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0
1부 0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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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아직도 턱이 아프시옵니까?”
“아, 아닐세. 잠시 그저 딴생각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틀 전 이를 뽑은 자리가 아직도 쑤셨다. 이틀이면 통증이 다 사라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일 텐데, 기분 탓일까?
어쨌든 아픔 때문에 대화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턱을 꽉 누르고 있으려니 이 뽑을 때 일이 또 생각났다.
“뭐, 양귀비 달인 물이라고…?”
기겁을 할 일이었다. 혹시라도 아편 중독에 걸릴까봐 이를 악물고 양귀비 처방은 받지 않았다. 어의들이 바치는 약을 일체 먹지 않은 이유 중 하나도 혹시 그 안에 양귀비가 들어 있을까봐, 그게 두려워서였다.
“네. 이게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약인데, 통증을 가라앉히려면 이거 이상 가는 약이 없어요.”
상희의 얼굴이 왠지 우울해 보였다.
“보통 상처를 치료하는 정도라면 절대 이걸 드리진 않았을 거예요. 이를 빼는 게 워낙 아픈 시술이라서…이거라도 드셔야 해요. 완전히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는 방법도 있는데 저는 권하고 싶지 않아요. 술을 마시면 고통은 없앨 수 있는데, 대신 출혈이 심해지거든요.”
알콜은 확실히 출혈을 더 심하게 한다. 서양에서도 종종 술을 마취약 대용으로 썼지만 그야 적당한 마취약이 없으니 그렇게 한 거지, 있기만 하면 아편, 대마, 뭐든 사용했다. 현대에서는 둘 다 마약이지만, 19세기까지는 동서양 어디서든 유용한 마취제였다.
“도련님, 나중에 아무리 아프셔도 양귀비는 절대 함부로 쓰시면 안돼요. 아셨죠? 정 아픔을 참기 힘드시면 저한테 오세요. 습관적으로 찾는 버릇이 생기지 않도록, 제가 적절한 양을 처방해 드릴게요.”
“알겠다. 그런데…왜…양귀비를 쓰겠다고…이야기하지…않았…느냐? 늘 웃으면서 탕약 이야기를 하기에…난 별 거 아닌 줄…”
약기운이 돌면서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기 시작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련님께…이런 위험한 약을 드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절대 이를 뽑지 않으실까봐서요. 댁에 두고 계신 의원들 약도 안 드시는 분이, 저 같은 연소한 의원이 처방한 수상쩍은 약을 드실 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일부러 별 것 아닌 약처럼 가볍게 굴었어요. 죄송해요.”
“아, 아니다…괜찮다. 이 정도를 뭐….”
상희는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마취약으로 쓴 양귀비 때문에 내가 아편중독을 일으킬까 봐 걱정하고 있기까지 했다. 헌데 약에 취해 몽롱해진 머리 한구석에서 뭔가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귀비는 동서양 모두 공히 통증을 낫게 하는 약으로 썼다. 당연히 한약재에도 들어가고, 동의보감에도 그 용법과 효능이 기재되어 있다. 아편이 마약으로 간주되는 21세기에도 양귀비를 몰래 재배해서 민간요법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상희가 진짜 이 시대의 보편적인 의원이라면, 양귀비를 마취약으로 쓰는데 전혀 거리껴할 리가 없다. 선뜻 발치를 하자는 거나 양귀비를 ‘위험한 약’으로 지칭하며 사용하기 꺼려하는 모습, 둘 다 절대 일반적인 이 시대 의원이 아니다. 이 아이, 정말 정체가…뭐지?
“이제 여기 의자에 앉아서, 머리받이에 기대세요. 입 크게 벌리시고요.”
몽롱한 상태에서 상희가 이끄는 대로 팔걸이 달린 의자에 앉았다. 시키는 대로 입을 벌리자 상희가 조심스럽게 내 입에 솜으로 싼 나무토막을 물렸다.
“자, 이제 뽑을게요. 아프지는 않을 거예요.”
“그 아이 말대로 뽑을 때는 아프지 않았네. 헌데 뽑고 나서 그 다음날 아침부터 턱에 강한 동통이 오더군. 덕분에 어제는 밥을 거의 먹지 못했네. 내가 이를 뺀 줄 모르는 주변 사람들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다행히 상희는 크게 어렵지 않게 내 이를 뽑았다. 썩은 이가 아랫니 중에서도 앞어금니여서 뽑기 쉬운 위치기도 했고, 상희의 팔 힘도 내 생각보다는 셌다. 역시 체구가 비슷해도 남자라서 그때 그 여자 치과의사보다는 힘이 센 걸까, 아니면 요령이 좋은 걸까.
“옆에서 보니 이를 제법 잘 뽑더군요. 저도 혹시 나중에 이에 벌레가 생기면 그 아이에게 뽑아 달라고 부탁해야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참, 내가 시킨 새 치아가 준비가 되었다고 했는가?”
“예, 여기 가지고 왔습니다.”
