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509
2부 2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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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끙끙댄 끝에 진영 두 곳을 다시 설치했다. 노부나가가 주재하는 북쪽 진은 북문에서 약 5리(2km) 정도 떨어진 들판 한가운데에, 그리고 별군이 위치한 동쪽 진은 아예 신천 건너편에다 세웠다. 18근 포 사거리는 확실히 벗어났다.
적은 진영을 새로 세우는데 필요한 모든 자재를 처음 진영에서 가져가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판에 꼼짝없이 맨몸으로 내팽개쳐질 판이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포루 안에 있는 포수들은 밤이건 낮이건 사거리 안에서 왜병이 보이기만 하면 포환을 날려 적을 죽였다. 화약을 너무 많이 쓰는 18근 포는 어쩌다 가끔 한 발만 쐈지만, 지자포들은 참 바쁘게도 쏘아댔다. 자재도 자재지만 흘리고 간 무기를 주우러 오는 놈들도 표적이었다.
“산자락에 접근만 하면 석전군이 돌을 던지고 궁수가 화살을 날리니, 어찌 적이 우리 산에 올라가 한 그루인들 나무를 베겠는가. 그러니 저럴밖에.”
유성룡이 북문 문루 위에서 주변 판세를 살피며 감탄했다. 대구성과 달성, 산성 다섯 개가 만든 방어진은 대구성을 포위하려고 했을 적을 사실상 역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방어사와 왜별장 두 사람 모두 고생이 많으셨소. 이제 하남벌의 원한을 갚게 되었소.”
“모두가 영민하신 주상전하의 흥덕입니다. 적이 대구로 밀려들 것을 일찍부터 예측하시고 성을 높이 쌓고 호를 깊이 파며 포와 화약을 비축하여 적을 물리칠 준비를 하라 이르셨으니, 어찌 흉적이 감히 이 땅을 범하여 더럽히겠습니까.”
“그렇소. 그것도 실로 전하께서 옳게 보신 바요.”
고개를 끄덕여 조경에게 동조한 유성룡이 손으로 적진을 가리켰다.
“지나간 닷새 동안 저들은 우리 포를 얻어맞으면서도 많은 물자를 되찾아 그럭저럭 진영을 재건하긴 했소. 그래도 아직 제대로 싸울 태세는 아닌 듯한데, 지금 우리가 군사를 몰아 치고 나가면 적에게 상당히 큰 타격을 주면서 우리 군사들 사기도 높일 수 있지 않소?”
조경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성룡이 제안을 계속했다.
“내 웬만해서는 용병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으려 했으나, 성에 있는 오위 장졸들이 찾아와서 출성을 허락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니 그 의분을 그대로 넘길 수 없어서 말이오. 평양군과 동료 군사들의 복수를 하게 해달라는 고 호군과 휘하 군사들의 간곡한 청을 외면만 할 수가 없소.”
오위 잔여병력을 이끄는 장수는 정4품 호군 고언백이었다. 신립의 명령을 받아 족친위 보병 2천과 오위 보병 1천을 거느리고 밀양강 좌우를 막았고, 산길을 넘어 퇴각해온 후군 군사들을 수습해서 지연전을 벌였다. 신립을 비롯한 수만 군사의 운명을 알고 지금도 이를 갈고 있다.
“송구하오나 영상 대감, 본 고을을 지킬 책임은 소장이 지고 있사옵니다. 고 호군이 오위군 잔병의 지휘를 맡고 있다 하나, 어디까지나 객장입니다. 대구방어사는 소장입니다.”
“물론 알고 있소. 그러니 고 호군도 자기 군사를 멋대로 움직이지 않고 나를 통해 부탁하지 않았겠소.”
“우리가 저들에 비해 갖는 가장 큰 강점이 활과 화포이옵니다. 지금 성을 나가서 싸우자면 단병접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데, 굳이 우리 강점을 버리고 단점으로 적과 싸울 필요는 없지 않겠사옵니까. 더구나 적은 아직 우리보다 수도 많은데 말이옵니다.”
“알겠소, 그대의 말이 옳소.”
