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9
1부 04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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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다녀왔다 들었다. 이래저래 험한 꼴을 좀 보았겠구나.”
“괜찮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사람을 치료하는 일이니까요.”
종군을 마치고 돌아온 상희는 좀 핼쑥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체구가 호리호리한 편이라 약해 보이는 아이인데, 요동에 다녀온 뒤로 더 힘들어 보였다.
“네가 종군했다는 이야기는 정 군관에게 들었다. 미리 찾아와서 좀 챙겨줬어야 하는데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여기 정 군관께서 필요한 물건이나 주의할 점 같은 걸 잘 일러 주셨습니다. 정 군관 부인께서도 마치 자기 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신경을 써 주셨고요.”
올해 마흔인 정 도사는 아들이 없이 딸만 셋이다. 막내가 상희 또래라 들었으니, 아마 막내아들을 돌보는 심정으로 상희를 챙겨준 모양이다. 지금 술상을 놓고 둘러앉은 자리도 정 도사네 사랑방이었다.
“그러냐? 그러고 보니 싸움에서 상한 군사들 숫자가 몇 명 안 되었다 들었다. 기껏 전장에 갔는데 막상 다친 이가 없어 좀 무료했겠구나.”
“무료할 틈이 없었어요. 치료할 이가 끊이지 않았거든요.”
상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전투에서 발생한 부상자는 분명히 서른도 안 되었다던데 치료할 사람이 그렇게 계속 나왔다고? 전염병은 발생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혹시 동상이나 낙상 같은 비전투손실이 많았나?
사상자 숫자에 대해 박원종이 보고한 내용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도성에서 의원을 열 명 씩이나 보낼 필요도 없었다고, 내 기우 때문에 상희를 고생시켰다고 후회까지 했다. 그런데 다친 사람이 계속 나왔다니?
“야인 부락을 공격할 때마다 붙잡은 여자와 아이들을 치료해주느라 정말 눈코 뜰 새가 없었어요. 저 말고도 다른 의원이 스무 명쯤 있었는데, 부상한 우리 군사들은 돌봐주면서도 야인 아녀자들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더군요.”
상희의 두 눈에 눈물이 살짝 어렸다.
“야인들이 변경에 사는 우리 백성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저도 알아요. 우리 군사들이 야인 부락을 짓밟는 것도 그동안 야인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응징일 뿐이고, 그들이 받아 마땅한 대접이지요. 하지만 여자나 아이들까지 그렇게 가혹하게 대하는 건 좀 불쌍하잖아요.”
애가 취해서 그런가, 아니면 아직 어려서 감성이 풍부한 건가. 16세면 혼인도 하고 군대도 가는 나이인데 말이다. 게다가 사당패에서 5년을 굴러먹은 애가 아직도 다른 사람들을 위한 눈물이 남아 있다니 신기한 일이다.
대한민국이라면 16세 아니라 36세라고 해도 불쌍한 사람들을 보며 눈물짓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는 삶이 훨씬 각박하다. 뿐만 아니라 여진족은 사실상 적국인이기까지 하다.
“역시 네가 의원이라 그런 모양이구나. 비록 야인이라 하나 다친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걸 보니 말이다.”
“환자는…어느 편 사람이건 구분하지 않고 낫게 해 주어야 하니까요. 화타도 관우와 조조를 가리지 않고 치료했지 않나요?”
아, 그건 아닌데. 하도 읽을 게 없어서 정사 삼국지를 읽다가 알았는데, 화타가 관우와 조조를 치료했다는 이야기는 전부 소설에서 친 뻥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화타는 조조의 두통을 치료해주지 ‘않으려고’ 하다가 분노를 사서 처형당했다. 게다가 이때는 관우가 다치기 전이었다.
하지만 뭐 굳이 그 이야기를 지금 꺼낼 필요는 없겠지. 중요한 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화타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지 그 이야기의 사실성 여부가 아니니까.
“도련님 말씀대로, 의원은 상대가 누구든 다쳤으면 치료하고 보살펴야 하죠. 비록 야인이라고 해도, 직접 죄를 저지른 사내들도 아니고 집에 있던 여자와 아이들이 핍박받는 모습은 가엾었어요.”
“그래, 네 뜻을 알만하다.”
정당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쨌거나 그 전쟁을 개시한 장본인이 나고 보니 지금 여기에서 정당성을 어필하기는 좀 계면쩍었다. 상희 스스로도 전쟁을 벌인 당위성은 인정하면서 그 과정에서 나타난 참상에 슬픔을 느꼈을 뿐이니까.
“자, 한 잔 받아라. 이래봬도 꽤 좋은 술이니 위안이 되면 좋겠구나.”
상희는 살짝 고개를 돌리더니 아무 말 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이제 겨우 16세 된 아이라고는 보기 힘들만큼 술잔을 드는 손놀림이 익숙했다. 이것도 사당패 생활 탓일까? 옆에 앉은 정 도사가 잔을 채워 주니 그것도 바로 비웠다. 내가 다시 따라준 한 잔도 한 번에 사라졌다.
