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00
2부 378화
– 7 –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
“그러게 말입니다. 4년 만이군요.”
만찬 자리에는 뜻밖의 손님이 하나 동석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조선을 찾아왔던 스페인의 첫 사절, 올리베이라 백작이 환하게 웃으며 견서사 일행을 맞이했다. 이항복 역시 올리베이라 백작과는 안면이 있었기에 반가이 인사를 건넸다.
“지금은 아시아 담당 위원회 위원으로서 국왕 폐하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조선에서 배운 지식 덕분입니다.”
펠리페 2세는 담당한 지역에 따라서 휘하에 있는 관료들을 분류했다. 이탈리아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은 30명, 프랑스 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은 80명 하는 식이다. 다만 아시아 방면 담당 위원회는 아직 총원 4명에 불과하다고 했다.
“대 잉글랜드 전쟁, 네덜란드 반란 진압, 프랑스 내란 개입 등이 워낙 긴급한 과제다 보니 아시아 방면 정책은 아무래도 순위가 뒤로 밀립니다. 그래서 배정된 인원도 소수지요.”
그나마 스페인 정부의 아시아 방면 정책 중점은 필리핀 정복이다. 마닐라에서 배를 만들어 파는 외에는 모든 교역과 선교가 막혀 있는 조선은 긴급하게 관리할 대상은 아니었다.
“예수회가 조선으로 들어가는 길을 독점하고 있는 게 독이 되는 셈입니다. 귀국 국왕께서 우리에게도 문을 활짝 열어주신다면 관계를 증진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겠습니다만.”
“허허, 너무 갑자기 대문을 열어젖히면, 찬바람이 들어와 우리 백성들이 감기에 걸리겠기에 말입니다. 열기와 냉기를 조절하며 조야의 의견을 모아 천천히 열어나가야지요.”
이항복이 허허 웃으며 의뭉스럽게 상황을 넘겼다. 주상께서는 외교사절은 국적을 불문하고 받아들이겠지만, 예수회 이외의 단체나 개인은 조선에서 교역이나 선교를 진행하지 못한다는 원칙을 확고히 정해 놓고 계셨다. 조정 여론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인 요인은 조선 풍속을 인정하느냐의 여부였다. 지금 조선에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은 조선 복식을 입고 갓을 쓰고 다니면서 사대부들과 경전을 논하고 한시를 지을 정도다. 열심히 조선 사회에 녹아들고 있는 이들에 대한 평은 무척이나 좋다.
하지만 예수회를 적대시하는 다른 수도회들은 취하는 태도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견서사 일행도 알고 있었다. 필리핀을 이미 장악하고, 중국과 일본에도 일부 손을 내민 도미니코회와 프란체스코회는 현지 풍속을 무자비하게 대했다.
더구나 이들은 스페인, 포르투갈 등이 영토를 확장하는 첨병이기도 했다. 물론 조선은 이미 스페인에 져 정복당한 필리핀이나 신대륙 토인들처럼 미개한 나라가 아니고, 지금은 스페인과 우호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란의 소지는 없는 편이 좋다.
“조선은 최근 일본과 전쟁을 치렀다던데, 그 전말이 무척 궁금하군요.”
올리바레스 백작이 끼어들었다. 올리베이라 백작과 이름이 비슷한 탓에, 견서사 인원 중에 다수가 이들 두 사람을 부를 때 혼동을 일으켰다. 물론 스페인 쪽에서도 ‘조선 사절단의 단장, 부단장 3명이 모두 「이」씨인데 모두 같은 가문인가?’라고 물을 정도였으니 할 말은 없었지만.
“전쟁의 배경에 대해 한번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올리베이라 백작에게 간략하게나마 들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조선이 중국을 천주교로 개종시키는 발판이 되길 희망했다. 그러려면 일본이 조선과 강화를 맺고 평화를 유지해야 했다. 그래야 조선이 일본을 경계할 필요 없이 전력으로 중국을 공략할 수 있지 않겠는가. 거기에 연합군을 보탤 수 있다면 더 좋고 말이다.
“음, 전쟁의 원인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일본이 영토 욕심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 기간 내내 조정에 있었던 이항복 쪽이 이런 역할에는 나았다. 이항복은 간단히 설명을 끝내기로 했다. 복잡한 설명은 오해만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
“일본의 여러 영주 중에 오다라는 자가 패권을 잡았습니다. 오다는 일본 내에서는 자기에게 맞설 적이 없고, 빼앗을 땅도 없어졌음을 깨닫고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해 우리를 침략했던 것입니다. 명나라 정복을 구상하며, 그 전열에 우리 군대를 앞세울 생각도 했지요.”
