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547
2부 325화
– 18 –
“장졸들은 들으라!”
연달아 울리는 포성 한가운데서 권율이 소리 높여 외쳤다. 권율이 서 있는 뒤편으로는 18근 포와 9근 포가 쏘아대는 철환을 맞으면서 왜군이 묵묵히 다가오고 있었다.
대구에서는 18근 포 한 방이면 수십 명은 기본으로 해치웠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포환 한 발에 많아야 일여덟 명이 쓰러졌다. 대구에서는 공성전인지라 적이 병력을 밀집시켰지만, 여기서는 각 열의 앞뒤 간격을 크게 넓혀 포환에 맞았을 때 죽는 숫자를 줄인 탓이다.
큰 효과가 없음은 알았으나 권율은 포격을 멈추라 명하지 않았다. 거탄이 날아가서 적진을 헤집어놓는 효과가 분명히 있었고, 일방적으로 포를 쏘아 적을 타격함으로써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기능도 있었다.
“주상께서 말씀하셨노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임금과 조정은 백성을 지키고 보살피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백성이 임금에 충성함은 자신을 돌보는 어버이를 위해 효를 바침과 같고, 너희 군병들 또한 신하로서 임금께 충성하고 다른 백성을 지킴이 도리를 다하는 일이로다.”
권율 휘하에 있는 중군 군사들은 북방군 1만, 충청도 관군 5천, 속오군 5천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감군 3만은 유극량 휘하 우군에 2만, 선거이 휘하 좌군에 1만이 있다. 선거이 역시 권율처럼 충청도 군사 1만을 함께 거느리고 있다.
이들 북방군 병사들은 권율과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몇 년이나 전장을 누볐다. 눈빛만으로 서로의 뜻을 알 수 있는 그런 친숙한 사이였다. 이들 중 절반은 야인이거나 야인의 피가 섞여 있었지만 그런 건 서로 간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런 강병들 사이에 있으니 경험이 부족한 충청도 병사들도 용기백배했다. 게다가 상감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고, 엄청나게 강력한 화포도 여러 문이나 있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사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명심하여라! 너희의 땅을 빼앗고, 너희의 처자를 빼앗으러 온 저 도적들을 모조리 쳐 죽여야만 너희와 너희 후손이 평안을 누릴 것이니라!”
“주상전하 천세!”
“주상전하 천세!”
좌군, 우군 진영에서도 선거이와 유극량이 같은 조서를 읽은 모양이었다. 양쪽에서 천세를 외치는 함성이 하늘을 울렸다. 권율이 환도를 뽑아 들며 크게 호령했다.
“전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노라! 모두 최선을 다하라!”
폭풍 같은 함성이 다시 한번 진영을 휩쓸었다. 그사이에 섞여 총통위 포수들이 쏘아대는 18근 포, 9근 포의 포성이 연달아 울렸다. 왜병들의 대열이 포환에 맞으면서도 점점 다가왔다.
– 19 –
활을 겨누며 달려오는 조선 기병들을 향해 철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기병 하나가 말에서 떨어져 굴렀지만 적은 거침없이 화살을 날렸다. 아군 여덟 명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고니시 휘하 병사들은 동료의 시체를 남기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전진했다. 가죽옷을 입은 조선 기병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30기, 40기씩 끊임없이 달려와 화살을 날리고 다시 멀어졌다. 본대가 포탄에 맞기 한참 전부터 이쪽에서는 전투가 치열했다.
