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86
2부 264화
– 1 –
“전하, 시중에서 저화 가격이 폭락하고 있사옵니다. 도성에 거주하는 관인들과 군사들에게 지급하는 녹봉을 당분간만이라도 다시 쌀로 환원하여 주시옵소서.”
사간원에서 올라온 주청이 또 내 뒷덜미를 잡았다. 내정과 관련한 사안은 웬만하면 세자가 알아서 하도록 전권을 주었건만, 이건 세자 선에서 처리될 일이 아니라 나한테까지 올라왔다.
“얼마나 떨어졌기에 그러느냐?”
“1말 짜리 저화가 저자에서 쌀 넉 되밖에 받지 못할 만큼 값이 낮아졌습니다. 직급이 낮아 녹봉이 적은 관원들은 당장 생계가 곤란해질 지경입니다.”
전쟁이 발발하면 원래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인플레이션이 일어난다. 그런데 저화는 쌀본위 화폐다. 게다가 하필이면 지금은 원래 곡식이 귀해 저화 값이 낮아지는 5월이고, 여기에 더해 전라도 전역에 경상도까지 전쟁터가 되어버렸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게 문제였다.
“전라도에 적이 침입한 직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으나, 경상도까지 전장이 되면서 삼남 일대 올해 농사는 망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저화를 쌀로 바꿀 수 없게 되리라고 두려워한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저화를 헐값에 내놓고 곡식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군량 확보 때문에 호조 관고에서 저화 태환을 중단한 탓도 있겠지.”
군량미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행여 싸우다 식량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악몽이 닥친다. 그 위험성을 생각하면 아무리 저화 유통이 중요해도 관곡을 저화 태환에 소모할 수는 없었다. 폭락한 저화 가치야 나중에 끌어올려도 되지만, 전쟁은 지금 당장 치러야 하니까.
“어쩔 수 없구나. 군량미 확보가 최우선이기는 하나, 정3품이 안 되는 당하관에게는 녹봉 중 절반은 쌀로 주도록 하라. 군량미가 필요하니 모든 녹봉을 쌀로 지급할 수는 없다.”
“살림에 어려움을 겪기는 당상관도 마찬가지이옵니다.”
“나라에 환란이 닥쳤는데 어찌 고관대작이라는 자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살 생각을 하는가? 이미 궁중에서도 비용을 절약하여 내 찬을 줄이고, 긴급하지 않은 용처는 모두 지출을 멈추게 하였다. 임금인 내가 평소처럼 살지 않는데 어찌 그대들이 평소처럼 지내려 하는가?”
대동법 전면실시 이래, 왕실 및 각 관청에서 소비하는 모든 물건은 시장에서 사다가 쓴다. 공납으로 공짜로 걷어다 쓰던 물품을 사서 쓰려니 기존에 없던 문제점도 많지만, 시장거래를 활성화하고자 감수했다. 골치 아픈 건 생각보다 커진 전쟁으로 이 시스템이 멈추는 거다.
아직 현대적인 경제체제가 자리 잡지 않은 조선에서, 왕실과 조정은 최대의 소비자다. 시장 제일의 큰손이 소비를 중단하고 시장에서 이탈하면 생산 및 유통에 종사하던 관계자 상당수가 졸지에 날벼락을 맞는다.
기존 공납체계에서는 이런 문제가 생기더라도 대납할 물건을 비싸게 구해놓은 방납업자들이 피해를 봤지 일반 백성들은 별 손해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조선에서는 왕실에 물건을 대던 일반 상공업자들이 직격탄을 맞는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이는 바로 불경기로 이어진다.
하지만 별다른 도리가 없다. 당장 전쟁이 터졌는데 평소처럼 먹고 입고 쓰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되도록 빨리 전쟁을 끝낼 테니 그때까지만 다들 참고 견디라고 하는 수밖에.
그러고 보니 한참 전 경성군으로 각성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본이 쳐들어오면 그 전쟁을 사회개혁의 계기로 삼으면 되겠지 하고 속 편하게 생각하던 때가 떠올랐다. 전비 핑계로 해서 종친들 재산이랑 공신전 따위를 싹 몰수하겠다고 계획했었지.
