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93
2부 2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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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푹 쉬면서 원기를 차린 오위군은 하루 만에 백 리를 걸어 청도에 도착했다. 미리 통보를 받은 청도군수는 관속과 백성들을 총동원해서 솥을 걸어 식사를 준비하고 군영을 차릴 터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라면 군대 밥 준비는 불평이 만만찮았을 부역이다. 쌀과 장, 솥이야 관가에 있는 것을 꺼내 쓴다고 해도, 장작이나 반찬은 백성들을 털어내서 마련하는 데다 종종 노역까지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저화를 몇 장씩 내주긴 한다지만, 값을 제대로 쳐서 받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한 달 전부터 전라도를 휩쓸고 있다는 왜적이 경상도에도 쳐들어왔다. 동래성이 떨어졌고, 며칠 안에 여기까지 밀고 올라올 참이다. 당장이라도 피난을 나서야 할 참에 주상께서 보내신 군사들이 왔으니 백성들이 힘을 아낄 리 없었다.
굳이 아전들이 가가호호를 돌면서 뭘 내놓으라고 닦달할 필요도 없었다. 사대부가에서 일개 민호에 이르기까지, 읍내 백성들이 줄줄이 장작과 솥단지를 들고 나섰다. 쌀섬, 장독도 줄줄이 나왔다. 관고에 있는 쌀과 장만으로 어찌 수만 대군을 먹일 수 있겠느냐는 걱정에서였다.
쌀과 장이 전부가 아니었다. 부유한 사대부와 호상들은 소를 끌고 나와 내놓았다. 그만한 살림이 안 되는 상인이나 백성들도 돼지와 닭, 개를 바쳤다. 술도 집집마다 내놓았다. 덕분에 오위군 군사들은 임금이 베푸는 잔치에서도 이렇게 먹어본 적이 없을 만큼 포식을 했다.
군사들이 신나게 먹고 마시는 동안 관아에서는 군의가 벌어졌다. 전날 참석했던 사람 중에 대구에 남은 대구부사 조경이 빠졌고, 대신 청도군수 조승일이 끼어있었다. 현직 관리가 아닌 사대부도 세 사람이나 탁자 한편에 줄을 지어 앉았다.
“관민이 힘을 합쳐 나라를 위하니, 이 어찌 기특한 일이 아니겠소이까. 내 꼭 주상께 이를 아뢰어 청도 고을이 얼마나 충의에 불타는지 천하가 알도록 하겠소이다.”
“그저 모두가 전하의 신하로서, 백성으로서 할 도리를 했을 뿐이옵니다.”
유성룡이 건넨 치하의 말을 듣고 얼굴이 상기된 청도군수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제대로 된 경직(京職)을 받지 못해서 몸달아 하던 참에 기회를 맞은 셈이다. 유성룡이 흐뭇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청도군수에게서 세 선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비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천한 선비들이 도체찰사 대감을 뵙습니다.”
“어서들 고개를 드시오. 지금은 이런 예를 차릴 때가 아니오.”
유성룡이 세 사람에게 고개를 들도록 권했다. 경상도 관찰사 겸 도순찰사 김성일이 나서서 세 사람을 좌중에 소개했다.
“여기에 모인 세 사람은 경상도 속오군 도대장 김면, 좌대장 정인홍, 우대장 곽재우입니다. 모두 향토에서 인망이 높은 선비들로, 전하께서 직접 발탁하신 향군장이기도 합니다. 김면은 고령, 곽재우는 의령, 정인홍은 합천에서 군사를 이끌고 있습니다.”
장계를 올려 이들 세 사람을 도대장으로 발탁한 주역이 김성일이었다. 대적이 쳐들어오는 이상 속오군도 전체 도 단위로 조직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북부 지방이라면 몰라도 남부 지방 속오군은 제대로 뭉쳐야 적에게 맞설 수 있었다.
이들 세 사람은 모두 남명 조식의 문하라는 데서도 공통점이 있었다. 조식은 이미 20여 년 전에 사망했지만, 문사이면서 평소 검을 차고 다닐 정도로 병법에도 관심이 있었다. 언젠가는 일본이 쳐들어올 게 분명하다고 예측하여 생전에 대비를 주장하기도 했다.
