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545
2부 3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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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국왕을 사로잡기 위해 밤을 새워서 5리(20km) 길을 달려온 일본군 7만 병력은 이제 목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강 건너에 있는 별동대 1만 명은 본대보다 조금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
“아직도 겁이 나나, 겁쟁이 고니시 놈!”
선두에 서서 군사들을 인솔하던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비웃었다. 지난밤에 있었던 군의에서 고니시는 계속 진격을 반대하면서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작 히데요시의 신하에 불과한 데다, 그동안 별로 공도 세우지 못한 고니시의 발언은 아무 힘이 없었다.
마사노리는 시마즈 이에히사, 안코쿠지 에케이 등과 함께 이케다 츠네오키를 편들어서 당장 국왕을 잡으러 가자고 주장했다. 그 결과 저 국왕의 어기(御旗)를 시야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방심한 조선인들의 허를 찌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조선 국왕이 공주성에 있는 게 아니고 이 앞 평원에 있다고?”
“예. 소문대로 전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몸이 안 좋아졌다면서 이동을 중지하고는 진영을 세우고 쉬고 있었답니다. 도성에서 데려온 측실과 함께 침소에 누워, 밖에는 나오지도 않는 바람에 측근들이 진영을 옮기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공주성을 바로 들이치려면 계룡산 북쪽 길로 이동하는 편이 훨씬 빠르다. 계룡산 줄기 여러 봉우리 사이의 길을 통과하면 금방 금강으로 나갈 수 있고,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면 간단하게 공주에 도착할 수 있다. 몇몇 포로들을 통해 얻은 정보다.
조선 국왕이 다른 곳으로 움직이지 않고 확실히 공주에 머물렀다면 일본군도 그 길을 통해 곧바로 공주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국왕은 공주를 거쳐서 전주로 내려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 앞을 차단하거나 뒤쫓아 내려가려면 계룡산 남쪽 길로 가야 했다.
이제 내일이면 평지로 나간다. 그동안 약탈로 식량을 확보하면서 진군한 탓에 진군 속도가 느려져서, 조선 국왕은 진즉에 전주로 내려갔으리라고 내심 각오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겨우 하룻길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자가 퍼질러 누워 있다는 게 아닌가.
개태사에 진을 친 일본군 수뇌부는 믿기 힘든 기쁜 소식에 열광했다. 방금 포로로 붙잡은 조선 승병이 자백한 대로라면, 이제 조선 국왕의 신변은 이들의 두 손아귀 속에 쥐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잠깐, 확인이 필요합니다! 저 승려의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고니시가 급히 나서서 좌중을 진정시켰다. 이건 너무 입에 맞는 떡이었다. 이미 추풍령을 돌파한 지 닷새, 아무리 국왕이 색에 빠져 있다고 해도 일본군이 나타난다는 소식을 접수하고 남을 기간이다. 그런데도 아직 그렇게 가까운 곳에 머물러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아프기에 근위병보다 4배나 되는 적이 다가오는데 움직이지 않는답니까? 신하들이 떠메고라도 피해야지요! 정말 국왕이 충분한 병력도 없이 거기 머물러 있다면 제정신이 아닌 겁니다! 혼자서라도 말을 타고 안전한 곳으로 도망쳤어야 합니다!”
“그 이야기라면 납득이 될 상황이 있소. 포로가 말하길, 그렇지 않아도 국왕이 후방에 있던 충청도, 경기도 병사 5만을 불러들여서 자기를 경호하게 했다는 거요. 내일이면 그 병사들이 도착할 거라고 했소. 국왕이 움직이지 못하니 대신 친위병력을 부른 거 아니겠소?”
포로로 잡힌 승병은 아군 진영에 침입해서 불을 지르려다가 화살을 맞고 붙잡혔다고 했다. 다행히 갑옷이 두꺼워 몸은 다치지 않고 다리만 다쳤는데, 그 덕분으로 쉽게 정보를 캐낼 수 있었다. 마침 아는 것도 제법 많았다.
“저들은 우리 목표가 공주성인 줄 알고 있었다고 했소. 그렇다면 피하지 않고 있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오. 더구나 요즘 자기들이 승승장구한다고 생각했을 테니 왕이 강가에서 물놀이나 하며 여유를 부렸을 공산은 충분하오. 전장에 측실까지 데리고 나왔다잖소!”
