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73
2부 25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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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싸움을 포기하고 도주하는 마지막 적선을 향해 철환과 대장군전이 잇달아 날아갔다. 왜선들은 판옥선보다 구조가 약해서, 포탄을 한 발만 제대로 맞아도 심하게 부서졌다. 일단 포에 맞고 속도가 느려진 배는 곧바로 집중사격을 받았다.
“좌군과 우군은 도망가는 왜적 본진을 쫓고, 전군과 중군은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놈들을 모조리 섬멸하라.”
이순신은 장대 위에 우뚝 서서 명령을 내렸다. 전투 막바지에 적이 쏜 탄환 몇 발이 장대로 날아들었음에도 장대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설사 적탄이 날아들더라도 장대에 버티고 서있지 않으면 휘하 장졸들이 자신이 쓰러진 줄 알고 혼란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예, 통상. 헌데 만약 왜적들이 구명을 청하며 투항하거든 어찌할까요?”
아군보다 한참 수가 많은 적과 싸우는 도중이라면 이런 판단을 놓고 고심할 시간도 없다. 싸움에 이겼고, 도망갈 엄두도 못 내는 왜적을 상대로 소탕전을 벌이는 중이니까 할 수 있는 배부른 고민이다.
“승패가 결정된 뒤에 무익한 살상을 할 필요는 없다. 무기를 버리고 구명을 청하는 왜적은 일단 포박하고, 심문하여 적세에 대한 정보를 얻겠다. 그 뒤에 전하께 처분 방법을 여쭙도록 하자.”
이순신은 과거 북변에 있을 때도 투항하는 적은 굳이 죽이지 않았다. 계속 반항하는 적은 마땅히 쳐 죽여야겠지만, 싸울 의사가 없는 자들까지 모조리 죽이려고 날뛰는 건 부덕하면서 또한 무익한 행동이었다. 그리하면 생포할 수 있는 자들도 죽기로 싸울 것이 아닌가 말이다.
“잡은 포로는 우리 배로 옮기지 말고, 빼앗은 적선에 모아서 직접 노를 젓게 하라. 등선군 군사들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겠다. 비록 적장의 목은 베지 못하였으나, 이번 싸움에 등선군이 실로 큰 역할을 하였다.”
적 본진과 벌인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는 데는 등선군이 한 몫을 크게 했다. 백 척에 달하는 적 본진 중, 적어도 십여 척은 등선군이 뛰어들어 단병접전으로 빼앗았다. 선두에서 뛰어들어 적과 싸우는 임꺽정의 용맹은 상선에서도 보일 정도였다.
등선군에 속한 도왜(渡倭) –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건너온’ 왜인이라는 의미 – 들은 처음에 자신들에게 익숙한 일본식 갑주와 무장을 사용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도왜들이 왜병과 같은 차림을 했다가는 심각한 혼란이 벌어질 수 있으리라는 우려가 당연히 제기되었다.
그래서 이순신은 이들에게 무장은 일본식으로 하더라도 복장은 조선식으로 전립과 흉갑을 사용하도록 했다. 덕분에 오늘 싸움에서도 피아가 확실히 구분되고, 궁수나 포수들이 아군을 향해 시석(矢石)을 날리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왜장의 목을 베지 못한 건 아쉬운 일이었다. 대선에 올라 후미에서 싸움을 지휘하던 왜장은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졌음을 깨닫자 뱃머리를 돌려 도주했다. 아직 잡히지 않고 남아 있던 왜선들이 그 뒤를 따랐지만, 그 수는 애초 규모에서 셋 중 하나도 되지 않았다.
절반 가까이는 이미 총통과 불화살에 맞아 불타고 있었고, 나머지는 불타는 자기편 배들과 판옥선들에 앞길이 막혀 움직이지 못했다. 파손된 부분이 너무 많거나, 노꾼들이 죽고 다쳐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배들도 있었다.
