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89
2부 267화
– 9 –
열흘 이상 남쪽으로 계속 내려왔다. 그동안은 원만하게나마 계속 남쪽을 향하던 해안선은 큰 곶 하나를 돌자 더 이상 남쪽으로 뻗지 않았다. 남쪽에는 오직 바다뿐이고 육지는 없었다. 육지는 이제 서쪽으로만 펼쳐져 있었다.
“여기 포구가 무척 좋구나. 여기 배를 대면 풍랑이 일어도 안전하리라.”
어립선 다락 위에 우뚝 선 마사무네는 모든 배를 포구 안쪽으로 들여보내서 정박시키라고 명령했다. 그러면서도 만약을 위해 세키부네 두 척은 만 입구에 남겨 경계를 시켰다. 아직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혹시 조선군이 배를 타고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주군, 그때 조선 상인들이 알려준 대로라면 아직 서쪽으로 사흘은 더 가야 조선 관찰사가 머무는 치소가 나오지 않습니까?”
“맞다. 하지만 저들이 어떤 태세를 갖추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찌 함부로 그 앞에 그대로 밀고 들어간단 말이냐?”
곧바로 적진으로 돌입하지 않고 일단 여기 머물면서 정세를 살피자는 건 마사무네의 독단이 아니었다. 정세도 살피지 않고 성급하게 움직이는 건 바보짓일 뿐이라는 생각에서는 요리키인 츠가루 타메노부와 주장인 마사무네 모두 의견이 일치했다.
“한 주를 다스리는 지방관의 치소다. 분명 방비가 있을 것인데 무턱대고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분명 남쪽에서 개전 소식이 전해졌을 테니, 우리를 순순히 맞아들이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그때 만난 상인들과는 다를 거야.”
마사무네는 동북인의 후예라던, 자신에게 친절했던 조선 통역관에게 마음속으로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자와 일행들은 에조치 토벌 중인 모가미군에 붙잡혔으리라. 외숙인 모가미 요시아키는 약자에게 관대하니, 아무것도 모르는 상인들을 죽이진 않겠지만.
“하지만 그동안 만난 조선인들은 죄다 전쟁이 난 사실을 모르고 있지 않았습니까? 기습이 성공할 가능성은 아직 있을 겁니다.”
이들이 탄 선단은 남하하는 동안 해안에 집 몇 채를 지어 놓고 고기잡이를 하거나 고래를 잡는 조선인 어부들을 십여 번쯤 만났다. 이곳 원주민이라는 북방인들은 해안에 살지 않는지,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 어부들도 여기 눌러사는 건 아니었다. 남쪽에 살지만 봄이 와서 얼음이 녹으면 북쪽으로 올라와서 고기를 잡아 말리거나 소금에 절이다가, 겨울이 와서 바다가 얼 때가 되면 그동안 잡은 고기를 싣고 남쪽으로 간다고 했다. 어쩐지 사내들뿐이더라 했다.
왜구를 접한 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배와 고기를 두고 도망갈 수 없어 그랬는지는 몰라도 난데없이 나타난 일본인 대선단을 보고도 조선인들은 놀라워하기는 할망정 도망치지 않았다. 도리어 다가와서 고기를 팔겠다고 제안했다. 역시 이들도 전쟁이 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마사무네는 흔쾌히 쌀을 주고 신선한 생선이나 고래고기를 샀다. 부하들에게는 먼저 만난 장삿배 때처럼, 이 어부들도 절대 해치지 못하게 했다. 별로 뺏을 것도 없는 어부들을 죽여 봤자 훗날 조선을 정복하면 오점으로 남을 테고, 만약 패하면 원한을 쌓을 뿐이니까.
“그거야 고립된 어부들이니 그렇지. 행정관이 주재하는 치소라면 분명히 연락이 있었을 터, 아직도 전쟁이 터졌음을 모를 리 없다. 평소라고 경계가 허술할 리도 없고. 포구로 들어가는 진입로도 잘 모르는 우리가 어슬렁거리며 접근했다가는 화포, 불화살 세례나 받게 될 거다.”
다테군과 츠가루군, 양군이 보유한 선박은 이제 겨우 81척으로 줄어들었다. 도저히 수리할 수 없을 지경으로 망가진 배 8척을 처음 표착한 곳에 버렸고, 남행하는 도중에 추가로 난파한 배가 6척이었다. 그나마 연안 가까운 곳에서 파선해서 짐과 사람은 모두 건질 수 있었다.
“일단 나무를 베어 성채를 구축한다. 바닷가에 하나, 그리고 바닷가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산속에 하나 더 만들자. 근거지부터 좀 만들어놓고, 그다음에 서쪽으로 정찰선을 보내 낌새를 살피도록 한다.”