그래도 고니시는 아득바득 반대를 외쳤다. 그 사위인 소 요시토시나 부역자 국경인과 그를 지지하는 호소카와 타다오키 등은 입을 모아 반대했다. 국왕이 우세한 적군을 코앞에 두고서 피하지 않고 뭉그적거리고 있다니, 말도 안 된다는 거였다.
“좋소! 그럼 정찰을 보내 봅시다. 그럼 확실하겠지?”
공격을 주장하는 마사노리의 명령에 기병 10여 기가 곧바로 저녁 어스름 속을 달려나갔다. 해가 다 지기 전에 포로가 털어놓은 위치까지 가서 진상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초조한 기다림이 몇 시간을 이어졌다. 마침내 진영을 향해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기다리던 무장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포로가 제보한 바로 그 위치에 정말로 적진이 있었습니다! 또한, 조선 국왕의 어기가 큰 깃대에 매달려 휘날리고 있는 모습도 확실히 보았습니다.”
정찰대를 따라간 이키 무사가 분명하게 확인했다. 이로써 방침은 결정되었다. 벌떡 일어선 총대장 이케다 츠네오키가 호령했다.
“시간을 끌다가는 적이 도망칠지 모르오! 국왕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덮칩시다. 야간행군을 해서라도 급히 움직여야 하오. 보름달이 밝으니 길도 어둡지 않을 거요. 서두르시오!”
그렇게 해서 잠자리 준비를 하다 말고 급하게 일어나 출진했다. 어차피 식량과 탄약 외에는 홑이불 한 장 지참하지 않았으니 그냥 일어서서 투구를 쓰고 줄만 서면 끝이었다. 병사들만 그런 게 아니고 무장들도 마찬가지였다.
츠네오키는 출발하면서 고니시 외에도 소 요시토시, 타다오키 등 ‘이건 조선군이 판 함정이 분명하다’고 주장한 장수 전원을 남쪽으로 가는 별동대로 돌렸다. 명분은 국왕이 전주를 향해 도망갈 수 있으니 차단하라는 거였지만, 실제 목적은 뒷전으로 빼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별동대를 빼고 본대만 해도 7만, 여기서 짐꾼을 또 빼도 4만이다. 이 병력이면 조선 국왕이 거느린 근위대 2만 정도는 손쉽게 짓밟을 수 있다. 지금은 방비가 가장 취약해지는 해 뜨기 직전 새벽녘, 한밤중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안심한 파수병들이 나태해지는 시간이다.
설사 국왕이 배를 타고 강으로 도망쳐버린다 해도 상관없다. 최정예라는 근위대 병력 2만 명은 섬멸할 수 있고, 그 뒤에 국왕을 계속 추격하면 되니 전혀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계속 구름이 끼어 달빛을 가리고 병사들을 감춰주고 있다. 아직 어둠에 잠긴 동안에 선봉 대열이 적진에서 3정(약 330m) 앞까지 가면 일시에 함성을 지르면서 돌격한다. 제대로 경계하지도 않고 있을 조선인들은 압도적인 대군이 돌입하면 바로 무너지리라.
적진에 너무 가까이 가기 전에 지시에 따라 대열을 정돈했다. 가능한 많은 병력이 한꺼번에 뛰어들 수 있도록 대열을 넓게 벌렸다. 잠시 비춰준 달빛 덕분에 대열 정리에 혼선은 없었다.
입을 꾹 다문 병사들이 신호에 따라 진격을 재개했다. 곧 목표선에 도달했다. 신호에 따라 칼이 칼집에서 빠져나오고 창날이 창집을 벗었다. 번쩍이는 창과 칼이 피를 탐하면서 이제 막 돌격하려는 참이었다. 갑자기 정면에서 불꽃 하나가 삐이익거리며 하늘로 솟다가 터졌다.
“저게 뭐지?”
혼잣말을 끝내기도 전에 정면에서, 그리고 우측에서 수십 개나 되는 화염이 일면서 굉음이 울렸다. 산이라도 무너뜨릴 듯한 거대한 화염과 그보다 작은 화염 틈에서 꼬리를 끌며 하늘로 치솟는 불꽃의 비가 보였다. 크고 작은 폭발이 왜군을 휩쓸었다.
