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552
2부 3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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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에는 벌써 찬 바람이 불었다. 태어나서 이런 추위를 겪어본 적이 없는 나가마스는 두꺼운 솜옷을 입고도 몸을 움츠리며 부르르 떨었지만, 차차는 태연했다.
“이 정도 날씨를 가지고 뭐가 그리 춥다고 난리십니까, 숙부?”
차차에게는 벌써 조선에서 겪는 다섯 번째 겨울이다. 북한산성에서 보내는 것만 두 번째다. 무예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임해군과 함께 겨울 사냥도 숱하게 다닌 차차에게는 8월 말 정도는 그냥 선선한 가을 날씨였다. 하지만 나가마스는 다른 모양이었다.
“추운 게 아니다. 전쟁터에 다시 가게 되었는데, 사정을 모르니 마음이 불편해 그렇다.”
나가마스는 조카 앞에서 애써 핑계를 댔다. 차차가 피식 웃었다.
“전황은 다 알고 계시잖아요? 핑계가 궁해요. 그냥 춥다고 하세요.”
두 사람은 북한산성 내에 있는 암자에 시종들과 함께 머무르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이들을 따로 감시하기 귀찮았는지 같은 장소에 가두어두고, 서로 오가는 것도 막지 않았다. 덕분에 외로움을 많이 덜 수 있었다.
“유키가 사흘마다 도성에 가서 전쟁 소식을 모아오고 있잖아요. 외숙도 현실을 인정하세요. 큰외숙은 이미 전쟁에 졌어요. 이번에는 아주 엄청난 참패를 당했던데, 큰외숙이 계속 싸우고 싶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전세를 뒤집겠어요?”
나가마스가 사절로 항복을 권하러 온 이후로 일본군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이기지 못했다. 노부나가가 지휘하는 본대는 대구성에 못 박혀 움직이지 못했고, 우회기동을 시도하던 병력은 잇달아 패했다. 전주성 공략도 실패했다. 육지뿐이 아니라 바다에서도 연패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둘 때마다 조보를 찍어서 한양 일대에 뿌렸다. 백성들은 당연히 사기충천했고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전장에 나간 임금을 칭송했다. 나가마스는 유키가 구해온 조보를 볼 때마다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러던 끝에 맞은 결정타가 닷새 전에 당한 패배였다. 8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추풍령을 넘어 충청도에 침입했다가 10만에 달하는 조선군에게 포위, 섬멸당했다고 했다. 조선 조정이 공표한 바에 따르면 5만 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쏘아죽였다는 거였다.
목을 베거나 생포했다고 거명된 장수 중에는 나가마스가 아는 이들이 숱하게 섞여 있었다. 죽인 수급 숫자라면 부풀릴 수도 있겠지만, 금방 들통이 날 사람 이름을 가지고 거짓 공표를 내놓을 것 같지는 않았다.
“외숙께서 그러셨지요? 큰외숙이 끌고 올 수 있는 병력은 다 끌고 왔다고요. 이쯤이면 이미 졌다고 봐야겠네요. 이젠 일본으로 돌아가시는 길밖에 없어요. 그것도 이젠 쉽지 않겠지만요.”
차차는 여자다. 하지만 보통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아자이 나가마사의 딸,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였다. 상황을 보고 판단하는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 형님 휘하에 남은 병력이 정확히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 않느냐? 아직 역전을 이룰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마침 조선 국왕도 직접 전선에 나갔으니, 맞대결로 승부를 낼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
“글쎄요. 조선 국왕은 그럴 의사가 없어 보이는데요.”
차차의 나이 어느덧 22세, 조선에서 보낸 세월만 해도 벌써 5년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웬만큼은 파악했다. 수시로 궁궐에 드나들면서 임금의 성격도 알았다. 이젠 조선에 처음 건너오던 그때와는 달랐다.
“설사 큰외숙이 결전에 이긴다 해도 조선 국왕을 잡을 수는 없을 거예요. 그리고 국왕은 또 병력을 모아서 싸움에 나서겠지요. 저기 대장간에서 밤낮으로 무기 만드는 소리 들리시죠?”
북한산성 안에는 군기시가 운영하는 대규모 무기 제작 공장이 있다. 철포, 대포, 갑옷, 창칼 따위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또 외부로 운반되고 있었다. 새로 편성하는 부대 병사들에게 지급하는 것이다.
지금 도성 일대에서 훈련 중인 훈련도감 소속 병력만 해도 3만이었다. 그리고 조선 국왕이 마음만 먹으면 백만 대군도 편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가마스는 유키가 훔쳐온 조보에 적힌 기사를 보고 알았다. 나가마스 한 사람을 속이기 위한 가짜 정보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알고 있다. 그야 듣고 있지만….”