이렇게 되기 전에 고니시도 자기 휘하에 있는 기병 5백 기를 내보내서 저지하려고 해봤다. 어제는 적 기병들에게 제대로 손도 못 쓰고 당한 만큼, 오늘은 비등하게 맞서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숫자는 4배나 되는 데다 더 큰 말을 탄 조선 기병들은 이들을 완전히 농락했다. 고니시군 기병들이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면 황급히 물러났지만, 곧바로 굽은 활을 들어 뒤쪽으로 화살을 쏘았다. 정신없이 적을 쫓던 기병들이 일격에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기병들은 모두 제법 든든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도 조선군이 날린 화살은 여지없이 갑옷을 뚫었다. 무척이나 묵직하고 강한 화살이 분명했다. 활을 가진 몇몇 기병이 응사하려고 했으나 사정거리도, 위력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적에게 별 피해도 입히지 못하고 백여 기 가까운 병력을 잃었다. 기병들이 조선군을 밀어내면 그 뒤를 따라 진군할 생각이었던 고니시는 어쩔 수 없이 기병을 철수시키고 보병의 철포와 활로 적을 몰아내며 진군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철포보다 조선군 활이 더 멀리까지 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조선군은 철포로 노려서 쏠 수 있는 거리 밖에서 화살을 날렸다. 철포대는 부디 눈먼 탄환이 하나라도 맞기를 바라며 마구잡이로 납덩어리를 쏘아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활은 아예 적에게 닿지도 않았다.
고니시가 상황을 살피니 반 리(2km)를 전진하는 동안에 5백 명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말안장에서 떨어진 적은 50기가 채 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쌍방이 피해를 낸다면, 적보다 다섯 배나 수가 많은 아군이 훨씬 먼저 전멸할 판이었다.
“장인어른. 일단 전진을 멈추고 병력을 다시 편성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본대의 전진에 맞춰야 하네. 우리가 멈추면 저놈들이 본대 측면을 칠 거야.”
소 요시토시가 주저하며 말렸지만, 고니시는 계속 진군하라고 명령했다. 어제 조선 국왕을 만나고 온 이후, 이들 두 사람은 군감 후루타 시게나리에게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만약 싸움에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면 총대장 츠네오키에게 어떤 보고가 올라갈지 모르는 판이다.
“지금 본대에는 포탄이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진영에 뛰어들면 자기네 포탄에 맞을 텐데, 저들이 그런 위험을 무릅쓸까요?”
“포격을 중단하면 그만 아닌가! 멀리서 날아오는 철환보다는 코앞에서 쏘는 화살 쪽 피해가 훨씬 크다. 더구나 지금 본대는 기병을 막을 준비를 전혀 못 하고 있지 않나.”
지금 본대는 조선군 포탄 세례를 받으면서도 묵묵히 전진하고 있었다. 포격에 의한 손해를 줄이려고 대열을 널찍이 띄운 상태라, 적 우익에 있는 기병들이 강을 건너 좌측에서 공격하면 적이 궁기병이라도 큰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기병을 막으려면 밀집대형이 필요하다.
“이제 조금만 더 전진하면 되네. 그러면 적군 화포를 제압할 수 있어.”
국왕이 있는 조선군 본진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 흉벽 뒤에 숨어 있다. 화포는 그 앞에 놓여 있다. 그 정도야 흥양을 벗어나 낙안으로 나갈 때 가토와 후쿠시마가 했던 것처럼 쳐서 뚫으면 된다. 장창대가 포격을 견뎌내며 가까이 가면 후려치기만 해도 돌파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단밀현에서 적 권율군과 싸웠던 호소카와 공은 절대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화포는 근접한 거리에서 작은 탄환을 마구 뿌려대듯 쏘아대며, 또 터지는 폭발탄을 날려 많은 병사를 죽인다면서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호소카와군은 별동대에서도 후미에 있다. 병력도 적고, 이미 두 차례나 대패를 겪었고 보니 선봉에 나서기는 좀 곤란했다. 헌데 요시토시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후진에 있으라는 지시를 호소카와 타다오키가 내심 반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군! 신기전입니다!”
고개를 들자 조선군이 본대를 향해 신기전을 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천 개나 되는 불화살이 화약을 품고 하늘로 치솟았다가 땅바닥으로 쏟아졌다. 수천이나 되는 폭발이 이미 포격 때문에 듬성듬성해진 본대 선두를 휩쓸었다.
