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567
2부 34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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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진 가까이 이어진 격전은 마침내 일본군이 괴멸하면서 끝났다. 두 배나 되는 조선군이 펼친 엄중한 포위망은 단 한 명의 왜병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포위망 안에는 수천 구의 시체와 더불어 저항을 포기한 포로 수천 명이 남았다.
“죽고 다친 우리 병사는 1천 명 정도 되는 듯하오. 마땅히 우리 군사들을 애도함이 시급한 일이나, 싸움이 급하니 어서 손해를 수습한 뒤에 동래성으로 갑시다.”
이빈이 재촉했다. 왜국과 인접하여 교류가 많은 지역 특성상, 경상우도군 소속 군사 중에는 왜어를 구사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이들을 시켜 포로 중 일부를 심문한 결과, 왜추 신장이 지금도 동래성에 있다는 진술을 얻은 것이다.
“왜추가 무슨 생각을 품고 아직도 동래에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아 있다 하니 어서 가서 붙잡아야 하지 않겠소. 성에 남은 군사도 불과 5천 남짓이라 하니, 서두릅시다.”
“당연한 일이오. 하지만 저기 강에 왜선이 아직 남아 있는데 저것들도 잡아야 하지 않겠소? 우리 백성들이 저 안에 붙잡혀 있다는 연통도 받았으니, 서둘러 구함이 옳소.”
“수군이 바다를 막고 있으니 어차피 저들은 퇴로가 없소.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겠소만….”
수영강에 있는 왜선은 아직도 백여 척은 되었다. 개중에는 특별히 크고 화려한 대선(大船)이 한 척 강변에 정박한 것이 눈에 들어오는데, 신장의 좌선이 틀림없어 보였다. 분명 저 안에는 막대한 전리품이 있으리라. 살짝 욕심이 동했다.
“그 간악한 왜적들이 길이 끊겼다고 순순히 항복하겠소? 도리어 우리 백성들을 태운 채로 배에 불을 질러 모조리 수장시키고 육지로 도망갈지도 모르오. 그 전에 붙잡아서 불미한 일을 사전에 방지해야 하오.”
선거이 역시 말과는 달리 눈빛에 살짝 욕심이 어려 있었다. 하긴, 당연한 일이리라. 이빈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럼 그대가 거느린 기병들만 나누어 보내 배를 점거하게 하시오. 어차피 오도리 녀석들은 말에서 내려 성벽을 기어오르라 하면 죽어도 따르지 않을 종자들이니.”
오도리는 자신들이 조선 최정예 기병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다. 그래서 보병으로 싸우라는 지시는 누가 내리건 절대로 듣지 않았다. 북변에서는 그 문제로 탈영한 사례도 있을 정도다.
“포로를 구출해야 하니 절대 배에 불을 질러서는 안 된다고 확실히 명하시오. 주상께 바칠 전리품을 개인적으로 후무려 넣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그야 당연한 일이오. 오도리 군사 사이에도 우리 감관이 다수 있으니 큰 염려는 마시오.”
선거이는 기병 2천 기를 보내 아직 수영강 쪽 기슭에 있는 왜선들을 점거하게 했다. 만약에 배에 남아서 저항하는 왜군이 있다고 해도 그만하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두 장수는 전장을 수습할 병력을 남기고 나머지 군사 1만 5천을 온천천 너머로 진군시켰다. 아까 총격에 제압된 왜군 포수들을 살펴 개중에 숨이 붙은 자들을 끌어내서 묶고, 동래성을 치기 위해 진형을 재편하는 참인데 온천천 서편을 달려 내려오는 기병 한 무리가 보였다.
– 34 –
“다 잡았다!”