조경은 유성룡을 통해 받은 고언백의 청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유성룡 역시 수긍했다. 이는 조경이 행사할 수 있는 마땅한 권리였다.
“고 호군에게 적이 물러갈 때 우리도 출성할 테니 그때 실컷 한을 풀라고 전해주시옵소서. 그날이 오기까지는 성벽에 의지해 화포와 화살만 써서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알겠소. 그런데 적이 우리 화포를 피하려고 호를 파며 전진하기 시작했다던데, 정말 계속 포만 써서 적을 잡을 수 있겠소? 적을 호에서 몰아내자면 결국 출성해야 하지 않을까 하오.”
왜적은 본진을 둘러싸는 목책을 세우고, 망가진 화포를 고쳐 설치하고, 흩어진 물자를 다시 모아들이는 작업을 끝내자 포격을 피하면서 성에 다가오느라 호를 파기 시작했다. 18근 포를 쏘더라도 포탄이 닿지 않을 먼 곳에서부터 말이다. 물론 아직 성벽에 근접하려면 멀었다.
“내, 훈련도감에 있는 서반아인들에게 들은 바가 있소. 저들의 땅에서도 공성을 벌일 때면 호를 파서 포환을 피하며 성벽에 근접한다고 말이오. 물론 지금은 장마철이라 저들이 판 호에 물이 좀 고이긴 하겠지만, 그 정도로 적이 호를 이용해 공격하기를 포기하겠소?”
“할 수 있습니다. 신천을 막아둔 둑이 있지 않습니까.”
조경이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적절한 시점을 보아서 터뜨리겠습니다. 그러면 왜놈들이 파놓은 호가 한순간 만에 모조리 물구덩이가 될 겁니다. 왜놈들이 개구리가 아닌 이상 그 속에서 기어 나올 수밖에 없겠지요.”
“동문 쪽 놈들에게는 통하겠지만 북문 쪽까지 적시기는 물이 모자라지 않을까 싶구려.”
근심 어린 얼굴로 적진을 살피던 유성룡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문제는 역시 무장들이 그때그때 상황을 살펴 처리하는 편이 낫겠지. 믿으리다.”
“감사합니다, 대감.”
유성룡은 올라오기 전보다도 훨씬 더 편안해진 마음으로 문루를 내려갔다. 조경은 사마유와 협력하면서 방어전을 썩 잘 수행하고 있었고, 별다른 간섭은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가노가 받쳐주는 우산을 쓰고 집무실로 돌아가는데 사노부가 급히 서문 쪽으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휘하 기병 10여 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니 우중에 정찰을 나가는 모양이다. 비승군이 날씨 때문에 통 뜨지를 못하니, 적진을 가까이서 살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 25 –
아침부터 비가 퍼부었다. 기름을 먹인 장막 밑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 비를 맞으면서 영남대로 저편에서 지붕을 씌운 수레 한 대가 다가왔다. 가마 한 대도 그 뒤를 따랐다. 이 대열은 군사 백여 명에게 호위를 받으면서 천천히 가까이 왔다.
이미 어제 통보를 받았는데도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퍼붓는 비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수레가 눈앞에서 점점 커졌다. 수레 위에 실린 까만 관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신립이 누워있는 관이었다.
모든 주요 장수들, 신하들이 내 뒤에 서 있었다. 모두 내 뒤로 가라고 내가 명령했다.
“열어라.”
관을 수레에서 내려 준비한 단 위에 놓은 군사들이 관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관 속에서 두 눈을 부릅뜬 신립의 얼굴이 보였다. 왜인들이 염한다고 시신을 닦기는 했지만, 그가 죽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뜨고 있던 두 눈은 감기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 평양군!”
나도 모르게 눈가가 축축해졌다. 하지만 지금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 신립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게 아까워서가 아니다.
나는 왕이고, 지금 대군을 거느리고 적과 싸우러 가는 중이다. 바로 그 적의 일원이 눈앞에 있는데, 그 자에게 눈물을 흘리는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신립 공은 누구보다도 용맹했습니다. 그래서 형님께서도 그 용맹에 탄복하신 나머지, 신립 공이 형님의 어깨에 화살을 꽂았음에도 용서하시고 전하를 설득하는 데 동참하기만 하면 일절 벌하지 않고 영지도 50만 석이나 내리겠다고 하셨습니다만….”
