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499
2부 27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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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라는 작자가 그동안 벌인 짓을 보라! 지난 십여 년, 수많은 백성이 강제로 북방으로 끌려가고, 북쪽 오랑캐의 희생물이 되어 수없이 죽어가지 않았더냐! 세 차례 난리를 겪으면서 얼마나 많은 백성과 군사가 희생당했는가!”
너무도 기가 막힌 상황이다 보니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역도 임해군이 임금을 향해서 격한 비난을 퍼붓고 있건만, 오위 예하 5만 병력 전원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비현실적이어도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이 벌어진 탓이다.
“힘없는 백성은 전가사변으로 끌어내고, 고귀한 이들은 족친위로 끌어내고, 가난한 이들은 몇 푼 안 되는 재물을 미끼로 도감군에 끌어내어 전쟁에 미친 폭군이 바로 금상이로다! 무릇 군왕이라면 만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데 매진해야 하거늘, 어찌 군비에만 열중할 수 있느냐?”
분명히 조선이 요 몇 년 사이 전쟁을 자주 치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상대에게 이쪽에서 먼저 싸움을 건 적은 한 번도 없다. 매번 먼저 공격한 건 상대방이었다.
제일 먼저 부여주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해서부 야인들은 부여주를 노략질하러 두 번 쳐들어왔다. 마지막으로 지금 왜놈들이 쳐들어왔다. 매번 전쟁 때마다 가장 선두에 서서 나가 싸웠던 여기 오위군 소속 장졸들이야말로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외침이 이토록 잦은데 어찌 군비를 증강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런 사정을 모르지도 않을 인간이, 그것도 종친이라는 작자가 저따위로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도체찰사 유성룡부터 일개 군졸들까지 입을 딱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군비에만 열중하는 임금은 일찍이 수나라 양제가 걸어간 길을 그대로 반복할 뿐이라, 이에 나 임해군이 의로운 이들과 힘을 합쳐서 일어섰노라! 거기 있는 그대들은 모두 내 옆에 서라! 이제라도 폭군을 버리고 대업에 동참하면 마땅히 큰 상이 있으리라!”
당황해서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종사관 김여물의 눈에, 도총관 신립이 천천히 말을 몰아 대열 앞으로 나가는 광경이 보였다. 임해군이 계속 소리를 질렀다.
“도총관 신립에게 고한다! 내, 그대의 충심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알아주지 않는 임금에게 충성을 바친들 무엇을 하는가? 임금이 그대에게 병조판서를 내렸나, 영의정을 내렸나? 품계만 올려주면 무엇을 하는가! 내게로 오라! 내게 오면 그대를 당장 영의정으로 명하리라!”
인근에 모여 있던 오위군 장졸들의 시선이 신립에게 향했다. 뜻밖에도, 분명히 머리끝까지 분노하고 있어야 할 신립의 얼굴에 웃음이 서려 있었다. 말을 몰아서 십여 보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기까지 했다. 마치 임해군의 제안을 수락하려는 듯이 말이다.
뜻밖의 모습에 모두가 어처구니없어하고 있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이 역적놈의 새끼야!”
벽력같은 고함이 벌판 전체를 울렸다. 다음 순간 신립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는 활과 통아, 편전이 들려 있었다.
“으악!”
임해군 바로 옆에 서서 대신 소리를 지르던 거한이 얼굴에 편전을 맞고 그대로 뒤로 자빠져 안장에서 떨어졌다. 임해군은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집어던지고 잽싸게 말 등에 엎드려 줄행랑을 쳤다. 신립은 오십여 보 정도 앞으로 달려나가다가 말을 세워 되돌아왔다.
“제기랄, 너무 흥분해서 손이 빗나갔군!”
신립이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활을 활집에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전군에 전투를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신립의 말이라면 뭐든지 곧바로 수행하는 태도가 몸에 밴 다섯 부총관은 당장 각자 담당하는 각 부대로 흩어져 군사들에게 필요한 지시를 내렸다.
“대감, 이제라도 군사를 물리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신립이 임해군에게 편전을 날리고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야 정신이 든 김여물은 전투를 당장 치르기보다는 미루자고 진언했다. 그는 지금 적과 싸우기가 영 내키지 않았다.
“이미 궁기병이 두 차례 돌입하면서 적진을 살피지 않았습니까? 왜적이 제대로 된 기병과 싸워본 적이 없다 하나, 지금 저들이 만들어놓은 방어진은 그저 철기로 들이친다 해서 쉽사리 뚫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포격도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대포로 싸움을 끝내려면 도감군 총통위가 가지고 다니는 것 같은 대완구와 진천뢰, 화차가 필요했다. 그런 게 있으면 울타리를 송두리째 날려 보내거나 불태울 수 있었다. 야포가 쓰는 척탄으로 울타리 파괴는 역시 무리였다.
“적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하나, 지금은 불리합니다. 일단 물러서서 밀양성을 지키면서 다음 기회를 노리시지요.”
