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6
1부 046화
– 1 –
3월이면 만물에 싹이 트는 봄이 시작되는 달이다. 하지만 그건 남쪽 먼 곳, 따뜻한 지방 이야기다. 압록강에서 사흘은 걸어야 도착할 거리에 위치한 이 골짜기에는 아직도 눈이 상당히 쌓여 있었다.
골짜기라고 해도 안쪽에 적당한 평지가 있으면 사람이 산다. 산줄기가 좋은 바람막이를 해주는 이 골짜기 안쪽에는 언뜻 보기에도 꽤 큰 부락이 있었다. 나무로 지은 가옥이 40여 채나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농지는 아직도 상당부분이 눈에 덮여 있어서 알아볼 수 없었다.
지금 이 마을에는 적이 나타날 경우를 대비해 망을 보는 이가 없었다. 만사가 불안하던 때라면 아무리 추워도 장정 몇은 분명히 밤새 경계를 섰을 것이다. 하지만 강을 건너 공격해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저들은 말로만 강을 건넜다.
강 건너 조선 땅은 아주 유용한 노동력 공급원이다. 저들의 수령은 우리가 건너가 잡아온 사람을 돌려달라고 아우성을 치지만 우리는 절대 돌려주지 않는다. 강을 건너오기를 두려워하는, 반격할 배짱도 없는 놈들이 하는 위협 같은 걸 왜 신경을 써야 한단 말인가.
이웃한 다른 부락에서는 요즘 소문이 좋지 않다며, 곧 적이 쳐들어올 거라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추장은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벌써 몇 년 째 말로만 위협하는 놈들이 뭘 할 수 있겠냐는 거였다.
어젯저녁에는 술을 마시고 흥이 오른 추장이 부락 주민들을 마을 한가운데 있는 공터에 모았다. 그리고는 그깟 겁쟁이 조선놈들은 열이든 백이든 오는 대로 죄다 때려눕혀 보이겠다며 백 근이나 나가는 창을 휘둘러 보였다. 돌아가는 창대에서 바람소리가 휙휙 났다. 든든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눈이 다 녹고 씨를 뿌릴 철이 온다. 새 봄이 오면 농사를 짓고 짐승을 잡아 모피를 거두자. 산삼도 캐자. 모피와 산삼만 있으면 명나라에서 온 상인에게 뭐든 살 수 있다. 일손이 부족하면 강을 건너가 또 몇 놈 잡아오면 그만이다.
아, 어서 봄이 왔으면. 봄이 오면 또 싹은 트고 아이들은 자라겠지.
– 2 –
“부락에는 전혀 움직임이 없습니다.”
탐후인들을 이끌고 척후로 나섰던 종사관 성희안이 보고했다.
“놈들은 모두 방심하고 자빠져 자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대로 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순변사 박원종은 잠시 고민해 보았다. 정말 야인 부락은 무방비상태일까? 헛수고만 하는 건 아닐까? 망을 보는 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도리어 의심을 부추겼다. 혹시 미리 낌새를 깨닫고 다 도망쳐서 마을이 비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주민이 다 도망가고 없더라도 집은 불태우고 농토에는 소금을 뿌려야 한다. 다만 명색이 첫 습격인데 빈집털이만 하게 된다면 믿고 지휘권을 준 상감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두 번째 이후로는 여진족들이 죄다 도망가고 없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박원종이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지 깨달은 종사관 민효증이 급히 성희안의 보고에 동조했다.
“정탐을 나간 탐후인들이 집안에까지 들어가 보지는 않았으나, 집안에서 말과 소가 우는 소리가 나고 푸르륵거리며 콧김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했다 합니다. 놈들이 도주했다면 절대 우마를 두고 갈 리가 없습니다. 분명 죄다 집안에 처박혀 자고 있을 겁니다.”
“알겠소.”
박원종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머지 보고가 이어졌다. 현재 눈앞에 있는 야인 부락에는 가옥 42채가 있었다. 한 집에 사람이 5명만 있다고 치면 전체 주민의 수는 200명 정도. 지금 박원종이 데리고 있는 군사는 평안도 기병 600에 내금위 100이니, 마을을 짓밟기에 충분한 수다.
다만 염려되는 바는 야인들이 단 하나라도 탈출하는 일이었다. 한 놈이라도 놓친다면 인근 마을 전부에 조선군 출격 사실이 알려진다. 물론 마을을 불태울 때 나는 연기 때문에라도 안 들킬 리는 없겠지만, 생존자의 존재 여부에 따라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확연히 다를 것이다.