듣지 않았다. 만약 나가마스가 신립이 어떻게 싸우다 죽었는지 하는 이야기만 들려줬다면 눈물을 흘리며 들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노부나가가 신립을 회유해서 자기 신하로 만들려고 내건 조건 따위를 들어서 뭘 한단 말인가.
나가마스가 주절거리는 소리 따위에는 귀를 닫고, 신립의 갑옷이 든 상자를 열게 했다. 난 솔직히 시신은 몰라도 갑옷은 분명히 일본군 전리품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유성룡이 장계에 노부나가가 시신 말고도 갑옷도 그대로 돌려보냈다고 쓴 내용을 읽고는 정말 놀랐었다.
깨끗하게 염한 신립의 시신을 보고는 잠깐이지만 ‘갑옷도 닦아서 보냈으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헌데 눈앞에 나타난 갑옷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피와 진흙으로 범벅이 된 상태 그대로, 정말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었다. 상자를 가득 채운 하얀 솜 위에 말이다.
순간적으로 뇌가 굳었다. 전투의 참상이 그대로 남은 신립의 갑옷, 내가 준 남만갑을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뭐냐, 이건? 갑옷을 이렇게 해서 보낼 거라면, 시신도 염하지 말고 피투성이가 된 그대로 보내지 그랬느냐!”
졸지에 화풀이 대상이 된 나가마스가 쩔쩔맸다. 실권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내 분노를 지금 내쏟을 대상이 나가마스밖에 없었다.
“신립의 시신은 예의를 차려 염해서 내 마음에 고마움을 불러일으키면서, 갑옷은 더럽혀진 채로 두어 왜군에 대한 두려움을 품게 할 생각이었느냐? 그렇게 하면 내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고, 네 형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느냐!”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겨우 이런 얕은수로 나한테 겁을 주려고 했나? 노부나가라는 놈이 생각한다는 수준이 겨우 이 정도인가? 아무리 나한테 남은 병력이 별로 없다고 알고 있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런 정도 협박에 넘어갈 인간이라고 날 얕볼 수가 있지?
“전하, 아닙니다! 그 갑주는 그저 신립 공이 얼마나 용감히 싸웠는지 알려드리고픈 마음에 손대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을 뿐입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공의 기개를 높이 사 좋은 뜻으로 신립 공의 시신을 가져왔는데, 어떻게 갑옷 따위로 전하를 위협할 궁리를 했겠습니까?”
나가마스가 급히 변명했다. 그래? 잠시 뒷말을 기다려 보았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바로 뒤를 이어 나온 나가마스의 발언은 신립의 시신을 이용한 협박이었다. 피투성이 갑옷을 그냥 가져온 진짜 본의가 어디 있었는지, 곧바로 드러났다.
“보셨듯이, 신립 공이 저토록 용전했음에도 신립군은 졌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도성에서 새로 모은 군사들을 데려오셨는데, 몇 년 동안 훈련과 실전을 경험한 조선 최정예인 신립군도 패한 일본군을 상대로 어떻게 갓 모병한 군사들을 싸우게 하려고 하십니까?”
이놈들 아직도 우리 조선군 주력이 어떻게 구성됐는지, 도감군과 북방군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구나. 임해군이 도대체 왜 ‘조선에는 오위군밖에 정예군이 없다’고 일본에서 허위정보를 퍼뜨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덕은 지금 확실히 보고 있다.
질서정연하게 막사를 치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 대군을 보고도 ‘갓 모은 신병’이라고만 생각하는 걸 보면 나가마스도 군사에는 엔간히 어둡구나. 물론 그렇다고 이 녀석을 붙들고 내가 그걸 설명해 줄 필요는 없겠지.
나가마스가 지껄이는 헛소리에 기막혀하다 보니 내 표정에서 분노가 잠시 사라졌다. 그걸 보고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나가마스가 본격적인 자기 용건을 꺼내기 시작했다.