“저쪽에 임해군, 아니 역적 이진이 있는데 어찌 물러난단 말인가!”
신립이 고함을 쳤다. 김여물은 순간적으로 신립이 역도 임해군의 멱을 따겠다고 단신으로 왜군 진영에 뛰어들려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럴 정도로 험악한 기세였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임해군이 신장의 위협에 억지로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이니, 이것도 당연하리라.
“하지만 대감, 역적 하나를 잡겠다고 5만 군사들의 목숨을 걸 수는….”
“바로 그 역적놈의 목에 우리 5만 군사들의 목숨이 걸려 있단 말일세!”
신립이 노호성을 발했다. 김여물은 잠시 흠칫했지만, 신립의 말이 바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감. 물론 역도를 벨 수 있으면 베어야겠지만, 사정이 되지 않아 베지 못했다 해서 설마 주상께서 오위 전원에게 벌이라도 내리시겠습니까? 금상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 임금은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신하들을 다그치지는 않는다. 능력이 있는데도 제대로 처리를 못 하는 사람은 나무라지만, 하늘의 뜻이 따르지 않은 까닭으로 실패한 이들을 붙잡아 질책하지는 않았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임해군, 아니 역도 이진 그놈은 우리 오위군 규모를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네. 자네는 잊었는가?”
“그, 그야….”
김여물도 임해군이 왜국에 가기 전까지 족친위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족친위가 오위 소속 별위(別衛)라는 사실도. 당장 여기도 족친위 병력 2천이 와있지 않은가.
“놈이 눈이 있다면, 지금 자기 눈앞에 있는 우리 병력이 오위군 거의 전부라는 사실을 이미 신장에게 고했을 테지. 그러면 적은 밀양강 좌우에서 길을 막고 있는 우리 군사가 허울뿐인 의병(疑兵)이라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챌 테고!”
“그, 그러면….”
김여물이 이를 딱딱 부딪쳤다. 왜군이 무슨 짓을 할지 그도 짐작이 간 까닭이다.
“아까 사자로 왔던 신장의 동생이 말하길, 상세한 위치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여기 삼랑진에만 왜군 십만이 있다고 했다지? 그중에 5만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철군을 방해하고, 나머지 3만으로 곧바로 밀양성으로 달려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그대로 갇히는 거야!”
밀양강 좌안에 있는 2천 병력이 무너지면 밀양성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지금 오위군이 들어온 산길 입구가 막힌다. 그렇게 되면 서쪽 덕대산 밑을 지나 창녕으로 물러나는 수밖에 없고, 밀양을 통해 대구로 가는 길을 그대로 적에게 내주게 된다.
“그것도 적이 우리가 순순히 물러나게 둘 때 이야기지. 저 위에서 우리 일거수일투족을 다 내려다보고 있는 왜놈들이, 우리가 진을 물리고 2리 반을 물러나는 동안 가만히 있겠는가?”
“기대하기…힘들겠지요.”
북방처럼 험하지 않은 남도의 산이라지만 산은 산이다. 그 산길을 5만 대군이 지나야 한다. 신장이 바보가 아니라면 고이 보내줄 리가 없다.
“고로 우리에게는 당장 저 산에 올라가는 외에는 다른 길이 없네! 저 산을 점령하면서 왜군 본대를 쳐부순 연후에야 적 잔적을 소탕하든 밀양성으로 물러나든 할 수 있네. 우리가 여기에 있는 한은 저들이 우리에게 전력을 집중하고, 밀양성을 치러 가지 않을 테니까.”
신립은 김여물에게 자기 결심을 설명하면서도 출전을 준비한 각 군영을 점검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준마를 탄 신립이 모든 군영을 돌았다.
야포 48문은 산 위에 있는 일본군 진지를 향해 발포할 준비를 마쳤다. 포병 외에 보병 3만 명은 양쪽 날개로 편성하고, 5천은 후군으로서 포대를 엄호하고 예비대 역할을 맡는다. 기병 1만은 고지를 향해 돌격할 틈을 노리며 중앙에서 대기했다.
태세를 살피고 고개를 끄덕인 신립이 환도를 뽑았다. 중천에 뜬 햇빛이 칼날을 반짝였다.
“충용스러운 오위 군사들이여! 주상전하께서 너희를 비롯한 만백성에게 베푸신 은혜를 잊지 말아라! 너희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정병이다! 오늘 역도와 왜적을 상대로, 너희들이 왜 조선 제일군인지 보여주도록 하라!”
신립의 호령에 응해 폭풍 같은 함성이 천지를 울렸다. 김여물이 전한 신립의 결심을 듣고, 이 모습까지 보면서 결전을 피할 수 없으며 신립이 선두에 서는 것도 말릴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달은 유성룡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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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마스의 설득도 실패한 참에 임해군이 다시 시도한다고 해서 신립이 투항하리라고 믿은 이는 거의 없었다. 임해군이 시도한 ‘설득’은 사실 설득이 아닌 도발이었으나, 신립은 여기에 걸려들지 않았다. 격장지계는 실패했고 하마터면 임해군까지 잃을 뻔했다.
