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579
2부 357화
– 14 –
“여기도 제법 춥구나.”
춥기도 춥지만, 눈이 무척 많이 오는 고장이었다. 이곳 에치고는 본래 겨울이면 눈에 묻혀 길이 끊기고 외출도 삼가야 하는 지방이지만, 조선 땅을 바다 건너로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무리해서 나온 참이었다.
조선에서 가져온 솜옷을 껴입은 채 눈을 들어 바다를 보니, 깊고 푸른 물이 한도 끝도 없이 서쪽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 바다 건너, 여기서 서쪽으로 수천 리를 족히 떨어진 곳에 조선이 있었다.
“참으로 멀기도 멀다. 내 저 반만리 머나먼 길을 어찌 지나왔는고.”
주상께서는 어명도 받들지 않고 멋대로 적과 교섭에 나선 행동을 크게 꾸짖으셨다. 그리고 그 벌로 우에스기군과 함께 왜국으로 건너가 정세를 살피라는 명을 내리셨다.
강항으로서는 약간 억울한 감이 없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세자께서 내린 지시였다고 해도, 적과 교섭하는 중대사를 어명도 없이 시도한 건 엄연히 잘못이었다. 젊은 혈기에 그만 부주의하게 공명심을 내세운 게 문제였다.
“대역죄를 적용받아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지.”
주상께서 마음만 먹었으면 세자가 왜병을 끌어들여 역모를 꾸미려고 했다고 몰아붙일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세자는 폐세자를 면치 못했을 것이고, 자신은 분명히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연좌제가 폐지되어 일가친척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으리라.
그래서 전하께서 왜국에 가라 명하셨을 때 기꺼이 받아들였다. 자신에게만 책임을 물으시고 세자 저하까지 벌하지 않으심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겼다.
다스리던 백성들을 적치하에 남겨두고 자기들만 먼저 빠져나간 강릉부사와 사대부들은 어찌 되었을지도 궁금했다. 전하께서 용서하셨을까?
10여 년 전, 지금처럼 바뀌기 전의 전하라면 선비로서 적에게 굴하지 않는 절개를 보였다 하여 칭찬하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 전하께서 보이는 모습을 보면, 모르긴 몰라도 절대 칭찬은 못 받을 것 같다. 백성들과 끝까지 함께한 허성 쪽이 훨씬 호평을 듣지 않을까.
“무슨 생각이 그리 깊으시오?”
말을 걸어온 이는 영주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제일가는 총신이자 측근 나오에 카네츠구였다. 명목상으로는 조선에서 붙잡은 포로지만, 실제로는 우에스기 측의 귀한 손님인 강항이 행여 불상사를 만나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해서 함께 나왔다.
“바다 서쪽, 고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생각하였소.”
강항은 올해 24세, 카네츠구는 31세였다. 둘 다 젊은 데다가 카네츠구가 일본인치고는 제법 유학 지식도 있는 편이라 이야기가 잘 통했다. 그래서 강릉에서부터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당분간은 귀국에서 오는 소식을 들을 수 없을 거요. 정권을 잡은 하시바 공이, 조선이 반격해 올까 봐 잔뜩 독이 올라 있으니까.”
두 사람은 눈길을 마주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강릉을 떠나서 동래, 쓰시마, 규슈, 오사카를 거쳐서 에치고까지 돌아온 그 복잡한 여정이 다시 떠올랐다.
“그대들은 어찌 전혀 손실 없이 조선에서 돌아왔는가?”
오사카성, 오다 노부나가가 앉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히데요시의 추궁을 받은 카게카츠는 눈도 깜짝하지 않고 대답했다.
“강릉 일대의 점령지를 반환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우에스기군 병력 2만이 나고야에 도착하자 난리가 났다. 몇 달 동안 연락이 끊겼던, 당연히 강원도에서 고립되어 전멸했으리라 여겼던 부대가 멀쩡하게 다시 나타난 탓이다.
이들의 눈에 비친 나고야 항구는 파손된 배와 긴장한 병사들로 가득했다. 조선으로 나갔던 원정군이 귀환한 지도 한 달은 족히 지났지만, 돌아온 병사들은 아직 상당수가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규슈 일원에 붙들려 있었다.
대기명령을 내린 건 히데요시였다. 히데요시는 일본으로 귀환하자마자 나고야에 머무르고 있던 마에다 토시이에에게 귀환부대의 수습을 부탁했다. 그리고 자기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곧바로 간몬 해협을 지나 해로로 오사카성으로 직행했다.
