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572
2부 3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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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 네놈들이 이대로 도망치게 놓아둘 줄 알았느냐!”
경상좌수사 상선에 탑승한 이운룡이 고함을 쳤다. 그가 지휘하는 경상좌수영 전선 17척은 지금 개운포에 있는 정박해 있는 왜선 150여 척을 상대로 포를 쏘며 공격하는 중이었다.
적은 그동안 쥐죽은 듯이 지내오던 경상좌수군이 갑자기 새벽 여명 속에서 공격해오자 매우 놀란 듯 허둥댔다. 몇 달 동안 대치가 이어졌는데도 경상좌수군이 단 한 번도 적을 공격하지 않았으니, 왜군의 경비태세가 느슨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근접하지 마라! 총통과 불화살로 배만 불태워라! 놈들이 본국으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라!”
경상좌수군은 전쟁 초기에 좌수사 박홍식이 겁을 먹고 전투를 회피한 데다가, 수졸 다수가 탈영하면서 수군영으로서의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 뒤로 배들은 후방 진포에 두어 왜군 전선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허울뿐인 수군 노릇을 하고 수졸들은 육전에 나섰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바뀌었다. 왜군이 대패하여 본국으로 물러갈 조짐이 보였고, 강을 건너간 탐후인들은 왜적이 물러나려는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지금 막지 않는다면 저들은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한 채 왜국으로 도망갈 게 분명했다.
신임 좌수사인 이운룡으로서도, 역시 신임 좌병사인 배설로서도 저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경상좌도 군사들은 그동안 패하기만 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대로 적을 보내고 전쟁이 끝난다면, 장차 무슨 낯으로 상감의 용안을 뵙겠는가?
두 사람은 힘을 합치기로 했다. 육지에 배치했던 수군의 화포를 다시 전선으로 옮겨 싣고, 부족한 수졸은 육군으로 보충했다. 그렇게 전선 17척에 군사와 화포를 가득 채웠다.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가득 차 있는 적이 다시 태화강을 넘어올 공산은 낮으니,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새벽을 기해 개운포를 급습했다. 그동안 바다가 조용했던 데 안심한 적은 불과 소선 4척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중 북쪽을 경계하고 있던 2척은 어스름 속에서 불화살 세례를 받고 불타올랐다. 하지만 여기서 울린 총성 몇 발이 다른 왜군들에게는 경보가 되었다.
왜선 30여 척이 부리나케 바다로 나왔다. 곧바로 양측이 겨누는 총포가 불을 뿜고 화살이 하늘을 덮었다. 밝아오는 아침 햇빛을 옆구리로 받으면서 양군은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운룡은 자기가 거느린 군사 중에 수전에 미숙한 자들이 많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러므로 성급하게 적진에 뛰어드는 행동은 최대한 피했다. 사용하는 무기는 당연히 포와 활이었다.
“혼전이 벌어져 왜적이 우리 배에 기어오르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왜적 단 한 명도 뱃전을 넘지 못하게 계속 거리를 유지하라!”
다행히 왜군도 중선이나 대선을 동원해서 접전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소선 30여 척이 앞을 막고 전진을 방해하면서 활과 조총을 쏘아댈 뿐이었다.
이쪽에서도 한참 활과 포를 쏘면서 응전했다. 그러던 중에 남쪽에서 봉화가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이쪽에서는 신호가 올라올 예정이 없으니, 저 봉화는 왜군의 신호가 분명했다.
“적이 바다로 나갑니다!”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포구에 남아 있던 왜선 120여 척이 봉화가 오르니까 일제히 바다로 나섰다. 이운룡이 호통을 쳤지만, 적 소선들이 계속 나서서 앞길을 가로막았다. 숫자가 부족한 경상좌수영 전선들이 그 방해를 뚫고 도주하는 놈들까지 쫓아가 잡기는 무리였다.
“안타깝도다. 한 놈이라도 더 수장시켜야 했는데….”