임해군이 살아난 건 가장 빠른 말을 골라서 타고, 갑옷도 입지 않아 무게를 줄인 덕분이다. 나는 듯이 달린 말 덕분에 신립이 두 번째 화살을 날리기 전에 사정권을 벗어날 수 있었다. 신립이 성격이 격하다기에 계속 따라붙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는 않았다.
“신립도 이순신처럼 남만갑을 입었군. 조선군 총대장들은 다 남만갑을 입는 모양이지.”
혹시나 했던 일이라 기대도 크지 않았다. 언덕 뒤쪽으로 말을 달려가는 임해군을 심드렁한 태도로 바라보던 노부나가가 근습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결전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좌익과 우익에 일제히 진격 명령을 내려라! 이 산을 노리고 올라오는 적 주공을 포위, 후방을 차단하고 섬멸한다. 이를 방해하는 적 좌우익도 저지한다!”
조선군의 움직임을 보니, 보병으로 산 좌우에 있는 일본군 좌우익을 견제하면서 기병대를 산 위로 돌입시킬 계획인 듯했다. 임해군이 말하기를 조선 기병은 이 정도 경사도 문제없이 올라올 수 있다고 했으니,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하리라. 비장의 수단을 쓸 때다.
“봉화를 올려라! 대기하고 있는 초소카베군과 타치바나군에게 출격 명령을 내려라.”
노부나가가 보루를 세운 이 산에는 조선인들이 만들어둔 봉수대가 있었다. 일본군을 보고는 모두 도망쳤는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놓고 간 설비는 일본군이 잘 쓰게 되었다. 이 일대 어디서든 시야에 들어올 만큼 시커멓고 굵직한 연기가 곧 기둥을 이루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노부나가는 그 시커먼 기둥을 바라보면서 온몸에 활력이 넘치는 듯했다. 전장에서 이만한 대군을 움직이며 적과 싸우는 게 도대체 몇 년 만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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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 대열이 앞으로 나가자 고지 위에 있는 왜군의 화포도 불을 뿜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쏘는 포탄은 터지지 않는 철환일 뿐이지만, 직접 맞기만 하면 사람의 몸 대여섯 정도 뭉개고 지나갈 만한 위력은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피해도 커졌다. 작은 포도 불을 뿜기 시작했다.
“포군은 저놈들을 때려잡지 못하고!”
적은 화포 앞에 담을 쌓았다. 그래서 척탄이 포구로 정확하게 들어가야 잡을 수 있었다.
“잡았구나!”
전진하던 보병 대열 사이에서 환성이 올랐다. 왜군 대포 하나가 폭음과 함께 하늘로 치솟는 광경을 본 탓이다. 필시 척탄이 터지면서 옆에 쌓아둔 화약을 인화시킨 게 분명했다. 화약이 터지면서 화포 근처의 울타리도 한꺼번에 날아갔다.
“침착하게 계속 진군하라!”
장수들, 군관들이 호령했다. 적과 충분히 가까워지기까지는 걸어야 한다. 충분히 가까워진 연후라야 1만 8천 장창수가 돌격할 수 있다. 강선조총으로 무장한 6천 조총수와 6천 궁수가 총탄과 화살을 쏘아 적진을 제압한 연후에 말이다.
왜군이 창 쓰는 재주에서 이쪽보다 더 뛰어나다고 알고는 있다. 하지만 척탄을 쏘는 야포와 저들 것보다 우수한 활, 조총이 지원하고 있으니 일방적으로 밀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포대에 신호를 보내라!”
기병 하나가 후방으로 달려가 신호기를 흔들었다. 곧 야포 48문 중 24문이 표적을 산 위에 있는 적진에서 아군 보병과 곧 격돌할 왜군 대열로 바꾸었다. 척탄이 날아가 터지면서 파편에 맞아 쓰러지는 왜병들이 똑똑히 보였다.
“150보(180m)다! 전군 정지! 사격 준비!”
호령이 떨어지자 조총수들이 일제히 무릎쏴, 서서쏴 자세를 취했다. 궁수들은 그 뒷줄에서 하늘을 향해 화살을 겨누었다.
“쏘아라!”
호령과 함께 조총 6천 정, 각궁 6천 장이 일제히 총탄과 화살을 적진으로 날렸다. 희뿌연 초연이 조선군 대열을 감싸고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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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이 겁을 먹었나? 저리 멀리서 철포를 쏘다니.”
노부나가가 자리를 잡은 산꼭대기 봉수대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철포가 도무지 맞을 만한 거리가 아닌데 벌써 쏘는 적이 가소로웠던 탓이다.
철포로 사람을 겨누어 쏘려면 지금 양군이 벌리고 선 거리를 ⅓ 정도로 줄여야 한다. 지금 정도 거리에서 철포를 쏘면, 맞았을 때 죽기는 하겠지만 거의 안 맞는다고 보면 된다. 동래성 싸움에서 본 조선 철포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선 활이 강력한 거야 이미 확인했지만 말이다.