한숨을 쉬는 나가마스를 향해 차차가 웃어 보였다.
“큰외숙은 이번 전쟁에서 졌어요. 아마 국왕이 외숙을 부른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조선 국왕이 나를 부른 이유가 이겼기 때문이라고?”
나가마스는 신립의 시신과 함께 도성에 도착한 이후 줄곧 북한산성에 갇혀 있었다. 차차와 이야기를 나누는 외에는 아무 소일거리도 없던 그에게 오늘 국왕이 보낸 소환장이 날아왔다. 지금 당장 경상도로 내려오라고 했다. 차차의 말을 듣자 나가마스도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나를 시켜서 형님께 항복이라도 권하겠다는 거냐?”
“그게 아니면 외숙을 부를 필요가 없잖아요. 패배로 기가 꺾인 큰외숙을 설득하려면 그동안 잡혀 있으면서 한껏 기가 죽고, 조선 국왕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 확실하게 알게 된 외숙만 한 사람이 있겠어요?”
“하지만, 형님이 고작 내 말을 듣고 항복할 리가 없어. 지금 분명….”
노부나가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을지, 직접 보지 않아도 빤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차차는 그의 걱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큰외숙이 항복을 거절한다고 해도 조선 국왕에게는 하나도 손해날 게 없어요. 아마 외숙이 실패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거예요.”
당황해하는 나가마스를 향해 차차가 생긋 웃었다.
“그러니, 가시거든 전하께 잘 좀 말씀드려주세요. 저는 여기에서 오직 전하께서 주선해주실 새 신랑감을 기다리며 얌전히 지내고 있다고 말이지요.”
“알았다.”
차차는 조선 양반, 특히 왕족들은 결혼한 적이 있는 여자와 절대 혼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듯한 그 태도에 나가마스도 감탄했다. 그 계획이 현실적이건 아니건, 의지를 갖추고 계속 노력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 9 –
공주성 주변은 마치 장날 같았다. 싸움이 있은 지 엿새가 지났어도 군사들과 백성들은 아직 논산벌에서 벌어진 결전에 대해 신나게 이야기를 나눴다. 누가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 적이 도망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따위가 모두 얘깃거리가 되었다.
이제 내일이면 임금이 직접 지휘하는 친정군이 공주에서 경상도로 출발한다.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무구를 손질하는 일이야 진즉에 끝났고 추풍령 고갯길도 이미 확보했다. 왜군은 길을 막지 않고 그대로 비워놓은 상태였다.
여기에 대군이 움직이니만큼 갖춰야 할 준비도 있었고, 혹시 모르는 위험을 배제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지리에 익숙한 충청도 관군과 속오군 1만 명이 공주에서 추풍령까지 이어지는 도로 양편을 철저히 수색했다. 덕분에 왜군 낙오병 3백 명을 더 죽이거나 붙잡을 수 있었다.
임금은 그럴 필요 없으니 빨리 왜적을 추격하자고 했지만, 조정 신하 전원이 이 문제에서는 일치단결하여 뜻을 꺾지 않았다. 흩어진 왜병 중에 행여라도 진시황을 저격한 형가 같은 자가 있으면 어쩌겠는가? 고려 때도 살리타이를 저격한 김윤후 같은 사례가 있지 않은가?
어쨌든 그 청소도 마무리됐다. 내일은 드디어 경상도를 향해 출발이다. 닷새 정도 움직이면 추풍령을 넘어 김산군에 도착할 수 있다. 그다음은 대구성 구원이다. 이제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였던 이번 전쟁도 종막이 바라다보이고 있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전하께서 치르신 고생이야말로 실로 비할 사례가 없으십니다. 어떤 옛 선왕들께서 이리 큰 환란을 겪으셨겠습니까.”
이덕형과 이수광은 입을 모아 내게 예를 표했다. 이들은 구리와 초석을 가득 실은 남만선을 타고 8월 10일에 벽란도에 들어왔다. 그리고 싣고 온 화물을 호조에 넘기고, 도성에서 세자와 분조 신하들에게 여정을 간략히 보고한 뒤 공주로 내려온 참이었다.
“전하께서 이토록 큰 난리를 당하시는 동안 신들은 바다 건너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었으니, 이 큰 죄를 어찌 청산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는 대로 처분하소서.”
“되었다. 너희를 바다 바깥으로 보낸 장본인이 나거늘, 죄는 무슨 죄란 말이냐?”
이덕형은 답답한 면이 있을 정도로 원칙을 중시하는 위인이다. 그렇다 보니 이런 소리가 안 나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인사치레라고 생각하고 내가 적당히 자르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 문제는 더 논하지 마라. 그보다 유럽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가 궁금하도다.”
“예, 전하. 서반아에 도착한 뒤에 있었던 일들부터 여쭙겠습니다.”
