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595
2부 37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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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일본 지도가 탁자 위에 펼쳐졌다. 내가 알고 있는 일본 영토 형태에 따라서 거대한 백지도를 그리고, 그 윤곽 안에 도왜, 항왜, 신왜 등 우리 편으로 넘어온 일본인들이 토설한 온갖 정보를 집대성해 편집한 최신 지도다. 물론 세부지형도 반영해서 넣었다.
한 가지 유감이라면 인구, 산업, 병력 숫자 등 인문지리적인 요소는 대부분 이번 전쟁 이전 수치를 기준으로 해서 기재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최신정보 수집에 한계가 있으니 그건 어쩔 수 없었다.
“그대들의 말이 옳다. 우리 역량을 살펴 그에 맞춰 목표를 정함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장차 대업을 수행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일단 달성할 과제부터 확실히 해두고 나서 그에 맞춰 준비를 시행함이 마땅하다.”
사실 전쟁을 곧바로 계속 이어가지 않고 1년을 쉬었더니 나도 흥분이 조금은 식었다. 새로 발생할 전사자 수천 명에 대한 미안한 감정도 없지는 않고. 아닌 말로 내가 마음만 바꾸면 안 죽어도 될 사람들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원정을 취소할 생각도 조금은 했다. 당연히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다. 망설이는 낌새가 보이기만 하면 쌍수를 들고 찬성하고 나설 사람들이 한둘이 아닐 테니까.
분명 이번 전쟁에서 우리 조선군은 왜군을 연파했다. 기습을 당한 초기에야 심각한 패배를 여러 차례 겪었지만, 제대로 대처에 나선 뒤에는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연승한 요인 중 하나는 방어전을 치르고 있다는 데 있었다. 지형도, 보급도 우리 편에 유리했다. 하지만 일본에 원정을 나가서도 역시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실한 보장은 없다. 유리한 지형에서 미리 준비하고 기다리는 일본군이 이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장 영의정 유성룡부터도 왜국을 치기는 쳐야겠지만 되도록이면 안 치면 안 되겠습니까…하고 은연중에 내게 반대론을 속삭이는 처지다. 그러니 다른 신하들은 그 속이 어떻겠는가.
다만 원정을 포기하자면 전제조건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조건은 충족되지 않았다.
“신장의 자리에 오른 왜추 수길이 진정으로 그 죄를 뉘우치며 사자를 보내 용서를 빌었다면 굳이 우리가 군사를 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 생각도 없으니, 어찌 군사를 보내 징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혹시나 하고 올해 1년을 조용히 기다려 봤다. 만에 하나라도 히데요시가 사죄사를 보내서는 자기네가 잘못했다고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전쟁 후반에 벌어진 매 전투는 압도적인 아군의 우세였다. 히데요시로서는 사기충천한 우리 조선군이 일본에 상륙해서 또 일본군을 쳐부술 게 당연히 두렵지 않겠는가? 그럼 속임수까지 써 가면서 겨우 잡은 권력이 날아갈 텐데, 아깝지 않을까?
작년에 에조치에 갔다가 붙잡힌 우리 교역선단의 배와 사람들을 별 조건 없이 돌려줄 때만 해도 ? 화물은 몽땅 뺏고 돌려주지 않았다 ? 혹시나 하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전쟁 전에 넘어온 비전투원이니 돌려준다고만 했을 뿐, 사과 같은 건 일절 없었다.
당연히 내가 빡이 칠 수밖에 없다. 좋다, 어디 끝까지 해보자고.
“왜추 수길은 신장이 분명 구두로만 자신에게 손자의 후견을 맡겼음에도, 신장의 유서라는 문건을 내세워 지금 권좌에 올랐다 하였다. 이는 수길이 문건을 위조하였음을 뜻하니, 나라를 다스리는 자로서 어찌 당당한 행동이라 하겠느냐?”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다는 유언장이 가짜라는 건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그 유언을 전달한 본인이 그런 건 없다고 했기 때문이지. 호소카와 후지타카가 히데요시 앞에서 노부나가의 유언을 알려줄 때, 바로 옆에 있었던 게 바로 나가마스다.
