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506
2부 28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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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 대군이 한강변 백사장을 메웠다. 각 군영에서는 기수들이 자기 군영을 나타내는 깃발을 높이 쳐들었고, 몸에 걸친 갑옷과 손에 든 무기는 하나같이 번쩍번쩍 빛이 났다. 모여든 도성 백성 중 이렇게 많은 군사가 집결한 광경을 생전에 본 사람은 없었다.
“하늘의 도리를 알지 못하는 왜적이 이 땅을 침노하여 크나큰 죄악을 짓고 있도다! 죄지은 자는 마땅히 응징함이 하늘의 도리인지라, 저들을 쳐서 징벌하러 내려가는 우리 군사는 실로 하늘이 돕는 군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니라!”
단상에 올라간 스물하나 젊은이의 여린 몸에 걸친 갑옷과 투구가 어색하다. 노동도, 싸움도 익혀보지 않은 책상물림의 하얀 얼굴과 부드러운 손이 확연히 허약해 보인다. 하지만 목소리 하나만은 천지를 뒤흔들 만큼 우렁차고 힘이 있었다.
“심지어 저 간악한 왜적들은 천자를 쳐서 천지의 질서를 뒤집겠다고 공언하며, 건방진 글월 한 장으로 우리 조선을 그 허황하고 참람한 모의에 끌어넣고자 하였다! 이 어찌 금수의 탈을 쓰지 않고서 자행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도리를 알고 예의를 아는 나라인 우리 조선을, 제 놈들과 같은 수준으로 본단 말이냐?”
그래, 노부나가와 밀약을 맺고 명나라를 공격하는 따위 선택은 고려할 수조차 없었다니까. 분명히 반정이 일어나서 내가 먼저 쫓겨났을 거다. 그래도 참 다행이다. 이 조선이 성리학을, 사림을 키운 덕분에 지금 저렇게 일어나는 신하들이 있어서 말이다.
“저 왜적들이 이대로 난동을 부리게 둔다면, 만백성이 해를 입음은 물론이고 옳은 도리가 힘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이 군자의 나라를 누구보다 앞서 나서 지키는 이는 마땅히 대로를 걷는 군자여야 함이 마땅한 일이다. 누가 감히 군자의 도가 책 속에만 있다 하더냐? 일찍이 옛 성인께서도 군사와 식량과 신뢰를 가리켜 나라를 떠받드는 세 개 기둥이라 하셨느니라!”
저 당당한 모습을 보니, 저 청년이 실제 역사에서 병자호란이 일어나도록 일조한 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용납이 된다. 김상헌 저 친구, 정말 대쪽같은 사람이다.
올해 진사과에 붙어서 성균관에 갓 들어온, 당연히 병역도 면제인 ? 성균관 합격자는 현직 관리로 간주해서 병역을 면제시켜준다 ? 김상헌이 저기에 서서 출전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런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춘부장께서는 실로 군자다운 최후를 맞으신 것일세!”
“이 어찌 실로 사대부의 모범이 아니겠는가!”
사직동에 있는 김여물의 집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선비들로 가득했다. 비록 시신은 없지만, 이제 스무 살인 아들 김류가 상주로서 베옷을 입고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찾아온 이들 중에는 김류와 친분이 있는 젊은 선비들이 많았다. 개중에는 성균관 유생들도 꽤 있었는데, 김류는 아직 성균관에도 들어가지 못했으나 친구들 사이에서는 아무 상관 없는 문제였다.
“그대 춘부장께서는 일찍이 알성시에서 장원을 하신 분이 아닌가. 그런 분께서 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셨으니, 실로 선비의 모범이라 아니할 수 없네!”
술 한 잔 마시지 않았음에도 선비들 사이에서는 목소리가 커지고, 흥분과 탄식이 나타났다. 친구의 부친이자 모범적인 성균관 선배의 장엄한 최후가 그만큼 젊은 선비들의 마음을 흔든 까닭이다.
“그대들은 들었는가! 전하께서도 친정하실 예정일뿐더러, 근래 백성들을 상대로 만이들이 혹세무민하는, 남만교 교도들이 도감군 초모에 무리를 지어 응했다는 이야기를 말일세!”
벌떡 일어선 김상헌이 동료들을 상대로 사자후를 토했다. 두 눈에 불꽃이 일었다.
“저 비천한 석씨(釋氏, 석가)의 무리들도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면 전장에 나가네. 이 나라에 사는 자들이라면 마땅히 져야 하는 군역 때문이지. 하지만 남만교도들은 당장 군역을 지지도 않네. 그런데도 스스로 전장에 나가겠다는 것이야! 전하께 충성하기 위해서!”
몇몇 이가 무력함을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상헌은 더 성내어 목소리를 높였다.