“적이 화살로 계속 공격했다면 도리어 난감했겠습니다만, 철포를 쓰니 도리어….”
“아니잖아, 멍청이들아! 우리 진영을 똑바로 보란 말이다!”
노부나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측신들은 시선을 낮춰 조선군과 대치하는 자기편 병사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 일제사격으로만 적어도 수백 명이 쓰러진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아니, 어떻게 저런 일이?”
“신립군은 정녕 조선 최정예가 맞는군. 저 거리에서 열 발 중에 두 발을 맞추다니.”
포격에 총격, 화살 공격까지 덮어쓰는 자기 병사들을 본 노부나가가 손에 들고 있던 부채로 봉수대를 둘러싼 돌벽을 후려쳤다. 지휘봉 노릇을 하는 부채가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대나무 파편이 튀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맞다가는 우리가 밀린다. 전진하라! 적이 활과 철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난전으로 몰고 가라!”
“예, 주군!”
일본군 좌익과 우익에는 각각 2만 병력이 대기하고 있다. 본진에도 2만이 있으니 이만하면 적과 난전으로 들어가기에는 충분하다. 신립군이 아무리 정예라고 해도, 창칼을 맞댄 근접전 상황이 되면 분명히 일본군에게 밀리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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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연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데.”
신립은 봉수대 위에서 아까부터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저 산에 조선 봉수군들이 있을 리는 없으니 필시 왜적들이 피웠으리라. 그리고 지금 연기가 오른다는 말은 적들이 뭔가 신호를 보낸다는 뜻이다.
“놈들이 복병을 두었나?”
눈앞에 보이는 적은 5만 명가량이다. 좌우익에서는 보병 4만이 함성을 지르며 아군을 향해 다가오고 있고, 산 위에 있는 놈들도 만 명은 되어 보인다. 하지만 언덕 후사면에 있는 놈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밀양강 쪽에 있는 놈들은 수를 알 수가 없다. 산만 넘으면 밀양강이다.
“종사관! 포대를 지키고 있는 부총관 조흥연에게 명하여 동쪽 산자락에 경계를 집중하도록 하라!”
“예, 대감!”
포대가 있는 후진에는 도체찰사인 유성룡과 도순찰사 김성일도 있다. 김성일이야 뭐가 됐든 상관없지만, 영의정을 겸하고 있는 유성룡은 꼭 지켜야 하는 중신이자 상관이었다. 여차하면 두 사람을 따로 빼서 도망시키기 위해 부마인 사노부를 붙여 두었다. 그 역시 중요하니까.
“조총수들은 다가오는 적에게 한 번 더 방포 후 후퇴하라!”
지금 조선군에서는 강선조총을 120보(144m) 거리에서 쏘는 것으로 정해두고 있다. 대열을 이룬 싸움에서는 그 이상 멀어지면 명중률이 떨어지고, 어차피 적이 가진 총은 사거리가 이쪽 총보다 반도 안 되기 때문이다. 명나라제든 일본제든 간에 말이다.
게다가 발사속도 문제도 있다. 강선조총을 장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활강조총보다 짧지만, 초연이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에는 차이가 없다. 눈앞이 보여야 총을 쏘든지 말든지 할 게 아닌가. 어차피 한 발 쏘고 나면 적이 눈앞까지 달려온다면, 좀 더 가까이서 쏘는 게 낫다.
하지만 오늘은 적이 워낙 많다 보니 좀 멀리서부터 쐈다. 그리고 역시 명중률이 떨어졌다.
“중군 돌입 준비!”
호령한 신립이 말에 올랐다. 오전에 두 번 궁기병만으로 강습했을 때는 아직 결심을 굳히지 못한 탓으로 포격도 약해서 울타리를 많이 부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포수들도 포를 쏘다 죽을 각오로 퍼부어댄 결과 꽤 여러 곳이 부서졌다. 화약이 유폭해서 날아간 곳도 있고.
“역시 하룻밤 새 만든 울타리가 그렇게 튼튼할 리 없지.”
돌격하면 돌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한층 더 굳어졌다. 휘하의 창기병 5천, 궁기병 5천은 조선 최정예다. 저 정도 산줄기는 쉽게 타고 오를 수 있다. 평지보다야 느리겠지만.
“족친위도 뒤를 따르라! 신장의 목, 그리고 역도 이진의 목을 치자!”
1만 1천 기병이 함성과 함께 산마루를 향해 전력으로 치달았다. 울타리 뒤에 웅크리고 있던 왜병들이 총과 활을 쏘아대기 시작했고, 몇몇 재수 없는 기병이 땅바닥을 굴렀다. 궁기병들이 왜적에 맞서서 제압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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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군,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시고 지금은 잠시 몸을 피하시는 게 어떨지요.”