내가 히데요시였다면 유언을 전한 사자 전원을 확실한 내 편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죽여버려 입을 막았을 텐데, 히데요시는 그러는 대신 내게 보냈다. 내가 나가마스를 죽일 줄 알았을까? 아니면 그런 생각조차 안 날 만큼 다급하게 나를 멈추고 싶었을까?
“옳으신 말씀이옵니다.”
“그 유서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수길은 당장 위기에 몰릴 것이다. 때를 살펴 적절한 시점에 왜국 천하에 공표토록 해야겠다.”
그 스피커 노릇은 당연히 이에야스가 해주셔야지. 내가 아무리 크게 소리친들 프로파간다로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거든, 저쪽에서. 그러니 누군가는 박자를 맞춰 호응해 줘야 효과가 있다.
사실 히데요시가 올해 여름, 아니 넉넉잡아 가을까지라도 좋았다. 고니시든 누구든 사자로 보내서 노부나가가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면서 우리한테 싹싹 빌게 시켰으면 굳이 이 사실을 폭로하지 않고 눈감아줄 수도 있었다.
물론 맨입으로는 안 된다. 사죄의 뜻을 구구절절하게 쓴 편지와 더불어서 전범으로 목을 칠 만한 악질 왜장 서른 명쯤 희생양으로 내놓고, 배 한 척을 채울만한 금은 정도는 배상금으로 바쳐야 하고, 제 놈이 가지고 있던 규슈 영지 정도는 노부나가의 유언대로 양도해야 했다.
이쪽 세계 히데요시는 적어도 침략을 주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성의를 보인다면야 살려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죄를 빌기는커녕 전쟁 준비나 하고 있으니, 나도 전쟁으로 화답할밖에.
“장차 우리 군사가 동래 일대에서 출항하면, 먼저 대마도와 일기도부터 공략한 뒤에 이번에 왜적이 거점으로 삼았던 명호옥(名護屋, 나고야)을 점거해야 하리라. 그런 뒤에는 일군은 구주 북부 일대를 점거한 상태로 방어를 굳히고, 일군은 대판(오사카)를 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규슈 전역을 우리 손으로 점령하는 건 시간 낭비다. 규슈 서부는 히데요시가 자기를 충실히 따르는 가토나 고니시 같은 여러 영주에게 분배해서 맡아 지키게 했다고 했다. 이쪽 방면이야 오사카를 치러 갈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꼭 쳐야 하지만, 나머지는 글쎄?
“동쪽의 대우씨도 꼭 제압해야 합니다. 우리 군선이 대판으로 가려면 중간에 구주에서 잠시 배를 해안에 대고 쉬었다가 다시 출발해야만 하는데, 이곳 부내야말로 그 적지입니다.”
대우씨는 오토모(大友) 씨, 부내는 오토모령인 분고(豊後)의 수도 후나이(府?)를 가리킨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분명히 여기에 오이타(大分) 시가 있었는데…그 이름으로 바뀌려면 아직은 세월이 더 지나야 하는 모양이다.
“옳은 말이다. 대우씨는 작년 전쟁에서 그 영주를 잃었으니, 몇 년 안에는 피해를 수복하기 어려우리라. 우리가 3년 뒤에 군사를 내더라도 여전히 혼란을 겪고 있을 것이다.”
오토모 씨의 당주 오토모 요시무네는 동래성 앞에서 벌어진 마지막 결전에서 아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전투 후에 신원을 확인해서 시신은 목을 쳐서 불태웠고, 갑주는 강무관에 보내 전시실에 보존해 두었다.
지금 오토모 씨의 당주는 겨우 15세밖에 안 된 요시무네의 아들 요시노리다. 스스로 넘어온 신왜들, 그리고 우리 습격대가 잡아온 왜인들 모두 오토모 씨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부분에서 진술이 일치했다.
“왜별장 남도사에게 묻나니, 그대의 본가는 어떤 입장을 취하리라 보는가?”
“신이 판단하기로는 전하께 기꺼이 협력하리라 사료되옵니다.”