그렇게 도망친 왜선 중에도 여러 척이 포에 맞고 멈춰 섰다. 대선 한 척이 또 좌군이 쏘는 총통에 맞아 멈추는 장면을 보면서 송희립이 이순신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지금까지 전군, 중군에서 분멸한 적선만 백여 척이 넘습니다. 실로 대승입니다.”
“살려 보낸 적이 더 많으니 기뻐할 일이 아닐세.”
이순신이 인상을 찌푸렸다. 후진에 있던 왜선 2백여 척에 손도 대지 못하고 보낸 것이 못내 아까웠다. 천리경으로 보니 죄다 뱃전이 물에 깊숙이 잠겨 있었는데, 이는 그 배들이 치중과 병사를 잔뜩 실은 수송선이라는 뜻이었다.
“왜적들이 우리 땅에 내리기 전에 바다에서 모두 진멸해야 했는데 놓치지 않았는가. 한없이 안타까운 일일세.”
“그래도 적이 부산 쪽으로 가서 다행 아닙니까? 저들이 거제도에 내렸다면 거제도에 있는 여섯 진포와 통영에 있는 통제영까지 모두 위험에 빠질 뻔했습니다.”
“아니. 차라리 저들이 거제도에 내리려고 했더라면 좋았을 거네.”
이순신이 씁쓸한 표정으로 멀어져가는 적 후진을 바라보았다. 본진과 달리 일찌감치 도망친 후진은 따라잡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가 있었다. 게다가 너무 격렬히 싸워 화약을 거의 썼다.
“저들이 거제도에 배를 댔다면, 사람은 내렸을지 몰라도 배에 실은 치중은 하나도 내리지 못했을 걸세. 옮기기 전에 우리가 모두 불태워버렸을 테니까. 왜병들이 아무리 싸움에 능하다 해도, 군량과 병기가 없이 어찌 싸움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
굶주린 왜적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전선을 띄워서 해안을 봉쇄하고, 등선군과 속오군으로 소탕전을 벌이면 몽땅 섬멸할 수 있었다. 다만 왜병 수천이 들어오면 거제도 백성들이 피해를 볼 수는 있다. 그래도 백성들 대부분은 이미 산중으로 피했으니 큰 피해는 없을 터였다.
“양식이 떨어진 왜병들이 풀이나 뜯어 먹으며 버티도록 만들 수 있었는데 아쉬울 뿐일세. 가덕도 쪽으로 도망친 왜장이라도 그렇게 만들었으면 좋겠네만.”
왜장이 먼저 도망친 한패를 따라가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의도는 알만했다. 모두 한 방향으로 물러나다가 잡히면 기껏 도망시킨 수송선들이 모두 격침당할 터이니,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간 것이다. 어미 종다리가 둥지와 떨어진 방향으로 사냥꾼을 유인하듯이 말이다.
“놈은 자신을 미끼로 해서 수송선들을 피하게 했지요. 자신이 바란 대로 되었으니 아마도 만족할 겁니다, 통상.”
“우리가 만족해야지 왜장이 만족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이순신도 수송선단을 치고 싶었지만, 그쪽은 너무 일찍 도망쳤다. 알라르콘이 가끔 말했듯, ‘멀리 있는 사슴을 잡고자 가까이 있는 토끼를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화약을 너무 소모하여 바로 싸움을 재개할 수는 없으니 일단 영등포로 돌아간다. 후군과 전군은 여기 머물러 전장을 수습한 뒤 귀환토록 하고, 중군은 좌군과 우군을 따라가서 도망친 왜장이 어찌 되었는지 확인한 후 귀항한다. 어차피 가덕도는 영등포 바로 옆이니.”
“예, 통상.”
장대 위에 선 이순신은 송희립이 예하 전선에 명령을 전하는 소리를 들으며 독백했다.
“다음에는 놈들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포구나 좁은 바다로 몰아넣은 뒤에 싸워야겠구나.”