이언량이 이를 갈면서 손에 든 칼로 장대 위 방패판을 내리찍었다. 마주 싸운 왜 소선 10여 척을 가라앉히고 왜병 수백 명을 쏘아죽였지만, 억울하게 침략당한 분을 풀자면 이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헌데 왜군이 벌써 떠나가고 있지 않은가.
미숙한 군사들을 태운 채 적을 쫓다가는 자칫 바다 한가운데서 적에게 포위되거나 난파할지 모른다. 이운룡은 휘하 전선들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분노 섞인 저주를 적에게 퍼부었다.
“이 도적놈들아! 내, 기필코 너희 본거지까지 쫓아가서 성과 전선을 모조리 불태우고 너희 수괴의 목을 베고 말리라! 너희 모두 목을 씻고 기다릴지어다!”
이를 악물고 내뱉는 결의가 바다 위를 퍼져나갔다. 왜군은 분노 서린 그의 고함을 뒤로 한 채 유유히 구주를 향해 돛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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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밤, 바로 처형할 예정이던 포로 1백여 명은 왕명으로 목숨을 며칠 연장받았다. 그리고 나타난 금위사 심문관들은 이 포로들을 수군에게서 넘겨받아서 말 그대로 걸레처럼 쥐어짰다. 금위사의 손에 떨어진 포로들은 자기들이 아는 정보라는 정보는 모조리 토해냈다.
“어제 본 광경을 떠올리니 지금도 오금이 떨립니다. 소장이라면 금위사에 끌려가서 국문을 받느니 자진해버리고 말겠습니다.”
왜병들에 대한 조사는 좌수영 지하 뇌옥에서 이루어졌다. 슬쩍 그 현장을 보고 온 수행군관 송희립이 만약 자기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할 정도로 그 심문 과정은 혹독했다. 하지만 왜병들을 불쌍하게 여긴다거나 심문관들이 너무 심하다고 수군거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성과는 있었다. 조선 백성을 방패로 삼거나 격군으로 쓰는 배는 어제 싸움에 나왔던 중선과 대선 백여 척이 전부고, 그 외에 왜국에서 새로 건너온 배들은 전부 왜인 격군이 젓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인즉슨 그놈들을 상대로는 얼마든지 화포를 쏘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밤늦게 전해진 그 전갈과 이억기, 정운이 데리고 온 원군은 이순신을 비롯한 수군 장졸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 올렸다. 심지어 가덕도에서 밤새 노를 저어 달려온 정운 휘하 전선들조차 여기 동조하여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싸움에 임했다. 망설이기는커녕 진심으로 기뻐했다.
“왜적을 몰아내는 마지막 싸움에 참여하지 못함을 통탄하는 이들은 있겠으나, 이 싸움에서 빠지게 되어 다행이라 여길 자는 없을 겁니다.”
“실로 그러하리라.”
130척에 달하는 아군 전선은 단단히 결심하고 진을 펼쳤다. 좌수영을 떠나 북진하자 오늘도 대변포 앞에서 250여 척이나 되는 적선이 앞을 막아섰다. 다수에는 어제처럼 조선 백성들이 매달려 있었다. 이제 기력이 소진되었는지 다들 오늘은 축 늘어져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이순신은 어제처럼 판옥선 70척을 전열에 세워 적과 싸움을 시작했다. 적은 어제 그랬듯이 붙잡은 백성들을 방패로 삼아 조선 수군의 앞길을 막았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왜인들이 제작한 자모포를 몇 문씩 설치한 중선 수십 척이 새롭게 나타나 전열에 끼어들었다는 점이다.
이순신이 이끄는 본대는 맹렬하게 싸웠다. 육지에 내렸던 등선군도 모조리 소환해서 갑판에 태웠고, 포수들은 세심하게 겨냥한 지자포와 현자포로 왜인들만 탄 적 소선과 포를 실은 왜군 중선을 저격했다. 어제 금위사에서 포를 쏘는 왜선에는 포로가 없다고 알려준 덕분이다.
왜군은 나름 조선군에게 타격을 줄 비장의 수라고 생각하고 포를 실은 배를 내보냈겠지만, 조선군으로서는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화포 탑재 여부가 ‘이 왜선은 안심하고 부숴도 된다’는 표식이 되어 주었으니 말이다.