남도사, 시마즈 도시히사는 시마즈 가의 좌절된 꿈에 관해서 설명했다. 시마즈는 오토모를 쓰러트리고 규슈 전역을 제패하는 패자가 될 뻔했으나, 노부나가가 히데요시를 보내 개입하는 바람에 성공 직전에 좌절했다. 그 열망은 아직도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 일 때문에 그대가 내 신하가 되었지.”
도시히사가 쏜 화살 한 대가 참 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전체적인 역사의 흐름이야 뭐 그대로일 수 있지만, 그 화살 때문에 원균이 히데요시의 친구가 되어 일본에 남고 침략의 선봉에 섰으니 말이다. 만약 도시히사가 원균을 아예 죽였다면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에휴, ‘만약에’ 운운하면서 이미 지나간 사건들을 곱씹으면서 허송세월하는 행동만큼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없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데나 더 노력하자.
“그럼 오토모령 제압에 시마즈군이 일익을 담당할 수 있겠구나. 수길의 측근 장수들이 몰려 있는 서부 역시 마찬가지고.”
본거지에서 하는 싸움이니까, 시마즈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만 단위는 족히 넘을 거다. 시마즈는 이번 전쟁에서 소모한 인력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고 했다. 노부나가가 내린 동원령 실행 과정에서 최대한으로 요령을 피운 덕분이다.
“제 아우 이에히사를 원정 전에 은밀히 잠입시키면, 본가에서는 기뻐하며 호응할 것입니다. 바로 군사를 일으켜 오토모와 가토?고니시 등을 칠 것이니, 규슈는 삽시간에 문을 활짝 열고 전하를 맞아들일 것입니다.”
시마즈 4형제의 막내인 이에히사는 우리 포로가 되었다고 저쪽에도 확실히 알려진 사람 중 하나다. 우리가 딱히 포로 명단을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나가마스가 사자로 양 진영을 왕복할 때 자기 눈으로 보고 전한 덕분이다.
내년에는 우리 남만선을 포르투갈 교역선인 척하고 나가사키에 입항시켜 첩보활동을 진행해 보도록 해야겠다. 이항복은 없지만, 그동안 정여립과 이항복이 가르친 금위사 요원들까지 다 유럽에 간 건 아니니까.
– 29 –
“전하, 이만 환궁하시지요.”
“아니다. 요즘 도성 분위기를 내 알고 싶구나.”
내 뒤를 따르는 선전관 유형은 시종 안절부절못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이제껏 내가 잠행을, 그것도 선전관 단 한 사람만 거느리고 나오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었던 까닭이다.
무종 때 내 전례 때문에, 임금이 미복잠행을 하는 건 황이 이래로 금기시되었다. 그 규범을 내가 또 깨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까지는 적어도 내금위 군사나 선전관 3명 이상을 대동하지 않고 외출한 적은 없었다. 갑옷도 늘 속에 껴입고 다녔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 혼자만 데리고 나왔으니 유형이 동요할 만도 하다.
“전하, 시중 분위기를 조사하여 전하께 올릴 신하들은 충분히 있사옵니다. 일부러 전하께서 이런 추운 날씨에 궁 밖으로 행차하지 않으셔도….”
“내가 이 정도 추위를 견디지 못할 듯하냐?”
12월로 접어든 날씨는 매서웠다. 얼음이라도 밟았는지 다리가 약간 휘청거렸다. 아니, 내가 속에 껴입은 비단 누비조끼와 쇄자갑과 가죽조끼가 너무 무거운 탓이려나. 급히 다가와 나를 부축하는 유형을 향해 겸연쩍게 웃었다.
“두툼하니 따뜻해서 좋긴 한데 무겁긴 무겁구나. 이젠 좀 벗고 다닐까?”
종성순 이후, 외출할 때면 꼭 챙겨 입는 코스튬이다. 이 정도면 칼이 아니라 조총에 맞아도 즉사하지는 않을 거다. 농담처럼 이야기하긴 했지만 아직은 벗고 싶지 않다. 세상일이란 언제 불확실한 사고가 생길지 알 수 없으니까.
어쨌든 춥기는 춥다. 어디 앉아서 따뜻한 국물이라도 좀 먹고 가는 게 좋겠다.