노부나가 주변을 둘러싼 측근 신하들이 몸을 피하기를 권했다. 조선군 기병들이 산자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말을 타고 저런 재주를 부린다는 것도 대단했지만, 앞을 막으려는 일본군 병사들을 해치우면서 그런다는 게 더 훌륭했다.
물론 수비대로 배치한 병사들이 조선군이 쏘는 화포와 화살 세례를 받아 상당한 손실을 본 상태에서 적군이 밀고 들어온 탓도 크다. 양측 장창병들이 접전을 시작하면서, 공격할 대상을 잃은 조선군 활, 대포, 철포가 모조리 산자락을 향해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오전에는 이 정도로 맹사격을 받지 않았다. 일본군 측에 오전처럼 멀쩡한 새 병력을 방책에 투입해 수비대를 교체할 틈이 있었다면, 이렇게 밀리진 않았으리라. 남만포 정도로는 조선군 진격을 저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측신들이 피하라고 재촉하는 게 무리가 아니다.
“아니, 여기 있겠다. 저 방어진을 거의 돌파해내다니, 조선 기병이 강하기는 강하구나. 지금 저놈들이 노리는 건 내 목이겠지? 내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베었을 때처럼.”
노부나가가 잠시 옛 추억을 떠올렸다. 정확히 30년 전에 있었던, 순전히 운이 좋아서 이긴 싸움이지만 그 뒤로 확고한 패업을 이루는 발판이 되었던 오케하자마 전투 때의 일을.
“의자를 가져오너라. 어디 여기까지 올라오는 놈이 있는지 기다려 보겠다.”
기겁하도록 놀란 측신들은 노부나가에게 제발 선에서 내려가라고 애걸했다. 하지만 주군인 노부나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상을 팍 찌푸린 채 앉아서 적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슬금슬금 밑에서 올라온 임해군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옆에 가서 섰다.
다음 순간 날아든 화살 하나가 근습무사 한 사람의 가슴에 박혔다. 어서 방패를 가져오라며 주변에서 난리가 났지만, 노부나가는 마치 돌부처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벌레 씹은 얼굴로 자기 눈 앞에 펼쳐진 전장을 내려다보았다.
– 26 –
유성룡은 불안감 가득한 얼굴로 적진을 향해 천리경을 움직였다. 신립은 임금에게 하사받은 은빛 남만갑을 입고 있어 그 움직임을 좇기도 쉬웠다. 쳐죽인 적병의 피가 튀어 갑옷이 점점 더러워지고 있지만, 아직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저러면서 용케 안 죽는단 말이지….”
북변에서부터 신기했다. 저렇게 선두에서 날뛰는데도 도대체 싸움에서 죽거나 크게 다치는 법이 없었다. 적이 날리는 화살이나 휘두르는 창칼이 알아서 신립의 몸을 피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헉! 저런!”
조총탄에 맞았는지 신립이 크게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신립은 멀쩡한 상태로 시복에 꽂힌 화살을 뽑아 그대로 적을 향해 날렸다. 아마도 자신을 쏜 왜적 조총병을 쏘았으리라.
“여해도 저런 갑옷을 입어 정말 다행이로다.”
저 먼 남쪽 바다에서 역시 저런 갑옷을 입고 싸우고 있을 친구 생각이 났다. 대구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수군은 이미 왜선 수백 척을 분멸했다고 했다. 왜적을 모두 물리치자면, 앞으로 더욱더 많은 왜선을 쳐부숴야 하리라.
어쩌면 보병이 적 보병과 대진하는 사이 신립이 정말로 적 보루를 깨트리고 봉수대를 도로 빼앗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오위 기병들은 잘 싸웠다. 화살로 적을 꿰뚫고 편곤으로 머리를 짓부쉈다. 창과 칼은 사지를 토막 내고 창자를 후벼팠다.
“왜적이다! 동쪽에서 왜적이 나타났다!”
유성룡이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밀양강으로 넘어가는 동쪽 산길을 따라 수천 명은 족히 될 왜군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후군 병력 5천으로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후방에서 적의 복병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삽시간에 유성룡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게 했다. 지금 중군이 거침없이 적을 짓밟으며 올라가는 건 야포가 지원사격을 해준 덕이 크다. 이게 끊긴다면, 그리고 만약 적이 포를 빼앗아 아군 등 뒤에 쏜다면…?
“포를 동쪽으로 돌려라! 척탄을 얼른 쏘아버리고, 조란환을 장전하라!”
포를 다루는 군관들이 급히 외쳤다. 포대를 지키는 아군보다 수가 많은 적군을 상대하려면 포를 돌리는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교범에 따라 포구에 화약을 뭉쳐 넣고 불을 댕겨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진짜 최악의 경우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유성룡과 김성일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사노부가 다가와 두 사람에게 말 옆으로 오라고 했다. 그는 초소카베군이 강함을, 그리고 조선군 후군이 저들을 막지 못할 공산이 크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았다.