정사 정곤수가 서면으로 제출한 보고서를 이미 받아보기는 했다. 하지만 정곤수는 형식상의 우두머리였고, 실제로 실무를 처리한 건 이들 두 사람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보고서와 별개로 직접 받는 구두보고는 이들에게 받아야 했다.
이덕형과 이수광은 자신들이 접한 주요 인사들, 그리고 그들과 주고받은 주요 안건에 대해 나열하면서 그중 내가 관심을 표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더 상세한 답을 했다. 인물과 사건에 대한 정보는 내가 아는 바와 모두 일치했다. 내가 원래 모르던 부분이야 뭐 알 수 없고.
그래도 내 연산군 시절로 인해 유럽사에서 생긴 변화는 전혀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혹시 나비효과가 약간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극동아시아 구석에 있고 국제 통상에 참여도 하지 않은 조선이 ‘눈덩이 굴리기’를 시작하기는 역시 무리였다.
약간 아쉬운 감은 들지만, 지금의 내 상황에서는 훨씬 다행이다. 내가 아는 유럽이 그대로 있으니까 거기 맞춰서 행동하기가 좋다. 아마 다음번 생에서는 ? 또 조선왕으로 눈을 뜬다면 말이지만 ?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 있겠지.
“흠, 흠, 참 즐거운 사교를 하셨구려.”
같이 앉아 듣고 있던 이항복이 가장 부러워한 부분은 이수광이 몇 번이나 참석했던 대규모 잔치 이야기였다. 이국의 미희들과 어울려 담화를 나누었고 가끔은 손이 살짝 닿기도 했다는 말에 이항복의 두 눈이 빛났다.
“우리 조선에서는 대갓집 여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밖에 나오는 것만 해도 흉이 될 일인데, 서양인들은 전혀 거리낌 없이 밖에 나와 용무를 보는가 하면 외간 남자를 만나기도 하고, 또 사내들은 남의 아낙에게 접근하기를 삼가지 않으니 실로 도덕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그 도덕이 없는 세상 참 좋구려.”
이항복이 너스레를 떨었다. 아니 이 양반이? 분노한 남편에게 결투 신청을 받아 봐야 저런 소리를 안 하지. 자꾸 저런 소리 하면 이덕형이랑 교대해서 다음 견서사로 보내버릴까 보다.
“병판께서 직접 보지 못하여 그리 궁금해하시지만, 실상 서양 여인네들은 코가 크고 눈이 푹 팬 데다, 모발과 안색이 형형색색이라 용모가 무척 괴이합니다. 장차 대감께서 그네들을 직접 보시게 되면 분명히 놀라실 겁니다.”
이수광이 웃으며 달랬다. 이항복은 이국적인 외모도 괜찮지 않냐고 했다. 넉살도 참 좋기도 하다. 하긴, 선교사들이랑 잘 어울리는 걸 보면 이항복은 서양 여자도 별 거리낌 없이 교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 조선 최초의 양첩(洋妾)을 두는 사람이 이항복이 되려나.
보고를 계속 듣다 보니, 이런 장난스러운 대목 말고 좀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교황청에서 선물로 미술품을 몇 점 받았는데, ‘뱀 두 마리가 사람 셋을 조여 죽이는 형상을 새긴 석상’이 눈에 띄기에 달라고 해볼까 하다가 이런 징그러운 돌덩어리를 가져와 봐야 뭐하나 싶어 말도 안 해봤다는 게 아닌가!
동양에서 온 사절단이 달란다고 교황청에서 가장 중요한 보물 중 하나인 라오콘 상을 내줄 리가 없다는 거야 나도 안다. 그렇지만 아예 달라는 말 한마디 해보지도 않고 왔다니, 아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정치와 외교 관련 보고는 충분히 참고할 만했다. 내가 개입을 망설였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무적함대는 역시나 영국 해군에 패했다. 내가 아는 그대로 말이다. 덕분에 스페인은 유럽에서 생기는 정치적 문제에 집중하느라 동양에는 그다지 손을 댈 수 없는 상태를 유지하게 됐다.
네덜란드는 조만간 스페인에서 완전히 독립하면서 동양으로 나올 테지. 영국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선교를 방패로 내세운 스페인의 탐욕을 강조하면서 자기들과 통상하자고 나올 거다,
뭐, 그 문제는 그때 가서 고민하도록 하자. 대충 1600년이 넘어가면서 영국인들이 아시아로 넘어왔다고 기억하는데, 그러려면 아직 10년은 더 있어야 하니까 말이지.
“저희와 함께 온 베네치아 화공은 법왕의 특사와 함께 먼저 내려왔다고 들었습니다. 솜씨가 제법 우수하였는데 혹시 뭔가 그려보게 하셨는지요.”