조식이 독특한 점은 그 외에도 있었다. 군자는 외모를 군자에 걸맞게 꾸며야 한다고 하여 이황 쪽 사람들이 사치스럽다고 비난할 정도로 차림새를 호화롭게 하기도 했으며, 농사 외에 장사와 공장(工匠)의 일도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에 돈을 대기를 장려했다.
경상우도 일대에서는 조식의 문하에 있던 이들이 확실히 뿌리를 내려 향군장도 대부분 이들 계열이었다. 그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이들이 지금 여기 모인 세 사람이었다. 그중 김면은 이황의 제자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김성일은 안동 출신으로 이황의 제자였다. 하지만 같은 스승 아래에서 배웠다는 이유만으로 세 사람 중 김면을 도대장으로 뽑은 건 아니었다. 다른 두 사람은 성정이 다소 과격한 탓에 서두르다가 일을 망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었고, 이에 신중한 김면을 도대장으로 골랐다.
“지금 왜적이 동래에서 오고 있으니, 마땅히 이 인근에서 적과 일전을 결해야 할 것입니다. 적이 대군인 탓으로 관군이 가진 군사만으로는 싸우기가 어렵기에, 속오군이 힘을 합쳐 나설 방법을 논의코자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김성일이 인사말을 끝내자 유성룡이 향군장들에게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명성 높은 그대들을 만나 참으로 반갑소. 지금 나라가 외침으로 위기에 빠졌는데, 의로운 선비들이 이리 나서서 큰일을 맡아주니 고마울 뿐이오.”
“이것이 다 전하께서 미리 안배하신 바가 아니겠습니까. 속오군을 만드시고 각 고을에 있는 사대부로 하여금 이를 이끌게 하셨으니, 모두 전하께서 장차 있을 위험을 예견하고 이룩하신 위업입니다. 저희는 오직 전하께서 부여하신 책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김면이 고개를 숙이며 겸양을 보였다. 인사가 몇 마디 오가지도 않았건만, 옆에 앉아 있던 신립이 인상을 찌푸리며 논의를 재촉했다.
“영상 대감. 인사는 그쯤 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지금 논해야 할 바는 왜적은 어디 있으며, 우리는 어디로 움직여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여야 합니다. 평소라면 마땅히 예를 갖춰 인사를 나누어야겠지만, 시국이 그야말로 시급하니 예를 줄이시지요.”
“도총관의 말이 옳소. 자, 그럼 지금 왜적이 동래에서 어디로 움직였소?”
조승일이 허리를 굽히며 일어나 답했다.
“해질녘에 사자가 와서 전하기를, 적이 양산을 치고 북으로 향하고 있다 합니다. 양산군수 김귀형이 서계하기를, 고을 백성들을 미리 산으로 피난시키고 속오군만 거느리고 관아에 남아 있었는데, 수천에 달하는 적이 밀려와 중과부적으로 그만 패하였다 했습니다.”
지금 조선의 방위체제는 각 도 병영이 중심이 되고 도성에서 내려온 오위군이나 도감군이 이를 지원하는 체제다. 이번 전쟁에서는 병력 소집이 빨랐던 탓에, 양산이나 청도 같은 작은 고을은 보유한 정군을 이미 병마절도사 밑으로 모두 보낸 뒤라 속오군밖에 군사가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울산에 있는 좌병영군이 적을 격파하거나 저지하거나 둘 중 하나는 해냈어야 한다. 하지만 참패해 버렸으니 경상좌도 각 고을 수령들은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목을 빼고 오위군만 바라보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청도 백성들의 환대도 그런 마음의 표현이었다.
“생각할 것도 없소! 당장 영남대로를 따라 밀양으로 내려가 적과 결전해야 합니다. 왜적이 한 발이라도 더 우리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모조리 절영도 앞바다에 처넣어야 하오.”
신립이 강경하게 주장했다. 유성룡이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는데, 뜻밖에도 속오군 도대장인 김면이 나서서 신립에게 반대 의견을 표했다.
“적이 우리 땅에 들어옴이 통탄할 일이기는 하나, 지금은 적이 동래부를 함락시키고 기세가 한참 올라 있습니다. 적이 성할 때 정면으로 맞닥뜨림은 병법에서 권하는 바가 아니니, 좀 더 우리 땅으로 끌어들여 그 기세가 쇠하고 지쳤을 때 침이 옳습니다.”