– 14 –
“실로 장관이로세!”
진영 한가운데 단을 세워서 만들어둔 전망대는 포탄 세례를 뒤집어쓰는 적을 구경하기에는 최적이었다. 이항복, 코르나로 추기경 두 사람을 데리고 위에 올라와 앉아 있으려니 평야에 늘어선 일본군 전열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왔다.
혹시나 해서 셋 다 갑옷은 입었지만. 유탄이나 유시가 날아들 염려는 없었다. 일본군 선두가 있는 위치에서 내가 있는 전망대에 닿으려면 적어도 4백m는 와야 하는데, 일본군이 장비한 어떤 무기를 쓰더라도 이 거리까지 탄환을 날리지 못한다. 조총이건, 활이건 마찬가지다.
감탄하는 사이에 중신기전 한 다발이 또 적진을 향해 폭포처럼 불꽃을 뿜으면서 날아갔다. 날아가면서 넓게 퍼진 신기전은 넓게 퍼지면서 수십 개나 되는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지난번 북방 원정에서도 본 광경이지만, 다가오는 느낌이 달랐다. 역시 상대가 왜군이라 그런가 보다.
일본군이 골짜기를 나왔다는 보고는 내 생각보다 제법 빨랐다. 놈들이 아침 일찍 출동할 줄 알았는데, 적군은 놀랍게도 밤중에 출발했다. 산지를 벗어난 평지 행군인 데다 달빛도 밝으니, 야간행군 중에 발생할지 모르는 비전투손실 같은 건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나 보다.
“어두운 탓에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사오나, 수만에 달하는 왜적이 밀려오고 있사옵니다.”
정찰대로 심어 놓은 승군들은 순서대로 달려와 적의 접근을 알렸다. 율령천 남쪽으로도 적 수천이 밀려온다는 예상 밖의 보고에는 조금 놀랐다. 이놈들, 우리를 포위할 생각인 모양이다. 미끼에 혹해서 수적 우세만 믿고 그냥 닥치고 돌격할 줄 알았더니 머리를 좀 쓰긴 쓰네.
적이 계획한 대로 ‘잘 되면’ 우리가 포위되겠지만, 그럴 일은 없다. 율령천 남쪽에는 울라 기병 2천 기를 미리 보내두었으니 적 별동대 1만 명 정도는 추가적인 병력 이동 없이도 쉽게 저지할 수 있다.
부잔타이 놈이 만사에 의욕이 없는 건 좀 걱정이긴 하다. 하지만 실질적인 울라군 사령관인 정여립이 군사들을 잘 몰아치고 있으니 울라 놈들도 자기 몫을 하기는 하겠지.
“적이 급하게 다가온다니 도리어 잘 되었다. 우리도 군사들을 깨워서 준비를 시키고, 다른 군영에도 상황을 전파하라.”
솔직히 일본군이 훤한 낮에 왔으면 더 귀찮았다. 위장이다, 은폐다 신경을 쓸 게 많으니까. 팔월 보름이 이틀 뒤라 보름달이 떴다지만, 그래도 낮보다는 어둡다. 빛이랑 소리만 안 내면 우리 움직임이 훨씬 자유롭게 되었다.
화포는 무종야포와 신기전기 화차, 대완구 같이 사거리가 좀 짧은 무기들을 모조리 본진에 – 내가 있는 곳이라 본진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정식으로는 우군이다 – 집중했다. 사거리가 긴 9근 포와 18근 포는 권율이 있는 중군에 두었다. 선거이가 있는 좌군은 포를 두지 않았다.
갑옷이나 화포가 번쩍이지 않도록 천을 덮고 흉벽 뒤에 몸을 감춘 채 다들 숨을 죽이면서 기다렸다. 마침내 달빛 아래에서 수만에 달하는 적이 이쪽으로 다가왔고, 칼과 창이 날을 빛내는 순간이 왔다. 다음 순간 유극량이 준비해둔 소신기전을 한 발 쏘아 올렸다.