– 27 –
“고작 크지도 않은 산 하나 넘는데 뭐가 이리 오래 걸렸단 말이냐?”
마침내 산줄기 사이로 나타난 초소카베군을 본 노부나가는 나무라기부터 했다. 그만큼 그가 총대장으로 지휘하는 2만 병력이 절실했던 까닭이다.
벌판에서 벌어진 양측 보병 주력의 대결은 이쪽이 우세를 점하긴 해도 압도하지는 못했다. 산비탈에서는 미쳤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의 뒤를 치는 별동대가 적 후군을 제압하고 보병들을 배후에서 친다면 전세를 일거에 뒤집을 수 있다.
“초소카베는 왔고, 타치바나는 왜 늦는 거지?”
“아마 산에 가려서 안 보일 뿐일 겁니다.”
초소카베군 2만 못지않게 타치바나군 5천도 중요하다. 어서 저들이 도착해야 조선 보병도, 기병도 모두 섬멸할 수 있을 게 아닌가.
조선 기병들은 정말 미친 듯이 날뛰면서 산자락을 기어오르고 있다. 조선 대포들이 사격을 멈춘 덕에 지원병력 투입이 좀 쉬워졌지만, 수천 기나 되는 조선 기병들을 상대로 싸우기는 지극히 어려웠다. 꼭대기로 날아드는 화살도 늘어나 근습무사 한 명이 또 목숨을 잃었다.
정규 아시가루뿐 아니라 신분 상승을 노리는 짐꾼들도 악착같이 적에게 달려들었다. 불리한 지형 탓에 쓰러지는 기병들도 많았지만, 일본군 시체도 겹겹이 비탈에 쌓였다.
“타치바나군만 도착하면 적은 무너진다. 이제 조금만 더 견디면 끝난다.”
노부나가는 굳은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정말이지 신립군과의 싸움에서 이 정도까지 고전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28 –
“대감, 후군에 적이…!”
신립이 걸친 남만갑은 이제 처음의 광택을 발하지 않았다. 전신이 왜병의 피로 젖어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말도 한 번 갈아탔다. 다행히 달릴 때가 아니라 멈춰 있을 때 창에 찔린 덕에, 낙마할 때 어디 뼈가 부러지는 수치는 면했다.
“역시 동쪽에 매복이 있었나!”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혹시나 했던 대로였다. 수천 명이 넘는 왜군이 동쪽 길에서 나와 후군을 공격하고 있었다. 후군은 예상을 뛰어넘는 적 규모에 놀라 흔들리고 있었다.
“후군을 구원하러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하러 가기는 이미 늦었다! 그리고 지금 돌격을 중단하면 죽도 밥도 안 되느니라!”
피와 시체로 비탈을 덮으면서 산꼭대기까지 7부 정도 올라왔다. 지금 포기하고 내려간다면, 다시는 이 비탈을 올라올 수가 없다. 병력도 줄었고 모두 지쳐 있다. 그리고 갈아탈 예비마는 밀양성에 놓고 온 것이다.
“어떻게든 후군이 버티는 동안에 산에 올라 적의 보루를 부수고, 역도 이진과 왜추 신장의 목을 베어야 한다! 그러면 후군도, 좌군과 우군도 구할 수 있다!”
좌군과 우군은 사격전에서는 우세했으나 단병접전이 시작되고는 확실히 밀렸다. 백 년 동안 창칼을 휘두른 왜적과 창칼로 대적하기는 역시 무리였다. 게다가 창대끼리 부딪치면 오위군 쪽에서 든 창은 중간이 부러져 버리기도 했다. 휴대성을 높인 분리식 장창의 단점이었다.
하지만 양쪽 다 아직 패하지는 않았다. 봉수대까지 올라가기만 하면, 지친 말로도 내리치는 힘으로 아래쪽 적을 분쇄할 수 있다. 마침내 신립이 탄 말이 피가 흐르는 말발굽을 꼭대기에 얹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꼭대기에도 수많은 왜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창날이 숲을 이루고 총성이 울리며 화살이 날았다. 보루 안에 틀어박혀 총을 쏘는 놈들도 있었다.
신립과 군사들도 치열하게 싸웠다. 바깥에 있는 적은 단병기나 활로, 보루 안에는 척탄을 넣어서 공격했다. 궁기병 중 일부가 척탄 두어 발과 이를 점화할 화로를 휴대하고 있었다. 또 아직 아래 비탈에 남아서 싸우는 병사들도 많았다.
한시라도 더 빨리 해치우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참에 벌판 아래쪽에서 왜군이 지르는 거센 함성이 들렸다. 무의식적으로 돌아본 신립은 절망적인 기분이 되고 말았다.
또 한 무리의 왜군이, 이번에는 북서쪽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북동쪽에서 공격해오는 적을 막느라 사력을 다하고 있는 후군을 배후에서 직격했다. 후군이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미 늦었단 말인가! 내 오위군이…내 오위군이…!”