“도대장이 말한 바가 옳습니다. 소인이 과거에 동래를 오가며 왜인들과 여러 번 접했는데, 왜인들은 싸움에 이겨 기세가 올랐을 때 더 힘을 낸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동래성을 함락하여 적의 기세가 올랐으니, 우리는 산성에 의거하여 버티며 적이 지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곽재우도 김면과 같은 의견임을 똑똑히 드러냈다. 임금이 직접 이름을 거명하며 향군장으로 뽑은 곽재우에게는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이 있었다.
“오위군이 우리 조선에서는 강력한 정병이라 하나, 백 년 동안 오직 싸움질만 익힌 왜병에 비하면 어찌 강병이겠습니까? 북방에서 야인들을 쳐부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음은 소인들도 들었습니다만, 왜병은 도적 떼에 불과한 야인들과 다릅니다. 야인 다루듯 할 수 없습니다.”
정인홍은 한층 더 나가 오위를 폄하한다고 볼 수 있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정인홍이 김면보다 연장자임에도 김성일이 김면을 도대장으로 뽑은 것이다.
“도총관께서 거느리신 오위군은 그나마 우리 조선에서 가장 잘 조련하고 전통 있는 중요한 군사들입니다. 이런 귀한 군사들을 어찌 위험한 회전에 내몰려 하십니까? 적이 지친 뒤에는 우리 오위군으로도 쳐부술 수 있을 터이니, 적이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소서.”
이들이 신립이 세운 위업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멀리 북방에서 벌어진 싸움이기는 해도, 북방에서 벌어지는 전쟁 소식은 조보를 통해 신속하게 퍼졌다. 오위군 소속으로 종군했던 이 지역 출신 번상병들도 귀가하면서 무용담을 가지고 돌아왔다. 당연히 모를 수가 없다.
향군장들이 걱정하는 바는 적의 차이였다. 북방에서 적으로 싸운 야인들은 근본적으로 진짜 군사가 아니라 도적들이었다. 유리하면 싸우지만 불리하면 냅다 도망치고, 이합집산이 일상이 된 놈들이다. 하지만 왜적들은 말 그대로 ‘전쟁’이 일상인 자들이다.
경상도 일대에서는 일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쉬웠다. 동래 일대를 중심으로 해서 활동하는 호상들은 관의 허가를 받아서 일본과 많은 교역을 했고, 곽재우가 그러듯이 이들에게 자본을 대여하는 토호들도 많았다. 장사의 성패를 위해서라도 이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동래를 통해 흘러나가는 수출품 중 의외로 많은 것이 무기를 만드는 철재다. 일본에서도 철 생산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전쟁이 난다거나 해서 수요가 급증하면 농기구를 만든다는 명목을 내세워 조선에서 수입하는 철의 양이 확 늘어나곤 했다.
자연히 왜놈들은 언제, 왜, 어떻게 싸우는가에 관해 관심이 늘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평소 익힌 일본에 관한 지식이 웬만한 무장들을 능가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위 군사들은 말을 타고 달려드는 야인들을 상대로 포와 활만 쏘며 싸우지 않았습니까? 더구나 싸움터는 부여주의 평원이 아니었습니까. 산과 고개가 많고 평지가 좁은 이 남방에서, 똑같이 도보로 싸우는 왜병과 싸우자면 유리할 게 없습니다. 적도 총이 있고 활이 있습니다.”
속오군 대장 세 사람은 하나같이 속전(速戰)을 반대했다. 동래부에서 시간을 끌어 주었으니 그동안 아직 피난하지 못한 각지 백성들을 산성으로 피난하게 하고, 왜적이 가고 싶은 대로 움직이게 놓아두면서 적이 지치고 흩어지면 그때 공격하는 게 좋다고 했다.
유성룡과 김성일도 여기 동조할 기미를 보이자 신립이 벌컥 화를 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적은 50만 대군을 준비했다 하였소. 그 기세가 강하니 지금 그 기세를 꺾어서 설치지 못하도록 해야지, 언제 적세가 꺾일지도 모르는데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자는 거요? 날뛰는 왜적을 바라보기만 하는 우리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지지 않을 듯하오?”
격분한 신립의 성토가 계속 이어졌다. 자기 백성들이 언급되자 청도군수가 움찔했다.