오사카에서는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가 부친의 명에 따라서 성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선에서 어떤 사태가 발생하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동안 조선에서 온 소식은 전세가 불리하다는 통보 정도가 전부였던 탓이다.
이때 히데요시가 거느린 5천 병력이 도착했다. 만약 노부카츠가 성문을 닫고 버텼다면 일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겠지만,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같은 편인 데다가, 히데요시가 자기 깃발과 함께 노부나가의 깃발까지 앞세웠기 때문이다.
부친의 깃발을 본 노부카츠는 노부나가가 조선에서의 전황 악화 때문에, 연락할 틈도 없이 귀환했다고 생각하고 급히 성문을 열었다. 그러자 곧바로 안으로 들이닥친 히데요시가 휘하의 군사들을 움직여 일거에 성내를 장악했다.
노부나가가 후계자로 지명한 11살 난 맏손자 히데노부가 먼저 히데요시의 수중에 들어갔다. 성에 남아 있던 병사와 무기, 재보와 물자도 모두 히데요시의 손에 넘어왔다. 노부카츠는 이 사태가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비롯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주군께서 돌아가시며 유언으로 히데노부 공을 후계자로 정하셨습니다. 주군께서는 본인을 그 유언을 집행할 자로 지명하셨으니, 오사카성의 통제권을 제게 넘겨주셔야겠습니다.’
‘즈, 증거가 있는가?’
‘여기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도장을 찍은 유언장을 내밀었다. 다른 이가 대필했는지 노부나가의 친필은 아니었지만, 노부나가의 도장은 붉은색으로 확실하게 찍혀 있었다.
부친의 유언장 앞에서 노부카츠는 할 말을 잃었다. 무엇보다 부친이 전사했다는 소식만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아, 히데요시에게 맞서 따지거나 반항할 힘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끝나 오사카성은 히데요시의 것이 되어 있었다.
히데요시는 오사카성 하나로 그치지 않았다. 노부나가의 이전 거성인 아즈치성을 비롯하여 인근의 주요 거점을 담당하는 장수들을 당장 오사카로 불러들여서 지금 처한 상황을 간략하게 알리고, 히데노부의 보호자인 자신에게 따를 것을 서약하게 했다.
노부나가의 유언장을 본 장수들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히데요시는 이렇게 해서 오사카를 확고히 틀어쥔 뒤에야 에도에 있는 이에야스에게 전갈을 보냈다. 더불어 노부나가를 패사시킨 조선군이 지금 바다를 건너서까지 추격해올 태세라는 위협도 덧붙였다.
만약 이에야스가 지금 히데요시의 조치에 반발한다면, 동맹자이면서 또 주군인 노부나가의 원수는 갚지 않고 적에게 협력한 배신자가 될 것이다. 서쪽에 있는 토시이에 역시 반발보다는 협력을 택했으니, 이에야스가 혼자 나서서 맞설 리는 없었다.
예상대로였다. 이에야스는 노부나가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면서, 관동에서 이 소식으로 인해 혼란이 빚어지지 않도록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겠다는 답을 보내왔다. 이에야스가 자세를 낮춰 열세를 인정했으니, 적어도 지금 당장은 반항할 자들이 없는 셈이었다.
그런데 이제 막 만사가 안정되기 시작하는 시점에,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전멸했으리라 여겼던 우에스기군이 나타난 것이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히데요시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에게 모든 병력을 규슈에 놓고 혼자서 오사카로 오라고 했다. 지금 카게카츠를 따라온 인원은 측근 중신 몇 명과 시종들뿐이었다.
“저희 군은 강릉성과 그 주변에 있는 산성 6개소를 일거에 함락했습니다. 조선군은 방어할 준비를 전혀 해두지 않았고, 기습은 대성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더 진격하지 못하고 적중에 고립된 채 일진일퇴했을 뿐입니다.”
“주군께서는 귀공에게 동쪽에서 한성을 공격하라 명하셨건만, 왜 명령대로 한성으로 군대를 몰아 진격하지 않고 강릉에서 멈췄는가?”
“길이 험하고, 정확한 지도도 없었습니다.”
히데요시 앞에 꿇어앉은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대답은 짧았다.
“그대 휘하에도 30척가량의 함대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왜 본대에 연락하지 않았나?”
“뱃길을 몰랐습니다.”
“해안을 따라 남진하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몰랐다고?”