막상 닥치고 보니 그런 거 몰수하지 않아도 전쟁은 치러낼 만하다. 거둬들인 세금에 명나라 조정에서 받아낼 보조금, 장사해서 버는 돈만 털어도 된다. 굳이 원성을 들어가면서 신하들이 가진 재산을 뺏으려들 필요도 없다, 그 말이다.
그보다는 가볍게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속 편하게 여겼던 왜란이 경상, 전라 두 도를 휩쓰는 불바다가 되어 버린 데서 오는 충격이 더 크다. 젠장, 내 자만심과 판단 착오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된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야? 죽고 다칠 사람과 불타버릴 집은 얼마나 되고?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가능하면 올해 안에 전쟁을 끝낼 작정이다. 일본군이 실제 임진왜란에서처럼 조선 동장군 맛을 보지 않는다는 소리다. 무척 아쉽기는 하지만, 그 맛을 보여주려고 일찍 끝낼 수 있을 전쟁을 일부러 질질 끌 건 없잖은가.
“식량이 부족한 문제는 추후 대국에서 양곡과 은자를 들여다가 해결할 것이니, 다들 잠시만 참도록 하라. 그건 그렇고, 권율과 유극량은 어디까지 내려왔는가? 언제 도착하겠는가?”
“양쪽 다 이달 말에는 도성에 도착할 것이옵니다.”
유극량은 건주위를 거쳐 평안도 쪽 길로, 권율은 원래 도감군이 철수할 예정이었던 함경도 방면 길로 내려오고 있다. 처음에는 도감군만 급하게 소환했었는데, 당연히 북방이 비었을 때 누르하치가 무슨 짓을 할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극량이 뜻밖에 장계를 보내서 보고하기를, 누르하치가 길을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행군에 동행하면서 도중에 필요한 양식과 마초를 공급하고 숙박의 편의까지 제공해 주었다고 했다. 아니, 이놈이 내 뒤통수를 친다고 해도 이렇게 정성을 들일 이유는 없지 않을까?
색안경을 끼고 보자면야 얼른 도감군을 남쪽으로 보내버린 다음에 마음껏 분탕질을 치려는 계획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너무 적극적으로 돕는다. 아닌 말로, 길을 열어주는 정도는 몰라도 자기 주머니를 털어 군량을 대고, 파병 제안까지 하는 건 좀 오버 아닌가?
게다가 누르하치 놈이 우리가 일본과 싸우는 사이에 북방에서 신나게 활개를 치려는 의도를 품었다면, 도감군이 빨리 움직이게 도우면 안 된다. 도감군이 늦게 도착하고 그만큼 일본군이 한양 가까이, 되도록 코앞까지 밀고 올라오게 만들어야 유리하다.
왜냐고? 그래야 일본군을 몰아내느라 우리가 더 고생하고, 수렁에 빠져서 여력을 허비한다. 그리고 누르하치가 무슨 짓을 벌이든지 터치를 못 할 게 아닌가. 그 정도 수도 계산하지 못할 누르하치가 아니다.
나만 이렇게 생각한 것도 아니다. 비변사에서도 누르하치가 우리한테 성의껏 협력하려는 게 틀림없다고 보는 관측이 대세였다. 심지어 병조판서 겸 금위사장 이항복조차 건주위 내부에서 수상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다고 보고했다.
아아…금위사를 언급하려니 대일 첩보전에서 완전히 실패했다는 걸 알았을 때 느낀 충격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제까지 금위사에서는 국내나 여진 쪽 첩보는 빠삭해도 일본 쪽은 다룬 적이 없었다. 덕분에 아주 호되게 똥을 밟았다. 이항복이 자기를 해임해 달라고 청할 만큼.
하지만 나도 적 진군로를 오판했고, 이항복은 대일 첩보전 말고도 하는 일이 많았으니 따로 문책하지 않았다. 대신 경상도 쪽 금위사 실무자들만 해임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후 해외에 첩보원을 파견할 때는 꼭 현지 사정을 확실하게 아는 이에게 조언을 구하리라.
어쨌든 누르하치가 우리한테 호의적으로 나오는 건 분명하니, 북방군도 4만 명 정도 소환해 전장에 투입해도 될 듯해서 권율에게 병력을 끌고 올라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평안도 병력은 그대로 두고, 함경도와 부여주 병력 중심으로 편성해서 말이다.