전신에 피칠갑을 한 임꺽정이 철퇴를 치켜들고 함성을 질렀다. 그를 뒤따르던 등선군 군사 십여 명도 일시에 함성을 질렀다. 치열한 싸움 끝에 수영강 하구에 뒤엉켜 있던 모든 왜선이 조선 수군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치열하다고는 했지만, 이번 싸움은 그전에 비하면 누워서 떡 먹기나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수전을 치를 때면 왜선 한 척에는 최소 수십에서 최대 수백 가량이나 되는 왜병이 타고 있게 마련이었다. 그 많은 왜적을 다 쳐 죽이자면 이쪽도 만만찮은 수고와 희생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기껏해야 몇십 명 정도씩 타고 있던 왜적들은 제대로 태세를 갖춰 싸우기는커녕 완전히 제각각으로 놀았다. 조선군이 올라타면 다른 배로 뛰어 타서 도망가고, 물에 뛰어들고, 엎드려서 구명을 청하고, 칼을 들어 맞싸우는 움직임이 완전히 따로따로였다.
저항하는 자들도 그 수가 많지 않은 데다 제대로 협력도 안 되니, 등선군에서는 희생자도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곤욕을 치르게 하는 왜적이 배에다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놈들이었다.
이번 싸움에서 조선 수군이 계획한 가장 큰 목표가 왜군에게 포로가 된 백성들을 구출하는 일이었다. 적이 바다로 나오기까지 기다린 이유도, 아예 바다로 나오지 못하게 하면 쓸모없는 배와 포로를 한꺼번에 태워버리고 도망칠까 염려함에 있었다. 저항도 더 세질 테고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적선을 나포하면 실려 있던 재물이 포상금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구출할 포로가 없었다 해도, 포구에서 불타버린 배는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등선군들은 일거양득을 노리며 적선을 공격했다. 새 적선에 옮겨 타면 갑판을 먼저 쓸어버린 뒤, 선창으로 내려가 포로들을 구출하고 곳간을 확인했다. 그리고 갑판 위에다 어느 배가 점거했다는 표지를 꽂아놓거나 지킴이를 한 명 남겼다. 그리고 다음 배를 덮쳤다.
그 와중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왜병이 있으면 인근에 있는 군사가 모두 달려들어 불부터 껐다. 아직 풀려나지 못한 포로들의 목숨과 재물의 안위도 중요하지만, 왜선들이 워낙 뒤엉켜 있어서 자칫하다간 모두가 불구덩이에 떨어질 위험성이 컸기 때문이다.
“나리, 저쪽 상류에 있는 배들도 마저 잡아야 하는데…아쉽습니다.”
등선군 하나가 입맛을 다셨다. 임꺽정도 고개를 돌렸으나 너무 멀어서 흐릿하니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쉰이 되니 근력은 여전해도 안력(眼力)은 많이 나빠졌다. 부러운 서림이 놈 같으니.
“좁은 강에 함부로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여기서 그침이 옳을 걸세. 아직도 남은 왜선은 잔뜩 있으니 다음 기회를 노리세나.”
부산포와 좌수영을 장악했으니 활동할 범위를 이제 더욱 북쪽까지 넓힐 수 있다. 임꺽정은 지척에 있는 대마도를 한 번 더 터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하면서 동래성 쪽을 보았다. 과연 육군이 지금쯤은 적괴 신장을 잡았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결판을 짓지 못한 승부도 생각났다. 야스케라는 신장의 흑인 호위무사와 마지막으로 승부를 결하지 못한 일이 진심으로 아쉬웠다.
– 35 –
본대에서 보유한 모든 야포가 성벽을 겨냥했다. 3만 병력이 공성을 시작할 채비를 갖췄다. 남문 방면에 있는 병력을 합치면 동래성을 포위한 병력은 5만에 가깝다.
성내에 진을 친 일본군은 대략 5천이라고 했다. 별동대가 남문 쪽에서 붙잡은 왜병 포로가 자백한 내용이다. 거짓 정보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보고였다.
분명히 노부나가는 찢어 죽여야 할 적이다. 하지만 공성을 잠깐 미루고 잠시 얼굴만 봐주면 포로로 잡혀간 수천 백성과 일본군 잔존병력 수만을 상처 없이 손에 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나는 물론 신하들도 솔깃했다. 게다가 여기 붙는 조건도, 위험부담도 없다.