무기력하던 어제와 달리, 마음껏 포를 쏘아대는 조선 수군을 보고 왜군은 당황했다. 함열이 조금씩 밀려났다. 그 틈을 포착한 이순신이 기패관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 수사를 불러라!”
남은 전선을 거느리고 이순신 뒤에서 대기하던 이억기는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함대 우익에 나타났다. 그리고 왜군이 위험을 깨닫기도 전에 앞으로 움직여서 적이 두모포로 돌아갈 길을 막아 버렸다. 아직 2백 척 가까이 남은 왜선들은 고스란히 대변포 포구 안에 갇히고 말았다.
이제 남은 일은 포위망에 갇힌 적선을 등선군으로 하나씩 점거하고 그 안에 갇힌 백성들을 구출하는 것뿐이었다. 임꺽정을 비롯하여 어제 싸움에서 빠졌던 군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가장 선두에서 적선으로 뛰어들었다. 법왕청 무사단 역시 어제에 이어 한 몫을 크게 했다.
남은 배 모두가 좁은 포구에 갇히니, 왜병들은 어제처럼 빼앗긴 배에 불을 지르지도 못하게 되었다. 어제 싸움에서야 뒤로 물러나서 피하면 그만이니까 마음대로 불을 지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저들도 도망갈 자리가 없다. 자칫하면 모두 뒤엉켜서 함께 불타오를 게 분명하다.
물론 저들에게는 배에 불을 지른 다음 육지로 도망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미 그 경우를 대비한 방책도 마련해 두었다.
“통상! 육지에 우리 군사들이 든 깃발이 보입니다!”
“주상께서 청한 대로 군사를 보내주셨구나.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이순신은 육지에 내렸던 등선군을 다시 전선에 태우면서, 이들이 담당하던 패잔병 소탕전을 육군에서 맡도록 해달라고 청을 올렸다. 그래야 부산 일대 해안의 안전이 충분하게 확보될 수 있었다.
더불어서 이들의 임무를 추가하자고 제안했다. 좌수영 일대에서 패잔병을 소탕하는 정도로 그칠 것이 아니라 해안을 따라 진군하면서 아직 왜적이 차지한 각 진포를 탈환하고, 수전에 패한 적이 육지로 도망치지 못하게 해달라고도 했다.
지금 대변포를 둘러싼 산줄기에는 기병과 보병 수천이 나타나 깃발을 휘두르며 거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순신이 요청한 대로, 적이 육지에 올라 도망치지 못하도록 협력하는 중이다. 만약 발생할지 모르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총이나 활로 왜선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다.
“육군이 도와주고 있으니 한층 더 든든하다. 모든 장수와 군사는 전력으로 왜적을 쳐부수고 우리 백성들을 구출하라!”
육지에 대군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았으니, 왜병들은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저 죽을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바로 이때 북쪽 기장 방면에서 봉화가 올랐다.
경상좌도 해안에 일제히 오른 봉화는 이순신의 눈에도 보였다. 왜군이 올린 신호임은 굳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신호가 의미하는 바는 돛대 꼭대기에 천리경을 들고 올라가 있던 선두무상의 외침에서 확인했다.
“통상! 왜선들이 두모포에서 동쪽으로 도망치고 있습니다!”
“조방장 정운으로 하여금 거북선을 이끌고 달려가 치게 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후군에 속한 거북선 11척과 대전선 1척이 바로 뱃머리를 북으로 돌렸다. 이들은 단병접전에 가담할 수 없는 까닭으로 포위망 외곽에서 예비대 노릇을 하던 중이었다. 두모포에서 적 지원군이 나타나면 저지하는 것이 이들의 애초 임무였다.
“통상, 왜추가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면 지금 당장 모든 전선을 몰아 놈들을 공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의 우두머리, 신장은 죽었다. 지금 왜군을 지휘하는 총대장이 누구인지는 이순신 휘하에 있는 장수들도 알지 못했다. 다만 지금 저기서 동쪽으로 도망가고 있는 왜적 무리 중 어딘가 속에 섞여 있으리라고만 짐작할 뿐이다.