– 20 –
신기전 약통 속에는 화약과 더불어서 파편 효과를 내기 위한 쇳조각이 들어있다. 화약량이 별로 많지 않은 데다, 쇳조각 크기도 작아서 갑옷을 뚫기는 무리지만 노출된 피부에다 상처를 입히는 정도는 간단하다. 재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웬만한 천도 뚫을 수 있다.
줄지어 걸어오던 왜병들은 주변에서 신기전이 터지자 두 손으로 뒤통수나 얼굴을 부여잡고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일본식 투구, 특히 삿갓처럼 생긴 일반 병사용 투구는 얼굴이나 목, 뒷덜미를 전혀 보호하지 않는 까닭이다. 드림천이 뒤를 가릴 뿐이다.
왜군 본진은 그래도 계속 진격했다. 포격으로 입는 손실을 분산대형으로 줄이면서 꾸준하게 밀고 나왔다. 보아하니 조총 사거리에 들어올 때까지는 저렇게 걸어오다가 사격전이 시작되면 전력으로 뛰어서 우리 진영에 뛰어들며 포격을 무력화할 심산인 듯하다.
생각 같아서는 오도리 기병을 내보내서 저 얄팍한 보병 횡진을 정면으로 짓밟아 뭉개버리고 싶다. 그런데 그러자면 포격도 멈춰야 하고, 아군에 비해 적이 너무 많다. 선두 대열 몇 개가 밟히는 사이 뒤에서는 창병을 밀집시키고 조총대랑 궁병대를 움직여서 맞서겠지.
저놈들도 바보가 아니니 당하기만 할 리는 없다. 내가 왜군 수준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지도 모르지만, 오도리가 아무리 정예라도 겨우 2천 기를 6만 대군 정면에 들이밀기는 부담스럽다. 으음, 오도리 2천 기를 청주에 예비대로 남기지 말고 4천 기 전부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정말 희박한 확률이긴 하지만, 적이 단 몇천이라도 별동대를 추가 편성해서 2차로 추풍령을 넘은 뒤 북진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기동성과 전투력이 우수한 오도리 기병 2천을 청주에 남겼는데, 그게 좀 아쉽다. 4천 기면 그래도 돌격할 만할 텐데.
잠시 아쉬움을 품는 사이 적이 더 가까워졌다. 척탄을 장전하고 대기하던 무종야포 60문이 선거이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불을 뿜고, 구름 같은 초연이 피어올라서 주변을 덮었다. 척탄 터지는 소리나 왜병들이 지르는 비명 같은 건 포성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다.
그래, 처음 작전대로 최후의 최후까지 화력으로 제압한 뒤에야 직접 돌격해서 해치우도록 하자. 그게 우리 군사들이 가장 적게 죽는 전술이니까. 화약은 주문하면 되고, 총포는 녹여서 재생하면 되지만 사람은 죽으면 되살릴 수 없다. 억지로 되살린들 좀비밖에 더 되겠나.
60문이나 되는 야포가 일제히 뿜은 연기는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 연기 속에서 각 포대가 제각기 재장전과 발사를 반복했다. 척탄 몇 발이 날아간 뒤에는 조란환으로 포탄이 바뀌었다. 중군 쪽에서 왜병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 그쪽 중포(重砲)들도 조란환을 쏘는 듯하다.
“포병의 장비는 모두 유럽식 화포라고 하셨지요?”
“중군에 배치한 중포는 펠리페 2세가 보내준 기술자들이 제작했지만, 이쪽에 있는 경포는 순수하게 우리 조선에서 만든 거라오. 거의 90년이 되었지요.”
“참으로 놀랍습니다. 포신이야 그렇다고 해도 포가와 포차는 개발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동양이건 서양이건 대포는 본래 바퀴가 없다. 수레에 대포와 포가(砲架) 부품을 싣고 가다가 필요한 장소에서 조립해서 땅에다 놓고 쐈다. 포를 얹어 끌고 다니면서 발포할 때의 반동까지 견딜 수 있을 만큼 가볍고 튼튼한 포가는 의외로 후대에 나온 물건이다.