“두 나라가 정말로 힘을 합친다면 중국을 정복해 개종시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렵습니다. 중국은 우리 조선보다 열 배는 큰 나라고 인구도 많습니다. 일본인들이 매우 사납고 거칠다 하나, 중국 변경을 약탈하는 정도라면 몰라도 천지의 질서를 아예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일본군대가 우리 땅을 지나가면서 어떤 악행을 벌일지, 어찌 알겠습니까?”
올리바레스도 그 문제는 인정했다. 자기 나라 군대라 하더라도 국내를 지나가면 민간인에게 피해를 준다. 조선인들이 일본군을 통과시키기 싫어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조선은 육로로 북쪽에서 중국을 공격하고, 일본은 해로로 남쪽에서 공격한다면 조선인들이 일본군이 벌이는 약탈을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까지 하면서 명나라를 공격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명나라 황제께서 조선에 베푼 은혜가 산과 같은데, 어찌 우리가 배은망덕하게 천자께 활을 겨누겠습니까?”
이덕형은 지난 백여 년 동안 명나라가 조선에 넘겨준 영토와 함께 이번 전쟁을 치러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전비 지원 액수를 소개했다. 황제가 내린 은이 얼마나 막대한 양이었는지 알려주자 올리바레스는 물론, 광해군과 이야기하다 마침 고개를 돌린 펠리페 2세도 놀랐다.
“황제의 말 한마디로 그만한 금액이 바로 지원된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희가 알기로 명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합니다. 그 국토는 인도 전체보다 더 넓으며, 인구는 유럽 전체와 맞먹을 겁니다. 그런 나라를 어떻게 공격할 엄두를 내겠습니까?”
중국이 얼마나 큰 나라인가에 대해서는 지난번 사절단도 누누이 이야기한 바 있었다. 이번 사절단은 전쟁비용 지출이라는 현실적인 근거를 추가로 제시했을 뿐이다.
“물론 로마가 그랬듯이 어떤 강대국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약해지고 무너질 수 있지요. 허나 아직은 명나라가 무너질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우리가 처한 위치에 맞게 행동하는 게 현명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요.”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특별한 국제관계에 대해서도 이미 지난번 방문에서 다 설명했다. 굳이 다시 입 밖에 꺼낼 필요는 없었다.
“알겠소. 우리도 지구 반대편의 황제와 친하게 지내야겠군.”
펠리페 2세가 논의를 마무리했다. 화제는 항해 중에 겪은 이런저런 사건들로 바뀌었다.
– 8 –
“광해군께서는 서반아 국왕과 어떤 이야기를 주로 하셨습니까?”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이항복이 질문을 했다. 광해군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성서 이야기를 좀 한 뒤에…자기가 왕비를 4명이나 먼저 떠나보낸 이야기를 하면서, 언제 헤어질지 알 수 없으니 함께 하는 동안은 아내에게 좋은 남편이 되어주라는 조언을 하였소.”
광해군은 올해 18세, 66세인 펠리페 2세에게는 손자뻘이다. 24년 전에 죽은 펠리페의 장남 돈 카를로스가 살아있었다면 48세였을 것이니, 광해군만 한 손자를 얻고도 남았을 것이다.
“군부인께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 뭐라고 하시던가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조용히 식사만 했을 뿐이오.”
유럽식 식사 예법도 배를 타고 오면서 익혔다. 다행히 다들 실수는 없었다.
“군부인께서 서양 예법을 배우셨다고는 하나, 남들 앞에 나서는 건 아직 서투르실 테지요. 조심하시는 게 낫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이덕형이 다시 화제를 돌렸다.
“다행히 서반아 국왕이 우리 무관들에게 플랑드르 전선 종군을 허용했습니다. 로마 법왕을 예방한 뒤에 인원을 셋으로 나눠서 두 무리는 각각 플랑드르와 베네치아 방면으로 움직이고, 나머지 하나는 로마에 남으면 될 듯합니다.”
플랑드르로 가는 조는 관전무관 역할이 주가 되겠지만, 잉글랜드나 네덜란드와 접촉해 보고 조선으로 데려갈 만한 사람을 물색하는 일도 맡는다. 경험 많은 유능한 군인과 항해사를 찾아 데려가는 게 목표다.
베네치아를 거쳐 보헤미아로 가는 인원들은 지난번과 임무가 같다. 가능한 많은 책을 모아 조선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하고, 데려갈 만한 기술자를 고용한다. 물론 로마 황제를 자처하는 합스부르크 군주를 예방하는 일도 있다.