마사무네가 보기에 이 포구는 배를 대기에도 좋고, 숲이 크게 우거져 있어서 나무를 베어다 진채를 구축하기도 유리했다. 마사무네는 조급하게 굴지는 않기로 했다. 지금 거느린 병사는 양군을 합쳐 겨우 2천 6백, 함부로 행동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 10 –
“저것은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저리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일까? 정녕 조선인들은 요괴를 수족으로 부린단 말인가?”
히데요시는 개탄하는 표정으로 전주성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 공중에는 자루를 뒤집어놓은 뒤 바람을 넣어 빵빵하게 부풀린 듯한 요상한 물건이 올라가 있었다. 바람에 흘러가지 말라고 그러는지 밧줄로 땅에다 묶어놓은 건 분명히 보였다.
저 물건이 그저 허공에 매달려 있을 뿐이라면야 거슬리기는 해도 큰 문제가 아니다. 곤란한 건 1정(109m) 높이로 떠있는 저 괴물의 아랫자락에, 분명히 사람이 매달려 있다는 점이었다. 서너 명이나 되는 조선인이 그 밑에 붙어서 일본군 진영을, 주변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히데카츠, 네가 보기에는 저것이 살아있는 생물이나 요괴인 듯하냐?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 하늘에 띄운 물건일 것 같으냐?”
“밤이면 내려앉고, 아침이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건대 요괴는 아니지만 살아있는 생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밤에는 둥지에서 잠을 자고 낮이 되면 다시 날아오르는 게 아닐지요….”
히데카츠는 히데요시의 누이의 아들이다. 자식을 얻지 못한 히데요시가 그 형인 히데쓰구와 함께 양자로 들였다. 지금은 두 형제가 모두 무훈을 쌓기 위해 양부와 동행하고 있었다.
“왜 그리 생각하지?”
“저것이 조선인들이 만들어서 띄우는 물건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띄워두지, 왜 밤이라 해서 땅에 내려오겠습니까. 또 바람이 세고 비가 오는 날에는 뜨지 않았던 걸 보면, 살아있는 날짐승이 분명합니다. 요괴라면 음침한 날에만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너는 저렇게 생긴 날짐승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제 스물두 살이 되는 히데카츠는 딱히 견문이 넓거나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 양부가 반문하자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야 없습니다만…조선 땅의 풍물은 일본과 달라서 혹시 저런 날짐승이 있을지도요.”
“됐다.”
히데요시는 시선을 다시 괴물에게로 돌렸다. 어느샌가 병사들이 ‘전주’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한 저 괴물 때문에 전주성 공략은 심대한 차질을 빚고 있었다. 일본군이 어느 방향으로 성에 접근하건, 조선군이 미리 파악하고 병력을 움직여서 방어 준비를 해놓는 것이다.
저 괴물을 빼고 생각해도 전주성은 공략하기 힘들었다. 성에 인접한 동쪽 산줄기에는 산성 두 개가 있고 상당한 병력이 들어가 있어서 동쪽 방면에서는 공격이 불가능했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강물이 둘러싸고 있고 그 너머에는 온갖 장애물이 설치되어 접근을 막았다.
그나마 북쪽 성벽이 평지에 드러나 있기는 하다. 문제는 북쪽 성벽에 맞닿은 평지로 가려면 서쪽 성벽에서 쏘아대는 포화를 그대로 덮어써야 했고, 도중에 강을 한 번 건너기까지 해야 해서 공성장비 운반이 어려웠다. 당연히 다리는 없었다.
어젯밤에는 밤의 어둠을 이용해서 여울을 통해 이동해 보았으나 이것도 들켰다. 조선인들은 여울에다가 폭탄을 묻어두었고, 폭발에 놀란 인마가 우왕좌왕하는 주변에다 총포를 퍼부었다. 졸지에 불벼락을 뒤집어쓴 기습부대는 철포로 응사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철수했다.
저놈 때문에 몇 번 톡톡히 쓴맛을 보고 나니, ‘전주’가 하늘을 맴돌고 있는 동안에는 도저히 성에 달려들 생각이 나지 않았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세게 불어 놈이 날지 못하는 날이 다시 오기를 기다리자니 그게 언제일지도 모를뿐더러, 그런 날은 이쪽도 철포를 쓸 수가 없다.
“저 괴물이 차라리 우리 머리 위로 날아온다면 철포대를 시켜 쏘아 떨어트리라고 하겠다만, 그럴 수도 없고….”
은밀하게 다가간 뒤 철포나 활로 쏘아 떨어트리려고도 몇 번 시도는 해보았다. 하지만 놈이 전주성 한가운데 묶여 있으니 총알이 닿을 만큼 다가갈 수가 없었다. 성벽 위까지 기어오르기 전에는 쏠 기회조차 없었다.
“역시 야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 간베에 공인가.”