“몰랐습니다.”
대답은 단 한 마디, 얼굴에서는 수염 한 가닥 움직이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얼굴에 핏줄이 솟았지만 애써 소리를 지르지 않고 참았다.
“그럼, 어떻게 돌아온 건가? 강릉에는 충분한 배가 없었을 거고, 가지고 있는 배만 가지고 돌아오려고 해도 조선인들이 뱃길을 막고 절대 열어주지 않았을 텐데.”
“적이 노부나가 공께서 전사하셨음을 알리며 항복하라고 권했습니다. 이에 우리를 무사하게 귀환시켜주면 강릉성과 그 주민 4만 명, 우리가 점령한 산성 6개를 다른 조건 없이 저들에게 돌려주겠지만 만약 귀환을 막는다면 모조리 죽이고 불태워 폐허만 남기겠다고 했지요.”
카게카츠의 뒤에 앉아 자기가 입을 열 때를 기다리던 카네츠구가 얼른 나섰다. 히데요시도 그와 대화하는 편이 덜 답답했는지 시선을 카게카츠에게서 그에게로 옮겼다.
“그 역제안을 받은 조선인들은 며칠 안에 수락하겠다는 답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강릉에서 우리가 관리하던 자기네 백성들을 돌려받는 대신, 부산에서 본대로부터 나포한 수송선을 다시 우리에게 제공해서 우리가 타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하겠다고 회신했습니다.”
카네츠구는 미리 정리해 온 문서를 내밀었다. 강원도의 조선군과 우에스기군, 양측이 종전 문제로 주고받았던 서한들과 서로 교환한 포로와 선박의 숫자를 기록한 문서였다.
히데요시는 문서를 받아 펼쳤지만 어려운 한자만 한가득 적혀 있는 걸 보고 인상을 구겼다. 표정을 일그러뜨린 히데요시는 넘겨받은 문서 다발을 다시 접어서 자기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미츠나리에게 넘겨주었다.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카게카츠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한마디 했다.
“더 물으실 게 있으십니까?”
“조선군이 규슈로 역공할 움직임은 없었나?”
“저들이 역공을 생각했다면 저희를 돌려보냈겠습니까?”
여기서 다시 카네츠구가 나섰다.
“강원도로 간 저희는 분명 계획한 만큼 진격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본대가 공격했던 조선 남부는 이번 전쟁에서 확실히 초토화되었지요. 그래서 저들은 이 정도 선에서 전쟁을 끝내고 일단 손실을 회복하는 데 먼저 열중할 생각인 듯했습니다.”
“저들은 아직 쓰시마를 탈환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여기서 전쟁을 끝내려고 해?”
“하시바 공께서도 직접 보셔서 아시겠지만, 쓰시마는 산으로 가득한, 농토도 없고 광산도 없는 가난한 섬입니다. 더구나 주민도 모두 경상도로 빠져나갔으니 저들에게는 서둘러 섬을 탈환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바닷길이 거칠어지는 겨울이 코앞이니 더더욱 말입니다.”
카네츠구는 조리 있게 설명을 계속했다. 히데요시가 듣기에도 확실히 그럴듯했다.
“더구나 쓰시마에 대군이 있음을 저들도 알고 있습니다. 막심한 피해를 감수하고 별 가치도 없는 섬을 탈환하려고 노력하느니, 포기하겠다는 게 조선인들의 생각입니다.”
카네츠구의 설명에는 거침이 없었다. 히데요시는 미츠나리를 비롯한 측근들을 뒤에 거느린 채 인상을 한껏 일그러트리고 카네츠구의 설명을 들었다.
“그럼 저 조선놈은 뭐냐? 너희는 모든 인질을 석방했다더니 저놈은 왜 데려왔지?”
히데요시의 손가락이 카네츠구 옆에 있는 강항을 가리켰다. 카네츠구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준비해둔 답을 즉석에서 내놓았다.
“이자는 조선 국왕의 조카입니다. 군감(軍監)으로 강릉을 살피러 나온 것을 저희가 기습으로 사로잡았는데, 정말로 모든 포로를 석방할 경우 적이 배신할 가능성이 있어 이자 하나는 남겨 데려왔습니다. 저자 역시 카게카츠 님을 보고 따르고 싶다 하며 불만 없이 따라왔습니다.”