“정말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은 몰랐어요.”
연거푸 잔을 비운 상희가 의미 모를 푸념을 했다. 얼굴에는 뭔지 모를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가난한 농가에서 눈을 뜬 것도, 사당패에 끌려 다니게 된 것도, 그냥 제가 운이 없어서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쟁터는…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이 나라에서, 이 시절에…전쟁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제가 끌려갈 것도요.”
“남변과 북변에서는 늘 도적들이 국경을 침노하곤 한다. 너도 풍문 정도는 들었을 것이 아니냐. 군정으로 동원되어 싸움에 나갔다 온 사람을 본 적도 있을 테고.”
“그거야 도둑놈들이 쳐들어오는 거지 전쟁은 아니잖아요. 이 조선이 군대를 편성해서 치러 나갈 거라고는, 그리고 제가 거기 끌려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 봤다고요….”
말꼬리가 흐려지더니 상희가 풀썩 엎어졌다. 들여다보니 어느새 코를 골고 있었다. 정 감사가 앉은 채로 웃었다.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그리 들이켰으니 취해 쓰러질 밖에요. 아무리 의원이라 직접 싸울 일은 없었다지만, 나름 첫 출전이다 보니 무서웠던 겝니다.”
그럴 법하다. 아무리 사내라지만 아직 떠꺼머리를 하고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다. 출정해 있는 동안은 바빠서 공포를 잊었지만 돌아와 혼자 있으니 무서운 감정이 살아났을지도 모르지.
“이래서야 위로연이고 뭐고 다 파장이군. 집까지 업어다 줘야 할 것 같은데 같이 가 줄 수 있겠나?”
“번거롭게 그러실 것 있습니까. 여기서 재우겠습니다. 어차피 사랑방은 늘 비어있으니까요.”
“사랑방이 빈다고? 자네는 어디서 지내기에?”
깜짝 놀란 내 목소리가 커졌다. 정호찬이 뭐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혼인을 했으니 당연히 내자(內子, 남 앞에서 아내를 이르는 말)와 함께 안방에서 잡니다. 사랑방은 책을 읽고 손님을 맞이할 때만 사용합니다.”
“그, 그런가.”
대부분 양반들은 부인과 관계할 때가 아니면 안방에 들어가지도 않는 경우가 잦다. 정 도사처럼 매일 안방에 가서 자는 사람은 확실히 특이한 사례였다. 그걸 드러내는 건 더더욱.
“알겠네, 그럼 잘 부탁하네.”
“염려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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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도사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궁으로 돌아왔지만, 당연히 신경이 쓰였다. 술도 약한 것 같던데 숙취는 겪지 않았을까나. 정 도사가 아침에 꿀물 한잔 정도는 내줬겠지.
충격을 받고 돌아온 상희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그 아이가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외에는 답이 없다. 동원된 군사들 중에는 상희와 같이 올해 16살이면서 직접 무기를 들고 여진족들과 맞선 이들도 있을 터이다. 그에 비하면 상희는 져야 할 마음의 부담도 훨씬 적다.
물론 나보다 힘든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진 않는다. 내 옆에 있는 이가 무거운 짐을 졌다고 해서 내 짐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니까. 나 역시 내 짐이 무겁기에 상희가 진 짐을 가볍게 해주는 데까지는 손이 잘 뻗어지지 않았다.
“왜인들이 토산물을 바친 것이 올해 들어 벌써 몇 번째인가?”
“지난 정월부터 4월까지 총 17회입니다, 전하.”
‘토산물’이란 대개 일본에서 들어오는 선물을 지칭한다. 유황, 구리 같은 쓸모 있는 물건인 경우도 많지만 수공예품을 보내기도 한다. 공작새라거나 설탕, 후추 같은 사치품인 경우도 있다. 이 경우 토산품이라고 지칭함은 그냥 형식상 하는 말이 된다.
설탕은 내의원에서 약으로 쓴다고 해서 별 말이 없었다. 헌데 공작새는 대신들이 쓸모도 없는 물건 어쩌고 잔소리를 할 기미가 보였다. 괜히 그런 걸로 싸우고 싶지 않아 수라간에 내려서 통구이로 만들어 올리게 했다. 맛은 그럭저럭 괜찮았던 것 같다.
목록표를 훑어보니 보낸 이는 제각각이다. 대마도가 보낸 물건이 가장 많지만 교토에 있는 중앙정부에서 보냈다고 하는 물품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키, 히젠, 사쓰마를 포함한 규슈 서부 지방 영주들이었다.
이들이 계속해서 선물을 보내는 이유는 조선과 무역을 더 트고 싶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문제는 그런 의사를 받아줄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자들의 태도는 도저히 종잡을 수가 없다. 일방에서는 관계를 개선하고 싶다면서 토산물을 바치고, 일방에서는 우리 백성들을 꼬여 밀무역을 하고, 일방에서는 아직도 수시로 도적으로서 우리 배와 사람을 덮치니 도대체 자신들을 어찌 대하라는 말인가?”