“눈앞에 잡혀 있는 우리 백성을 구함이 더 급하다. 설사 왜적 열을 놓치더라도, 우리 백성 하나를 더 구해야 한다.”
시간을 끌면 궁지에 몰린 왜적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군사들이 흥분해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적을 구슬려서 항복하게 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지금 수군에서는 왜적이 항복한다고 해서 받아줄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몇몇 왜병이 싸움 중에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서 구명을 청했다. 하지만 저들이 저지른 만행을 눈앞에서 본 등선군들이 왜병들을 용서할 리 만무했다. 게다가 등선군에 있는 군사들 중에는 경상도 군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저기 묶인 포로들도 모두 경상도 백성들이다.
당연히 등선군 군사들은 분노로 미쳐 날뛰었다. 항복하며 자비를 청하는 왜병들에게도 용서 없이 칼과 활을 휘둘렀다. 지금 대변포(大邊浦)는 대혈포(大血浦)라고 개명해도 좋을 정도로 붉게 물들었다. 이런 판에 싸움을 중단하라는 지시는 통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왜추와 적 본대는 정 조방장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네.”
이순신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북쪽을 노려보았다. 구주를 향해 도망치는 왜군의 대함대를 향해 화살처럼 달려가는 정운의 대전선과 11척의 거북선이 보였다. 저들이 도망치는 왜선들을 어느 정도나마 붙잡지 못한다면 자신 역시 임금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을 터였다.
“포를 쏘아라!”
기패관이 호령하자 기라졸이 신호기를 흔들었다. 잠시 후 대장선인 대전선이 먼저 선수부에 장착한 24근 포 2문을 쏘았다. 날아간 포환이 왜 중선을 적중시키자 삽시간에 배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곧이어 거북선들이 연달아 포를 쏘았다. 연이어 날아간 24근 철환은 대선 옆구리에 구멍을 뚫었고 중선을 박살 냈으며 소선을 뒤집어엎었다. 왜 소선 같은 작은 배는 24근 포 한 발에 두세 척씩 뒤집히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바로 이어지는 포격은 없었다. 각 전선이 전면에 탑재한 화포는 24근 대포 2문밖에 없고, 적선을 추격하자면 선회해서 측면에 있는 지자총통을 쏠 여유는 없었다. 왜군 역시 지금 반전해서 일전을 벌이려는 시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줄행랑을 쳤을 뿐이다.
“소선 30여 척이 우리 쪽으로 옵니다! 몸을 던져 시간을 벌려는 듯합니다!”
“대응할 것 없다! 무시하고 적 본대를 쫓아라!”
정운이 호통을 치자 그 내용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하긴 거북선과 대전선 입장에서는 소선 따위는 멈춰서 대응하는 것 자체가 낭비다. 앞으로 진행하면서 그대로 짓뭉개버리면 그만인 미물들이니 말이다.
소선에 탄 왜병들이 활이나 조총을 쏘더라도 이쪽에는 아무 피해가 없다. 혹시 배가 깔려서 부서지지 않았다면, 측면을 지나칠 때 포문을 열고 한 방 쏴주는 정도면 족하다.
“24근 포 장전을 마쳤사옵니다!”
“지시를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쏘아라!”
천지를 진동시킬 만한 포성이 또 연달아 울렸다. 이번에는 대선 한 척이 철환 두 개를 모두 맞고 그대로 선체가 쪼개지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수백이나 되는 왜병들이 바닷속으로 떨어져 아우성을 질렀다.
“계속 쏘면서 쫓아라! 적 함열을 파고드는 데 성공하면 좌현과 우현에 있는 지자포도 적을 겨누어 쏘아라! 포를 쏘기 전에 적선이 눈앞에 닥치면 들이받아라!”
