠나이까?”
전라도 방어를 강화할 겸 유사시 경상도 지원을 원활하게 하려고 강진에 있는 기존 병영을 우병영으로 하고 전주에 좌병영을 새로 설치할 참이었다. 5월 중에 창설할 예정이었는데 적이 기습을 가하면서 이것도 꼬였다.
“지금 바로 창설하고, 이일을 좌병사 겸 순변사로 명한다. 군사와 병기를 모아 전라도에 온 적과 대적하도록 하라.”
지금부터 전주성 방어에 열중하라고 할 필요는 없겠지. 일단 전주성까지 오는 도중에 적을 저지해야 우리 피해가 적어진다. 전주까지 왜군이 오게 놓아두면, 사실상 전라도 전역이 전화(戰火)를 뒤집어쓰게 된다. 중도에 최대한 막아서야 한다.
내가 타임 리프가 가능한 능력자가 아닌 이상 이미 벌어진 일을 뒤집을 수는 없다. 이제껏 벌어진 일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라도 가능한 한 대처하는 수밖에.
아참, 일본군 침공 예측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사퇴한 전 영의정 노수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왔다. 사실 요즘 몸이 많이 안 좋아서 등청도 거의 안 하고 있었는데, 큰일이 터지고 자신이 책임을 진 데 대해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이다. 광해군을 보내 대신 조문을 시켰다.
“아, 잊고 있었다. 경기수영에도 명을 내려 강화도와 교동 방어에 최선을 다하라 이르라!”
젠장, 어쩌면 마카오에서 빌린 포르투갈 갈레온을 탄 일본군 특공대가 벽란도나 한강으로 들어오는 거 아닐지 모르겠다. 이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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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망선이 보고하기를, 일차로 들어온 적선은 총 7백 척이었으며 사흘 전 이차로 도착한 적 선단은 8백여 척이라고 합니다. 일차로 들어온 배 중 군사와 치중을 싣고 온 배 4백여 척은 이미 왜 땅으로 돌아갔고, 이차로 들어온 왜선도 절반가량은 돌아갔습니다.”
“남은 배들은 어떤 배인가?”
“군사를 싣고 온 배들은 사람을 먼저 내린 뒤 바로 돌아갔고, 아직 포구에 있는 왜선들은 치중을 싣고 온 짐배입니다. 일차로 온 선단에서 남은 2백여 척은 모두 전선인 듯, 뱃전에다 방패판을 달고 군사를 태운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정걸은 세심하게 탐망선을 띄워 발포에 들어온 왜적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적은 정걸이 우려했던 바와 달리 좌수영을 직접 공격하려고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저들이 전선 2백 척을 일거에 몰아 쳐들어온다면, 막아낼 수야 있겠지만 이쪽이 입을 피해도 만만치 않을 터였다.
더 큰 문제는 적이 군사를 나누어 한 갈래는 수전을 걸고 다른 한 갈래는 육지에 내려 직접 좌수영으로 진군하면 대책이 없다는 데 있었다. 서쪽에서 낙안군을 뚫고 온 왜군이 순천부를 공격하는 바람에, 지금 여수 일대 육군은 죄다 순천에 가서 혈전을 치르고 있는 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저들도 수전을 꺼리고 있습니다. 우리 탐망선이 지나치게 접근하다 들키면 총과 활을 쏘면서 추격하나, 인근에 있던 우리 전선이 나가 보호하면 곧 물러납니다.”
“왜적들도 우리 수군과 싸워본 적이 있으니 그렇겠지.”
판옥선이 조선 수군 군선이 된 지도 어언 80년이다. 그동안 수많은 왜선이 판옥선에 덤비다 포환과 불화살에 맞고 장작개비가 되었다. 빠른 속도를 살려 도망치면 모를까, 대놓고 싸우려 달려들었다가는 무슨 꼴이 되는지 왜인들이라 해도 충분히 배우고도 남을 시간이다.
“왜 수군을 지휘하는 장수가 손실을 꺼려 움직임을 조심하는 모양이다. 치중을 실은 배와 포구를 지키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도 모르고.”
왜구라면 약탈이 목적이니까 되도록 교전을 회피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저 정도 대군을 몰고 쳐들어 왔으면서도 싸움을 피한다면 그 이상 가는 타당한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치중이 불타기라도 하면 이미 상륙한 육군이 기동에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될 테니까 말이다.
“어쩌면 적장은 자기가 기다리는 동안 순천으로 내려오는 왜군이 좌수영을 점령하면 자기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않고도 우리 전라좌수군을 쫓아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거, 그럴듯하네. 거참 게으른 자로구먼.”
사도첨사가 내놓은 추측을 들은 정걸이 피식 웃었다. 비록 지금 전라좌수군이 위험에 처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 여유는 군사들에게 보여주어도 되리라 생각했다.
“경상우수군은 언제쯤 온다 하였지?”
“예정대로 온다면 오늘 저녁에 도착할 겁니다. 모두 미조항진 전선들입니다.”
