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
1부 0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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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주안상이옵니다.”
“놓고 가거라.”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되지 않았다. 대신에 내관 아저씨한테 아직 국상 기간인데 어찌 술을 마시려고 하느냐는 꾸지람만 들었다.
“과인은 오늘 내 친어머니가 사사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노라! 내 그동안 제사도 지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너무도 우울하니 술이라도 마셔 기분을 달래야겠다.”
“전하, 국상 기간에 음주를 한다 함은 사대부라 해도 처형될 수도 있는 중범죄입니다. 만백성의 모범이 되셔야 할 전하께서 그런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셔서야 되겠습니까?”
아니 내가 그런 소소한, 아니 조선에서는 중범죄인가? 하여튼 불법행위를 저질렀다고 날 처형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싶지만 그건 넘어가자.
“전하께서 폐비 윤씨의 이야기를 듣고 슬퍼하심은 전하의 효심이 두터우신 탓이니 지극히 당연하시다 하겠으나, 돌아가신 선대왕께도 효를 지키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내 친부모도 아닌데 효는 무슨 효. 그리고 원래 상갓집에는 술이 끊이지 않는 법 아닌가? 내가 주연을 벌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우울한 기분을 달래고자 하려는 것뿐이잖아.
“그대가 하는 말은 알겠다. 허나 지금 과인은 단지 가엾으신 어머님께 술 한 잔을 올리고자 할 뿐인데, 그조차 안 된다는 말인가?”
“전하, 그것이….”
“어명이다!”
결국 술상을 받아냈다. 다만 국상 중이라서인지 몰라도 안주는 형편없었다. 고기 한 접시 정도는 있겠지 했는데 한식 과자만 몇 가지 들어왔다. 젠장, 앞으로 아직 한 달은 더 이런 형편없는 상을 받아야 한단 말이지.
누구 앉혀 놓고 술을 따르라고 하고 싶지도 않아서 자작으로 조용히 한 잔 들이켰다. 무슨 술인지 이름은 모르겠지만 향은 무척 좋았다.
“하긴, 임금이 마시는 술이니.”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고 연달아 석 잔을 더 마셨다. 보기보다 독한 듯, 겨우 넉 잔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은근히 취기가 올라왔다.
“좋구나.”
기분이 좋아지자 나도 모르게 나지막한 소리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무의식적으로 뒤로 기대앉아 콧노래를 흥얼거릴 뻔 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급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는 지금 비명에 가신 ‘어머니’에게 술을 올리겠다고 자리를 잡았다. 그래 놓고 노래를 흥얼거리다니, 스캔들이 날 일이지. 아무렴.
헛기침을 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자작으로 한 잔 더 따라 들이키자 화끈한 기운이 뱃속에 퍼졌다. 빈 속에 마시는 술이라서인지 더 자극이 강했다. 문득 혼잣말이 나왔다.
“진짜…안 깨는 구나….”
근 두 달. 정말 정신없이 보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야 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전 공부를 해야 하고, 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나라 다스리는 일을 해야 했다. 할아버지뻘, 아버지뻘 되는 어른들이 조정에서 다투면 의견조정도 해야 했다.
평소에 뉴스를 보며 정치인들을 욕하기는 쉬웠다. 하지만 내가 직접 정치를 하는 입장이 되어 보니 정말 쉽지가 않았다. 결정해야 할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이래서 연산군이 막판에 막장으로 놀아난 거겠지.”
또 한 잔이 목구멍을 넘어갔다. 지난 두 달 동안 이렇게 느긋하게 술이라도 마신 적이 없었다. 꽉 짜인 시간표대로 하루하루를 넘기기도 바빴다.
경연을 땡땡이친다고 해 봐야 어디 놀러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신하들을 모아놓고 주기적으로 조회를 하고, 매일 대신들과 회의를 한다. 회의를 안 할 때면 승지들에게 붙들려서 상소문을 읽고 이것저것 결정을 내린다. 그러다 보면 하루해가 금방 저물었다.
하루 두 시간, 말 타고 활 쏘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정말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었을 거다. 그것도 상중에 말을 탄다고 대간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욕을 바가지로 먹어야 했다.
“전하! 지금은 국상 중입니다. 그 누구보다 행동을 조심하셔야 할 전하께서 국상 중에 말을 달리고 활을 당기시다니, 이는 망측한 일입니다!”