시선을 내리니 남만갑 가슴과 팔 부분에 생긴 탄흔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적 대장선이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퍼부어댄 조총탄의 흔적이었다. 실로 이 강철 갑옷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 탄환에 죽었으리라. 심지어 전하께서는 그 안에 입을 비단 내갑의까지 내리시지 않았는가.
“실로 고마우신 전하의 은혜 덕분에 비루한 목숨을 건졌구나. 앞으로 더 많은 적도를 베어 전하께서 베푸신 은혜를 갚아야 하리라.”
왜군으로부터 도망친 김모라는 하성군의 서기가 실토하기를, 왜적은 군사 수십만과 배 수천 척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것들을 다 부수자면 앞으로 한두 번 싸워서는 끝나지 않으리라.
– 17 –
“지금 항복하면 성내에 있는 모든 장수와 병사, 주민들을 살려주겠다. 하지만 일단 전투가 시작된 뒤에는 누구도 살아날 수 없다, 항복하라! 절영도 포대가 무너지는 광경도 이미 보지 않았느냐?”
“꺼져라, 이 무도한 놈들! 당장 너희 땅으로 물러가지 않으면 후회하도록 만들어주겠도다!”
조선군이 보낸 회답은 단호했다. 항복을 권고하러 갔던 이키 출신 무사는 계속 설득해봐야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말을 달려 본진으로 돌아왔다.
“조선군은 항복을 거부했습니다. 성을 무너뜨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노부나가는 부대마다 조선말을 구사하는 이키 무사들을 통역으로 몇 명씩 배속시켰다. 협상 역시 일차적으로는 이들의 몫이었다.
“좋아. 공격을 시작해라.”
해변에 친 장막 안에 좌정한 노부나가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미 부산진 포위를 종료한 2만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레에 실어 가져온 남만포가 성벽을 향해 불을 뿜었다. 노부나가 휘하 정예군이 조선 본토에서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노부나가 역시 오는 길에 조선이 바다 위에 피워올린 봉화를 보았다. 부산진에 있는 조선군 또한 그 봉화를 보고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절영도 최남단에 위치한 포대에는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고, 그 밑에는 발포 준비를 마친 화포들이 늘어서 있었다.
“주군, 본래는 섬 중간에 병력을 내려 뒤에서 포대를 공격할 계획이었습니다만….”
“적이 모든 해변에 벽을 쌓고 보루를 만들었단 말이지.”
노부나가가 탄 어립선은 쌀 2천 석을 실을 수 있는 거대한 아다케부네였다. 크기만 거대한 게 아니라 무장도 강력해서, 남만포만 20문에다 오오쓰쓰(대조총)도 60여 문이나 싣고 있으니 일본 내에서는 이에 버금가는 배가 없었다. 다만 철갑은 씌우지 않았다.
“텟코센을 보내 포대를 제압하라! 그리고 고바야로 정면에서 병력을 양륙한다.”
노부나가 주변을 에워싼 중신 중에는 정면공격을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장 공격하지 않고 포대를 우회해도 부산진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단호하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저 포대를 그대로 두고 부산진으로 들어간다면 부산진을 함락한 이후에도 계속 방해가 될 게 분명하다. 일본을 왕래하는 배들이 안전하게 드나들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또, 조선 국왕이 무릎을 꿇게 만들기 위해서도 저 포대는 함락시켜야 한다. 공략을 개시하라!”
열두 척에 달하는 텟코센들이 천천히 앞으로 나갔다. 니혼마루들은 여기 끼지 않고 함대 양 측면을 지키면서 혹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조선 수군을 경계했다.
본래는 니혼마루도 포대 공략에 한몫해야 했지만, 봉화를 본 노부나가가 임무를 바꾸었다. 조선 수군이 봉화를 보고 출격하여 포대 공략에만 집중하던 일본 함대를 측면에서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먼저 포를 쏜 것은 조선군이었다. 절영도 포대에서 가장 큰 포가 굉음을 울리면서 연기를 토했고, 날아온 포탄은 텟코센 옆에 떨어져서 물기둥을 만들었다. 다음 순간 일본 함대에서도 각종 화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남만포와 오오쓰쓰가 연달아 탄환을 날렸다.