“주모, 혹시 따끈한 꿀물 있나?”
“잠시만 기다리십쇼.”
유형이 주문하자 주모가 질그릇을 들고 왔다. 맛을 보니 조청을 가지고 꿀이랍시고 내놓은 게 분명했지만 이런 걸 가지고 다투기는 피곤했다. 그냥 천천히, 조금씩 입에 흘려 넣었다.
“이젠 뭘 드릴까요?”
“장국밥 두 그릇이랑 저기, 저 사람들 먹는 걸 한 접시 주게. 탁주 한 병하고.”
“육병 말입지요? 알겠습니다요.”
날씨가 추운 탓인지 손님은 많지 않았다. 넓은 술청과 마당, 평상은 죄다 텅 비었고 방에도 우리뿐이었다. 주방에서 안주를 굽는 사이 술병부터 들고 온 중년 주모가 덤덤한 표정으로 내 질문에 답했다.
“전쟁이 작년에 끝났다지만, 아직은 다들 사는 게 빡빡하지요. 게다가 날도 추우니 일부러 술을 마시겠다고 나오는 사람도 드물어요.”
조선에서 사람과 돈이 가장 몰리는 도시가 한양이다. 그 한양도 아직 전란으로 입은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여기 육병이요.”
육병(肉餠)은 고기를 다져 뭉쳐서 번철(燔鐵 : 솥뚜껑을 뒤집은 형태의 지짐용 요리도구. 프라이팬을 번철로 적기도 함)에 구운 것이다. 진짜 떡갈비와 달리 뼈는 없다. 내가 투박한 나무젓가락을 잡자 유형이 움찔하더니 급히 얼굴을 내 옆으로 가져와서는 속삭였다.
“저자에서 파는 이런 음식에 손을 대시면 안 됩니다. 그저 구색을 갖추고자 시켰을 뿐이니 부디 드시지 마소서.”
“음식을 마련해 놓고도 먹지 않고 버리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으냐.”
“전하, 저자에서는 절대 남긴 음식을 버리지 않습니다. 남기고 가면 분명히 고스란히 다른 손님에게 낼 겁니다. 술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남긴 술이 섞였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육병을 뭉친 덩어리가 궁에서처럼 손바닥만 하지 않고 밤톨만 하다. 먹기 좋게 작게 만든 줄 알았더니, 먹다 남긴 티를 내지 않고 다른 손님에게 내기 좋게 만든 거였던가.
“괜찮다. 그리고 적어도 술 한 모금, 안주 한 점이라도 먹지 않으면 저 주모가 어찌 우리를 의심하지 않겠느냐?”
유형이 말릴 사이도 없이 뿌연 술을 막사발에 따라 잠시 들었다가 천천히 마셨다. 물을 탄 게 분명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실수로 사레가 들려 재채기를 했다.
“쿨럭!”
“저, 전하!”
“소리를 크게 내지 마라. 나는 괜찮으니 어서 그대도 한 잔 받아 마시라.”
장소가 장소이기는 해도 어주를 사양할 수는 없었는지 유형이 두 손을 떨며 잔을 받았다. 병을 내려놓고 육병을 한 조각 집어 맛을 보았다. 역시 궁중에서 만든 물건에 비하면 심하게 맛이 떨어진다. 고기에 밴 양념에 설탕이나 후추, 배즙, 계피도 없고 간장과 파, 마늘뿐이다.
고기 자체도 질이 낮다. 잡육 수준도 아닌 진짜 찌꺼기 고기를 갈았다. 어쩌면 상한 고기도 섞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간장을 퍼부어 짠맛으로 쉰 맛을 가렸을지도. 더구나 지지는 데 쓴 기름은 질 나쁜 고래기름이다. 그래도 궁중에서 흘러나온 레시피를 흉내라도 낸 게 가상하다.
“국밥은 그럭저럭 괜찮구나.”
개고기를 잘게 찢어 넣은 개장국은 된장과 실고추로 얼큰하게 간이 되어있었다. 매운맛은 확실히 조선 사람들 입맛에 맞지 않을 수가 없다. 뿌듯하구먼, 이거.