이 정도 표현은 매우 부드러운 축에 들었다. 내가 한문에 능숙하지는 않지만, 중국사에 나오는 누구 같은 행동이네 누구 같은 행동이네 잔뜩 적어서 들이미는 상소문을 보면 느낌이 왔다. 이 새끼 지금 나 욕하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감투고 모가지고 모조리 잘라버리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성종이 사림들을 우대하면서 대간들에게 무제한적인 발언권을 허용한 사실은 나도 알았다. 내가 한두 마디 한다고 몇 년을 날뛰던 저놈들 버릇이 고쳐지겠나? 혀라도 뽑으면 모를까.
게다가 상을 치르는 중에는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저놈들 주장은 조선식 도덕관으로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냥 무시하면서 버티고 있었다. 말이라도 타지 않으면 도저히 스트레스를 풀 수가 없었으니까.
“여봐라, 게 누구 있느냐!”
“예, 전하.”
내관 아저씨는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다른 내관이 들어왔다. 잠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바로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누가 해도 되는 일이었다.
“술 한 병만 더 들이라 해라.”
“전하…이제 그만….”
“한 병 더 가져오라지 않느냐!”
“예, 예. 당장 대령하겠나이다.”
곧바로 술상 하나가 새로 들어왔다. 처음 들여왔던 상을 내관이 조심스럽게 들고 나갔다. 깡술로 마셔 댄 탓에 술주전자는 비었지만 안주 접시는 거의 그대로였다.
“먼젓번 술이랑은 향이 또 다르군.”
두 번째 주전자도 어느새 반 이상 비었다. 안주도 제대로 먹지 않고 술만 마시니 점점 취기가 올랐다. 술기운과 함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외로움도 점점 치솟았다.
외롭다. 친구가 갖고 싶다.
물론 애초에 왕에게는 친구가 없다. 왕자가 귀족들과 어울려 자라는 서양이라면 모를까, 조선이라면 애초에 왕자가 성장할 때부터 또래 친구라곤 없이 자란다. 근본적으로 친구가 생길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그저 단순한 친구를 원하는 게 아니다.
왕으로서의 내가 아닌 진짜 나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갖고 싶다. 내가 사실 조선 사람이 아니라 어디서 왔는지 털어놓고, 전혀 다른 세상인 21세기 대한민국 이야기를 나누고, 그걸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친구를 갖고 싶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여기는 15세기 조선이다. 어떻게 21세기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설마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있다 한들 지구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찾아가서 만난단 말인가.
또 한 잔을 들이켜자 눈앞에 있는 여러 사물들이 비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취기가 오르고 있음을 깨닫자 그대로 뒤로 누웠다. 눕는 모습이 방문 밖으로 비쳤는지, 내관이 급히 들어와 내 옷을 갈아입혔다.
술은 충분히 마셨으므로 더 이상 버티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 누웠다. 술기운 탓인지 온갖 잡념이 머리를 스쳤다. 그 와중에 내 몸 끝부분 하나가 딱딱해지자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음…국상 중에 여자를 품으면 대간들이 무슨 난리를 치려나.
하려면 여자는 있다. 지금 나한테는 중전도 있고, 몇 명인지 지금 생각은 안 나는데 후궁도 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다들 별로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실망스러웠지만, 여러 번 보다 보니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익숙해지는 것 이상 무서운 게 없는 것 같다.
후궁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들과의 잠자리를 상상하곤 했다. 연산군은 이 후궁들과 어떤 식으로 밤을 보냈을까? 체위는 어떻게 했을까? 여기를, 저기를 만지면 반응은 어떨까? 어떤 소리를 낼까?
다만 중전과 동침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으면서, 그걸 내 아이라고 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물론 그 아이를 임신시킨 정자는 지금 내 몸에서 나간 게 맞는데 이 몸의 그때 주인은 내가 아니란 말이지.
마침 국상 중이라서 내가 중궁전을 찾지 않아도 중전이 별 불만을 갖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국상도 끝난다. 그때가 되면 슬슬 중궁전과 후궁들 처소를 방문해도 되리라. 아방궁은 아니라도 일단 내 하렘은 하렘이니까.
“나를 나인 줄 모르는 여자들로 채워진 하렘이라….”
쓴웃음이 났다. 중전이건, 후궁들이건 몸을 나눌 수는 있을 거고 아마 마음도 나눌 수 있을 거다. 조선의 왕과 그 배우자들로서 말이다.
하지만 나를 본래의 나로서, 이재석 본인으로서 이해해주고 함께해줄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은 있을 수가 없다. 임금 자리에서 하는 일도 힘들어 죽겠는데, 기댈 데도 없는 셈이다.