구로다 간베에(?田官兵衛)는 히데요시의 군사로서 보좌를 맡고 있다. 이른바 ‘주고쿠 회군’에서 히데요시가 아케치군을 토벌하러 귀환하는 동안에 모리와 협상하여 강화를 맺음으로써, 뒤를 든든하게 지켜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조선 원정에서는 조선에 대해 잘 아는 고니시가 중용되다 보니 화려한 빛은 좀 덜 받았다. 하지만 고니시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정보 제공과 참고할 의견 제시일 뿐, 실제적인 계획 수립 및 실행에서는 여전히 간베에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주군께서도 사흘 전 히데나가 공께서 당하신 일을 잊지 않으셨겠지요. 낮에 전주천이라는 저 강에 접근하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각오하고 계시겠지만 야습밖에는 없습니다.”
히데요시는 동생이면서 가장 믿음직한 장수인 히데나가도 이번 출정에 동행시키고 있었다. 이번 원정에 실패해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노부나가의 눈 밖에 난다면 어차피 하시바 가문은 끝장일 터, 뒷일을 대비하기 위해 히데나가를 영지에 남겨둔다는 선택 같은 건 없었다.
그 선택의 결과, 소중한 동생 히데나가는 지금 막사에 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것도 전주성 성벽에서 4정은 족히 되는 먼 거리에서 맞은 총탄 때문에 말이다. 지금은 히데요시의 ‘맏아들’인 히데쓰구가 숙부의 신변을 돌보고 있었다.
“히데나가 공께서는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적세를 살피고 계셨습니다. 그 먼 거리에서 단 한 발을 쏘아 갑옷을 입은 사람을 죽이다니, 적은 보통 솜씨가 아닙니다.”
철포 수백 발을 난사하다가 한 발 맞았다거나, 혹은 커다란 화포를 쏘아 히데나가가 있었던 그 근처를 몽땅 박살을 냈다면 이들도 놀라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조선군은 철포 딱 한 발을 쏘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탄환이 정확하게 히데나가를 맞혔다.
“상처에서 빼낸 탄환의 크기를 보니 하자마쓰쓰였다. 그만한 철포라면 그 거리에서도 맞고 죽을 수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자마쓰쓰(挾間筒)는 수성전에서만 쓰는 대형 철포다. 일반 철포보다 훨씬 길고 무거워서 한 사람이 다루기 어려울 정도지만, ‘하자마’라고 부르는 작은 총안구에 거치하고 쏘는 총이기 때문에 그건 문제가 아니다. 위력도 막강해서 2정에서 3정 거리까지도 쏠 수 있다.
“규슈에서 조선으로 넘어간 아소 잔당 중에는 사이카 패거리가 섞여 있었다. 하자마쓰쓰는 원래 놈들이 쓰던 장기, 여기 놈들이 있다면 노려 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히데나가 공 말고도 여덟 명이나 당했습니다. 성벽에서 4정 이내 거리로 다가갔다가 총성 딱 한 발과 함께 쓰러진 사람만 아홉 명이란 말입니다. 개중에 여섯 명은 즉사였습니다.”
전열에 선 장창병들이 총탄과 화살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지금 날아드는 탄환이 나를 정확히 노리는 건 아니다, 그냥 재수가 없어서 맞는 거다, 하는 믿음이다. 하지만 적이 정확히 나를 노려 쏘고 있음을 깨달으면 그 즉시 엄청난 공포에 시달리는 게 사람이다.
“발사되는 화포 수량을 보건대 전주성에 있는 병사는 우리 예상보다 많습니다. 적어도 1만 5천은 됩니다. 공성이 불가능한 수는 아닙니다만, 다가갈 수가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대가 말한 대로 야습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겠군. 수공을 할 수도, 포위해서 굶길 수도 없으니.”
강물을 막아서 적지를 물바다로 만드는 건 히데요시의 특기 중 하나였다. 하지만 전주천이 그리 큰 강이 아닌 데다, 성에서 쏘는 총포 사거리 안에서 둑을 쌓아야 하는 점도 문제였다.
게다가 식량이 발목을 잡았다. 닷새가 지났으니 이제 남은 식량은 보름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수공이나 포위전을 시도할 수는 없었다.
“오늘 밤부터, 다소 희생을 무릅쓰더라도 장애물을 치워서 통로를 만들도록 하라. 어떻게든 전주성에 달려들 수 있는 문을 열어야 한다. 적어도 열흘 안에.”
남원으로 돌아가는 데만도 식량이 닷새분은 필요하다. 열흘 내로 공성에 실패하면 포기하고 남원으로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다.
“전주 주변 마을에서 식량을 좀 조달하시지요.”
잠시 생각하던 히데요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탈은 안 된다. 노부나가 님께서는 조선 국왕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길 생각이시라,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가능한 약탈을 삼가라고 명하셨다. 식량이 떨어지면 차라리 전주성 공성을 포기하고 후퇴한다.”