왜병 하나하나를 겨누어 쏘는 데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배를 부수면 적은 도망치지 못하니, 총통으로 배부터 부순다. 그리고 불화살로 부서진 적선을 불태운다. 물에 빠진 왜적은 활로 쏴 죽이거나 그대로 물에 빠져 죽도록 내버려 둔다.
정운은 마치 신들린 듯 거북선 전대를 지휘했다. 다섯 달 전 개전 첫날, 적습을 받고 배를 끌고 도망쳐야 했던 그 한풀이를 한껏 하는 듯했다.
“조선 해군도 유럽 해군과 별다를 게 없는 전법만 쓰는 줄 알았는데, 상당히 다르군요.”
“무척 다르지요? 보셨겠지만, 배 구조부터도 차이가 큽니다. 그러니 전법도 영향을 받지요.”
정운이 쓰는 대장선의 갑판 한편에는 성 요한 기사단 파견대장 로드리게스와 그의 통역 겸 안내인 정발이 서 있었다. 다른 대원들은 조선군과 함께 조선 포로들을 구출하느라 백병전을 치르고 있지만, 로드리게스는 거북선 전투를 볼 생각에 이쪽으로 왔다.
“일전부터 말씀드렸지만, 조선에서는 가능하면 원거리에서 적을 제압하기를 원합니다. 그런 탓으로 해전에서도 활과 화포를 중시하고 근접전을 회피합니다. 주적인 일본인들이 근접전에 원체 능하다 보니 더욱 대결을 피하게 된 점도 있습니다.”
정발은 조선 수군이 보유하는 다양한 종류의 화기에 관해 설명했다. 대전선이나 거북선에서 포성이 울릴 때마다 저게 어떤 대포인지 알려주는 건 기본이었다. 사실 대부분은 서반아에도 비슷한 물건이 있었기에 별로 문제가 안 되었다.
딱 한 가지, 정확한 성능을 설명해 주지 않은 무기는 강선조총이었다. 거북선 상단부에 탄 선방포수들이 쓰는 강선을 판 조총만은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고 넘겼다. 강선총과 그에 맞는 길쭉한 탄환의 비밀을 누설하는 행위는 어명으로 엄금되어 있다.
“그래서 주상께서 근접전을 따로 맡을 등선군을 창설하시고, 우리 임금의 신하가 되겠다고 건너온 왜병들을 거기 배치해서 이번 전쟁에서 싸우게 하신 게요. 그대들도 여기 눌러앉아서 우리 군사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면 좋겠는데.”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교도와 싸운다는 숭고한 의무가 있소. 성지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진 이런 곳에서 평생 있을 수는 없소.”
로드리게스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선상에서 근접전을 벌일 때의 요령이나 기본적인 항해술 같은 지식은 이미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다. 정발로서는 왜구 방어에만 특화된 조선 수군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줄 능력을 갖춘 이 서방인들이 오래오래 머무르기를 바랄 뿐이었다.
“쏘아라!”
호령과 더불어서 두 번째 포성이 울렸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왜 중선 한 척이 또 쪼개져 가라앉는 모습이 보였다, 적은 아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승부가 그렇다는 것이지, 지금 상황에서 왜군 전선 전부를 불태우거나 붙잡을 수는 없었다. 적선의 수효에 비해서 싸움에 투입할 수 있는 아군 전선이 너무 적었다. 나머지는 놓칠 수밖에 없었다.
정발은 이를 악물었다. 오늘 도망치는 적들은, 왜국 본토까지 쫓아가서라도 꼭 쳐 죽이고 말겠다고 천지신명에게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 50 –
왜군 함대는 모조리 사라졌다. 바닷가에 남은 배는 부서지고 망가져 물에 띄울 수 없는 배 10여 척뿐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해변을 메우고 있던 수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도 이젠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뭇조각과 함께 바다에서 밀려와서는 눈에 띄는 해변에 쓰러져 있는 자들이 있기는 있다. 다만 그놈들 중 태반이 이미 시체가 되었을 뿐.