경상우수영에서는 판옥선 30척을 보낸다는 연락이 왔다. 약간은 아쉬운 규모지만, 부산포에 왜적이 밀어닥칠 위험성이 아직 있으니만큼 그 이상을 바랄 수는 없었다. 정걸 역시 흥양현을 덮친 왜적은 의병(疑兵)이고, 왜군의 진짜 주력은 부산으로 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경상우수사 이순신이 예하에 있는 각 진포에 미리 영을 내려 유사시에 바로 출정할 수 있도록 해둔 덕분에 원군이 이렇게 빨리 오는 것이다. 적군이 침입한 지 닷새 만에 원군이 오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아무리 미조항진이 가깝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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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군은 낙안을 뚫고 순천을 공격하고 있으며, 후쿠시마 군은 강진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게 뭡니까? 상륙지 주변을 지킨다고는 하지만, 코앞에 있는 전라좌수영조차 건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고니시는 흥양 읍성 안에 임시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 발포진은 그가 본영을 두기에는 너무 작고 혼잡했다. 게다가 조선 수군이 급습한다면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성안에 남은 전투의 흔적을 정리하는 일은 주민들에게 시켰다. 휘하 장수들은 조선인들이 항복 권고를 거부했으니, 민간인이라 죽이지는 않더라도 마땅히 노예로 삼아 분배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고니시는 이 요구를 억누르느라 노부나가의 이름을 팔아야 했다.
“노부나가 공께서는 전쟁이 끝난 이후에 공을 따져 포상하겠다 하셨소. 조선의 땅을 영지로 분배하는 일도, 조선의 백성을 노예로 삼는 일도 모두 조선 국왕이 무릎을 꿇은 뒤의 일이오! 그대들이 지금 노예를 탐한다면 공께서 내리신 명을 어기는 일이니, 어찌 책임지겠소?”
조선인을 노예로 삼지 않으려는 고니시를 이해하는 이는 소 요시토시 하나뿐이었다. 다른 해적 출신 장수들은 기껏 바다를 건너와서 서전에서 승리했는데도 노예도, 전리품도, 무훈을 늘릴 다음 전투도 없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정찰선이 파악하기를, 지금 좌수영에 있는 조선 수군 중에 전투선은 스무 척도 안 된다고 합니다. 2백 척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스무 척을 두려워한대서야 말이 됩니까?”
자연스럽게 장수들은 점령지인 흥양을 지키면서 가까운 주변에서 세울 수 있는 공적을 찾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첫 번째 목표는 자신들이 이곳 흥양에서 쫓아낸 전라좌수군이 되었다.
“2백 척이라고 해도 그중에 60척은 세키부네, 130척은 고바야가 아니오. 그나마 대형이라 할 수 있는 아타케는 10척뿐이고. 조선 수군 전선과 싸우기에는 부족하오.”
흥양에 올 때 타고 온 아타케는 대부분 수송선이었으므로 지금은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남은 것들도 거의 고니시 자신이 마련한 것이고, 해적들은 대부분 소형선만 가지고 있었다.
고니시는 자기가 거느린 수군이 전라좌수영조차 공격할 전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육군이 순천을 거쳐 전라좌수영을 점령함으로써 조선 수군을 축출할 때까지, 이대로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비록 그 육군의 선두에 가토가 서 있기는 했지만.
“고니시 님, 잊으셨습니까? 공을 세워야 영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적을 앞에 두고 싸우기는커녕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으면, 어찌 노부나가 공께서 영지를 내리시겠습니까!”
고니시 본인이 장래의 영지 수여를 빌미로 저들이 포로를 나눠 갖지 못하게 했으니, 영지를 받기 위해 공적을 쌓아야겠다는 말에 반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이들은 모두 고니시 밑에 거느리는 신하도 아니다. 그저 명에 따라 지휘를 받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고니시는 조선 수군과 직접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핑계를 댔다.
“서쪽에는 전라우수영이 있소. 좌수영보다 더 강하지. 우리가 동쪽에 있는 조선 전라좌수영 군선들과 싸우는 사이 그들이 나타나서 발포진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아직 짐을 내리지 못한 수송선과 실려 있는 쌀, 화약은 몽땅 재가 되고 말 텐데, 그 책임은 누가 지겠소?”
귀중한 보급물자의 안위가 거론되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고니시가 내세운 논리에 반박은 하지 못하지만, 그예 불만을 품은 기색은 완연했다. 살벌해진 분위기가 좀 불안했는지, 군감(軍監)으로 따라온 노부나가의 신하 후루타 시게나리가 타협안을 내놓았다.
“내일 해가 뜨자마자 서쪽으로 정찰대를 보내서 하루 거리 내에 조선 수군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없다면 좌수영 군을 공격해도 되지 않겠소? 어떻소?”
“좋소.”
시게나리의 제안대로 타협이 이루어졌다. 적어도 이틀은 벌었다는 생각에 고니시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항해가 순조롭다면 이틀 뒤에는 히데요시가 도착한다, 그럼 이 갈등도 결판이 나리라. 히데요시의 권위라면 저들도 함부로 대들지 못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