포격전에서는 조선군이 유리했다. 텟코센에서 쏘는 오오쓰쓰는 탄환이 포대까지 날아가지도 못했고, 남만포는 닿기는 하는데 성벽을 부수지 못했다. 아래쪽에서 높은 곳에 자리한 성벽을 쏘는 탓도 있었다.
그에 반해 조선군이 가하는 포격은 확실하게 타격을 주었다. 작은 화포도 윗갑판에서 총을 쏘는 병사들 정도는 충분히 죽일 수 있었고, 특히 2문의 거포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 맞기만 하면 철판을 바른 텟코센 현측 벽도 간단히 뚫고 안에 있는 병사와 수부들을 죽였다.
상당한 손해를 입었으나 공격은 계속됐다. 조선군이 지친 기색을 보이는 순간 고바야 60척, 세키부네 20척이 일제히 앞으로 나가 돌격했다. 그리고 포대의 사정권을 가로질러 절벽 옆에 있는 작은 모래사장에다 병력을 내려놓았다. 일부는 아예 포대 밑 절벽에 달라붙었다.
당황한 조선군이 포를 돌렸지만, 절벽 밑으로 파고든 작은 배를 노리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바로 이 시점에 텟코센들이 포대 가까이 배를 바짝 붙이면서 공격을 더 가열차게 퍼부었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오오쓰쓰도 충분한 유효사거리에 들어갔다.
물론 조선군도 다른 수단을 더해 반격했다. 비격진천뢰라고 하는 쇳덩이 폭탄이 날아왔고, 몇 발인가가 탯코센 위에서 터졌다. 상당한 피해는 났으나, 도도 다카도라가 심혈을 기울여서 튼튼하게 만든 배 자체는 갑판 위에서 터진 폭탄 두어 발 정도로는 까딱도 하지 않았다.
포격전이 벌어지는 사이에 모래사장에 내린 병력은 순식간에 담장을 넘어 포대로 쇄도했다. 조선군도 해안가 방벽에 수비대를 배치하긴 했지만, 수도 적고 장비도 빈약했다. 결정적으로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는 일본군에 맞서서 제대로 싸울만한 배짱을 가진 병사가 부족했다.
그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조선군은 도망치지는 않았다. 어차피 섬이라 도망칠 곳도 없지만, 밀려드는 일본군에 맞서서 최대한 저항했다. 포대 후방을 엄호하던 군사들이 계속 밀린 끝에 끝내 포대까지 밀리게 되자, 포대를 지키던 조선 장수는 서슴없이 남은 화약에 불을 질렀다.
십여 차례에 걸쳐 이어진 폭발은 그 불꽃과 굉음을 접한 6군 전원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도록 만들었다. 이미 흥양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받은 노부나가는 조선군이 또 자폭했음을 알고 혀를 찼다. 그리고 포대를 수색하여 포로와 노획품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제 부산포는 일본군이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항구가 되었다. 포대가 함락되었으니까.
“부산진도 순순히 무너져 준다면 말이지만.”
부산진성은 별로 큰 성은 아니었다. 2만 군사가 둘러서기만 해도 서너 겹은 포위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에다 노부나가군이 보유한 남만포도 공격에 동원하고 있으니, 몇 명 되지도 않을 조선군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제가 나서서 한 번 더 항복하라고 권해 보겠습니다. 절영도 포대 공략에 들인 시간도 정말 막대했는데, 여기서 시간을 더 끌면 되겠습니까?”
임해군이 으스대면서 나섰다. 조선 왕족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임해군 역시 원균처럼 일본 갑옷이 아닌 조선 갑옷을 입고 돌아다녔다. 노부나가 주변 신하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바라볼 뿐이었다. 아닌 말로, 임해군은 딱히 호감을 산 인물도 아니었으니까.