권율이 데려오는 병력은 함경도 기병 1만에 보병 1만, 부여주 기병 2만이다. 도감군은 보병 중심 편제고 삼남에도 기병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 숙련된 북방군 기병이 필요하다.
그러면 전라도, 경상도 지방군과 속오군을 제외하고도 결전병력으로 최정예 13만을 확보할 수 있다. 오위군 5만 3천에 북방군 4만, 도감군 3만이다. 도감군 1만은 전주성에 가 있으니, 아쉽게도 노부나가와의 결전에는 투입하지 못하겠고 말이다. 아, 승군도 5천 명 정도 넣고.
아니, 생각해 보니 이것보다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 먼저 처맞은 이상 당연히 보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혹시 전쟁을 피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 잘못된 일본 정보 덕분에 ? 대규모 전력 증강을 망설였다만, 이제는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다.
“훈련도감에서는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일원에 방을 붙여 병정을 초모하라. 추후 싸움에서 군사가 더 필요해질 수 있으니, 미리 충분히 뽑아 조련해두었다가 도감군이 손실을 보면 바로 충원해야겠다.”
이참에 도감군을 아예 규모부터 확 키우자. 적어도 당장에 2만 명은 더 뽑아야겠다. 지급할 조총은 일단 강선 없는 일반 조총으로 할 생각이다. 성능이야 강선총이 좀 더 낫지만, 제작비 문제가 큰 데다가 생산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는 단점도 있다.
어떻게든 준비는 한다만, 이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왜적이 쳐들어오는 과정에서 다행히 비변사에서 상정했던 최악의 경우가 터지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노부나가는 부산진으로만 밀고 올라왔지, 한 번에 여러 군데에 상륙하지는 않았다.
적이 여러 곳에 동시에 상륙하면 신립이건 누구건 한 번에 쳐부술 수 없다. 딱 한 군데로만 상륙해도 장소를 잘못 찍으면 쪽박이다. 가장 빨리 출동할 수 있는 전략예비대, 경상좌병영을 원 주둔지인 울산에 놓아둔 이유가 적이 어디에 상륙해도 대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더불어 안심이 되는 건, 경상도 일원에 산성은 잔뜩 지어뒀다는 거다. 해안포대는 절영도에 만든 거 말고는 각 수군 진포를 방어하기 위한 용도로 약간밖에 안 만들었다. 경상도 해안선 전체를 포대와 토치카로 도배할 능력은 어차피 없으니까. 대한민국에서도 그렇게는 못 할걸?
우리가 설정한 방어의 중핵은 산성이다. 적이 쳐들어오면 백성들을 요소요소에 있는 산성에 피난시키고 버티는 사이 구원군이 내려간다. 강원도로 갔다는 미친놈들은 둘째 치고, 적군이 지금 부산진에 상륙했으니 그에 맞춰 우리 전략예비인 오위군과 경상좌병영군이 움직일 거다.
“도체찰사는 평양군을 따라잡았다 했지?”
젠장할 신립. 끝내 신립이 최고 지휘권을 쥐고 일본군에 맞서러 가고 말았구나. 이렇게 안 하고 싶었는데. 신립은 그냥 적당한 자리에 처박아 두고, 좀 더 성품이 차분한 장수를 골라서 키우려고 했는데.
쉴 틈도 없이 북방에서 자꾸 전란이 터져 댔으니 북방 전문가인 신립을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승전을 거두면 또 벼슬을 높여주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공을 모두 까고 벼슬을 깎을 만큼 잘못한 건 또 없다 보니 내쫓을 수도 없어서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예, 전하. 그저께 밤에 대구에 도착하여 평양군을 만났고, 오위군이 같은 날 낮에 대구에 도착하여 쉬고 있음을 확인했다 하였습니다.”
말도 잘 못 타면서 불과 사흘 만에 대구까지 내려간 유성룡한테 애도를 표한다. 그래도 그 덕분에 신립 따라잡고, 적절히 통제도 할 수 있게 됐다. 신립도 상주에서 대구까지 사흘이나 걸린 걸 보면, 아무리 신속한 기동이 특기라고 해도 보병 대군을 끌고는 안 되는 모양이다.
“도체찰사가 대구에 도착하였으니 이제 주상께서도 염려 놓으소서. 평양군이 용병하면서 그 성급함을 드러내지 않도록 도체찰사가 적절히 타이를 것이옵니다.”