예전의 평범하던 나 같았으면 아무리 적군이라 해도 수천 명이 뼈와 살이 분쇄되는 광경을 이렇게 태연하게 보지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드니 입맛이 좀 쓰다. 전쟁을 몇 차례 겪고 사람이 무더기로 쓰러져 죽어가는 모습을 숱하게 보고 듣다 보니 점점 무뎌져 가는 것 같다.
이번 생에만 벌써 네 번째 전쟁이다. 세 차례에 걸친 북방 전쟁, 그리고 왜란. 직접 친정에 나선 것만 무자년에 이어서 두 번째다.
죽기는 무자년 때 야인들이 정말 많이 죽었다. 몇십만 명이 죽었더라? 하지만 그 야인들은 내 백성이 아니었고, 워낙 넓은 전역에서 전투가 벌어진 터라 내가 직접 본 싸움터는 그중에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는 내 군사들, 내 백성들이 숱하게 죽었다.
정확한 사망자 숫자는 집계가 돼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적어도 십만 명 단위로 세어야 할 건 분명하다. 직접 해를 당한 백성들만 해도 수십만, 피난길에서 고초를 겪는 이들까지 전부 합산하면 그 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 그 참상도 상희와 함께 한껏 보지 않았는가.
여기에 신립과 함께 오위군 2만을 한 번에 잃었다. 그 일로 정신적인 충격을 너무 받았더니 지금 눈앞에서 포화를 뒤집어쓰고 죽어가는 왜병들 따위를 보고 가엾다고 생각할 만한 인정은 죄다 말라버린 지 오래다.
“유럽에서도 이토록 완벽한 매복은 사례가 별로 없을 겁니다. 놀랍습니다.”
코르나로가 옆에서 탄복했다. 칭찬을 받자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솔직히 이걸 순전히 내 힘으로 얻어낸 성과라고 하기는 부끄러운 일이라서 말이지. 권율이나 유극량이 이런 아이디어 하나 못 내놓을 사람은 아니고, 딱히 뛰어난 계략도 아니다. 왜군이 알아서 덫에 뛰어들었다.
“아니, 이건 내 밑에 있는 장수들이 세운 공이지 내 공은 아니오.”
“군대를 포진케 하고 정찰을 확실히 하여 주변을 살피는 일에 모두 전하께서 한몫하셨는데 어찌 세우신 공이 없겠습니까. 겸양을 거두시지요.”
코르나로는 군의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영 안팎을 다니며 우리 군사들의 포진을 보았고, 데 라 로카 중위를 통해 군의 내용 일부를 전해 들었다. 그러니 내 비위를 맞추려고 이런 말도 할 만하다.
“아니오. 나는 그저 군의 사기를 높이고자 친정에 나섰을 뿐이라오.”
칭찬을 짐짓 사양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단 아래에서 선전관 유형이 올라와 보고했다.
“왜적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햇살을 등진 일본군이 급하게 동북쪽으로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대열은 엉망진창, 땅바닥에는 저들이 떨어트린 무기가 널렸다. 적이 물러난 자리에는 수천 구는 될 듯한 시체와 아직 숨이 붙은 중상자가 나뒹굴었다.
“좀 더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
표적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고, 제대로 조준할 여유도 없이 마구 쏘아붙였다. 게다가 16세기 포탄이다 보니 아무래도 위력에 한계가 있어서, 포격에 죽은 왜병 숫자가 내가 기대한 만큼 많지는 않았다. 들판에 널린 몸뚱어리 숫자를 언뜻 세어보니 한 4천 명쯤 돼 보인다.
우리 군사들이 몰려나가서 역습했으면 분명히 더 많이 죽였을 거다. 하지만 난전으로 잘못 끌려 들어가면 일방적이었을 싸움이 혼전이 되고, 입지 않아도 되는 피해를 본다. 야간이니까 우리 군사들끼리 오인교전이 벌어질 여지도 크다.
그보다는 적을 좀 덜 죽이더라도 안전하게 사격으로 해치우는 게 훨씬 낫다. 어쩔 수 없는 경우는 몰라도, 분명 안 죽어도 될 병사들을 죽게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
“전하, 추격 명령을 내리시겠습니까?”
옆에 서 있던 이항복이 물었다.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다. 군사 지휘는 장수들에게 맡기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각 진영에 사자를 보내 절대 경계를 풀지 말라 이르는 정도만 하라. 적은 이 정도로 물러나지 않고 분명 우리 화포 사거리 밖에서 진을 치고 대열을 다시 편성하여 싸움을 계속하려 할 테니 대비해야 한다.”