“아니, 됐다. 저들은 이미 내가 한번 보낸 항복 권고를 거절했다. 누구에게도 기회를 두 번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못 박아 둘 필요가 있다.”
“아…알겠습니다.”
피해 없이 항복하려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해야 한다는 건 상식이 아닌가. 싸움을 시작한 뒤에 항복하려면 최소한 수비대장이 할복하는 정도 성의는 보여야 하고 말이다.
노부나가는 이번 부산진성 공략전을 앞으로 조선인들이 순순히 항복하게 하는 본보기로 할 작정이었다. 무모한 저항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면 조선인들도 고분고분해질 테니까.
– 18 –
눈앞을 지나가는 왜선 무리는 끝이 없었다. 백 척, 2백 척, 3백 척…크고 작은 배들이 계속 눈앞을 지나갔다. 도저히 덤벼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수, 수사또 나리, 그, 그래도 싸, 싸워야 하, 하지 않겠, 않겠습니까?”
얼굴이 백지장같이 하얘진 군관이 부들부들 떨면서 진언했다. 경상좌수사 박홍식은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으나 그 역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그, 그렇네만, 자, 자, 잠시만 더 이대로 있, 있도록 하세.”
경상좌수영 전선은 겨우 23척이다. 이 전력으로 눈앞 바다를 메운 저 왜적 대선단에 뛰어들 생각은 도무지 들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 싶었다.
경상좌수영도 먼바다에 띄워둔 당선에서 오르는 불길을 보았다. 적이 조선 수군 중에 가장 강한 전력인 경상우수영과 맞닥뜨리기 두려워 좌수영 구역으로 온다고 생각하고 맞아 싸우러 나왔다. 임시 집결지인 두모포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든 전선이 출항했다.
헌데 얼마 내려오지도 않아서 남쪽에서 미친 듯이 달려오는 사후선 한 척을 만났다. 좌수영 본영에 연락용으로 두고 왔던 배였는데, 이 배가 깜짝 놀랄 소식을 전했다.
“왜적이 천 척이 넘는 배를 동원했습니다! 도저히 싸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판옥선이 왜선보다 강건하다지만, 천 척을 상대로 겨우 23척으로 싸움에 나서기는 무리였다. 겁을 먹은 박홍식은 전선을 모두 후퇴시켜 경상좌수영 본영 앞바다에 있는 어선들 사이에 숨기고, 배에 걸린 모든 기를 내리게 했다.
일단 일반 사선인 척은 했지만, 불안감은 여전했다. 혹시 위장에도 불구하고 적이 공격해 오면 일전을 결하고, 아니라면 그때 생각할 참이었다. 그래도 도망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를 악물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 뒤 나타난 적은 경상좌수영 본영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해안선을 따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북상했다. 지금 경상좌수군 장졸들은 눈앞을 지나는 왜선들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 할 말을 잃은 참이었다.
“그, 그래도 우리는 수군입니다. 적이 왔으면 마땅히 싸워야 하지 아, 않겠습니까.”
용감한지 실성했는지 알 수 없는 군관 두엇이 적을 치자고 했다. 좌수사 박홍식도 명색이 장수 된 몸이다 보니 차마 대놓고 못 싸우겠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마…맞는 말이네. 마땅히 싸워야지. 다, 다만 지금 나섰다가는 적에게 그대로 포위당할까 저어되니, 왜, 왜적이 다 지나가거든 그, 그 후, 후미를 치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적이 정말 경상좌수군을 보지 못한 것인지 봤으면서도 그냥 지나친 것인지는 모른다. 허나 기왕 적을 기습한다면 제일 후미를 치는 게 적을 가장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경상좌수군에게는 적의 후미를 칠 기회가 왔다.
문제는 하나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적 후미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