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533
2부 31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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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위 항구는 2년 전보다 한층 더 번화해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 신호영이 부두에 발을 디디자 마중을 나온 중국인들이 수레를 준비해 놓고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신 대인. 오 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배가 좀 늦었네그려. 어여 가세.”
신호영은 상단을 이끄는 대방으로서 웬만하면 개성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에서 일을 받은 처지에 개성에 앉아 도방이나 행수들만 부릴 수는 없었다.
더구나 요즘은 오공충 역시도 개성에 직접 내왕하는 일이 드물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다고, 지금 아쉬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전황은 좀 어떻습니까?”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뒤, 오공충은 조선과 일본이 치열하게 벌이는 전쟁 양상에 궁금증을 표했다. 그저 인사치레가 아니다. 자신의 벌이에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인 탓이다.
“오 대인께 인도할 인삼 공급에는 별 차질이 없을 거요. 대인께 제공하는 인삼은 주로 한강 이북에서 채취하고, 집산지는 개성이니 말이오. 하지만 왜군은 지금 충청도도 범하지 못했소.”
“저야 다행이지만 경상도, 전라도 백성들은 고생이 많겠군요.”
“그래서 오 대인께서 많이 도와주셔야겠소.”
두 사람 모두 선수였다. 빙빙 돌면서 서로의 진의를 탐색하는 과정 따위는 가뿐히 생략하고 곧바로 용건으로 넘어갔다.
“이 사람은 조정에서 삼남 백성들에게 구휼곡으로 지급하고 군량미로 쓸 쌀을 구해오라는 명을 받았소. 어쩌면 내년 양식도 필요할 수도 있소.”
“필요한 수량과 대금은?”
“최소 5백만 석. 대금은 홍삼을 비롯한 다른 상품으로 지급하겠소.”
일반 인삼을 증포(蒸包, 쪘다가 말림)해서 가공한 홍삼은 일반 인삼보다 훨씬 맛과 약효가 우수하다고 알려져 있다. 최근 개성 일대에서 인삼 재배가 성공하면서 증포 기술도 확립되어 증포소가 가동에 들어갔고, 1년에 홍삼 1만 근을 생산할 능력을 갖췄다.
다만 홍삼 1만 근만 가지고 쌀 5백만 석과 이를 수송할 배, 뱃사람까지 구하기는 무리다. 요즘 시세를 보면 150만 석 정도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5백만 석을 한 번에 사들일 것도 아니고, 북방에서 캔 인삼이나 왜인 포로와 병장기를 대신 팔아도 되니까 걱정되지는 않았다.
“홍삼이라면 대환영이지. 다른 필요한 물건은 더 없소? 구리, 염초는? 전쟁을 치르려면 이 두 가지 물품도 꼭 필요할 텐데.”
“조정에서는 쌀 외에 다른 물품은 요구하지 않았소. 하지만 구리는 필요하겠구려. 왜국에서 들여오던 구리가 끊겼으니 말이오. 염초는 남만초가 워낙 질이 좋아서 명초는 별 인기가 없는 게 문제요. 명초랑 품질 차이가 별로 없는 향초 생산도 만만치 않으니 말이오.”
남만초는 남만선이 실어오는 천축산 염초다. 명초는 명나라산 염초, 향초는 조선에서 직접 생산하는 염초를 가리킨다. 도성 일원에 있는 초석밭과 각 지방 군영이나 민간에서 생산하는 물량으로, 지방군이나 민간에서 쓰는 화약은 다 향초다. 이쪽도 연 10만 근은 나온다.
“염초는 그렇다 해도 황은 필요하실 텐데. 화약을 만들려면.”
“조정에서는 일단은 비축분을 쓸 모양이오. 게다가 조선 땅 안에서도 황이 나는 곳은 있고, 호조가 운항하는 관선도 황을 들여가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길 수도 있소. 혹시 나중에 필요해지면 부탁드리겠소.”
“그럽시다. 어차피 다른 물건도 거래할 거니, 그편에 함께 보내면 되고.”
두 사람은 쌀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공충이 찻잔을 기울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5백만 석은 조달하기 불가능한 양은 아니지만, 시간은 걸릴 거요. 그만한 양을 한꺼번에 매집하면 시장에서 쌀값이 요동치지 않을 수가 없소. 당연히 관에서 문제 삼을 테니, 귀찮은 일을 줄이려면 일부는 안남 일대에서 구매하는 편이 좋겠소. 섬라에서도 들여와야 하겠고.”