일단 노부나가가 나보고 동래성에 직접 들어오라고 한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내가 그대로 따를 리도 없지만. 내가 미쳤냐?
동래성으로 가는 길이 전투 없이 열렸다. 그러니 전군을 몰고 가서 조총 사거리 한참 밖에 진을 치고, 노부나가가 기어 나와 엎드리기를 기다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못할 이유가 있나? 애초에 계획이 막는 놈들 다 쳐부수고 동래성 앞에 가서 ‘노부나가 나와!’라고 하는 거였는데.
광개토대왕이 백제 아신왕에게 항복을 받을 때 위례성에 들어갔던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 앞에 진을 치고 백제왕이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나라고 그렇게 안 할 이유가 뭔가.
한 가지 의아했던 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왜군, 히데요시가 지휘한다고 하던 4만 병력의 움직임이었다. 그 행동이 나를 비롯한 우리 수뇌부가 예측한 바와 전혀 달라서 깜짝 놀랐다. 세상에, 기장 방면으로 전면철수를 해?
회견 결과가 전면 항복이라면 놈들은 이 자리에서 무장해제를 해야 한다. 교섭이 결렬되어 전투가 재개된다면 마땅히 우리 측면을 쳐야 한다. 그런데 놈들은 교섭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는 듯 떠나버렸다. 마치 노부나가를 우리 손에 넘기고 가듯이 말이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동래성을 둘러싼 진형을 풀고 히데요시를 뒤쫓을 수도 없었다. 나가마스의 진술만이 아니라 별동대가 사로잡은 포로들로부터도 분명히 노부나가가 동래성에 남아 있다는 자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진에게 기병 2만으로 히데요시를 쫓으며 견제하게 하고, 나머지 병력은 동래성을 둘러싼 채 나가마스가 형을 데리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정도는 참아줄 수 있으니까.
“기껏 목숨줄 붙여 주려고 내보냈더니 뭐 찾아 먹을 게 있다고 도로 들어왔느냐?”
두 시진도 되지 않아서 돌아온 동생을 자기 군막에서 맞이한 노부나가의 첫마디였다. 표정 역시 의아함으로 가득했다.
“원숭이 놈이 길을 열고 도망치는 건 봤다. 혹시 그놈이 자기를 무사히 보내주는 대가로 널 조선 국왕에게 팔아먹기라도 했냐? 그리고 조선 국왕은 날 보고 자기한테 항복하라고 권하는 사자로 널 써먹고 있는 거냐?”
“아닙니다. 제가 스스로 왔습니다.”
저녁이 되어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만 나가마스의 얼굴에는 진땀이 흘렀다. 조선 임금은 일단 자기 말을 들어주었지만, 과연 형인 노부나가는 어찌 반응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키지 않은 일을 했다고 욕만 처먹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조선 국왕은 동래성 북문 밖 5정(약 550m) 되는 지점에다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 네 형은 회견을 청해놓고는 왜 자신을 맞이하러 나오지 않느냐는 호통에, 지금 들어가서 당장 데리고 나오겠다고 둘러대고 동래성에 다시 들어온 참이었다.
“실은, 형님께서 어떻게든 목숨을 건지셨으면 하는 마음에 하시바 공의 제언을 받아서 이번 일을 꾸몄습니다.”
나가마스는 조선 국왕에게는 말하지 않았던 이번 교섭 시도의 뒷사정을 모조리 털어놓았다. 히데요시가 계책을 낸 부분부터 자기를 칼로 위협한 일까지 단 하나도 숨기지 않았다. 형에게 사정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쳤군.”
노부나가는 딱 한 마디로 감상을 표했다.
“어느 한쪽이 다 이긴 전쟁에서 패자가 성을 나와서 살려달라고 비는 것도 아니고 승자보고 자기 성으로 오라고 불러? 죽으려고 환장한 소리가 아니냐?”