“전하, 제 주군이신 저희 형님께서는 아직도 전하와의 화의를 강력히 원하고 계십니다. 두 나라가 이번에 불행하게 서로 싸우게 되긴 했지만, 전하께서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어 화의 체결에 동의하신다면 전쟁은 끝입니다. 조선과 일본에 모두 더 나은 훗날이 있을 것입니다.”
실소가 나왔다. 뭐? 더 나은 훗날?
“적에게 끝까지 맞서지도 않고 항복한 이들에게 노비가 되는 외에 무슨 훗날이 있느냐? 네 형은 역도 이진을 사위로 맞고 감히 조선 국왕으로 칭한다던데, 너는 우리 보고 역도의 신하, 역도의 노비가 되란 말이냐?”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제 조카 아이히메가 부친의 묵인하에 임해군과 꽤 가까이 지내긴 했으나, 정식으로 혼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따져보면 임해군은 형님의 사위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형님은 임해군을 조선의 왕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신 적도 없습니다.”
이젠 하다 하다 별 궤변이…내 뒤에 서 있는 신하들이 열 받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지금 신립의 시신 앞이라서, 내 앞이라서 다들 참고 있을 뿐이다.
“임해군이 멋대로 조선의 왕이 되겠다고 주장하고 있긴 합니다만, 저희 형님께서는 전하와 화의를 맺고자 아직 임해군을 공식적인 조선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계십니다. 이제 전하께서 화의만 맺어 주신다면…임해군을 넘겨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계속 거부하신다면….”
“그 입 그만 닥쳐라.”
내가 한 말이 아니었다. 얼음장처럼 냉정하면서도 매서운 목소리, 이항복이었다.
“너희가 말한 화의라는 게 무엇이냐? 명나라를 향한 네놈들 우두머리의 야욕, 그 앞에 나가 앞잡이가 되라는 요구 아니었더냐? 부당한 요구를 하고, 그에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고한 이웃을 치고, 화의라는 허울로 부당한 요구를 반복하는 행위가 어찌 합당한가?”
무슨 일이 있어도 흥분하지 않을 것 같은 양반이던 이항복이 이토록 화를 내다니. 일반적인 사람이 화를 낼 때처럼 고성을 지르거나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삿대질하거나 욕설을 퍼부어 상대를 겁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어조만으로도 등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공, 공께서는 아무래도 우리 뜻에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우리 주군께서는 오직 우리 두 나라가 중원을 함께 도모하고, 그 과실을 함께 나누자 하셨는데 전하께서 이를 계속 거부하신 탓으로….”
“그 입 그만 다물어라. 이미 역도 이진 그놈이 보낸 수하들이, 역모에 동참하라고 선동하는 서한을 들고 삼남을 돌다가 숱하게 잡혔느니라!”
금위사에서 잡아들인 임해군의 수하가 네 명이었던가. 일본군 경호부대가 붙은 경우도 하나 있기는 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변장하고 은밀하게 숨어들었다가 붙잡혔다. 삼남에 있는 여러 관리와 향반 중 하성군과 연줄이 있는 자들만 감시하고 있으니 알아서들 걸려들었다.
“아까 전하께도 말씀드렸지만, 그런 일들은 모두 순전히 임해군이 혼자 멋대로….”
“너희 우두머리가 묵인했다고 함은 곧 임해군의 역심을 인정한 행동이다. 역당을 도왔으니 역당의 한패이고, 역당과는 어떤 화의도 타협도 없다.”
이항복은 평소와 정말 달랐다. 다른 신하들이 역시 분노했으면서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왜 이렇게 화가 났을까 하는 순간 기억이 났다. 이항복은 김여물과 친한 친구였다. 나이는 김여물이 8살 많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시대다.
“더구나 너희가 말하는 ‘화의’를 맺고 역도 이진을 넘겨받으면 그것으로 평화가 오겠느냐? 군사를 일으킨 비용을 물어내라 할 것이고, 대국 원정 거점으로 쓸 땅을 내달라고 할 것이고, 대국 원정 선봉에 설 병사를 내라고 할 것이다. 이 무슨 평화이냐?”
“조선만 앞세우지 않습니다. 일본군은 강남으로 가고, 조선군은 요동으로….”