“안남, 섬라라.”
안남(安南)은 그들 스스로는 대월(大越)이라고 자칭하는 중국 남쪽의 나라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번국을 자처하고 있다. 섬라(暹羅)는 그보다 더 서쪽에 있다.
“두 나라 다 한참 내란을 벌이고 있다 하지 않았소? 과연 저들에게 팔 식량이 있겠소?”
“접촉해 봐야지요. 적절한 대가만 내주면 물건을 팔 사람은 언제든 있는 법이니까.”
강남에서 조선으로 양곡을 운반할 배와 선원을 조달하는 업무는 오공충이 맡아서 시행하고, 신호영이 나중에 대가를 정산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오공충은 한 가지 경고를 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조달한 배 열 척 중에 한 척 정도는 침몰할 수도 있다고 각오해 두시는 게 좋을 거요. 아무리 새 배라 해도 수백, 수천 척이 오가다 보면 사고가 없을 수는 없으니.”
“바닷길의 운이야 바다에 달린 것이니 어쩌겠소. 감수할 생각이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의미로 술잔을 나눌 차례였다. 술과 요리가 들어와 상이 차려지는 참에 오공충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쨌든, 조선 조정도 제법 수완이 좋소. 감합증서를 얻어내다니. 감합증서가 있으면 관세를 물지 않아도 되지만, 증서가 없는 사무역은 2할이나 되는 관세를 내야 하니 말이오.”
“워낙 큰 사태가 터진 탓이지요. 대국 조정에서는 자기 돈은 전혀 들이지 않고 크게 생색을 내는 방법이기도 하고. 이 조치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소만.”
두 사람이 한담을 나누는 사이 갖가지 요리와 술이 큰 탁자를 가득 채웠다. 헌데 오공충이 갑자기 생각난 듯 얘깃거리를 하나 덧붙였다.
“마카오에서 귀국 벼슬아치 하나가 남만초를 사는 데 쓰겠다면서 내게 은을 좀 빌려달라고 청을 넣었소. 그 빚을 그대들이 내는 홍삼으로 상환하면 어떨까 싶소만.”
견서사 일행 중 일부가 구리와 염초를 구하겠다고 마닐라에 남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듣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호조가 내야 할 돈이지만, 일단 먼저 대납하고 나중에 정산을 요청하면 문제가 될 건 없다. 신호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우리가 지불하리다. 증서만 넘겨주시오.”
“마카오에서 증서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요. 나중에 선편으로 벽란도에 보내겠소.”
맹세의 뜻을 담은 술잔이 사이좋게 비워졌다. 두 사람은 탁자를 메운 산해진미와 향기로운 술을 즐기며 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 28 –
12만 대군을 손에 쥔 노부나가는 대구성 포위를 유지하면서도 주변에 몇 번 공세를 펼쳤다. 두 번째 달성 공격은 또 실패했다. 대구를 둘러싼 산자락에 진을 치고 있던 조선군도 완전히 밀려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와서 일본군을 공격하는 정도까지는 못하게 되었다.
식량 확보를 위해 준비한 영천 공격도 완전히 실패했다. 공격하려는 참인데 그쪽에서 먼저 연기가 크게 솟는 게 보였다. 뒤늦게 병력을 보내 확인하게 했더니, 영천성이 통째로 불타고 있는 게 아닌가? 익어가는 주변 논밭까지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대구 주변 농경지는 그동안 벌어진 전투와 조선군의 수공 때문에 모조리 망가졌다. 그래서 영천에서 가외로 식량을 얻을 생각이었지만, 조선군이 한발 먼저 손을 쓰고 말았다.
식량 문제는 차츰 심각해지고 있었다. 조선 수군이 다대포를 점거한 일은 낙동강 수로를 쓸 수 없게 되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다. 다대포를 손에 넣은 조선 수군은 매일 부산포 앞바다로 출격하여 사실상 부산을 완전히 봉쇄했다.
울산에서 내려온 수송선은 조선군이 없는 밤에만 짐을 내릴 수 있었다. 해변에 쌀가마니를 내던지다시피 하고 아침이 오기도 전에 부산을 떠났다. 부산에 내리는 화물의 양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우리 군의 병량 공급에는 문제가 없다!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는 모조리 처형하라!”