“논산벌 전투 전경을 그리고 있노라.”
처음에는 초상화를 그리려고 불렀지만 차마 결전을 앞두고서 내 얼굴이나 그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좀 쉬게 하다가 전투도를 그리게 했다. 특별히 근처 언덕 꼭대기에서 전투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전하게 해주고 말이다. 과연 어떤 결과물이 나오려나.
“보고는 잘 들었다. 이덕형, 견서사로서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무사히 돌아온 공을 크게 사고, 또한 명받지 않았음에도 나라에 필요한 물자를 구해온 점을 인정하여 그대를 예조참판 겸 외수사 제조로 명하노라. 이수광은 예조정랑을 제수하니 앞으로 국사에 매진하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항복에게 병조판서를 줬으니 이덕형도 예조판서 정도는 주고 싶지만, 그래도 단계를 거쳐 승진한 이항복과 상황이 좀 다르니 이 정도로 하자. 이덕형은 나이도 이제 겨우 서른밖에 안 됐으니 승진할 시간은 충분하기도 하고. 참, 이수광은 스물다섯이다.
자, 이제 밤이 깊었으니 자고 내일부터 또 움직여야지. 추풍령을 넘을 때까지 한 닷새 걸릴 텐데, 그때쯤이면 나가마스 놈도 도착할 테니 그놈을 시켜 항복 권고를 보내기는 해봐야겠다. 노부나가가 과연 얼마나 펄펄 뛸까? 항복할 가능성이 그래도 0%는 아니겠지?
– 10 –
“빠르게 움직여야 해. 나와 하시바 공이 최선을 다해 막아 왔네만, 결국 주공께서는 패전한 원인이 조선인 부역자들에게 있다고 결정하셨네. 적어도 이틀 안에 모두 처형하실 게야.”
국경인과 타다오키의 얼굴이 굳어졌다. 발언자인 호소카와 후지타카는 태연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하나일세. 도망하게. 조선 국왕에게 곧바로 처형당하지 않을 정도의 가치가 있는 선물을 준비해서 말일세. 이 정도가 그동안 귀공이 내 아들 타다오키에게 바친 충성에 대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보답일세.”
다른 부역자들은 버리라고 했다. 모두가 움직이려다가는 모두가 죽는다. 혼자 몸만 무사히 빼내기도 벅차다. 그게 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조언이었다.
국경인 자신에게도 다른 부역자들까지 모두 데리고 함께 도망갈 의사는 없었다. 공을 세울 거리를 가지고 간다면, 그 공은 자기 혼자만의 것이어야 했다.
“그동안 내 말은 듣지도 않더니, 인제 와서 다 내 탓이니 나를 죽이겠다고?”
국경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한적한 구석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초가집 한 채를 향해서 조용하게 접근했다. 뒤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손에 활을 들었을 뿐이다.
목표로 한 막사는 왜병 2명이 지키고 있었다. 국경인은 가까운 덤불 속에 숨어서 적들에게 조심스럽게 활을 겨눴다. 급소에 화살을 맞은 왜병들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바로 허리춤에서 도끼를 뽑아 든 국경인이 사립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무슨 일인가? 아니, 자네는 국가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나리!”
누워서 자고 있던 임해군은 도끼가 문을 부수는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났다. 조정에서 보낸 자객인 줄 알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자기 부하인 국경인이라는 걸 알고는 가까스로 멈췄다.
그동안 임해군에 대한 부역자들의 호칭은 ‘마마’였다. 하지만 국경인은 난에 가담하기 이전 부르던 대로 ‘나리’라고 불렀다. 하지만 임해군은 이 문제로 국경인을 꾸짖을 여유가 없었다.
“급합니다. 수일 전 논산에서 왜군이 주상께서 보낸 군사에게 대패하여 7만 군사를 한 번에 잃었사옵니다. 이에 격노한 노부나가 놈이 나리를 비롯한 우리 조선인들을 죽여 분을 풀고자 하니, 어서 도망쳐야 합니다.”
“우리 두 사람만 말인가?”
“어쩔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까지 다 불러 모으려면 시간이 걸릴뿐더러, 만약에 왜병들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나리를 붙잡으려 든다면 이 어찌 끔찍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임해군이 시키는 데 따라서 부역자 노릇을 한 이들은 하성군 집안의 청지기나 소작농, 기껏 신분이 높다고 해 봐야 문객이었다. 임해군도 이런 자들이 어찌 되건 아무 관심이 없었다.
국경인에게도 다행스럽지만, 임해군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았다. 형식상 챙겼을 뿐, 굳이 남은 부하들을 모두 데리고 도망칠 뜻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듯 보였다.
“알겠다. 어서 가자.”
국경인은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알려준 길로 임해군을 데리고 내달렸다. 왜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가능한 멀리까지 움직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