왜병들은 아직도 언덕 뒤편에서 끊임없이 올라왔다. 이대로 싸워 산꼭대기를 탈환하더라도 그때쯤이면 후군, 좌우군이 연쇄적으로 무너질 판이었다. 당장이라도 말머리를 돌려 내려가서 포위망이라도 뚫어야 할 판국이었다.
“아니, 역도 놈이 아닌가!”
저편, 봉수대 석벽 뒤에 임해군이 보였다. 당장 남은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이런, 약삭빠른 놈 같으니!”
임해군은 잽싸게 석벽 아래로 몸을 숙여 피했다. 목표를 잃은 화살은 대신 그 뒤에 서 있던 화려한 갑옷을 입은 왜장의 어깨를 맞혔다.
다음 순간 그 왜장을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왜장과 왜병들 사이에 대소동이 일어났다. 자기 화살이 무슨 난리를 일으켰는지 똑똑히 본 신립은 자신이 방금 맞힌 자가 적의 괴수 신장임을 깨달았다. 그렇다. 아직 역전할 기회가 있었다!
“나를 따르라!”
신립은 지금 바로 옆에 있는 기병 30여 기와 함께 봉수대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왜병들도 주군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수백이나 되는 왜병들과 왜장들이 앞을 메웠고, 부하들은 하나하나 창과 총에 맞아 낙마했다. 마침내 신립 홀로 남았다.
“이제 내 차례로구나! 이놈들, 끝장을 보자!”
신립이 또다시 말 옆구리를 걷어찼다. 남은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한껏 휘두르던 창대도 부러졌다. 환도를 뽑아 든 신립이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투구는 이미 한참 전에 잃어버려서, 악귀와 같아진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놈들아, 왜 덤비지 않느냐? 너희가 덤벼야 내가 베어 죽이지 않겠느냐?”
신립을 얕보고 덤비다가 하도 많이 죽어서 저들도 망설이는 모양이다. 이 꼭대기에서 죽인 왜병만 서른 명 이상은 되는 듯하다. 화살도, 조총도 통하지 않았으니 더 덤비기 어려우리라.
고개를 돌리니 신장 주변에 선 왜장들이 뭐라고 권하는데 신장이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이 보였다. 저놈이 화살을 맞고도 아직 저 자리에 있다니, 기회가 있는 셈이다.
적이 멈춘 틈을 타 신립이 다시 신장을 향해 말을 몰았다. 정면에 있던 창병들의 대열이 확 갈라지더니 조총병 스무 명가량이 새로 나타나서 일제히 총을 겨눴다. 다음 순간 총성과 함께 말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왜병들이 신립 대신 말을 향해 사격한 것이다.
땅바닥에 내팽개쳐진 신립이 비틀거리며 일어나자 이번에는 왜장 하나가 창을 겨누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왼손으로 창대를 잡은 신립이 확 끌어당기며 오른손에 든 환도로 적의 목을 베었다. 그 뒤를 이어 달려든 왜병 둘은 한칼에 어깨와 허리를 베어 쓰러트렸다.
그래도 적은 계속 달려들었다. 정신없이 베고 또 베는 중에 억센 손 하나가 발목을 잡았다. 휘청거리는 신립을 향해 이번에는 올가미가 날아들었고, 몇 개는 베어버렸지만 한 개가 처진 왼팔을 얽었다.
환도를 휘둘러 자르는 사이에 뒤쪽에서 날아든 올가미 하나가 목에 걸렸다. 마침내 신립이 뒤로 쓰러지자 사방에서 왜병들이 달려들었다.
– 29 –
“대감! 어서 제 뒤를 따르십시오!”
노부시게는 유성룡과 김성일을 보호하며 사력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그가 거느린 중대원 수도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유성룡의 명령으로 초소카베군 방어에 투입한 덕분이다.
유성룡은 자기 신변을 지키기보다 후군 전체를 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면서 병력을 내보내게 했지만, 노부시게로서는 딱한 노릇이었다. 왜군 수천 명을 뚫고 이들 두 명을 구출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단 마흔 명을 가지고.
이미 후군은 괴멸했다. 노부시게는 두 고관과 휘하 병사들, 그리고 잡다한 후군 패잔병들과 함께 밀린 끝에 좌군, 우군과 합류한 상태였다. 후군은 모든 포를 파기했고, 병력도 절반으로 줄었다. 좌군, 우군 역시 후군이 무너지자 급하게 밀리면서 상당한 손실을 냈다.
산으로 올라갔던 기병들은 후방에 있는 본진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고, 선두에서 돌격을 이끌던 도총관 신립이 쓰러졌음을 알았다. 오위군 군사들에게 있어서 신립이란 존재는 간단히 평할 수 없는 존재인바, 그런 그가 쓰러졌다는 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었다.
결국, 남은 기병 대부분은 보루 공략을 포기하고 산에서 내려와 서쪽으로 이탈했다. 당장 전장을 이탈해 살기 급한 이들이 적에게 포위될 보병들을 구해주기를 바라는 건 과욕이었다. 그 탓으로 노부시게가 안에서 포위망을 뚫는 선두에 서게 된 것이다.
