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57
1부 05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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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인이 행행하고자 한다. 그대들에게 의견을 듣고 싶다.”
행행(幸行)이란 왕이 궁 밖으로 나가는 행동을 통칭해서 가리킨다. 어디 다른 고을에 다녀와도 행행이고 모화관(慕華館, 중국 사신을 모시는 일종의 영빈관)이나 신하의 집에 가는 행동도 행행이라 한다. 물론 내가 즐기는 미복잠행 말고, 정식으로 외출할 때를 가리킨다.
“전하께서 행행하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어디에 가시려 하시기에 신들에게 의향을 물으시나이까.”
이런 막연한 질문에 대해서는 누가 답해야 할지 확실하지 않은 만큼 가장 지위가 높은 이가 대표로 답하기 마련이다. 역시나 영의정 한치형이 나서서 원론적인 답을 했다. 다른 이들은 내 의도가 파악되지 않아서인지 잠자코 있었다.
“전하께서 필요하다 결정하시어 행행하실 때는 언제나 신들은 따를 것입니다. 다만 행행코자 하시는 목적지가 어디시기에 의견을 물으시나이까.”
맹세코, 내가 왕 노릇을 시작하고서 지금만큼 배짱이 필요한 적은 없었다. 무오사화를 일으키면서도 이 말 한 마디를 하는데 필요할 만큼 배짱을 부리지는 않았다.
“무안군 목포진까지 내려가 땅 끝을 보고 오려 한다. 순행에 나가 돌아오기까지 두 달 정도 걸리지 않을까 한다.”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해봐도 이날만큼 조정이 일치단결해서 반대하고 나선 적이 있었나 싶다. 잠시 편전인 사정전에 침묵이 흘렀지만 이는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시간일 뿐이었다. 3분도 되지 않아서 폭풍과 같은 반발이 시작되었다.
“전하, 아니 될 일입니다. 통촉하시옵소서!”
“군주는 국가의 근본이온데, 근본이 자리를 비우면 어찌 나라가 유지될 수 있겠사옵니까!”
“이제 곧 겨울입니다. 겨울에 원지에 출타하심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옵니다!”
“전하께서 계시지 않으면 정사를 누가 돌보겠사옵니까?”
“원자도 계시지 않으신데 혹여 불측한 무리들이 흉계를 꾸민다면 실로 끔찍한 재앙이 닥칠지도 모르옵니다!”
“순행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생각하소서. 성을 쌓고, 북정을 행하고, 군선을 건조한다 하시는 것만으로도 무용한 지출이 하늘을 찌르옵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찌 순행까지 하시어 백성에게 짐을 지우려 하시나이까? 통촉하시옵소서!”
“작년 배목인 일당의 역모를 떠올려 보시옵소서. 팔도의 벽지에 어떤 흉악한 자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누가 짐작할 수 있겠사옵니까? 전하께서 굳이 옥체를 위험에 드러내실 필요가 없사옵니다.”
터진 둑에서 물이 쏟아지듯이 나를 향한 비난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내 계획을 옹호하기는커녕 일부라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있지만 차마 말문을 열지 못하는지도 모르지.
내가 무리한 소리를 한 줄은 나도 안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수도인 도성을 떠나 지방을 둘러보러 간다는 것은 대부분의 임금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상 유일한 예외가 질병을 치료하러 온천에 가는 경우였다.
당장 태조 이성계부터가 황해도에서 온천욕을 즐겼다. 그 뒤를 이은 임금들 중 세종과 세조는 온양온천을 자주 찾았다. 한참 후대지만 현종(숙종의 부친)은 눈병 때문에 온양에서 한 달씩 머무르며 치료하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건강에 문제가 없었던 정조는 온천에 가는 대신 임금의 위엄을 보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능행차를 했다. 충과 효가 최대 명분인 조선에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참배한다는 명분으로 움직이니 신하들도 크게 반대하지 못했다.
나 역시 순행에 나설 명분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관건은 내 명분을 신하들이 인정하느냐 마느냐, 이거겠지만.
“전하, 신들은 도저히 그 연유를 짐작할 수가 없사옵니다. 어찌하여 그동안 전혀 의사를 비치지 않으시던 지방 순행을 떠난다 하시고, 그것도 저 먼 땅끝 무안까지 가시옵니까? 청컨대, 우매한 신에게 그 진의를 알려주시옵소서.”
한 시진(2시간) 가까이 떠들 만큼 떠들고 나서야 마침내 편전 안이 조용해졌다. 다른 신하들이 할 말이 없어졌는지, 내가 전혀 반론을 하지 않으니까 내 답이 궁금해서 멈췄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사방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이조판서 신수근이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 신수근은 다른 몇몇 노신(老臣)들과 더불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전하께서 순행을 결심하신데는 사유가 있으실 터, 부디 신들에게 들려주시옵소서. 신은 전하께서 그리 결심하신 연유를 들은 연후에야 비로소 전하께 신이 생각한 바를 말씀드릴 수 있겠나이다.”