노부나가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분명 당장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쌀이 적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보급부대가 쌓아두고 있는 식량 더미가 줄어들고 있고, 먹은 만큼 보충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그나마 내가 가져온 3만 석 덕분에 두 달은 더 버티는 것 아니겠소?”
으스대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를 보는 히데요시의 눈에서 살기가 뻗쳤다. 다카카게는 식량 공급이 실패한 원인이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있다고 했지만, 마사노리는 결국 남원에 와닿지 않았는가. 그때는 이미 다카카게가 나주에서 노획한 쌀을 대부분 태워버린 뒤였지만 말이다.
다카카게가 좀 더 기다렸다면, 아니면 후쿠시마가 적진을 뚫도록 제대로 지원을 해주었다면 히데요시는 원래 계획대로 다카카게로부터 군량 공급을 받으면서 전주성 공격을 더 시도할 수 있었다. 식량만 있었으면 분명히 상황이 바뀌었을 것이다.
“하시바 공, 그대도 다음에는 부디 무운을 빛내시기 바라오. 기회는 있을 거요.”
다카카게는 식량 3만 석을 가져온 데다, 중요한 성인 진주성까지 공략하는 무훈을 세웠다. 적은 고바야카와군의 용맹함에 겁을 먹고 하루 만에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했다. 그 덕으로 지금 진중에서는 다카카게의 지위가 히데요시에 버금갈 지경이었다.
노부나가는 다카카게만도 못하다고 히데요시를 또 욕했다. 그리고 곧 충청도로 진공할 테니 그 진군로나 탐색하라고 했다. 이키섬에서 구축한 첩보망을 자기 멋대로 움직이다 날려 먹은 전과가 있는 히데요시는 또 아무 소리 못 하고 명에 따라서 병사들을 내보냈다.
“주군, 역시 조선군의 경계가 너무 엄중해서 탐색이 어렵습니다. 상주에 접근하려던 우리 병사들이 또 기습을 당해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문제는 성과가 변변치 않다는 데 있었다. 도성으로 가는 최단거리인 조령으로 가는 도로는 대구 북방 산악지대를 지나고, 그 양편에는 조선군이 매복하고 있다. 그대로 진군하면 막대한 손실을 각오해야 했다. 전주에 가면서 당한 그 끔찍한 매복은 절대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히데요시에게는 산길을 최대한 피해서 가는 우회로가 필요했다. 그래서 정찰대를 북쪽 대신 서쪽, 낙동강으로 보냈다. 강물을 따라 올라가면서 영남대로와 다시 만나는 지점을 찾으라고 했지만, 탐색은 어렵기만 했다.
“조령보다 남쪽에 추풍령이라는 고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 길을 택하면 어떨까요.”
고니시가 주저하면서 의견을 내놓았다. 고니시는 히데요시와 갈라지는 바람에 고바야카와군 밑에 들어가 대구에 왔지만, 도착한 뒤에는 다시 2천 병력과 함께 히데요시 휘하로 돌아왔다. 소 요시토시 역시 그와 함께였다. 길을 찾는 정찰대도 주로 요시토시의 이키 병력이었다.
주군인 히데요시를 비롯해 다른 동료들이 죽을 고생을 한 데 비하면, 이들 두 사람이 흥양 수비 및 이후 철퇴 과정에서 한 고생은 입밖에도 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늘 조심하고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았다.
“추풍령은 조령보다 한참 돌아서 도성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대신 낮고 평탄합니다. 게다가 상주에서도 멉니다. 지금 조선군은 아마 상주 감영에 집결했을 텐데, 선산군에 병력을 배치해 상주에서 오는 길을 차단한다면 적이 막기 전에 충청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단 충청도로 들어가면 상주에 있는 적 대군을 피해 북상, 한양으로 달려갈 수 있다. 모든 전력을 경상도로 보낸 조선 국왕을 무방비 상태로 공격할 수 있다. 전쟁을 끝낼 수 있다.
“조선 국왕이 친정에 나섰을 수도 있지 않나? 지난번 전쟁에서도 그랬다면서? 친정했다면 왕은 주력군과 함께 있을 텐데, 그럼 차라리 상주에서 결전을 치르는 편이 낫지 않은가?”
“우리 군이 충청도로 진입해서 도성으로 갈 기세를 보인다면 적은 상주에 구축한 방어진을 버리고 급히 충청도로 돌아와야 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 유리하겠지요.”