의심이 가시지 않았는지 히데요시는 몇 가지 질문을 더 건넸다. 하지만 강항은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했고, 카네츠구와 의논해서 답변도 준비해두었다. 강항이 내놓은 답변은 히데요시가 속으로는 어떨지언정 겉으로는 의심을 거두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 조선이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전쟁을 걸어오지 않을 거란 말이지….”
히데요시는 이번 전쟁에서 톡톡히 곤욕을 치렀다. 조선군은 예상보다 강력했다. 전주성에서 겪은 참담한 패배는 지금도 머릿속을 괴롭혔다. 만약 저들이 ‘전주’라도 가지고 와서 하늘에서 오사카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한다면…?
지금 중요한 건 히데노부의 보호자로서 굳건한 위치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서 일본 내에서 주도권을 확립하는 일이었다. 만약 조선군이 지금 쳐들어온다면, 자신의 영지인 규슈 일원이 곧바로 전화에 노출된다. 그리고 멀리 동쪽에 근거지를 둔 토시이에와 이에야스만 득을 본다.
히데요시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노부나가가 사라진 긴키 일대를 자기 손에 넣어서 규슈를 대신할 새 터전으로 삼으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협력할 세력도 많이 필요하다. 이에야스만큼 위협적인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면서 충분히 강한 협조자 말이다.
“좋은 정보, 고맙게 받겠다. 그럼 병사들을 데리고 에치고로 돌아가 겨울을 날 준비를 하기 바란다. 올해의 동원은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 한 마디로서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우에스기군이 벌인 활동에 대해서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음을 명확하게 했다. 카게카츠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간단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다 지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그때는 정말 등에 진땀이 다 흘렀소.”
카네츠구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한참 지난 일이지만 그때 생각을 떠올리기만 하면 등에 소름이 돋는 건 여전했다.
“물론 확신은 있었소. 패전으로 위상이 떨어진 하시바 공은 동맹세력을 하나라도 더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면서 우리를 몰아세워 봐야, 자신에게 유리할 건 하나도 없지.”
본국에 남았던 두 명의 유력 영주 중 마에다 토시이에는 확실히 히데요시와 가까운 사이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자기보다 상위에 올라도 좋다고 순순히 인정할지는 알 수 없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러서는 분명히 히데요시를 경계한다. 명문가의 후예로 노부나가의 친구이자 천하를 주름잡는 2인자였던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를 확실히 경원했다. 히데요시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야스 님을 견제하자면 우리 우에스기 가가 하시바 공 쪽에 가담해서 북쪽에서 에도를 위협하는 게 필수요. 다테, 사타케, 모가미는 다음 차례고. 그러니 하시바 공으로서는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소. 더구나 우리 군은 이번 전쟁에서 전력도 온존했으니.”
조선에서의 졸전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조선과의 결탁 여부를 노골적으로 의심하면 애매한 상대였던 우에스기가 확실한 적으로 바뀐다. 이미 조선에서 큰 타격을 입은 데다 되도록 빨리 이에야스를 제압해야 하는 히데요시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다.
“설마 귀측이 하시바에게 넘어가 우리 전하와 맺은 맹약을 깨트리는 건 아니겠지요?”
“강 공, 우리 우에스기 가문은 ‘신의’ 두 글자를 빼면 모두 시체가 되고도 남을 사람들이오. 노부나가 공과의 신의는 우리를 속여 사지에 밀어 넣은 시점에서 깨졌지만, 조선 국왕께서는 끝까지 약속을 깨지 않으셨소. 우리가 먼저 약속을 깨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우에스기 측은 장차 조선이 이번 전쟁에 대한 보복전을 펼치면 조선에 유리하게 움직인다는 밀약을 했다. 강항도 그 준비를 위해 일본에 넘어온 터였다.
“하시바 공은 조선이 쳐들어오지 않으리라는 우리 보고를 듣고서는 규슈 북부에 남겨두었던 원정군 잔여병력의 동원을 모두 해제했잖소? 물론 내년에 다시 소집할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우리 덕에 조선에 더 유리한 결과가 나왔음은 분명할 거요.”
“그야 물론이지요.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뭐, 약속이니까. 솔직히 우리도 조선이 일본을 정복하기를 바라는 건 아니오. 하지만 자기 주제를 모르고 세력을 확장하려 드는 하시바를 골탕 먹이는 정도라면야, 기꺼이 돕겠소.”
“감사합니다.”
임금이 어느 정도까지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는 사실 강항도 몰랐다. 그저 우에스기처럼 꽤 말이 통하는 세력과 앞으로도 우호적으로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