“망언은 그만두라! 너희가 어디를 치건, 우리 조선은 대국과 혈육과 같은 사이니 막지 않을 수 없다. 너희가 우리 손이 닿지 않는 남쪽 바닷길로 대국을 범했다면 우리도 손을 쓸 방법이 없었겠으나, 지금 우리 땅에 왔으니 마땅히 전력으로 막겠다.”
친구인 김여물은 왜적을 막다가 죽었고, 시신조차 거두지 못했다. 그 아들이자 자신의 제자 김류는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고 자원해서, 친구들과 함께 도감군 대대 서기로 종군하고 있다. 사실 본래는 성균관 유생도 아니라서 일반병으로 징병해야 할 대상이지만….
그 김류도 지금 가슴에 상장(喪章)을 달고서 몇몇 동료들과 함께 뒤에 서서 이 상황을 함께 보고 있다. 다들 함께 신립의 시신과 갑옷을 보았고, 왜사가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또 내놓는 모습까지 봤으니 이항복이 저 정도로 화가 날 수도 있겠구나 싶다.
“그럼, 귀국은 어떤 조건이면 화의를 맺겠다는 거요?”
나가마스와 대화하는 상대는 어느새 이항복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차분하게 그 논쟁을 바라보았다.
“우리 땅을 범한 왜병부터 모조리 격파하고, 그 뒤에 왜국 땅까지 진군하여 너희가 다시는 이런 짓을 벌일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응징한 뒤에야 비로소 화의가 있을 것이다.”
나가마스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입을 몇 번 벙긋거리긴 했지만, 이항복에게 제대로 반박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너희는 수백 년 전부터 도적질과 침략으로 우리 조선을 무던히도 괴롭혔다. 크게 혼이 한 번 나지 않으면 그 악습을 버리지 못할 것이니, 우리로서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왜사를 가마에 태워라.”
나가마스에게 반박을 허용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이항복이 한 말은 일본 측에 대한 우리의 경고이자 우리 스스로 하는 선언이었으니 여기서 끊는 게 좋다. 더 길어지면 군더더기다.
“도체찰사가 장계하기를, 왜사가 행여 도중에 백성들에게 맞아 죽지 않을까 하여 주변에서 시선을 피하고자 가마에 태워 보냈다 하였다. 그 가마에 그대로 태워 북한산성으로 보내 추후 내가 찾을 때까지 유폐해 두라. 전 임해군부인과는 만나지 못하게 하라.”
“아니 됩니다, 전하! 당장 저 무도한 왜인의 목을 베어 전군에 위엄을 떨치소서!”
누군가 했더니 김상헌이었다. 김류와 함께 뒤편에 서 있다가 나선 모양이다.
“저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살아서 왜국으로 돌아가게만 해달라고 빌어도 용서하지 못할 판인데 지금 저놈이 무슨 망발을 하였습니까? 마땅히 목을 베어 전군의 선두에 내걸어 우리 군사의 사기를 올리고, 적을 위압해야 합니다!”
사자로 온 게 히데요시나 가토, 고니시라면 그 의견도 충분히 채택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형이 시키는 대로 부지런히 오갈 수밖에 없는 이 불쌍한 놈을 죽여서 뭘 하란 말인가. 일단은 살려두고 활용할 방법을 찾는 게 낫지. 그렇다고 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대의 말대로 함도 가하겠으나, 이 왜사는 평양군의 시신을 가져다주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주지 않았느냐? 그 공을 높이 보아 자비를 베풀겠노라. 또한, 아무리 태도가 무엄하다 해도 사절을 함부로 베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유념하라.”
협상을 거절하는 답을 들려 돌려보내기에는 놈이 오는 길에 본 게 너무 많다. 그러니 일단 북한산성에 넣어두고, 나중에 처리방안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비가 그치면 전군을 도열하게 해서 신립의 시신에 예를 표하게 하는 것도 좋겠다. 그 뒤에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연설 한 번 한 뒤에 도성으로 운구해서 시신은 가족이 장례를 치르고, 갑옷은 강무관에 전시하게 해서 두고두고 무관들이 모범으로 삼게 하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