“사대부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림은 하늘이 정한 바이니, 어찌 망설이겠는가? 송을 위해 죽은 이가 바다에 뛰어든 육수부만 있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의병을 일으킨 문천상도 있었네. 사대부의 기상을 중히 여김이 이 조선이 대송보다 못할 것이 무엇인가?”
모두가 찬동했다. 사대부로서 갖는 자부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젊은이들이다.
“여기 관옥(冠玉, 김류의 자)의 춘부장께서도 문 승상에 버금가는 충신이시라 하겠네! 그분 역시 장원급제를 하셨고, 스스로 사지에 남아 수만 군사를 탈출시키셨으니 어찌 그 공이 작다 할까? 공으로는 후학이자 사사로이는 자제의 친구로서, 우리가 그 위업을 어찌 봐야겠는가? 심지어 시골의 한량들과 은퇴한 노신들까지 향군장으로 나서는 지금 이 때에 말일세!”
좌중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어갔다. 김상헌이 토하는 사자후도 점점 기세를 더했다.
“지금은 우리가 명륜당에 앉아 글월이나 읊고 있을 때가 아닐세! 마땅히 공관을 선언하고, 칼을 잡고 활을 들어야 할 때가 아닌가! 공관이란 옳지 못한 일을 접했을 때 하는 것인데, 저 무도한 왜적들의 만행만큼 옳지 못한 일이 천하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나라를 이끌어야 할 우리가, 어찌 석씨들과 만이들과 시골 한량들보다 전하를 따르는데 못할 수 있단 말인가!”
육수부는 남송 마지막 황제 소제의 스승으로, 최후의 전투에서 패하자 황제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었다. 문천상은 남송의 마지막 승상으로, 의병을 이끌다 원군에 잡혀 처형되었다. 역시 싸우다 익사한 마지막 대원수 장세걸과 함께 남송의 마지막 세 충신으로 불리는 이들이다.
공관(空館)은 성균관 유생들이 부당한 일을 접하고 항의의 의미로 수업을 거부하는 일종의 동맹휴학이다. 성균관은 출석일을 채워야 알성시 응시 자격을 주는데, 수업을 거부한다는 건 과거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출석 체크인 식사를 거부하는 권당(捲堂)도 있다.
초상집에서 벌어지던 ‘왜놈 성토대회’는 그렇게 해서 졸지에 ‘입대 지원 결의대회’로 바뀌고 말았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발언 내역을 받아보기만 했는데도 얼마나 격한 자리였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김상헌의 열변에 감동한 성균관 유생들은 줄줄이 대사성에게 ‘공관서(空館書)’를 내고 내게 군적에 넣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합법적인 면제 대상인 성균관 유생들이 줄줄이 자원입대를 청하니, 정말이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악행은 왜추 신장이 무도하게도 군주를 몰아내고 스스로 대군을 자칭하며 나라를 농단함에서 비롯되었으니, 우리 정의로운 군사들이 신장을 토벌하고 왜국에 도리를 되살리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으리라!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하여, 너희 모두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행하라!”
김상헌의 출전 선언문 낭독 마지막 구절을 듣자니, 갑자기 내가 경성군으로 각성한 초기에 병조판서였던 이이가 역적 노부나가를 토벌하자며 불타오르던 생각이 난다. 혹시 이쪽 김상헌 학통은 이이 계열일까? 아, 윤근수 제자라고 했으니 이이 계열이 맞겠구나.
이이 계열이라면 노부나가를 없애서 이 난리의 근원을 뽑아버리자고 외치는 것도 당연하다. 더구나 나이도 이제 스물하나, 타고난 성미도 대쪽이니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게 없다.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다니,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외치던 패기도 저기서 나왔겠지.
김상헌이 단상을 내려간 뒤, 패라리를 탄 내가 도열한 각 군영 군사들 앞을 천천히 돌았다. 굳이 연설 같은 걸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앞을 지나가기만 해도 군사들은 일제히 손에 든 무기를 흔들며 천세를 연호하고 함성을 질렀다. 백성들도 환호했다.
무기를 제대로 잡아본 적도 없는 성균관 유생들도 뻣뻣한 몸을 하고 도감군 대열 안에 섞여 있었다. 물론 나라고 그 무경험자들을 전투병 대열에 넣지는 않았다. 대대마다 한 명씩 넣어 대대 서기 노릇을 시켰다. 행정보급관 겸, 도감군에는 문맹이 태반이니 편지도 써줄 겸.
이번에 괜찮게 돌아가면, 아예 제도로 확립시키는 것도 좋을 듯하다. 현대 한국으로 치자면 서울대 입학생들이 학사장교로 복무하는 셈이 되겠구나. 서책만 보던 유생들을 군대에 보내서 고생시킨다기보다는, 사람을 지휘해 보고 행정 경험을 쌓게 하는 루트가 될 듯하다.