노부나가의 비판은 맹렬했다.
“만약 오다와라에서 호조 씨가 내게 네가 한 것 같은 제안을 했으면, 당장 ‘할복부터 하고 나서 이야기하라’라고 답신했을 거다. 정말 미친 소리로구나.”
오다와라에서 농성하던 호조 우지마사?우지나오 부자는 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 공격받고 멸망했다. 부자는 성이 무너진 뒤 모두 할복했다.
“함정이 아니라는 의미로 하시바군 4만이 일제히 길을 열고 동쪽으로 물러났습니다. 저들도 여기서 이제 싸우지 않겠다는 우리 군의 의사를 보고 형님의 뜻… 진정 싸움을 끝내고 싶다는 뜻을 납득하여 회견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다.”
“그게 길을 열고 물러나는 정도냐? 원숭이 놈, 아주 동쪽으로 줄달음질을 치고 있던데?”
얼굴이 벌게진 나가마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로서도 자신에게 ‘협상’을 성사시켜야만 한다고 그렇게 강요하던 히데요시가, 교섭 결과도 듣지 않고 아예 전장을 떠나 동쪽으로 도망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조선군을 견제할 수 있는 정도 위치에서 기다릴 줄만 알았다.
“네가 속은 거다. 원숭이 자식은 자기가 도망갈 시간을 더 벌기 위해서 나라는 고깃덩이를 조선 국왕이라는 호랑이 앞에 내던진 거야. 앞으로 다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하긴 했다만, 날 팔아넘겨도 좋다고 한 적은 없는데 말이다.”
노부나가가 냉소를 지었다. 그리고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하고 있는 동생에게 차갑게 질문을 던졌다.
“원숭이 녀석은 애초에 제 살 궁리만 했다고 치고, 너는 간교한 원숭이에게 속았다고 치고, 조선 국왕은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 정신 나간 제안을 받아들인 거냐? 상식적으로 움직인다면 이딴 교섭은 걷어차 버리고, 물러나는 하시바 놈의 병력부터 쳐서 궤멸시켜야 하지 않느냐?”
“형님이 국왕을 만나 순순히 항복하시면 자기네 병력을 더 이상 잃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솔깃한 듯합니다. 아직 우리 군에 남은 병력이 적잖다는 건 저들도 아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제 쪽에서 무슨 조건을 걸지도 않았고, 그저 형님을 한 번 만나달라고만 했으니까요.”
망설이던 나가마스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형님이 항복하시면 우리 잔존병력 전부를 포로로 붙잡을 수 있다는 부분도 중요하게 여긴 듯했습니다. 잡아서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르긴 뭘 몰라. 노예로 삼아서 부려먹거나 팔아먹겠지. 뻔한 것 아니냐.”
일본에서도 전쟁포로는 대개 같은 운명을 맞는다. 노부나가는 조선군에 포로로 잡힌 일본군 병사들이 딱히 더 나은 상황에 직면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뭐, 너만 내게 항복을 권한 건 아니다. 조금 전에는 프로이스가 와서 투항하길 권하더군.”
“프로이스가요? 아직 동래성에 있었습니까?”
“네가 나가고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도망쳤을 것 같으냐, 아직 있다. 남만포병대를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잖으냐. 그 남만포병대도 가모군과 함께 싸우러 나갔다가 전멸한 것 같다만.”
그들을 고용하느라 쓴 거액이 허공으로 날아갔는데도 노부나가는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유럽식으로 명예로운 포로 대우를 받도록 자기가 중재하겠으니, 여기서 헛되게 죽지 말고 투항하라더군. 지금 죽는 건 자살이나 마찬가지고 자살한 죄인은 천당에 갈 수 없다나.”
“남만교 교리로군요.”
“그래서 개소리 닥치라고 했다.”