지금 남은 제대로 된 왜군은 타치바나 무네시게 휘하에서 우리를 막던 후위부대 뿐이다. 안 탄 건지 못 탄 건지는 몰라도, 그놈들은 철수선을 타지 않았다. 대신 최후의 최후까지 권율이 지휘하는 우리 주력부대를 저지했다. 끝내 우리는 히데요시가 배를 타기 전에 잡지 못했다.
과연 정운과 거북선들은 히데요시가 탄 배를 격침했을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일본 측에 전쟁 책임을 묻고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을 때, 그걸 누가 접수하느냐를 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타치바나군은 대략 5천. 권율이 이끄는 병력과 해안을 따라 진군한 병력 사이에 끼어서 이젠 더 이상 후퇴할 곳도 없다. 탄약도, 식량도 없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무네시게 공에게 묻겠소! 그대들은 항복할 것이오, 싸우다 죽을 것이오?”
노부시게가 나가서 소리를 쳤다. 사실 선택하라고 제안하는 시도 자체가 항복 권유다. 만약 항복을 권할 생각이 없다면 그냥 쏴버리고 마는 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니까. 곧바로 그렇게 섬멸하지 않고 이렇게 귀찮은 절차를 거치는 이유야 뭐 여러 가지가 있다.
일단은 노부시게에게 ‘무네시게가 항복한다면 살려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고로 항복하라는 권고 정도는 해야 한다. 또 마지막 싸움이라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형편인 점도 있다. 게다가 무네시게는 그동안 윗선이 내린 명령에도 불구하고 대민범죄를 전혀 저지르지 않았기도 하고.
“무사로서 주군께 바칠 신의를 지킬 뿐. 그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다.”
무슨 생각인지 스스로 앞으로 나선 무네시게가 답했다. 항복하기 싫다는 말을 참 돌려서도 하는구나 하는데, 여기서 노부시게 옆에 있던 이덕형이 나섰다.
“그대는 신의를 무척이나 중시한다 들었소. 그런데 귀측에는 신의를 아예 값없게 취급하는 자가 있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주군을 적에게 팔아넘기는 자를 어찌 생각하시오?”
질문을 받은 무네시게의 인상이 굳어졌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주군을 팔다니, 그런 하늘이 노할 짓을 저지르는 자를 무네시게인들 어떻게 좋게 본단 말인가?
물론 적에게 영지나 금전으로 매수된 자가 주군을 배신하는 경우는 무척이나 흔하다. 직접 목을 베겠다고 달려들 때도 있다. 하지만 늘 하던 일본 내에서의 싸움도 아니고 바다를 건너 이국에 와서 치르는 싸움이다. 그런데도 주군을 배반하다니! 참 대단한 충심 아닌가?
“지금 들려주는 말을 믿기 어렵겠지만, 그대가 잠시 상전으로 모신 수길이 바로 그런 자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단 몇 시간을 얻기 위해서 자기 주군인 신장을 우리에게 팔아넘겼으면서 만고의 충신인척하니 무척이나 가증스럽소.”
이덕형은 그동안 우리가 수집한 히데요시의 배반에 대한 증언과 증거를 차근차근 제시했다. 분명히 충격적이리라. 내 눈에도 무네시게의 표정이 굳어져 가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그대는 전군의 후위를 맡아 분투하였으니 죽은 신장의 신하로서 지킬 도리는 충분히 했다 할 수 있소. 이제는 칼을 놓고 남은 수하 군사들을 살릴 도리를 행함이 어떻소? 또한, 그대도 역시 신장의 신하일진대 배반을 당해 죽은 상전의 복수도 해야 하지 않겠소?”
이덕형은 전혀 흥분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차분하고 침착하게, 시종일관 이성적인 태도로 무네시게를 설득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무네시게가 말에서 내리더니 투구를 벗었다. 그리고 손에 든 창을 바닥에 버렸다.
“귀공의 말이 옳소. 투항하겠소.”
9월 14일, 처음 흥양 앞바다에 왜군이 나타난 지 정확히 151일째 되는 날이었다. 경상도에 마지막 남은 왜군 정규부대, 타치바나군이 항복했다. 이로써 경인왜란이 마침내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