잠시 후 사열이 끝나고 전군이 차례로 용산에 준비한 배다리를 향해서 행군하기 시작했다. 떠나는 부형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백성들을 보니 나도 눈시울이 뜨거웠다. 평소에 무관심하게 대하던 비빈들과 왕자, 옹주들까지 모두 한 번씩 안아주고 오기를 잘했다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날 보내는 후궁들 눈빛에 어린 감정이 참 다양했다. 대부분 걱정하는 빛이기는 했지만, 질투와 부러움을 은연중에 비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유를 알겠기에 그냥 두었다.
“다녀오겠노라. 그동안 도성을 잘 부탁한다.”
“무사하시옵소서, 아바마마.”
대리청정을 맡아 도성을 지키게 될 세자 성이도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긴말은 필요 없을 듯해서 어깨만 두드려 주었다.
“조만간 칙사가 온다 했으니, 잘 대접하고 우리 상황을 세세히 알리라. 우리로서는 천병은 필요하지 않으나, 전량(錢糧)은 대국에서 지원을 꼭 받아야 하니 말이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바마마.”
다른 외부적 문제는 대부분 조치해 놨다. 이건 성이가 신하들의 보좌를 받아 혼자 처리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만 잘 해결한다면 성이가 외교적인 역량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여겨도 되겠지. 자, 이제 나도 출발하자. 권율은 상주로, 나와 유극량은 청주로. 남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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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또, 왜적의 큰 무리가 나타났사옵니다. 전주 쪽에서 몰려온 것을 보니, 아무래도 전주를 치러 갔던 적이 패퇴한 듯합니다.”
“무척 잘된 일이로구나!”
남원부사 조헌은 부하 군관이 내미는 천리경을 받아들고 북서쪽에서 내려오는 왜군 행렬을 관찰했다. 돌아온 왜적은 이달 3일에 전주 방면으로 진군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 숫자가 아마 절반을 약간 넘을 듯했다. 남아서 교룡산성을 포위하고 있던 왜병과 합치면 2만을 좀 넘겠다.
“전라병사께서 실로 대공을 세우셨구나. 허나 우리는 한동안 경계를 강화해야겠다.”
천리경을 내려놓은 조헌이 수하 장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적이 합세하여 규모가 커졌고, 전주에서 패배한 탓에 앙심을 품고 분풀이하려들 위험성이 있다. 행여 적에게 샛길이 드러날 수 있으니 당분간 야습을 중단하도록 한다.”
“예, 사또.”
그동안 사나흘에 한 번씩 적진을 야습해서 수급 열하나와 소소한 병장기를 노획하고, 적이 편히 잠들지 못하게 했다. 이웃 고을과 조금씩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적이 대폭 늘었으니 어느 쪽도 어려울 듯했다.
“돌과 바위를 넉넉히 준비하라. 왜적이 대군으로 교룡산성을 공격하면 그나마 가장 완만한 동문으로 올라오는 수밖에 없는데, 총도 활도 쓰기 어려우니 돌이라도 던져야 하잖겠느냐?”
“알겠사옵니다.”
명령을 받은 장수와 군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흥이 난 조헌이 소리쳤다.
“참, 새로 만든 내 도끼를 가져오너라!”
“사또, 어깨가 아직 다 낫지 않으셨으니 그런 무거운 병기를 쓰셔서는 아니 됩니다. 등패나 계속 들고 계시옵소서. 이젠 사또께서 맨 뒤에 서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조헌이 왜 적의 창에 어깨를 찔렸는지, 군사들은 다 알았다. 사또를 향한 군사들의 눈에는 끝없는 신뢰와 존경이 서려 있었다.
“좌군은 순천을 목표로 철수하고 있단 말이지.”
가는 데 사흘 걸린 길이다. 매복을 피하고 추격을 저지하면서 그 길을 돌아오는 데 이레가 걸렸다. 그 험한 길을 돌아왔건만 반가운 소식은 하나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주군.”
남원성 포위를 맡았던 오타니 요시쓰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고바야카와군에서 순천을 돌아 도착한 사자가 전하기를, ‘좌군은 약속대로 나주에서 얻은 군량을 전하려 하였으나, 조선 노부시들의 방해로 남원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유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직접 운반 가능한 만큼만 남기고 모두 태운다고 했습니다.”
“전라도에 있는 우리 군 전체가 1년 가까이 먹을 수 있는 쌀을…태운다고?”
“죄송합니다, 주군.”
중도에 돌아가 버린 수군을 빼고, 전라도에 내린 일본군 병력은 9만 명이었다. 이 인원이 한 달을 버티는데 1만 3천 석, 조선 되로 2만 6천 석이 필요하다. 나주에는 조선 되로 20만 석이 저장되어 있다고 했었고, 지금 일본군 규모는 개전 초기와 비교하면 격감했다.