조선 국왕이 아무리 예수회 선교사를 주변에 두고 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동방의 군주다. 중간에 낀 선교사들이 뭐라고 중재를 시도하건, 사로잡은 노부나가를 어떻게 취급할지 불을 보듯 빤했다. 그동안 나가마스를 통해 보내온 위협하는 언사가 얼마나 많았던가.
“지난번 조선 병조판서의 말대로, 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조선 국왕을 한번 만나보았으면 좋았을 뻔했다. 때늦은 후회로구나.”
“그럼…지금은 만나지 않으시겠습니까?”
“만나서 뭘 한단 말이냐? 내가 지금 국왕을 만나고 싶었으면 너를 호소카와와 함께 내보낼 때 이미 지시를 내렸을 거다. 만날 생각 없다.”
노부나가는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고개를 푹 숙인 나가마스를 보고는 뭔가 좋은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피식 웃었다.
“조선 국왕을 만나지는 않겠다. 하지만 조선 국왕에게 한 마디 전하고는 싶구나. 일어서라.”
“조선 국왕은 들으라!”
나가마스가 들어가고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말로 독촉하는 대신 야포를 스무 발쯤 쏴 볼까 하는데 누가 성벽 위에서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다. 망원경으로 보니 팔짱을 끼고 선 왜장 옆에서 사무라이 하나가 대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이덕형이 속삭였다.
“전하, 저기 팔짱을 낀 자가 신장 본인입니다.”
그래? 회견하자더니 왜 성벽 위에서 고함을 쳐? 기분이 확 나빠졌다. 강선조총을 쏘더라도 닿지 않을 거리라서 잠시 갈등하는 참인데 북문이 열리더니 사람 한 무리가 몰려나왔다. 대열 맨 앞에 나가마스가 있고, 그 뒤에는 서양인 신부 한 사람이 따르고 있었다.
“들으라! 나 오다 노부나가, 그대의 승리를 인정하며 내 패배 역시 인정하노라. 이에 승자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원숭이 놈의 영지를 그대에게 선사하니, 재량껏 손에 넣도록 하라!”
뭐? 히데요시 영지를 나한테 넘기겠다고? 이게 뭔 개소리야?
대답할 말을 찾기도 전에 노부나가와 그 스피커는 성벽 아래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눈앞에 나타난 나가마스는 지금 히데요시의 영지인 히젠 등 규슈 북부 및 서부 일대의 4개국을 모두 내게 양여한다는 노부나가 명의의 문서를 들고 있었다. 정말 농담이 아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냐? 네 형이 제정신이냐?”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나가마스는 형이 왜 저런 결정을 했는지 자기로서도 모르겠다는 대답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한 가지, 노부나가가 항복을 거부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확인했다. 그와 함께 온 프로이스도 자신 역시 항복을 설득해봤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변명했다. 나는 그에게 냉소를 날렸다.
“그대와도 할 이야기가 많지만, 일단 로마에서 온 법왕의 특사부터 만나보는 게 좋겠구나. 그 뒤에 시간이 나거든 다시 나를 만나보도록 하자.”
교황특사로 온 추기경을 대면했을 때 프로이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궁금하지만, 지금은 다른 일이 더 급하다. 끝장나기를 원하는 노부나가를 끝장내 줘야지.
뭐, 처음부터 항복하겠다면서 날 불러들인 건 아니었으니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지금부터 전력으로 동래성 탈환전을 펼치고, 노부나가의 목을 벤 다음 히데요시를 뒤쫓으면 된다. 자, 시작해 보자.
“쏘아라!”
내가 호령을 내리자 야포 40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군이 성벽 위에 만들어놓은 방어용 구조물들이 연달아 부서져 나갔지만, 위력이 좀 부족한 탓으로 성벽 자체는 큰 탈이 없었다.
뭐 별로 상관은 없다. 만일을 위해서 호출해둔 총통위 소속 중포(重砲)들이 지금 뒤따라오는 중이니까. 잠시 후에 그걸로 불벼락을 끼얹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