“광해군께서는 본래 예정대로 군부인과 함께 로마에 머무르십시오. 긴 여행은 무리실 테고, 제사 문제로 법왕청과 원활한 교섭을 하려면 광해군께서 로마에 계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견서사가 수행해야 할 진짜 중요한 임무는 유럽에서 지식과 기술을 구하는 일이다. 제사를 지내도 좋다고 교회에서 승인하건 말건, 상감에게는 크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하필 종친인 광해군을 정사로 임명한 데는 이 진짜 목적을 가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다른 이들이 유럽을 돌면서 견문을 쌓고 책과 사람을 모으는 동안, 광해군 부처는 로마에서 사교를 즐기며 교황청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야 했다. 그것도 나름 쉽지 않은 일이다.
“역시 중국을 무력으로 개종시키기는 무리인가.”
“어려워 보입니다.”
반가운 손님과 모처럼 만찬을 즐긴 대가는 야근이었다. 펠리페 2세는 산더미 같은 서류를 앞에 쌓아 둔 채로 서재에서 올리바레스와 올리베이라 두 백작을 접견했다.
“중국 황제가 말 한마디로 병사 백만 명을 전선에 투입할 수가 있고, 그들을 먹이고 입히며 무장시킬 수도 있다면 필리핀에 주둔한 우리 군사력 정도로는 턱도 없습니다. 데 베라 총독이 올린 계획안은 역시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망상에 불과했습니다.”
펠리페 2세는 중국을 정복할 생각이 없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영토를 지키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땅을 넓힌단 말인가? 더구나 중국은 스페인에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았다. 또 중국과의 무역은 역시 그의 영토인 포르투갈에는 큰 이득이었다.
그가 중국에 바라는 건 신앙의 자유를 얻어내는 것뿐이었다. 일본과 조선에서의 선교가 꽤 성과를 올리고 있다는 소식에 두 나라 군대를 중국 개종에 동원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잠깐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어려울 듯하다.
“조선은 일본에 보복원정을 감행할 계획이라고.”
“그렇습니다.”
올리베이라 백작이 부연설명을 했다.
“조선과 일본은 천여 년 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마치 잉글랜드와 프랑스처럼, 서로 전쟁과 약탈을 반복해 온 사이입니다. 이번에 조선이 크게 한 방 얻어맞았으니, 속 시원하게 보복전을 벌이지 않으면 국왕이 조야에서 큰 비난을 받을 겁니다.”
조선과 일본이 왜 사이가 나쁜지,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들은 펠리페 2세는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개입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어쩔 수 없군. 조선이라도 먼저 확실하게 개종하도록 노력해야지. 조선 사절단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융숭하게 대접하도록. 그리고 올리바레스 백작, 그대는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사절단장인 조선 대공을 잘 설득하여 교회에 귀의하도록 유도해 보게. 전망이 보이더군.”
잠깐 이야기를 나눠 보니, 조선 대공은 이교도치고는 성서 내용과 가톨릭 교리를 잘 알고 있었다. 조선에서부터 선교사에게 배웠다는데, 그 수준이 평범한 일반 신도보다 훨씬 높았다.
본인에게 믿고자 하는 마음이 아예 없다면 그만한 경지에 오를 수가 없다고 펠리페 2세는 확신했다. 광해 대공을 개종시킬 수만 있다면, 분명 조선 왕실로 신앙을 침투시키는 돌파구가 되어줄 터였다.
– 9 –
『“떠나십니까? 정녕 떠나시는 것입니까?”
“아버지께 아들로 인정받지도 못했는데, 어찌 내가 이곳 카스티야에 더 머무를 수 있겠소? 할 만큼 했음에도 인정받지 못했으니 나는 이제 여기 머무르고 싶지 않소.”
희동은 그동안 온갖 고난을 겪었다. 잉글랜드 해적선을 쫓다가 플로리다에서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밀림을 누비며 죽을 고생을 하기도 했고, 열병에 걸려 하루 동안 몇 번이나 눈앞에서 천당과 지옥이 나타나는 경험도 했다. 인디오들과도 몇 차례나 목숨을 걸고 싸웠다.
동료들도 있는 힘껏 희동을 도왔다. 덕분에 희동은 대위가 되었고, 친우인 산도발은 소위가 되었으며 하인 취급을 받던 다른 세 사람도 모두 부사관이 되었다.
이제 희동은 스페인 국왕을 섬기는 장교이면서 기사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부친에게 아들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라 여기고 본가로 찾아왔건만, 부친 비얄바 후작은 여전히 희동을 자기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차갑게 일갈했을 뿐이었다.