“그대들에게는 저 밖에서 술과 고기를 내어 우리 군사들을 대접하는 청도 백성들의 바람이 들리지 않소? 모두가 우리 오위군이 당장 왜적을 물리쳐 주기만 기다리고 있소이다! 그러고 보니 그대들 모두 경상우도 사람인데, 경상좌도로 오는 적을 그냥 놔두자는 이유가 그거요?”
“도총관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왜적은 이미 경상우도로 들어왔소이다. 오늘 아침에 낙동강을 건넌 왜적이 김해부 군사들을 쳐부쉈소. 조만간 의령에 들어오겠지요. 그 외에 낙동강을 타고 북쪽으로 곧장 올라오는 놈들도 분명 있을 거요.”
멈칫한 신립이 잠시 말을 멈추었으나 곽재우는 멈추지 않았다.
“적이 들어오면 내 집이 불타고 내 고을이 불탈 수도 있소. 허나 왜적과 정면으로 싸워서는 안 되오. 김해에서 그랬듯이 패할 뿐이오.”
“우리 오위 군사들을 그리 가볍게 보지 마시오!”
신립이 두 손으로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섰다. 다른 이들은 당황했지만, 곽재우와 정인홍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야인이건, 왜인이건 우리 군사들 앞에 적수는 없소. 우리 오위군은 이곳 청도에서 하루 쉬고 내일 아침 남으로 내려갈 예정이었으니 본관은 그대로 시행할 거요. 도체찰사께서 합당한 이유 없이 군령을 바꾸지는 않으시리라고 확신하오.”
“대감, 부디 참으시라고 그리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역시 제가 안에 들어갔어야….”
“아닐세. 필요한 행동이었어.”
신립의 격한 대응 덕분에 오위는 본래 예정대로 남하하기로 되었다. 일단 밀양을 거쳐 양산 쪽으로 움직이면서 적을 쳐서 예봉을 꺾고, 그 뒤에 적의 전체적인 규모와 기세를 살펴 다시 움직일 방향을 결정하기로 했다.
도대장들 휘하의 속오군은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 오위가 움직이기에도 빠듯한 도로가 더 혼잡해지기만 할 뿐이고, 집결하는 데 시간이 또 걸린다 해서 오위만 내려가기로 했다.
“저들이 말하듯이 우리가 아예 대구까지 물러서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대구 이북은 지킬 수 있겠지. 대구 이동에는 대군이 제대로 북상할 만한 길이 없으니까. 하지만 대구 이서는 어찌 지킨단 말인가? 적이 경상우도를 지나 전라도에 있는 십만 왜적과 합류한다면?”
“저들은 그러지 못하게 길을 끊고 적을 배후에서 치면서 괴롭히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신립의 고함은 전각 밖에서도 다 들렸다. 덕분에 밖에서 기다리던 김여물도 마치 회의장에 있었던 것처럼 군의 내용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자네도 북방에서 겪어보았을 텐데? 야인들이 우리를 상대로 행동한 바가 저 향군장들이 말한 바와 같았네. 우리 치중대를 공격하고 우리를 배후에서 기습했지. 하지만 우리가 함정을 파고 호송을 강화하니 적이 기습해도 시체만 쌓을 뿐, 우리는 피해가 거의 없지 않았나.”
북방에서 신립은 야인들의 습격으로부터 보급선을 지키는데 무척이나 공을 들였다. 김여물 역시 그 임무를 수행했었다. 자신이 야인들을 상대로 보급선을 지키는 과업에 성공했었는데, 왜군이라고 해서 실패하라는 법이 있는가?
“게다가 남도 속오군은 야인들 만한 전투경험도 없지 않은가! 농투성이나 유생들을 끌어다 활 쏘는 연습 정도나 겨우 했을 텐데, 그런 자들로 정예한 왜적의 보급선을 끊는다고?!”
신립이라고 왜군에 대해 모르는 게 아니다. 왜별기와 습전(習戰)도 해보았고, 왜군의 특징에 대해서도 사마유에게 수차 들었다. 군사에 대해서 실제로는 쥐꼬리만큼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아는 척하는 시골 선비 나부랭이들과 말다툼하기가 죽고 싶을 만큼 싫었을 뿐이다.
“그야 속오군으로서는 그 이상을 시도할 수조차 없지 않습니까. 좌대장 곽재우가 하는 말도 맞는 것이, 속오군으로서는 왜군을 상대로 산성에 들어가 버티거나 매복했다가 기습하는 외의 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까지 그렇게 움직이라 하니 개탄할 수밖에.”