대신, 모두가 탈출할 때까지 뒤를 지키는 역할은 종사관 김여물이 맡았다. 평소 김여물이 보인 인덕에 감복해서 그와 함께 남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선 군사 3천이 종사관과 함께 마지막 후위를 맡았다. 노부시게도, 유성룡도 이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대감! 절대 말에서 떨어지셔서는 아니 됩니다!”
다행히 아직 적은 촘촘한 포위망을 만들지 못했다. 노부시게는 자기 앞을 가로막는 일본군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베면서 길을 열었다. 휘하 병사들도 악귀처럼 활을 쏘며 싸웠고, 서쪽 창녕으로 가는 길을 겨우 뚫었다. 뭐가 터지는지 산꼭대기에서 연달아 울린 폭음 덕도 봤다.
몸을 말안장에 꽁꽁 붙들어 맨 유성룡과 김성일을 서쪽으로 탈출시키고, 노부시게는 남은 기병 중 따로 도망치지 않고 합류한 자들을 긁어모았다. 그리고 부마라는 자신의 신분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이들 4백여 기를 자기 밑으로 끌어넣었다.
“너희 모두 내가 누구인지를 알리라! 너희가 공을 세우면 어찌 내가 모르고, 어찌 주상께서 모르시겠느냐? 도망치지 말고 싸워라! 전하의 백성을 구하는 일이다!”
노부시게는 자기 밑에 들어온 기병들을 독려해 적과 최선을 다해 싸웠다. 포위망 안에 갇힌 조선군을 모두 처리하고, 탈출자들을 쫓아올 여유가 드디어 적에게 생긴 것이다. 김여물과 저 뒤에 남은 3천 명은 끝내 한 명도 도망쳐오지 못했다.
노부시게와 부하들은 왜군 장창병은 화살로 제압하고 궁병대나 조총대는 돌입해서 칼과 창, 편곤으로 해치웠다. 섞여서 몰려오는 적은 활을 쏘아 조총병부터 죽이고 시작했다.
추격대 대부분은 공을 탐해 쫓아온 소부대, 반 이상은 갑옷도 안 입은 짐꾼이었다. 하지만 수가 워낙 많았고, 노부시게군 군사들도 손실이 계속 생겼다. 쏘아죽인 적의 몸에서 화살을 뽑아 써야 할 정도였다.
계속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벌인 이 싸움도 그의 밑에 백여 기밖에 남지 않았을 때 마침내 끝이 왔다. 3천에 달하는 대군이 나타난 것이다. 유유히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간 노부시게가 적의 깃발을 보고 크게 중얼거렸다.
“타치바나군이시로군.”
“그렇소, 나는 타치바나 무네시게요. 우리말이 능숙한데, 그대는 누구요?”
“사나다 노부시게. 조선 국왕의 신하이자 부마요.”
마지막 부하들을 돌아보면서 노부시게가 쓴웃음을 지었다.
“용맹으로 이름 높은 그대를 만나 반갑소만, 길은 열어드릴 수 없소. 이 앞으로 더 가려면, 우리 시체를 밟고 가야 할 거요.”
노부시게 휘하에 남은 기병들은 이제 삶에 대한 미련 따위는 모두 잊었다. 온통 피에 젖은 그들의 행색을 본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됐으니 떠나시오. 이미 전과는 충분히 거뒀고, 곧 해가 저물 거요. 본진의 상황도 수상하니 돌아가 봐야 하는데, 고작 백여 명에 불과한 그대들을 굳이 쫓을 필요도 없소.”
“동정이오?”
“아니오. 그대가 주군을 위해 바치는 충정과 오늘 벌인 분투에 대한 경의요. 만약에 상황이 허락한다면 다음 싸움에서 만나도록 합시다.”
무네시게가 망설일 것 없다는 듯 방향을 돌리자 당황한 부장이 옆으로 붙었다.
“주군, 저 자는 조선 국왕의 사위라 합니다. 그런 큰 전공을 그냥 보내신단 말입니까? 설사 거짓이라 해도 붙잡아서 손해를 볼 일은 없습니다!”
“주군을 위해 위험한 후위 임무를 맡아 저토록 당당하게 싸운 자다. 이미 승패가 갈렸는데 굳이 사사로운 공적을 위해 목을 벨 필요는 없다.”
의리야말로 타치바나 무네시게가 목숨을 거는 최고의 가치였다. 의리를 지키는 자를 존중한다는 신념은 그가 평생을 지켜왔고 앞으로도 지킬 것이었다.
타치바나군이 떠나자 노부시게 역시 말머리를 돌려 창녕 쪽을 향했다. 그가 떠나는 그림자 뒤로, 저물어가는 저녁 햇살을 맞으며 2만 명에 달하는 조선군과 8천여 명의 일본군이 죽은 몸을 차디찬 땅 위에 누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