그래, 남들이 다 반대하고 난리를 쳐도 당신은 거기 동참하면 안 되지. 명색이 큰처남이잖아. 나의 ‘악마의 변호사’ 신수근이여.
– 9 –
“군주는 자신이 다스리는 땅을 두루 알고 그 백성을 살펴야 한다. 그러자면 마땅히 강토를 두루 돌며 천세와 지세, 인화를 살펴야 하지 않겠느냐?”
중국에서도 부지런한 황제들은 수시로 그 큰 대륙을 돌면서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가 어떤 환경과 백성들로 구성되었는지 살폈다. 최고로 부지런한 황제 중 하나였던 진시황의 경우에는 순행을 다섯 번이나 했고, 결국 마지막 순행에서 죽음을 맞았다. 덕분에 사후가 안 좋았지만.
만약 진시황이 측근 몇밖에 없는 순행 중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수도에서 죽었다면 유언이 조작되지도 않아서 무난히 태자 부소가 즉위했을 테고, 그 뒤의 중국사가 완전히 바뀌었…겠지만 그 이야기는 그만두자. 지금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니까.
“이 나라는 대국(중국)에 비해 한줌밖에 안 될 만큼 작다. 대국 황제들은 그 넓은 땅도 수시로 순행을 하면서 다스리는데, 이 작은 나라 임금이 자기가 다스리는 땅도 한번 돌아보지 않는다면 말이 되겠느냐?”
내 주장은 간단했다. 왕이 국토와 백성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명분에 맞설 수 있는 논리는 없다. 당연히 반대하는 신하들도 이 점까지는 부정하지 못했다. 당연히 신수근이 내놓는 반박도 실행과 관련된 문제로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전하. 벌써 10월입니다. 이제 곧 겨울입니다. 추운 날씨에 먼 길을 여행하심은 좋지 않습니다. 상체(上體, 임금의 몸)가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이하려 그러시옵니까.”
“옷을 단단히 입고, 매일 따뜻한 처소에서 유숙하면 감기에 걸릴 일이 없다. 혹여 몸이 불편하면 여정을 중단하고 쉬겠다.”
“도성을 비우신 동안 정사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어느 한 고을에 머무르시는 것도 아니고, 계속 이동하신다 하면 의정부가 함께 따라가기도 곤란합니다.”
“의정부는 도성에 두고 가겠다. 일상적인 국사는 의정부에서 맡아 논의하면서 해결하라. 의정부에서 결정을 감당할 수 없는, 군국(軍國)에 대한 중대사는 즉시 상주문을 올려 과인에게 알리면 되리라. 우리나라는 작다. 아무리 멀어도 파발이 사흘이면 닿을 것 아니냐.”
“군국에 대한 사무는 한시를 따져 처리해야 할 만큼 촉박합니다. 외변(外變)이 일어났을 때 어이 한가하게 파발을 띄우고 있겠사옵니까? 전하께서 도성에 계셔야만 긴급한 사태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외변이 일어난다면 남변 아니면 북변에서 일어날 게 아니냐? 올 겨울에 북방에서 야인이 연합하여 쳐들어오리라는 첩보는 없었으니, 조정에서 나서서 직접 감당해야 할 만한 대규모 변란은 없을 것이다. 소소한 소동은 평안?함경 두 도에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어차피 도성에 있어 봐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없잖아. 이제 겨울이니 도성에서 원군을 편성해서 보낼 수도 없고, 아직 수량이 부족한 조총을 북방에 보낼 수도 없다. 북방에는 이미 총통과 주화(走火)가 상당량 배치되어 있으니 화기가 필요하면 그걸 쓰면 된다.
“또한 남방에서 왜인들이 변란을 일으킨다면 과인이 남방에 있으니 훨씬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을 터이다. 이번에 진도에서 왜변이 일어난 것도 다 남방에 있는 장수들이 해이해진 탓이니, 과인이 직접 이를 다스려 기강을 바로잡고자 한다.”
임금이 자기 임지에 나타난다고 하면 암행어사가 나타나는 것 이상 충격이다. 암행어사도 결국 임금이 보내는 거니, 부패한 지방관 입장에서는 진짜 최종보스를 마주하게 되는 셈이다.
“전하, 장수들을 다잡으려 하신다면 감찰관을 보내어 그 집무하는 양상을 확인케 하신다면 충분하지 않겠사옵니까? 수많은 인마를 피로케 하면서 전하께서 직접 가실 필요가 있는지요.”