“선대의 유산이오. 계속 개량해야지요.”
포병이 달성할 과제는 많다. 강선도 파고, 불랑기 수준인 자모포가 아니라 진짜 제대로 된 후장포도 만들고, 안심하고 쏠 수 있는 대구경 고폭탄도 만들고. 문제는 이 개념들을 실제로 구현할 기술 부족이다. 강철, 공작기계, 약품…아직 필요한 수준이 못 되는 게 한둘이어야지.
당장은 못 만들더라도 나중에는 할 수 있도록 기반을 쌓는 게 지금 할 일이지 싶다. 연산군 때 쌓은 약간의 기반으로 현재의 조선이 만들어졌으니, 지금 쌓은 기반은 지금보다 더 달라진 조선을 만들어낼 게 아닌가. 적어도 경성군 같은 반동 정치는 절대 시도할 수 없게 할 테다.
코르나로 및 이항복과 몇 마디 더 주고받는 사이 지휘소에 있는 유극량이 명령을 내렸다. 지시를 받은 기패관이 달려가 명령을 전하자, 흉벽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조총대와 궁수대, 장창대가 화살을 메기고 탄환을 쟀다. 번쩍이는 남만갑의 광채가 눈을 부시게 했다.
우군 전면을 완전히 가로막은 흉벽은 높이가 넉 자, 두께가 한 자다. 후면에는 나무판자를 덧댔다. 흉벽을 쌓느라고 흙을 파내는 동안 깊이 두 자, 폭 두 자짜리 도랑이 흉벽에서 10보 앞에 자연스럽게 생겼다. 그리 깊진 않지만, 재수 없는 적병이 빠져 넘어지기에는 충분하다.
우군은 적이 코앞에 밀려와도 맞돌격하지 않는다. 왜조총 따위로는 절대 뚫지 못할 이 흉벽 뒤에 숨어서 적군에게 총과 활을 쏜다. 혹시 사격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나 걱정했던 햇빛은 자욱하게 낀 초연이 다 가려버렸다. 사격을 받고도 살아서 다가오는 왜군은 창병들이 막는다.
선전관 유형에게 물으니 적은 이제 3백 보 앞까지 다가왔다고 했다. 원체 병력이 많다 보니 그렇게 대포에 처맞고도 아직 잔뜩 남은 모양이다. 이 정도 화력을 동원해도 역시 20분 정도 퍼부은 것만 가지고는 저 많은 왜병을 몽땅 때려잡기에 부족하다는 소리겠지.
일본군이 입은 피해가 우리 기대보다 적다고 해도 놀랍기는 놀랍다. 이 포화를 맞으면서도 대열을 유지하고 전진을 계속하다니, 역시 전국시대를 겪은 베테랑 병사들이라 그런지 멘탈이 보통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저것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준비해둔 발사틀을 모두 사용한 신기전기는 사격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 대신 이제 대완구가 포격에 가담해서 비격진천뢰를 쏴 날리기 시작했다. 신기전기처럼 전면에 장애물이 있어도 방포에 지장이 없는 대완구는 야포와 달리 역시 흉벽 안쪽에 있다.
포에 맞아 쓰러지는 적들이 지르는 비명은 여전히 포성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적이 2백 보 거리까지 도달했다. 야포 포수들을 철수시키기로 정해놓은 거리다. 일본군의 발걸음이 속보 수준으로 빨라졌다.
화약 자루만 챙겨 든 포수들이 급히 흉벽을 넘어 진영으로 돌아왔다. 어차피 대포를 빼앗길 일은 없겠지만, 혹시 사고가 날지도 모르니 화약만 챙겨온 거다.