몇 숟가락 뜨고는 물을 한 잔 달라는 핑계로 유형에게 주모를 부르게 한 뒤 대화를 시켰다. 어차피 손님도 별로 없어 그런지, 주모는 선뜻 자리에 앉아 요즘 도성 분위기를 들려주었다.
“남쪽이야 전란으로 쑥대밭이 됐다지만 도성은 무사했으니 다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지요. 근데 오위군이나 도감군으로 나가 죽은 사람이 꽤 많다 보니 다들 올해 첫 제사를 치르느라 동네가 울음바다였습지요.”
이 주모도 남편과 두 아들이 모두 도감군으로 전선에 나갔다고 했다. 남편은 전주에서 이일 휘하에 있다가 경상도로 넘어가는 길에 죽었고, 큰아들은 논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죽었다고 했다. 천주교도 의군으로 입영한 작은아들만 살아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다.
전사자에 대한 보상금으로는 저화가 열 섬씩 나왔다. 고로 이 아낙네는 스무 섬을 받았는데 저화 가격이 워낙 폭락한 터라 안 받은 거나 매한가지라고 했다.
“쌀이 귀해 죽겠는데 누가 종이를 받고 쌀을 줍니까요. 그저 둘째라도 살아서 집에 왔으니 다행입지요. 이제 그놈이 어서 장가를 가야 하는데, 주님의 뜻에 따라서 군졸로서 상감마마께 충성해야 한다면서 창질 연습만 하고 도통 장가갈 생각을 안 하니….”
“거, 훌륭한 청년이구료. 꼭 좋은 배필이 나설 거요.”
천주교도 의용군은 전쟁이 끝나고 반으로 규모가 줄었다. 사상자도 꽤 있었고, 지원자라면 연령 불문으로 다 받아들인 탓에 중년 이상의 연장자도 꽤 많았다. 그런 양반들은 계속 끌고 가기 영 부담스러워서 다 제대시켰다. 지금 도감군에 남은 의용군은 1개 대대, 500명뿐이다.
지금 남은 병사는 꽤 재주 있고 똘똘한 자들뿐이니, 이 주모의 아들에게도 기본적인 자질은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한번 잘 키워서 좋은 처녀에게 장가보내줘 볼까.
“이만 돌아가자.”
내가 일어서자 유형이 뒤따라 일어나며 허리춤에 손을 댔다.
“그대 처지가 안됐소만, 우리는 그만 가야겠소. 주모, 여기 얼마요?”
죽은 남편과 큰아들 생각에 눈시울이 벌게져 있던 주모가 계산이라는 말에 벌떡 일어섰다. 눈가는 아직 붉고 목도 아직 메어 있었지만,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탁주에 육병에 꿀물에 국밥에…쌀 석 되는 주셔야 합니다요.”
나야 요즘 저자 물가를 모르니 그냥 서 있었다. 유형은 분개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내 앞에서 진상을 부릴 수는 없는지 잠자코 전낭을 열어 저화를 꺼냈다. 그런데 저화를 본 주모 쪽에서 고개를 마구 흔들면서 받기를 거부했다.
“저화라뇨, 저화는 안 받아요. 저화로 내시려거든 한 말은 주셔야 해요.”
“아니, 그따위 물건들을 음식이랍시고 내놓은 주제에 그 돈을? 석 되도 비싼 것을 참았더니 한 말이라고? 그게 말이 되는가!”
기어코 유형이 성을 냈다. 나는 잠자코 유형의 어깨를 잡아 말렸다. 남편과 두 아들을 모두 전쟁에 보냈고, 그중 하나만 겨우 무사히 돌려받은 아낙이다. 저 아낙네에게 임금으로서 당장 해줄 것도 따로 없지 않은가.
“됐다. 그냥 은을 한 냥 주어라.”
은 한 냥이면 거의 쌀 한 섬에 해당한다. 유형은 그러시면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잠자코 고개를 저었다. 은을 받아든 주모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와 유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뒤로하고 천천히 궁궐로 돌아왔다. 나갈 때도 그랬지만, 돌아오는 발걸음도 썩 가볍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