“알겠습니다.”
노부나가는 약탈을 벌이지 않고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두기만 해도 조선을 위압할 수 있다고 여겼다. 히데요시는 내심 불만을 품었으면서도 그 지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 11 –
“그동안은 노부나가 공께서 내리신 지시도 있고 해서 참았다만, 이제는 도저히 안 되겠소. 좌군 전체에 명을 내려서 앞으로 마주치는 모든 도시와 마을을 약탈하고, 우리 군에 반항하는 조선인은 모조리 죽여버리도록 하시오.”
“그런 짓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다카카게 공?”
“그럼 어쩌란 말이오? 본국으로 가는 길은 끊기고, 노부시가 된 조선인들이 사방에서 우리 등에 죽창을 찌르는 판인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지휘하는 좌군 본영은 나주에 있었다. 선발대로 나간 후쿠시마군이 남원에 도착하면 그 뒤를 이어 전주로 나갈 예정이었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좀처럼 길을 뚫지 못함에 따라 하릴없이 나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주에 도착할 때까지는 별로 힘든 일이 없었다. 전라도에 있는 적군은 후쿠시마군이 쳐서 몽땅 쫓아버렸고, 다시 집결해서 싸울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주를 비롯해 일본군이 점령하는 고을마다 관아에 양식도 잔뜩 쌓여있어서 점거하는 재미도 났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남원에서 우군과 합류해야만 하는데, 조선인들이 고갯길마다 매복하고 있다가 총탄과 화살을 퍼부었다. 차라리 조선군이 정면으로 덤벼 온다면 얼마든지 싸우겠는데 덤비는 자들 대다수는 갑옷도 제대로 안 갖춘 농민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수시로 출몰했다.
“그래도 노부나가 공께서 조선 국왕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하니, 일반 농민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말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마을을 약탈하거나 안전보장세를 징수하는 일도 아직 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우리 군은 적지 한가운데 고립되어 매우 곤란한 상황에 직면해 있소. 본국은 물론 남원에 있는 우군과도 연락이 안 되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애초 계획대로 온후하게만 저들을 대할 수 있소? 더구나 군량 공급이 끊긴 이상, 약탈이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병사들이 굶게 되오.”
“그건 그렇습니다만.”
자신에게 반발하던 모리 데루모토가 기세를 수그러뜨리자 다카카게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러저러해도 데루모토는 자신보다 열여섯 살이나 어린 조카였다. 게다가 성격도 우유부단한 편이고 기량도, 패기도 없었다. 이래서야 모리 본가 가주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만약 이 원정이 모리 가의 깃발 하에 행해졌다면 데루모토가 주장이 된다. 그럼 그가 어떤 의견을 내든지 그게 우선이고, 다카카게가 자기 뜻대로 일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 원정은 노부나가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며, 좌군 지휘관은 데루모토가 아닌 다카카게였다.
“나주에서 노획한 군량도 벌써 사분지 일이 침입한 조선인들에게 불타 버렸소. 그 창고만 바라보고 있다가는 곧 굶게 될 거고, 지금이라도 모을 수 있는 식량을 모두 모아서 경상도로 움직여야 하오. 노부나가 공께서 건너오시면 바로 합류할 수 있도록.”
군의에 참석한 다른 장수들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카카게를 지지했다. 데루모토는 자기가 고립되었음을 깨닫자 망설였지만 그래도 반대 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병사도 아닌 자들까지 모두 죽이라는 건 좀….”
“반항하는 자들이 병사가 아니라고? 우리도 처음엔 잇키(농민반란)인 줄 알았지만, 붙잡은 적병을 심문해 보니 속오군이라는 조선군 군영에 속한 병사라고 했잖소? 하는 짓은 노부시나 다를 게 없지만 말이오.”
다카카게가 비아냥거렸다.
“아마 조선 국왕이 원체 가난한 탓으로 병사들한테 허술한 갑옷 한 벌씩 지급할 돈도 없는 모양이지만, 어쨌건 저들은 조선군으로서 우리를 친 거요. 그러니 우리도 저들을 병사로 대우하여 몽땅 쳐죽임이 마땅한 대접이 아니겠소.”
조선 속오군의 습격은 그만큼 이들을 귀찮고 힘들게 했다. 곤두서고 곤두선 신경이 마침내 폭발한 상황이었다.
“그럼 군령을 내리겠소! 각지에 흩어진 좌군 병력 전체에 명을 내려, 수집할 수 있는 모든 식량과 가축을 모아서 순천으로 집결하라 하시오! 순천에 모인 뒤 경상도로 넘어가겠소.”
“존명!”
장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모리 데루모토도 마땅찮은 표정이기는 했으나 고개를 숙여 동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