포수들이 철수를 완료했을 때 적 선두가 150보에 도달했다. 각 조총대를 지휘하는 군관들이 호령하자, 흉벽 위에 팔꿈치를 괴고 총을 겨눈 조총수들이 이제 뛰기 시작하는 왜적들을 향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야포가 발포를 멈추자 걷혀가던 초연이 다시 우리 전열을 뒤덮었다.
“중군에서 신호가 올랐사옵니다!”
조총에 탄환을 장전하는 사이를 메우기 위해 쏘는 화살이 연기 속을 날았다. 바람을 가르는 그 소리 속에서 이항복이 손을 들어 왼쪽을 가리켰다. 과연 권율이 있는 중군에서 총진격을 명하는 신호기가 오르고 있었다. 덫을 조일 시점이 온 것이다.
– 21 –
“진군하라!”
선거이 휘하 병력 1만 5천이 일제히 앞으로 나섰다. 도감군 1만, 충청병영군 5천이다.
“빨리 걸어라! 모든 공을 중군에 양보할 셈이야!”
좌군이 진을 친 자리는 지형 탓에 율령천에서 20리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석성천이 또 앞을 막고 있어서 진격에 지장을 받는다. 하지만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중군에서도 속오군을 뺀 1만 5천이 앞으로 나섰다. 왜적은 중군 쪽에는 포대밖에 없는 줄로 여겼기에 소수 병력만 배정하고 대부분 전력을 주상께서 계시는 좌군에 집중했는데, 느닷없이 측면에서 대군이 나타나자 당황하는 모습이 여기서도 보였다.
왜군은 5리 가까운 거리를 피와 시체를 깔면서 진격했다. 벌판에 쓰러져 있는 왜병은 5천, 아니 1만은 족히 돼 보였다. 그중에는 아직 숨이 붙은 자도 많았다. 피투성이가 되어 벌판을 기는 왜병을 보니 코웃음이 쳐졌다. 모두 남의 땅을 침범한 데 대한 마땅한 대가다.
“장군! 적이 주상께 가려고 합니다!”
왜군 선두는 측면에서 나타난 중군을 목격하고서도 좌군 진영을 향해 활과 총을 쏘아대면서 거세게 공격했다. 그리고 흉벽 때문에 사격이 별 효과를 내지 못하자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우군에서도 치열하게 사격을 가했다. 비격진천뢰가 작렬하고 조총과 각궁이 왜병들이 걸친 갑옷을 뚫었다. 적 선두가 도랑을 넘자 척탄 수백 개가 일제히 날아가 작렬했다. 포탄에 총탄, 신기전과 화살을 모두 피해내며 악착같이 달려들던 왜병들이 무더기로 고꾸라졌다.
“당황하지 마라! 이미 다 예상하였다! 전하께서는 무사하실 것이니, 침착하게 명을 따라라!”
적이 우군을 공격한다고 해서 당황하면 안 된다. 우군은 철저하게 방어준비를 해두었고, 잘 막아내고 있었다. 중군도 우군을 공격하는 적의 측면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고 있다. 총통차가 조란환을 퍼부어 적을 쓸어내고, 그 자리로 용맹한 북방군 병사들이 돌입한다.
“우리 임무는 적이 중군의 좌측방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면서 적의 뒤쪽 옆구리를 공격하여 움직일 수 있는 범주를 제한하는 것이다! 침착하게 움직여라!”
좌군은 왜적과 단병접전을 벌이지 않고 활과 강선조총으로 제압사격을 가해 적을 몰아넣는 임무를 맡았다. 아군 전열과 율령천 사이로 몰린 적의 숨통을 단박에 끊는 일은 지금 저기서 달려오는 황진의 별군, 북방 기병 3만 기가 맡게 될 터였다.
적은 어제 종일 머물던 후방 숙영지에 어제 새벽 매복에 걸렸을 때 죽고 다친 자 약 1만을 모아놓았다. 그곳에 남아 있던 왜병 중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 쇄도하는 기병들을 보고 겁에 질려 사방으로 도주하는 모습이 보였다.
* 일본 리(里)로 1리 = 조선 리(里)로 10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