이를 빼면 반드시 그 자리에 의치를 만들어 넣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빼낸 이 양쪽에 있던 이들이 이가 빠진 자리로 기울어지면서 치열이 내려앉는다. 놀라웠던 건 이 문제에 대한 상희의 마음씀씀이였다.
“이를 빼면 그 자리에 새로 이를 만들어 넣어야 치열이 무너지지 않는데…죄송해요. 제가 그런 쪽 재주는 없어서요.”
“괘, 괜찮다…그건 내가 따로 준비할 테니까.”
상희는 이 문제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말 평범한 의원이 아닌데…혹시, 그저 임상 경험이 많을 뿐일까? 이를 많이 빼 보았다면, 그리고 그 환자를 꾸준히 살폈다면 알 수 있는 일이기는 하다.
나는 상희에게 가기 전에 이미 정호찬을 시켜 솜씨 좋은 상아 장인 한 사람을 물색해 두게 했었다. 그리고 빼낸 이를 가지고 가서 뿌리는 말고, 잇몸 밖으로 드러나는 윗부분만 똑같이 깎아서 만들게 했다. 완성품을 받아보니 진짜 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헌데 이는 만들었다 하더라도, 이제 이걸 어떻게 입안에 고정시킬 생각이시옵니까?”
“그래서 여기 구멍을 뚫으라 했네.”
이건 고대 이집트, 페니키아 쪽에서 의치를 고정시킬 때 사용하던 방법이다. 구멍을 뚫은 의치에 금줄을 꿰고, 이 줄을 다른 이에 묶어서 고정시킨다. 일종의 브리지인 셈이다. 물론 이것도 제대로 하려면 이런 작업에 숙련된 치과의사가 필요하다.
궁에서 들고 나온 유리거울을 보면서 나 스스로 묶어 보려고 하니 쉽지가 않았다. 잇몸도 아직 부어오른 채라 건드리면 아팠다. 그래도 한참 애를 쓴 끝에, 겨우 이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게는 할 수 있었다. 헌데 혀로 살짝 밀어 보니 흔들거렸다.
“이거 생각만큼 잘 묶어지진 않는군. 애초에 이 이를 가지고 밥을 먹을 수 없으리라곤 생각했지만, 이래서야 다른 이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것도 어렵겠네.”
고정이라도 단단히 되면 가끔 풀어서 닦아주기만 해도 되겠지만, 이렇게 흔들려서야 매끼 밥을 먹을 때마다 뺐다가 다시 묶어야 한다. 안 그러면 금줄이 풀어져서 음식이랑 같이 뱃속으로 들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차라리 궁 안으로 장인을 불러서 본을 뜨게 하고, 은으로 의치와 양 옆의 이까지 덮는 크라운을 만들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역시 치장용 의치라 식사를 할 때는 빼야겠지만, 현대식으로 접착하는 대신 살짝 얹기만 해도 되게 하면 매번 끙끙대며 묶을 필요는 없어진다.
“이미 뽑은 뒤니까, 이가 빠진 사실이 드러나서 안 될 것도 없지. 그냥 앓던 이가 절로 빠졌다고 하고, 드러내놓고 보철할 의치를 만드는 게 낫겠네. 그동안 수고해 줘서 고맙네.”
“알겠사옵니다. 헌데 빠진 이를 채워 넣는 재간까지 알고 계시다니, 전하의 신명하신 재간은 역시 우둔한 신으로서는 따라갈 수가 없나이다.”
“과인 역시 옛 선인들에게 배웠을 뿐이네.”
여기는 적당한 겸양의 말로 넘길 수밖에 없다. 그 선인이 어느 책에 나오는 누구냐는 질문이라도 나오면 곤란하니 어서 화제를 넘기자. 마침 통증도 가셨고.
“조사 결과는 나왔는가? 충청, 전라 양 도에 배목인 같은 자들이 아직 얼마나 있는가.”
“그간 살핀 결과 몇 놈이 걸려들긴 하였사옵니다.”
내가 정색을 하자 정호찬도 곧바로 업무 모드로 전환했다. 서랍에 있던 서류가 책상 위로 올라왔다.
“도첩(승려들의 신분증)도 없는 주제에 사찰을 차려 놓고 백성들을 호도하여 재물을 사취하는 자들이 여섯 있었사옵고,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않은 비결(秘決)을 내세우거나 스스로를 미륵, 또는 진인(眞人)이라고 주장하며 무리를 모으는 자들 다섯을 찾았사옵니다.”
정호찬이 피식 웃었다.
“태반은 그저 우매한 백성들을 상대로 사술(詐術)을 부려 재물을 모으는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개중 몇은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닌 듯 했으나 대신 광증으로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위험하게 볼 자들은 거의 없어서, 그저 해당 고을 수령에게 단속하도록 하였사옵니다.”
“다행이로세.”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광신자, 미친놈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놈들과는 떨어질수록 좋다. 종말론을 믿는 자객 따위는 한 번만 겪어도 된다.
물론 의도적으로 권력을 잡고자 반역을 도모하는 이들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적어도 합리적으로 움직이기라도 한다. 배목인 일당처럼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워서 미쳐 날뛰지는 않는다.