“지금부터 마을에서 산자락으로 올라가는 모든 길에 총통영 군사를 5명씩 배치해라. 내가 신호를 하면 일제히 허공에 빈총을 쏘고, 신속히 재장전한 다음 두 번 더 쏘아라. 이후 위치를 지키며, 탈출하는 적도들 중 무기를 가진 자는 사살하고 나머지는 포획하라.”
총통영 부장이 군례를 올리고 길안내를 맡은 탐후인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떴다. 이번에는 박원종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조총대가 일제히 발포하면, 부락에 있는 야인들이 일시에 혼란에 빠질 것이오. 그때를 노려 주력으로 일제히 정면에서 들이치시오. 전하의 지엄하신 분부가 계셨으니 저항하지 않는 자는 되도록 죽이지 않도록 하고, 포로를 무사히 구출하는 일을 가장 우선하도록 하시오.”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헌데 순변사 나리, 조총이란 물건이 포성이 그렇게 큽니까? 보아하니 총통보다 훨씬 작은데 그 소리가 커봐야 얼마나 클까 싶습니다만.”
안주 소속 기병을 이끌고 온 안주목사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안주 군사들은 도착이 하루 늦어진 탓에 박원종이 선보인 조총 발사 시연을 보지 못했다.
“이런 쇠막대기 같은 물건에서 화약이 터진다고 저들이 크게 놀랄까요? 자칫 저들의 주의를 불러일으켜 습격에 대비할 마음만 갖게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예전부터 하던 방식대로 조용히 다가가 기습하는 편이 낫지 않을지요.”
“한 번 두고 보시오. 얼마나 부락을 뒤집어 놓을지. 귀공들도 말이 놀라지 않도록 미리 주의하는게 좋을 게요.”
“우리 전마(戰馬)들이야 총통 쏘는 소리를 제법 자주 들었으니 그 콩만 한 조총 소리 정도에 놀라서 날뛰지는 않을 겝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박원종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조총 백 자루가 한꺼번에 발사되면, 화약의 폭음이라고는 들어보지 못한 여진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나마 조선군 쪽에서는 대비라도 하고 있다. 자다가 그 소리를 들은 여진족들은 정말로 세상이 뒤집히는 줄 알리라.
– 3 –
두 시진 후.
마을에서 산줄기로 올라가는 모든 샛길에 병력이 배치되었다. 이를 알리는 횃불 신호가 저만치 산등성이에서 흔들렸다. 고개를 끄덕인 박원종이 옆에 서서 대기하고 있는 기라졸에게 짧게 전달했다.
“기병들에게 돌격 준비를 명하라!”
“예, 나리!”
군례를 올린 기라졸이 뒤쪽으로 달려갔다. 박원종은 조용히 자신의 총을 들어 적당히 허공을 겨누었다. 신호용으로 쏘는데다 탄환도 없으니만큼 조준할 필요도 없었다. 가볍게 방아쇠를 당기자 화승이 불접시 위에 놓인 점화약에 닿았다.
다음 순간 허공을 향해 불꽃이 튀었다. 곧이어 이 골짜기가 생성된 이래 단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굉음이 사방을 울렸다. 곧이어 사방에서 똑같은 폭음이 연달아 울렸다.
“돌격하라!”
선봉에 선 안주목사가 호령하자 500기에 달하는 전마들이 일제히 눈발을 차올리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눈앞에는 난데없는 굉음에 놀라 허둥대는 여진족 마을이 있었다.
– 4 –
총성을 듣고 집 밖으로 뛰쳐나온 여진족들은 산등성이에서 연달아 번쩍이는 불길과 터져 나오는 굉음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멀쩡한 산에서 갑자기 불꽃과 굉음이 울리다니, 저런 건 본 적도 없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말이나 소 같은 가축들도 갑자기 울린 굉음에 놀라 날뛰었다. 차라리 자다가 습격을 당했어도 이 정도로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이 난리통이라고 해도 모든 감각이 막히는 건 아니다. 수많은 말들이 부락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오는 소리와 그 진동까지 모를 수는 없었다. 이만한 대규모 병력이 몰려올 곳은 빤했다.
위기를 알아챈 사람들 몇이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고함소리가 말울음 소리 사이로 뚜렷하게 울렸다.
“조선군이다! 무기를 잡아라!”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피해라!”
마을 남자들은 부리나케 창과 칼, 활을 들었다. 마을 남자의 수는 백 명 남짓이니 조선군에게 맞서려면 턱도 없다. 하지만 부녀자와 노약자들이라도 산으로 피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아니, 사방의 산에 적이 있다. 피할 곳이 있기는 한 건가.
“개 같은 조선 놈들!”