김명원이 차분한 태도로 날 안심시켰다. 그래, 유성룡은 명색이 영의정이니 신립도 대놓고 유성룡이 내리는 지시를 거부하지는 못하겠지. 더구나 내가 어갑(御甲)까지 내렸는데. 장식을 넣다가 말아서 용 문양 같은 건 안 새겼지만…아, 이거 하나는 꼭 다시 강조해야겠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대구로 파발을 띄워서 도체찰사 유성룡과 평원군, 도순찰사를 겸하는 경상도 관찰사 김성일에게 한 번 더 이르도록 하라. 혹 역적 이진을 붙잡거든, 절대 현장에서 베지 말고 도성으로 압송하라고 말이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처벌을 내릴 테다!”
임해군 본명이 이진이다. 노복들만 적과 내통했다고 했을 때는 처벌을 미룰 명분이 있었다. 나도 설마 임해군이 그럴 정도로 미쳐 있을지 의심했고, 노부나가가 임해군을 인질로 잡고 그 이름만 팔아먹었을 가능성도 있기는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하성군의 서기가 탈출해서 그놈이 벌인 행각을 제보한 이상, 넘어갈 여지가 없었다. 차마 왕실에서 왜적과 내통한 반역자가 나왔다는 사실을 공표할 수 없어서 며칠 망설이기는 했지만, 결국 임해군이 가지고 있던 모든 지위와 재산을 박탈했다. 군호도 마찬가지다.
아직 전파가 안 된 지역도 있을 텐데, 빨리 퍼뜨려서 조선 팔도 삼주가 놈을 임해군이 아닌 역적 이진으로 부르게 해야겠다. 그리고 잡기만 하면 한강 모래밭에서 말 그대로 뼈와 살을 분리해서 죽일 거다! 필요하다면 명나라에서 진짜 능지형 집행 전문가를 초빙해올 작정이다.
“전하, 부디 고정하소서. 어찌 대역죄인의 더러운 이름과 마땅히 받을 벌을 귀하신 입으로 거론하시어 스스로 해를 입으시나이까. 신들이 마땅한 처결 방안을 올리겠나이다.”
“알겠다. 호조판서의 말이 맞는다. 내, 좀 자중하겠노라.”
그래, 윤두수 말마따나 너무 흥분하지 말자. 내 나이가 벌써 쉰이 다 되어가는데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흥분할 때마다 폴짝폴짝 뛸 거냐. 좀 더 진중해져야지.
나도 참 원래부터 이렇게 촐싹거리는 성질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쓸데없는 잔소리를 일삼는 간관들 다 때려잡은 연산군 중반기 이후, 감정표출을 일부러 억누를 필요가 없어진 뒤로 좀 심해진 듯하다. 오죽 감정 기복이 심했으면, 막판의 잠시긴 해도 정호찬까지 의심했었을까.
그때 내 최대의 스트레스 요인이었던 미륵당도 지금은 없다. 본래 미륵신앙 따위는 세상이 망조가 들었다 싶을 때 인기를 끄는 건데, 황이랑 환이가 제법 안정되게 통치를 해온 덕이다. 경성군도 딱히 백성들 상대로 폭정을 펼치지는 않았으니까 미륵신앙은 자연히 쪼그라들었다.
미륵당이 자취를 감췄다고 알고 나니, 어딘가 날 노리는 암살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도 거의 가셨다. 다만 아무래도 좀 망설여져서 암행은 여전히 잘 안 나가지만.
정말이지, 둘이서만 있을 때 상희가 가끔 ‘나이 헛먹은 거 같다’고 핀잔을 줘도 반박할 수가 없다. 내가 차분하게 생각해 봐도 철없는 말이나 행동을 자주 하는 건 사실이니 말이다. 몸이 젊어진 탓에 그렇다는 핑계도 한두 번이지.
눈치를 보고 모셔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도 내 행동이 가벼워지는데 한몫했지 싶다. 왕실에 대왕대비든 왕대비든 어른들이 있었으면 좀 고쳐지지 않았을까.
이번 전쟁만 끝나면 나도 좀 여유를 가지고 살자.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고. 그래야 20년 전에 살인사건 접하고 결심했던 것처럼 명군이 되지.