신립은 쓰러지듯이 의자에 앉았다. 늦기 전에 움직여 적을 쳐야 하는데, 그 심정을 깨닫지 못하고 여유를 부리는 자들이 답답할 뿐이었다. 신립이 왜 조급해하는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김여물이 조심스럽게 신립을 탓했다.
“장마 이야기는 왜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감께서 장마를 언급하며 싸움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면 도체찰사께서도 대감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셨을 겁니다. 원체 영민하기로 유명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렇게 영민한 양반이 꼭 말해 줘야 그걸 안단 말인가? 왜 스스로 깨닫지를 못해? 그것도 바로 이 경상도 사람이!”
신립이 신경질을 냈다. 그가 결전을 서두르는 결정적인 이유가 장마였다.
벌써 5월 중순이다. 차라리 올해도 가뭄이 들었다면 좋았겠는데 올해는 비가 평소처럼 아주 잘 내렸다. 그 말인즉슨 늦어도 5월 하순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리였다.
남쪽 지방은 그동안 오위가 주로 활약한 북방보다 훨씬 비가 많이 온다. 비가 내려서 땅이 물러지면 오위의 핵심 전력인 기병이 활동에 심각한 지장을 받는다. 아무리 남도가 북방보다 평탄하지 않다지만, 기병이 활동할 정도의 전장은 있었다. 기동로가 제한될 뿐이다.
기병이 움직이지 못하는 공백을 보병으로 메우려고 해도 한계가 있다. 활과 조총도 장마가 닥치면 운용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일찍이 태조대왕께서도 사불가론을 내세워 전조가 시도한 요동 정벌을 반대하셨었지. 이미 지금도 활이 평소 같지 않은데, 계속 비가 내리는 장마철이 오면 어찌 풀어지지 않겠는가? 또 조총은 불을 댕겨야 하는데, 빗속에서 어찌 불씨를 지키며 화약을 마르게 보존하겠는가?”
다른 화포나 신기전도 마찬가지다. 기병도, 활도, 화포도 제 몫을 못 한다면 보병이 창칼로 직접 맞싸우는 수밖에 없는데, 오위라 해도 적과 창칼로 싸워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이제 장마가 시작되면 적어도 한 달은 적과 제대로 싸울 수 없다. 대구성이야 성벽 위에다 왜식으로 판자지붕을 얹어놓아 활과 총포를 쏘는 데 지장이 없겠지만, 다른 곳에서는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사가 하나도 없을 터였다. 신립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우리 군사들은 지금 한껏 사기가 올라 있네. 그 사기를 유지하게 해주는 상징 중 하나가 언제나 용맹하게 싸우고 적을 겁내지 않는 호랑이 도총관, 바로 내 모습이지. 그런 내가 고작 날씨 따위를 두려워한다고 하면 과연 군사들이 지금처럼 나를 신뢰하겠는가?”
김여물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대감, 날씨는 천리(天理)입니다. 사람이 움직일 수 없는 바를 두려워함이 실로 자연스럽지 어찌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군사들에게 장마 이야기를 하소서.”
“아닐세. 왜적도 장마가 닥치면 활과 총을 쓰지 못함은 우리와 같으니, 싸움을 삼갈 것이네. 그 전에 적의 예봉을 적어도 한 번은 꺾어 밀양 이북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해야만 상감께서 원군을 보내주실 때까지 적이 함부로 진출하지 못하게 할 수 있네.”
신립도 이제 장마가 오기 전에 단 한 번 결전으로 왜적을 섬멸할 수 없음은 알았다. 하지만 적이 흩어져 있는 동안에 하나씩 쳐부수고, 이로써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동래 일대에 모여 있도록 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군사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비가 온 뒤라면 모를까, 비가 오기도 전에 ‘비가 올 테니 어차피 적을 섬멸할 수는 없다’고 선언할 수는 없네. 우리 군사들은 적을 섬멸할 수 있다고 믿어 사기도 높으니, 지금이야말로 전력으로 싸워 적을 물리칠 기회일세.”
“알겠습니다.”
처음 따라올 때만 해도 귀찮은 잔소리꾼으로 여기던 김여물이, 어느새 신립에게는 진중에서 유일하게 속을 터놓는 사람이 되었다. 김여물로서는 부디 신립이 바라는 대로 일이 풀리도록 기원하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