어쨌든 지금 순행 예정지인 충청도와 전라도에 불온세력이 없다니 안심이다. 그럼 확실히 순행을 나가도 되겠구나. 안도하고 있는데 정 도사가 조금 엉뚱한 이야기를 꺼냈다.
“상희의 고향과 스승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혜민서 동료들에게도 남사당패에 있었던 이야기는 했지만 그 전의 삶에 관해서는 일체 말한 적이 없더군요. 도리 없이 예전에 그 아이가 있던 사당패를 찾아야 하는데, 순행을 위한 남도 지방 정세 점검을 우선하느라 아직….”
“그 일은 천천히 수행해도 좋네. 당장 급한 게 아니니까. 허나 갈수록 궁금해지긴 하는군.”
순행을 다녀온 뒤에는 상희를 붙잡고 한번 제대로 이야기를 해 보자. 그때쯤이면 정호찬도 뭔가 조사결과를 들고 올 테니까. 뭔가 실마리를 얻은 다음에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겠지.
“동짓달 초하루에 남쪽으로 순행을 나가겠다! 더 이상 논의할 필요 없도다!”
반론도 들을 만큼 들었고, 지적 받은 문제점들에 대한 보완사항도 챙길 만큼 챙겼다. 이쯤이면 의견 수렴 과정은 거칠 만큼 거쳤다고 생각한다.
“도성에서 보령과 전주를 거쳐 무안에 이르기까지, 경로는 일전에 묘당에 올려 논의한 그대로다. 도상에 위치한 각 고을에 즉시 파발을 띄워 대략적인 일정을 알리고, 어가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 이르라!”
가장 큰 ‘준비’는 역시 도로 보수겠지. 위풍당당한 임금의 행렬이 지나갈 만한 넓이로 만들려면 왕복 4차선 정도는 되어야 할 거다. 게다가 3천 명은 족히 될 수행인원들에게 제공할 숙소와 식사도 준비해야 한다. 경로에 있는 고을에서 지방관과 아전들이 머리 깨나 싸매겠다.
“전하, 부디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시옵소서. 추위가 닥쳐오고 있습니다. 이제 겨울인데 어이하여 백성들을 노역으로 고생시키려 하시옵니까? 그리고 동원되는 인마들이 지치고 병들 것도 감안하소서.”
“올 겨울은 그다지 춥지 않고, 어쩌면 기한제를 지내야 할지 모른다는 소리를 과인이 직접 관상감에서 들었소. 이제 10월 중순이니 정말 추워지기 전에 순행을 마칠 수 있소. 앞으로 한 달 시간이 있으면 도로 정비도 충분히 할 수 있소.”
비가 오기를 원해서 기우제를 지내듯, 기한제(祈寒祭)는 추위가 오기를 바랄 때 지내는 제사다. 너무 지독한 한파가 와도 문제지만, 겨울이 너무 따뜻하면 얼음이 얼지 않는다. 겨울 동안 얼음을 구하지 못하면 다음해 내내 얼음을 쓸 수 없게 되니 적당한 추위가 꼭 필요하다.
비록 슈퍼컴퓨터를 동원한 과학적인 기상 관측을 할 수는 없어도, 오랫동안 날씨를 살펴 온 경험 있는 인력은 있다. 노련한 관측관의 감은 때로는 웬만한 기계보다 정확할 때도 있다.
“어가를 수행할 인원은 이조판서가 제안했듯이 군사와 역부(役夫), 내관을 합쳐 3천 명 정도면 충분하리라 본다. 조정 중신들 중 누구를 골라 어가를 수행케 하고 누구를 도성에 남아있게 할지는 논의를 좀 더 한 후에 최종적으로 결정하겠다.”
신하들 중 일부는 아직도 역도들을 걱정했다. 신수근이 처음 예견했던 것처럼, 만약 무도한 일당이 쿠데타를 시도할 경우에는 어쩌겠냐는 건데, 그게 그리 답이 없는 일인가?
내 답은 정했다. 만약 도성에서 누군가가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리고 대궐을 점거하고 자기가 왕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라지. 명분도 없이 대충 거병한 반란군을 무서워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도성에 있는 군사들 중에서 최정예는 몽땅 순행에 데리고 갈 거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지시만 내리면 하삼도 전역에서 근왕병을 소집할 수도 있다. 그만하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반란을 일으키건, 진압하기에 충분한 전력이다.
“과인이 순행을 나가는 뜻을 그대들은 모를지 모르나 후대에는 반드시 깨닫게 되리라! 이제 무용한 문답은 그치고, 순행에 나설 준비를 하라!”
“예, 전하.”
신하들은 더 이상 반발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동의를 표했다. 그래, 이 정도면 그동안 충분히 반대했어, 그지? 앞으로도 그 정신을 유지하는 건 좋다. 다만 그 반대력은 언젠가 내가 정말 잘못된 일을 하거든 그때 발휘해주길 바란다. 지금 하는 일은 분명 필요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