첫 번째 왕생은 확실히 명군이 되기에는 실패였으니까, 이번에는 명군이 좀 되어보자. 이번 전쟁만 임진왜란 꼴 안 나게 처리하면, 그 뒤로는 정말 여유를 가지고 만사를 좀 해나갈 수 있겠지. 이번에는 종성순 같이 원한 품은 놈 안 나오게, 되도록 조심하며 살고 있기도 하고.
– 2 –
“다른 아이들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지?”
“여전히 의금부에서 내준 집 한 채에 모두 모여 살고 있습니다. 대문 밖으로 출입할 수는 없지만, 집안에서는 별다른 제약이 없습니다.”
무릎을 꿇은 유키가 조용히 보고했다. 따로 떨어진 동료 시녀 19명의 안위를 살피러 밤을 틈타 도성에 다녀온 참이었다. 주변을 부왕사 승려들이 둘러싸고 있고, 다시 그 바깥은 조선 군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으나 유키 한 사람이 나갔다 오는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다행이군. 외숙께서 쳐들어오셨다 해서 내 시녀들을 해치지는 않았으니. 국왕께서는 역시 통이 커.”
차차가 뒤로 기댄 몸을 쭉 뻗었다. 어차피 갇힌 몸, 이 암자 주변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 눈치를 볼 사람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정처라는 자리에 너무 욕심을 냈어. 차라리 국왕의 후궁으로라도 먼저 들어간 뒤에 그다음 위치를 노려도 되었을 텐데.”
국왕은 중전 외에 후궁 여섯 명을 거느리고 있다. 일단 그중 하나가 되면, 그 뒤에는 어떤 수단이든 써서 가장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런 우회로를 택해도 됐을 것을, 정실부인이라는 허울에 욕심을 내다가 공연히 임해군 같은 껍데기만 멀쩡한 놈을 잘못 골라잡았다.
“그때는 내가 아직 너무 어렸던 탓에 사리를 판단할 줄 몰랐다. 어떠냐, 유키. 네 생각에도 후궁으로 들어가겠다고 청했다면 국왕이 넙죽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으냐?”
“아마 받아들였겠지요.”
“그래, 그리고 궁에서 장애가 있으면 네가 다 해치워 버렸을 텐데.”
유키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차차가 한숨을 쉬었다.
“선뜻 너를 딸려 보내주신 어머니께 감사할 뿐이다. 물론 외숙의 위광도 있지만, 네가 함께 있기에 어머니께서 어디를 가든 든든하셨는데 그런 너를 내게 보내시다니.”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이국(異國)입니다. 마님께서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유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저희는 대대로 아자이 가를 섬겼습니다. 비록 노부나가 공께서 아자이 가를 멸문하고, 두 분 도련님을 죽이고 절에 보냈지만 제 의무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군께서는 마님을 따르라 하셨고, 마님께서는 아씨를 따르라 하셨습니다. 아씨께서는 아자이 가문의 장녀십니다.”
“네가 바치는 충성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있다. 훗날 내가 원하는 지위에 오르면, 네게도 충분한 포상을 내릴 것이다.”
유키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게는 아씨의 안위가 중요할 뿐입니다. 명령만 하시면 당장이라도 이 산을 빠져나가시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럴 건 없다. 국왕은 날 죽일 성격은 아니니까. 외숙을 비난하고, 이진 그놈을 붙잡아다가 극형에 처하라는 편지까지 바치지 않았느냐? 게다가 내 옆에는 ‘시녀’인 너 하나뿐이니, 무슨 일을 꾸미리라고 의심하지도 않을 거다.”
차차는 이 전쟁의 승패에 대해서도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 이기든지, 자신에게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으니까 말이다.
조선이 이기면, 자신은 임해군과 상관없는 사람임을 강조하며 국왕에게 새 남편을 청한다. 조선은 이혼한 여자가 결혼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자기 정도면 꽤 괜찮은 가문 남자를 얻어서 재기를 시도할 수 있으리라.
일본이 이기면, 자신이 임해군의 합법적인 정처임을 주장하여 조선의 왕비 자리를 차지해야 할 사람은 자신임을 내세운다. 이혼 운운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벌였던 연기였다고 주장하면 외숙은 당연히 조카를 편들 게 아닌가.
차차로서는 도중에 무슨 사고가 터질지 알 수 없는 탈출을 시도하기보다는 여기서 유유히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는 모르고, 조금 지루하고 따분하기는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