“조선군의 추격과 노부시들의 매복에 시달리면서, 마지막 쌀 한 톨까지 다 먹고, 죽은 말을 생으로 뜯어먹는 병사들을 보기까지 하면서 돌아왔는데 들은 소식이 그따위라니….”
허탈해하던 히데요시가 고개를 들었다.
“후쿠시마군도 고바야카와와 같이 물러났느냐?”
“아닙니다. 후쿠시마는 지금 곡성에 있습니다. 좌군 주력이 진격로를 그대로 되밟아 순천을 향하는 동안 뒤에 남아 엄호하다가, 나주 쪽 길이 완전히 끊기면서 우리 진영에 합류하려고 오는 중입니다. 그쪽도 조선 노부시들에게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한숨을 쉰 히데요시가 창밖으로 보이는 교룡산성을 힐끗 보더니 물었다.
“저기 있는 조선놈들은 아직도 그대로 있느냐?”
“예, 워낙 지형이 험하여 포위만 유지하고 있습니다. 공격하시겠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히데요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버려야 할 성을 빼앗겠다고 공연히 병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후쿠시마가 여기에 오거든 함께 동쪽으로 간다. 고바야카와군이 순천을 목표로 한다는 걸 보면 녀석은 분명 남쪽 하동을 통해 경상도로 넘어갈 모양인데, 우리는 북쪽으로 간다. 함양을 거쳐 경상도로 간다.”
“알겠습니다, 주군. 적을 남북으로 흩어놓으실 생각이시군요.”
“그래. 길잡이는 없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길을 잘 아는 부역자를 데리고 있지 않으셨습니까?”
“조선 노부시들이 낚아채 가버렸다.”
히데요시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차마 놈이 자기 발로 도망쳤다고 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남원에는 아직 군량이 남아 있습니다. 잠시라도 푹 쉬도록 하십시오.”
말할 기운도 없다. 히데요시가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전주성을 떠날 때, 조선인들이 하늘이 무너지라고 울려 대던 악기 소리와 환호성 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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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컥 문이 열렸다. 어린 둘째 아들 다이샨을 품에 안고 장난치고 있던 누르하치가 얼굴을 위로 들자 건장한 무장 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 동생 슈르하치였다.
“음, 왔구나. 앉아라.”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코르친에 좀 다녀오너라.”
“코르친이요?”
슈르하치는 지금 건주위에서 제일가는 무장이다. 대추장 누르하치의 바로 아래 동생이면서 용감한 전사이기도 하니, 그 위명은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 다만 형에게만은 도무지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르고 있다.
“코르친에는 무슨 일로 말입니까? 놈들은 아직도 그때 우리가 조선군을 안내한 일로 깊은 원한을 품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 건 상관이 없어. 거래하러 다녀오라는 거니까.”
“거래라면야 저들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을 테지요. 가격만 맞는다면 말입니다.”
누르하치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저들이 거부해도 이뤄야 하는 거래다. 조선에 팔 준마 3만 필이 급하게 필요하다. 평안도 관찰사 편으로, 조선 국왕이 우리에게 말을 사고 싶다는 제안을 보내왔다.”
“우리는 그럴만한 여분의 말이 없지 않습니까? 조선 국왕은 분명히 자기네 기병이 쓸 만한 준마를 원할 텐데, 지금 우리가 가진 여유분 중 저들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말은 1만 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코르친에 다녀오라는 거다.”
슈르하치가 갑자기 씩 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누르하치의 얼굴을 바라보며 은근하게 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조선에 팔 말을 코르친에서 좀 더 싸게 ‘사들여’ 오라는 말씀이시죠? 말값은 화살촉으로 치르고요.”
“그렇지. 이제야 이해했구나. 혹시 녀석들이 다른 가축이나 모피를 ‘덤으로’ 얹어주면 선뜻 받아와도 좋다. 계집이나 어린애들도 주면 받아오도록.”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가서 ‘사들인’ 말을 몰아올 ‘몰이꾼’들을 소집하겠습니다.”
슈르하치가 나가자 누르하치는 품에 안고 있던 다이샨의 뺨을 꼬집었다.
“기다려라, 아들아. 20년 뒤에 너와 네 형이 물려받을 건주위가 어떤 모습일지 말이다. 그 건주위를 지배할 너희 형제에게 걸맞을 신붓감을 빨리 정해야 할 텐데….”
누르하치의 머리가 천천히 돌아갔다. 과연 주변 세력 중 누구와 사돈을 맺어야 건주위 세력 강화에, 그리고 장차 요동부 타도에 도움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