조선군은 상주에, 그리고 조령에다 이미 든든하게 방어진을 구축해 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전주와 대구에서 경험한 바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쉽게 돌파하기는 어려우리라. 게다가 평지에 있는 성도 아니고, 고갯길의 관문을 돌파해야 하는 상황이다.
히데요시가 얼굴을 크게 찌푸렸다. 그는 고니시와 소 요시토시가 가진 조선에 관한 지식을 존중했다. 지금 들은 계획도 개연성이 없지 않았다. 조령보다 방어가 허술할 추풍령을 넘는다, 도성을 노리는 것처럼 보여서 조선군 주력을 끌어내 격파한다. 운이 좋다면 국왕도 잡는다.
“노부나가 님께 건의해 보지. 헌데 원균이라는 그 부역자 놈은 혹시 추풍령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는가? 부상했다던데, 상처가 나았으면 불러다 쓰면 좋지 싶은데.”
“놈은 화살에 맞은 상처는 다 나았으나, 임해군의 신하인 그놈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으니 후방에 감금해 두라고 주공께서 부산포로 다시 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런가. 그럼 할 수 없지.”
히데요시가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조선과 명나라를 정벌한 패자의 최측근이 될 기회는 아직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히데나가, 히데쓰구, 히데카츠까지 다 잃은 값으로 그 자리를 갖는다면, 과연 이 원망이 사라질까?
– 29 –
기둥 위에 매달린 머리 두 개가 볼품없이 흔들렸다. 그 앞에 줄지어 선 기병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압록강을 넘을 때부터 경고했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전장 속이라 하여 엉뚱한 짓을 한다면 모조리 도륙을 당할 것이라고! 그런데 저 두 놈은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정여립은 도열한 울라 기병들을 상대로 한껏 핏대를 세웠다. 감히 피난민 부녀자를 상대로 몹쓸 짓을 한 놈들이 나온 것이다. 질서가 유지되는 충청도까지는 퍽 얌전히 내려오던 놈들이 왜군 때문에 어수선한 전라도에 오더니 사고를 쳤다. 슬쩍 넘어갈 줄 알았던 모양이다.
“너희가 왜병 수백을 베었다고 해도 소용없다. 저런 놈들 하나 때문에 모조리 역적이 되고 울라 부가 폐지될 수도 있음을 어찌 모르느냐? 울라에 남아 있는 일가붙이들이 모조리 노비가 되고, 마을이 불타는 꼴이 그리 보고 싶으냐!”
해서 4부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부가 울라 부다. 다른 3부는 패전 후 건주위에 흡수되어 사라져버렸다. 울라도 임금의 명 한 마디면 당장이라도 불바다 속에서 소멸할 수 있다. 지금 여기 있는 기병들도 꼼짝없이 탄광이나 염전으로, 옻나무밭으로 보내지는 것이다.
“울라 부사께서도 휘하 군사를 더 철저히 감독하십시오! 저 혼자서 2천 군사를 전부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알겠네.”
조정에서는 울라 부를 조선 내지(內地)인 팔도에 속한 여러 부(府)와 같이 취급하기로 하고 부잔타이를 종3품 부사로 임명했다. 과거 명나라 황제에게 직접 조공을 바치면서 조선 국왕과 같은 급이라고 으스대던 만타이 시절과 비교하면 참으로 비참한 몰락이었다.
“그럼 충주로 귀환한다. 진군!”
정여립은 어떻게든 도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길은 하나, 복속되었다고는 해도 언제 사고를 칠지 모르는 이 만적(蠻狄)들을 다그쳐서 공을 세우게 하고 사고 없이 북쪽으로 돌려보내는 것밖에 없다. 사고를 치면 그걸 잘 수습하는 모습을 보이는 방법도 있다.
울라 병사들은 억지로 끌려온 탓에 사기가 높지는 않다. 부장인 부잔타이부터 의욕이 없다. 하지만, 적어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거나 패잔병을 찾아 도륙하는 임무에서는 솜씨를 훌륭히 발휘했다. 쌓인 울분을 약한 상대에게 풀어내는 행위라서 그렇겠지.
공적을 쌓아 도성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어떻게든 금위사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면 옛날 초대 금위사장 정호찬이 그랬듯 영원한 임금의 측근으로서 만사를 관장할 수 있으리라. 물론 지난번 같은 실수는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다.