처량한 생각만 하고 있다가 갑자기 웃음이 났다. 젠장, 불평하면 뭐 나아질 게 있나?
안 되는 걸 빌어 봐야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왕 왕이 된 이 세상에서 뭘 하고 싶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짓도.
일단 하지 말아야 할 짓.
연산군이 저지른 패악질은 일단 전부 안 한다. 지나친 사치와 이를 위한 높은 세금 징수, 신하들에 대한 과도한 억압, 성균관을 놀이터로 만들거나 백성들이 사는 집과 땅을 빼앗아 사냥터로 만드는 짓 같은 행동은 당연히 안 할 거고, 언로도 막지 않겠다.
물론 폐비 윤씨 건으로 할머니(인수대비)나 계모(정현왕후)에게 가서 패륜아처럼 날뛰지도 않을 거다. 굳이 신하들 세력을 꺾으려면 다른 수단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거짓 분노를 통해 사람을 죽이고, 패륜을 저지를 필요가 있나?
그리고 하고 싶은 일.
일단 한글을 정리하고 싶다. 먼저 상놈들이 쓰는 말이라는 뜻인 ‘언문(諺文)’이라는 이름부터 바꿔야겠다. ‘한문(韓文)’은 ‘한문(漢文)’이랑 헷갈리니 ‘국문(國文)’이라고 하면 어떨까? 반대하는 신하들에게는 감히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글을 폄하할 작정이냐고 몰아세워야겠다.
난 국어학을 제대로 공부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직접 문법을 체계적으로 정비한다거나 사전을 만든다거나 할 수는 없겠지. 적어도 21세기의 정비된 한글 체계를 이식할 수는 있을 거다. 복잡하게 가르치기 곤란하면, ‘내가 쓰는 대로 써라!’ 해 버리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토지와 인구를 상세히 조사해야겠다. 백성들은 당연히 싫어하겠지만, 제대로 계획을 짜서 나라 일을 하려면 수입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하지 않겠나?
조선에서는 원래 토지와 인구를 철저하게 파악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철저한 세원 파악은 엄중한 과세로 이어지기 때문이겠지만, 나로서는 그게 도리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50명이 100만원씩 세금을 내는 것보다 100명이 50만원씩 내는 게 당연히 옳지 않은가. 아 물론 반대하는 이들은 100명이 100만원씩 내게 될 거라고 생각하겠다만.
군적도 마찬가지다. 내가 알기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은 30년 동안 군적을 개정하지 않았다. 덕택에 전쟁이 일어나자 30년 전에 군적에 오른 50대 이상 노인들이 군인으로 동원되고 20대, 30대 청년들은 군량 운반을 했다. 이게 말이 되나.
재정확보 다음은 군대 강화다. 정확한 군적에 따라 공평하게 군역을 부과하고, 동원된 군사들에게는 철저한 훈련을 시켜서 강군을 만든다. 내가 새 훈련 프로그램까지 만들 수는 없지만 그 정도는 조선 장수들에게 시켜도 되겠지.
신무기도 개발하자. 뭐 탱크나 기관총 같은 물건까지 만들 수는 없겠지만, 내 기억을 잘 되살려 보면 지금 조선이 보유한 기술 수준으로 만들 수 있는 무기들도 분명히 있을 거다. 내가 말로 설명하면 기술자들이 만들 수 있는 무기가 말이다.
충분한 규모에 잘 훈련되고 신장비를 갖춘 군대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엄청나게 많겠지. 남쪽이건, 북쪽이건 가면서 정말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다.
아, 그러자면 사림을 일단 한번 때려잡긴 해야겠구나. 도리가 어쩌니 하늘이 어쩌니 하면서 세금도 못 걷게 하고 군대도 못 키우게 하고 전쟁은 더더욱 못 하게 할 테니까.
사림들 같은 도덕주의자들도 세상에 필요하긴 할 거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이어야지. 무조건 자기 생각만 옳고 남들은 그에 따르라고만 하면 극혐이다.
슬슬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오늘은 잠이나 실컷 자자. 내일 아침 대왕대비전 문안은 내관 아저씨보고 대신 좀 가달라고 하고 아침까지 그냥 자는 거야. 내일은 조회도 없고 경연도 안 하기로 했으니까, 어전회의 시작할 때까지 푹 잘 수 있겠지.
조용히 눈을 감자 차츰 의식이 흐려졌다. 오늘은 술 덕분에 편히 잠드나 싶다. 아아, 이러다 술 마시고 자는 버릇 들면 안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