“후작께서는 이리 말씀하셨소. ‘돈 디에고, 국왕 폐하를 위해서 보인 충성에 탄복하는 바요. 그만하면 이곳 카스티야에서 충분히 일가를 세울 수 있을 테니, 내 가명(家名)을 탐내려는 그 헛된 욕심은 그만 버리고 행복하게 사시오.’라고 말이오.”
부친의 냉대를 상기한 희동의 얼굴은 무섭게 뒤틀렸다. 그가 머무는 숙소로 남몰래 찾아온 비올레타가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뒷걸음질을 칠 정도였다.
“잘 있으시오. 비얄바 후작가에서 나를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여. 그대를 만났기에 내가 이곳을 사람 사는 곳으로 여길 수 있었소.”
희동은 굳어 있는 비올레타를 뒤로하고 등자에 왼발을 걸쳤다. 안장에 몸을 들어 올리고 말 옆구리를 박차로 걷어차려는 참인데 갑자기 비올레타가 앞을 막아섰다.
“가시려거든…저도 데려가 주세요.”
뜬금없는 이복누이의 말에 놀란 희동이 말고삐를 당겼다. 희동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비올레타가 입을 열었다.
“디에고! 당신과 처음 대면했던 날, ‘차라리 오라비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던 제 말을 기억하시나요? 그 이후 한시도 그 마음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들어오는 혼담을 갖은 핑계로 거절하면서 오직 그대를 다시 보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났습니다.”
희동은 미처 대꾸하지 못했다. 비올레타는 상기된 얼굴로 그동안 마음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대가 아버지께 아들로 인정받았다면, 나는 그대와 맺어지지 않아도 좋았을 것입니다. 늘 가까이에 있으면서 그대를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대는 떠납니다. 조선인지, 신대륙으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나는 그대를 다시 만날 수 없겠지요.”
“그럴…거요.”
“나는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는 이제 살 수 없어요. 제발 함께 데려가 주세요. 디에고, 혹시 그대는 우리가 일가를 이룰 수 있는 전망이 완전히 없어진 지금도 계속 나를 당신의 누이라고 생각하나요…?”』
“음, 괜찮군요. 돈 균이 이야기를 제법 흥미 있게 잘 뽑았습니다.”
미구엘 세르반테스라 하는 외팔이 문사가 쓸 수 있는 오른팔 ? 왼팔은 쓸 수 없을 뿐, 몸에 붙어 있기는 했다 ? 로 원고 뭉치를 천천히 넘기다가 마지막 장에서 자기가 흥미 있게 읽은 장면이라며 한 면을 펼쳐 보여주었다.
“그런데 조선어판에서는 비올레타와는 여기에서 이별하고 산도발과 이어진다고요? 산도발은 실은 남장으로 정체를 감춘 여자였고요?”
“그렇소.”
이덕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은 이항복은 연신 두 눈을 사방으로 돌리며 주점 안팎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드리드의 번화가에 자리 잡은 주점은 제법 혼잡했다. 카디스에서와 달리 스페인인이 아닌 다른 인종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동양인인 두 사람은 확연하게 눈에 띄었다. 옆 탁자에는 만약을 대비해 이들이 고용한 스페인인 호위 2명이 앉아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낮에 왔으니 망정이지, 밤에 왔으면 왈패에게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르겠군.”
안심하는지 아쉬워하는지 알 수 없는 이항복은 제쳐두고, 이덕형은 글 이야기를 계속했다.
“조선에서 이복남매가 배필이 되는 글 따위를 썼다간 천륜을 저버린 죄로 처형장에 끌려가 사지가 갈기갈기 찢기고 말 거요. 서반아에서는 그런 글을 써서 팔아도 괜찮은 거요?”
세르반테스가 사악하게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오, 물론입니다. 세상에는 도덕을 거스르고 금기를 범하는 글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그런 책을 쓰는 이들은 대개 가명으로 책을 내기 때문에 처벌받을 가능성도 별로 없습니다. 돈 균 같은 경우에는 본명을 써도 이게 누구인지 아무도 모를 겁니다.”
하긴 조선에서도 잡기는 제대로 된 대우를 못 받는다. 허균만 해도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제가 몇 부분 더 손을 보고, 여러분께서 로마에 가 계시는 동안 인쇄소를 섭외해서 찍어낸 다음 팔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익금은 돌아오시는 대로 정산해 드리지요.”
“고맙소이다. 잘 부탁하오.”
이덕형이 세르반테스와 악수를 나눴다. 과연 이런 글을 정말 돈 내고 보는 사람이 있으려나 싶었지만, 이제는 일이 되어가는 결과를 기다릴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