– 30 –
요즘 정체불명의 남만선들이 쓰시마 인근에서 얼쩡거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돛대 위에 달고 있는 깃발도 처음 보는 것이다. 정체불명의 이 남만선들은 멀찍이서 일본 수군의 수송선단을 살피다가 사라지곤 했다.
“조선 수군이 아닐까요?”
“아니, 저놈들은 남만 해적선이야. 전쟁이 벌어졌다니까 그 혼란을 틈타 한탕 하려고 돌아다니는 거다. 그리고 조선 수군에는 남만선이 없다. 판옥선이라는 상자처럼 생긴 배를 쓰지.”
무라카미 해적을 지휘하는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이즈하라 바닷가에 내렸다. 해적의 생리는 그 자신이 훤했다. 분명 혼란을 틈타 노략질을 하려는 놈들이다.
지금은 그따위 놈들보다 훨씬 크고 중요한 문제가 있다. 조선 수군에게 시달린 노부나가가 준비한 회심의 반격, 1천 척 대함대를 동원한 이순신과의 결전이 코앞이었다.
그동안 전해진 정보에 따르면 조선 수군은 2백 척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전라도에 상륙한 1군의 경험으로 볼 때, 1백 척가량 되는 조선군은 대부분 수송선이던 아군 함대 7~8백 척을 보고 놀라서 그대로 도망쳤다. 그러니 전투선 1천 척을 보면 분명히 도망치리라.
“총탄을 튕겨내는 메구라부네나 움직이는 성과 같은 대판옥선 같은 전선도 있다고 하지만, 세토우치 최강인 우리 무라카미 해적은 그 정도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어!”
노부나가는 구키 수군이 천하제일 수군이라면서 주역을 맡겼다. 하지만 구키가 천하제일이 될 수 있었던 건 자기들이 잘나서가 아니다. 이기는 편에 있었고, 마침 그때 적수인 무라카미 해적이 집안싸움을 벌여 분열되었던 탓이다.
일본 최강인 노부나가와 거기 붙은 구키 수군을 상대로 힘을 합쳐 전력을 다해도 빠듯했을 판에 내분을 벌였으니, 패배는 필연이었다. 그 뒤로 무라카미 해적은 선봉을 빼앗기고 뒷전에 밀려나 있게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노부나가 덕분에 패배의 원인이던 가문 내 주도권 문제가 해결되었다. 해적을 없앤다는 해적금지령에 반발해서 반란을 일으킨 무라카미 해적 본가가, 무참히 진압당한 뒤에 세토우치에서 완전히 추방당했다. 그 세력은 모조리 미치후사에게 귀속되었다.
무라카미 해적 중에서 가장 먼저 노부나가 편으로 돌아선 미치후사는 이제 전선 3백 척을 거느릴 만한 세력을 얻었다. 비록 이번 싸움을 이끌 총대장은 조선에 있는 도도 다카도라지만 여기 참가하는 여러 무장 중 단일 세력으로는 그가 가장 컸다.
“다카도라 공이 수군 건설에 공이 크고 전술도 잘 구사한다지만, 과연 우리 무라카미 해적 이상으로 수전에서 싸울 수 있을까? 마땅히 총대장은 내가 맡아야 했는데.”
구루지마 미치후사가 모래밭을 걸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자기를 총대장으로 임명하지 않은 건 역시 노부나가가 아직 무라카미 해적의 실력을 믿지 않기 때문임이 분명했다.
“이순신의 목을 잘라오면 노부나가 님도 생각이 바뀌시겠지. 그 이순신이라는 자가 얼마나 잘 싸우는지 몰라도, 과연 우리 무라카미 해적의 용명에는 비길 수 있을 리가 없어. 어디 그 알량한 솜씨 한번 보도록 하지.”
이순신이라는 자가 불태운 배가 벌써 1천 척을 넘는다고 했다.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도 그 배에 타고 있다가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 값을 톡톡히 치르게 해주리라.
“이순신의 수급을 바다에 빠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텐데.”
수전에서는 적의 시체가 물에 빠져 수급을 놓치는 경우가 잦다. 역시 밧줄에 묶은 갈고리와 자루가 긴 갈퀴를 넉넉히 준비하게 해야 할 것 같았다.
*안남: 베트남
*섬라: 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