마을 입구로 뛰어나온 사내 하나가 분노를 토하며 화살을 날렸다. 조선 기병 하나가 사내가 쏜 화살에 낙마했나 싶은 순간 서른 개가 넘는 화살이 사내를 향해 날아들었다.
전신에 화살을 맞고 고슴도치가 된 여진족 사내가 그대로 자기 집 벽에 못 박혔다. 잠시 꿈틀거리던 사내는 비명도 토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궜다. 곧이어 달려든 기병들이 그 옆을 지나쳐 마을 안으로 질주했다.
– 5 –
“저항하는 자는 모조리 죽여라! 여자나 애들은 붙잡아 끌어내라! 소나 말은 끌어와라! 집과 곡식은 모조리 불태워라!”
장수들의 호령에 따라 기병들이 민첩하게 움직였다. 마을 안에 남아서 싸우고 있던 여진족 남자들은 사방에서 내리치는 창과 칼에 연달아 쓰러졌다. 몸을 빼내 도망치던 이들은 뒤에서 쏜 화살에 몸통을 꿰뚫려 나뒹굴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기병들은 반쯤 열린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집 안 축사에 있는 소와 말을 끌어내고, 화덕에 남아있는 불씨를 집안 전체에 흩뜨려 불을 질렀다. 땅속에 움을 파서 만든 곡식 저장고에는 횃불을 쑤셔 박아 불을 놓았다.
산등성이 위에도 조선군이 있어 피할 곳을 찾지 못하고 마을 안에서 우왕좌왕하던 이들, 그리고 그나마도 움직이지 못하고 집안에 웅크리고 있던 이들 등 수많은 여자나 어린애들이 비명을 지르며 끌려나왔다.
“전 조선 사람입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이를 안은 여자 하나가 조선말로 비명을 질렀다. 조선말을 하지만 옷은 야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말을 탄 채 다가간 기병 하나가 한 손에 창을 들고 고함치듯이 물었다.
“애새끼는! 애새끼는 누구 새끼야?”
깜짝 놀란 여자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기병이 말을 몰아 다가서면서 다그쳤다.
“두 번째다! 그 애새끼 애비 누구냐고!”
겁에 질린 여자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마, 마을 추장….”
다음 순간 기병이 창을 들지 않은 손을 뻗어 모피로 감싼 아이를 우악스럽게 나꿔챘다. 깜짝 놀란 여자가 도로 빼앗을 틈도 없이 아이는 울음소리만 남긴 채 그대로 불타는 집 안으로 던져졌다. 여자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내 아기! 내 아기!”
“짐승 놈의 새끼 따위 달고 돌아가서 뭐 하려고? 나한테 감사하게 될 거다!”
기병은 곧바로 말을 몰아 불타는 집들 사이로 사라졌다. 넋이 나간 듯 서 있던 여자가 그대로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첫 번째 부락이라서인지 성과가 좋군.”
해가 뜬 뒤 골짜기 아래로 내려온 박원종은 만족스럽게 부락 안을 둘러보았다. 사방을 메운 잿더미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오르고, 발밑에는 시체가 말발굽에 채였다. 대부분은 싸우다 죽은 야인 남자들이었지만 간간이 말발굽에 밟혀 죽은 여자나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 손실은 얼마나 났소?”
“죽은 이는 없고, 화살에 맞아 부상한 이가 4명 있습니다. 개중에 말을 타지 못할 정도로 중상인 이는 없습니다.”
포위된 적도들이 도망치지 못하고 맞선 탓에 나름 치열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워낙 일방적인 기습이었던데다 전력 차이가 압도적이다 보니 아군에는 손실이 거의 없었다.
“전과는 어떻소?”
“베어서 거두어들인 수급이 87급, 포로로 잡은 사내가 12명, 아녀자가 68명입니다. 구출한 한인(漢人) 포로는 4명, 우리 백성이 남녀 합쳐 11명입니다. 우마는 51필을 노획했습니다.”
수십 년 내 거둔 최대 전과다. 소식이 퍼지지 않도록 빠르게 기동하기도 했지만 저들이 지나칠 정도로 방심한 덕을 크게 보았다. 세상에 마을이 완전히 포위될 때까지 나와 보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니. 이 마을 놈들은 조심성이라는 걸 갖다 버린 모양이다.
“다음 부락에서는 이처럼 쉽지 않을게요. 소문이 널리 퍼지기 전에, 가능한 신속히 움직여서 더 치도록 합시다. 모두 서두르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장수들이 지시를 받고 흩어지는 사이, 기병들은 열심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간밤에 찾아내지 못한 곡식 저장고를 찾아 불태웠다. 몇몇은 소금자루를 실은 말을 끌고 돌아다니며 밭에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포로로 잡은 여진족들이 두 손을 묶여 끌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