벼르고 별러서 날 잡으러 온 놈들이다. 포화에 한 번 밀려났다고 해서 포기하고 물러날 리 없다. 게다가 우리 쪽 병력이 겨우 2만인 줄 알고 있을 테니, 태세를 정비해서 다시 돌입하면 숫자로 밀어붙여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거다.
오른쪽, 즉 남쪽에서 말 수천 기가 달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정여립이 지휘하는 울라 기병들이 날이 밝자 율령천 남쪽에 있는 왜군 별동대를 치러 나가는 참이었다. 어두우면 적을 식별하기 어려우니, 싸움이 시작됐어도 바로 나가지 않고 기다렸던 모양이다.
“전하, 정여립이 호남에 이어 이곳에서도 용맹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뛰어납니다. 옛날에 지은 죄도 충분히 뉘우친 듯하니, 관직을 주어 도성으로 부르셔도 될 듯합니다.”
“병판의 말이 옳도다. 다만 정여립을 금위사로 복귀시키기보다는 서반직(무관직)을 내림도 좋을 듯하다.”
야인들이 쳐들어왔을 때 속오군 이끌고 맞섰던 일도 있고, 지금 싸우는 모습도 보니 정여립 능력은 비밀경찰보다 군대 쪽에 더 걸맞지 않을까 싶다. 뭐, 당장 정할 건 아니니 잠시 두고 보도록 해야겠지만. 그보다는 다른 문제부터.
“훌륭합니다.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조선군은 유럽 어느 군대보다 우수합니다. 규율도 매우 엄격하게 잘 잡혀 있고, 장비도 훌륭합니다.”
“허허, 칭찬해주어 고맙소. 이참에 우리 조선군의 위용을 마음껏 보시기 바라오.”
전투를 관전하던 코르나로의 칭찬이 계속 이어졌다. 나도 적절히 답했다.
교황 특사가 유럽에 돌아가서 조선군의 위력을 알리면 조선 원정 같은 가당찮은 헛소리를 하는 놈은 절대 나오지 않을 거다. 그러니 기회가 왔을 때 한껏 홍보해야겠다. ‘강한 군대를 가진 나라는 언제나 존중받는 법’이니까. 스탈린이었지? 이 말로 핀란드군을 칭찬한 사람이.
이 시대에 10만 정예군을 한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나라도 드물지. 그리고 조선군은 혹시 봉급이 좀 늦더라도 유럽 용병들처럼 반란을 일으키거나 파업을 하지 않는다. 급료병이라고 해도 임금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으니까 말이다.
고개를 다시 돌려 남쪽을 봤더니 정여립의 기병들이 일본군 별동대를 마구 뒤로 몰아내고 있었다. 적은 맞싸우려면 방진이나 원진을 형성하고 버틸 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고 계속 물러나기만 하고 있었다. 날이 약간 밝은 덕에 놈들이 든 가문 깃발을 구분할 수 있었다.
“흥, 누군가 했더니 배반자와 반역자가 아닌가.”
내 호의를 배반한 고니시와 내 은혜를 원수로 갚은 소 요시토시의 깃발이 보였다. 그 옆에 있는 건 호소카와 가문 깃발이다. 그놈들을 율령천 북쪽에 있는 왜군 본대와 나란히 늘어서는 위치까지 밀어붙인 정여립이 의기양양하게 본래 위치로 돌아오고 있었다.
“서전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고맙소.”
코르나로의 인사에 답하고 돌아보니 일본군은 대충 4km 정도 물러나서 대열을 정비하고 있다. 저놈들이 지금 얼마나 당황하고 약이 올랐을까 생각하니 막 웃음이 나려고 한다. 우리 장졸들도 지금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으니 내가 살짝 웃어도 안 될 건 없겠지.
적이 시도한 일차 공세를 격퇴했으니 이제 반응을 보면서 느긋하게 밟아나가면 된다. 약도 좀 올려 주고. 어디, 네놈들이 우리한테 베풀었던 괴로움을 너희도 한번 실컷 당해 봐라.
* 일본 리(里)는 길이가 조선의 10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