신수근은 차분하면서도 논리정연하게 논박을 계속했다. 이 인간이 정말로 가상적 역할에 충실한 악마의 변호인인지, 진심으로 내 주장을 꺾기 위해 맞서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전하께서 친히 순행을 가신다면, 절대 그 행렬이 초라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위엄을 떨쳐야 하므로 적어도 수행하는 인원이 수천 명은 되어야 합니다. 신이 생각건대 3천 명 밑으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 비용이 한두 푼이겠습니까?”
“지난 5년 동안, 과인은 나랏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게다가 올해는 충청도, 전라도에 풍년까지 들지 않았느냐? 3천 명이 무안까지 왕복하는데 필요한 비용도 충당하기 힘들리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나와 신수근 사이에 날 서린 공방이 계속되는 모습을 보기 난감했는지 영의정 한치형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신수근과는 약간 다른 화제를 꺼냈다.
“전하, 만약 순행을 하신다면 중궁전은 어이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순행은 유람이 아니오. 중전도, 두 숙의도, 궁녀들도 모두 데려가지 않을 것이오.”
순행에 동반할 인원은 내 시중을 들기 위한 내관 소수를 제외하고는 병조판서 이계동, 특진관 유자광 등 군사 쪽 인사들을 중심으로 꾸리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우의정 성준도 데려가고 싶지만 도성에도 군사전문가를 남겨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지금 궁중에는 전하의 보위를 이을 원자가 아니 계십니다. 오직 몇몇 종친이 있을 뿐인데, 전하께서 도성을 비우시면 혹 흑심을 품은 자들이 힘으로 보위를 차지하고자 종친 중 누군가를 내세워 난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전하께서는 그런 사태를 염려하지 않으시옵니까?”
한치형이 잠시 논쟁의 맥을 끊었음에도 신수근이 내놓는 날카로운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신수근은 악마의 변호인 노릇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지 본조(本朝)에서는 그런 전례가 없사옵니다만, 옛 역사를 보면 그런 일이 무수히 있었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정녕 그에 대한 대비는 없으시옵니까?”
“그런 일이 생기지 말라고 경들을 도성에 남겨두고 가는 거요. 행여 역도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거든 바로 진압하라고 말이오. 여기 혹시 그런 일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이 있소?”
당연히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스스로 ‘나는 역적입니다’하고 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뿐이 아니오. 대왕대비께서 대비전을 굳건하게 지키고 계시지 않소. 과인이 잠시 도성을 비우더라도, 그동안 대왕대비께서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중심을 지켜 주실 것이오.”
내가 그동안 효도를 좀 잘 한 모양이다. 원래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인수대비는 맏손자라면 껌뻑 죽는 할머니가 되어 있다. 손자며느리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할지 신경도 쓰지 않고 면전에서 ‘후궁을 더 들이라’ 할 정도라면 빤하지 않은가.
그 정도라면 내가 부재중이라는, 정말 하잘것없는 이유로 쿠데타를 승인한다거나 할 리가 없다. 내가 중병에 걸려 오늘내일 하는 상황이라면 동생 진성대군에게 양위하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궁궐을 점거해도 즉위를 승인받을 리 없다.
“경들이 정 불안해한다면 진성대군, 제안대군, 덕풍군까지 모두 순행에 동행시키겠소. 그만하면 안심하겠소?”
“옛날 사람이 이르기를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 하였사옵니다.”
신수근은 조용히 있었다. 헌데 이번에는 대사간 이균이 나섰다.
“전하께서는 일전에 있었던 배목인 일당의 역모를 생각해 보시옵소서. 전하뿐 아니라 가까운 종친들이 모두 한꺼번에 움직이면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자들에게 절호의 표적이 될 수도 있사옵니다.”
“나 원 참. 종친들을 동반하라는 건지 두고 가라는 건지 모르겠군. 그래서 대사간은 과인이 어떡하면 좋겠소?”
“전하께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 긍휼히 돌보시려는 마음을 품으심은 좋은 일입니다. 허나 전하께서 일단 궁 밖으로 나가시면 수많은 백성들이 그로 인해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그러니 순행을 중단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과인은 농사철이 아닌 이 계절에 순행을 가고자 하는 거요. 바쁜 농사철에 순행을 나가면 농사에 큰 지장이 있을 테니, 농한기인 지금이 낫지 않겠소.”
“농한기는 아무 일도 안 하는 시기가 아니옵니다. 내년 농사를 위해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헌데 전하께서 행차하신다면 도로를 정비해야 하는데 이는 곧 이 중요한 시기에 수많은 백성들이 부역을 해야 함을 의미하옵니다.”
맞는 말이다.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반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