경찰 열 명이 도둑 하나를 못 잡는다고, 남해 전역에서 정말 수시로 왜구가 나타났다. 작은 배 한두 척으로 나타나 잽싸게 털고 사라지니, 이건 도대체 잡을 수가 없었다. 붙잡은 왜구들을 장대 위에 매달아 굶겨 죽이는 조치를 취해도 왜구가 줄지 않았다.
왜관 일대 바다를 봉쇄하는 방안은 확실히 효과가 좀 있었다. 문제는 이 도둑놈들이 왜관을 근거지로 삼는 대신, 대마도나 일본 본토에서 출항하기 시작했다. 큰 배를 타고 조선 근해까지 와서 다시 작은 배를 갈아타고 해적질을 벌이는 식으로 방법을 바꾼 거다.
겨우 잡은 본토 출신 왜구가 처형되기 전에 실토한 바에 따르면 자신들은 영주가 직접 거느린 신하는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은 물론 일본 각지를 털어 얻은 이득에서 ⅓을 영주에게 바치고 있다고 했다. 대마도주도 이들에게 기항세를 받는다고 했다.
즉 한편으로는 해적질을 장려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역을 확대해달라고 청하는 게 일본 영주들이었다. 젠장, 이 빌어먹을 놈의 자식들 같으니.
“일본과 아예 무역을 끊어버리면 어떻겠습니까, 전하. 저 도적놈들에게 배려를 해주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사옵니다.”
호조판서 박숭질이 분노하여 진언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올해만 전라도 해안에서 왜구에게 털린 조운선이 세 척이나 되었다. 쌀 3천 석이 그대로 바다에서 사라져 버렸다. 뱃사람도 네 명이 죽고 일곱 명이나 끌려갔다. 호조판서로서는 경을 칠 노릇이었다.
“왜관을 폐쇄하고 왜인들을 아예 쫓아버리시옵소서. 왜인들이 아예 우리 땅에 범접하지 못하게 해야 도적질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왜적들을 쫓아낼 수 없사옵니다.”
병조판서 이계동이 진중한 태도로 반론했다.
“저들은, 특히 대마도인들은 땅이 척박하여 스스로 필요한 곡식을 재배하지 못하기에 외부에서 식량을 구해야만 하옵니다. 무역을 통해 저들이 곡식과 면포를 조달할 수 있게 해주지 않는다면 필시 도적질을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종대왕께서도 삼포를 터 주신 것입니다.”
그래, 나도 안다. 명나라가 16세기 중반에 왜구와 밀무역 때문에 짜증이 나서 해금조치를 때렸더니 정확하게 명나라가 원한 것과 정반대 상황이 터졌다. 무역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끊긴 일본인들이 해적질에 나서면서 제2차 대왜구시대가 폭발했으니까.
조선에서도 고려 말부터 날뛰던 왜구들이 줄어든 배경에는 이종무의 대마도 토벌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3포 개항을 통해 정상적인 무역도 허용해 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왜구가 잦아들었던 것이다.
지금 왜구들이 나타나는 건 일본이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일본 내부 질서가 개판이 된 탓이 클 터였다. 근본적으로는 일본이 다시 안정을 찾아야 왜구도 줄어든다. 물론 이게 내 마음대로 될 턱은 없다.
“병판은 어찌함이 옳다고 보는가?”
“왜관에 숨어 있는 적도들은 현재 하고 있듯이 왜관 일대 바다를 우리 전선으로 봉쇄하고 수시로 감시함이 옳습니다. 왜 본토에서 오는 적선(賊船)들은 대개 대마도에 기항하므로, 대마도주에게 단속과 감시를 요구하고 적선이 나타날 때마다 제재함이 가할 듯하옵니다.”
“제재한다 함은, 군사를 보내 치자는 뜻인가?”
“아닙니다. 이제 막 요동에 군사가 갔다가 돌아왔는데 어찌 또 바로 대마도를 치겠습니까? 대마도주에게 매년 하사하는 쌀과 콩을 적선이 한 번 나타날 때마다 1할씩 삭감하거나, 내년도의 세견선을 1척씩 줄임이 어떠할까 합니다.”
세견선(歲遣船)은 대마도주가 매년 보내도 좋다고 허가를 받은 정기무역선을 뜻한다. 내 기억으로는 일본이 삼포왜란이라든가 뭔가 사고를 칠 때마다 그 수를 줄였다고 했다. 물론 아직은 그런 사건들이 안 일어났기에 세종대왕 때 50척으로 정해진 수가 유지되고 있다.
“좋은 방안이다. 예조에서는 즉시 대마도주에게 보낼 서한을 초하도록 하라.”
“예, 전하.”
젠장, 북로남왜(北虜南倭)가 고려를 말아먹었다더니 조선도 큰 차이는 없군. 나라가 망할 정도는 아니라지만 짜증나기 짝이 없다. 얼른 준비를 갖춰서 일본도 한 번 단단히 혼을 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