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02
2부 3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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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서사 일행은 교황령의 주요 항구인 치비타베키아에서 무사히 하선했다. 다행히도 도중에 해적은 만나지 않았고, 올리바레스 백작은 로마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팔레르모를 꼭 방문해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호위선에 올라 남쪽으로 떠났다.
코르나로 추기경이 미리 수배해둔 덕에 치비타베키아에는 마차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살아있는 호랑이 한 마리를 비롯한 짐은 거룻배에 실어서 로마로 보내기로 하고, 일행은 마차에 올라 로마를 향했다.
“여기가 로마인가! 우르브스 아에테르나(Urbs Aeterna, 영원의 도시), 카푸트 문디(Caput Mundi, 세계의 수도), 드디어 내 눈으로 보는군.”
마차가 8월의 강한 햇볕을 맞으며 성문을 들어서자 이항복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황진도, 이억기도 마찬가지였다. 뒤 마차에 탄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유씨도 비슷하리라. 이미 로마를 본 적이 있는 이덕형 한 사람만 담담한 태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항복이 주절거렸다.
“사전청 도제조 대감이 여기 오셨으면 좋아서 팔짝팔짝 뛰었겠는데?”
견서사가 출발할 때, 사전청 도제조 정철은 로마사에 푹 빠져 있었다. 자기도 내심 가보고 싶어 하는 티가 팍팍 났지만, 환갑이 다 되어 가는 나이다 보니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1차 견서사로 다녀온 정곤수가 돌아오자마자 앓아누웠던 것도 기억에 남았으리라.
“뭐, 도순찰사 대감도 만만찮지요.”
이항복의 장인 권율 역시 사위가 번역해준 갈리아 전기와 영웅열전을 애독하면서 로마사에 빠진 사람이다. 그도 로마에 가보고 싶어 했지만, 당장 동정(東征) 준비에 꼭 필요한 사람이다 보니 상감께서 놓아주시지 않았다.
“자네는 어땠나? 자네도 로마에 처음 왔을 때 흥분했는가?”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은데 놀랄 건 또 무어란 말이오. 크고 화려한 궁전이 많아 참으로 웅장하구나 하는 생각은 했소이다.”
마드리드나 카디스와는 또 분위기가 다른 로마 시가지를 보며 일행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갔다. 웅장하고 화려한 도시의 외양과 달리 인적이 많지 않다는 점도 얘깃거리였다.
“너무 더워서 여기도 다들 낮잠을 자나?”
이들은 고하를 가리지 않고 한낮에 낮잠 자는 풍속을 스페인에서 이미 보았다. 아마 기후가 비슷한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습속이 있는 모양이라고들 입을 모으자, 전에 와봤던 이덕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에스타라 하는 오침 시간이 맞긴 하오만, 다들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째 사람 자체가 없어 보이는데….”
의문을 풀지 못한 채 로마에서의 숙소가 될 코르나로 추기경의 저택에 도착했다. 코르나로 저택을 숙소로 사용하기로 한 건 조선에서 출발하면서부터 예정한 바였다.
“카디스에서 헤어진 지 한 달만이군요. 얼른 뵙고 싶었습니다.”
집주인인 코르나로 추기경이 마침 마중을 나와 있었다. 추기경은 교황청에 출근해 있다가 견서사 일행이 탄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맞이하러 나왔다고 했다.
“8월이라, 더위 때문에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사실 지금 로마 시내도 반쯤 비어있습니다. 모두 더위를 피해 피서를 떠났지요. 저도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여기 없었을 겁니다.”
로마의 8월은 꽤 덥다. 게다가 말라리아가 발생한다. 그래서 교황청을 포함한 로마 전체가 휴가를 떠난다. 물론 교황 이하 성직자들이 한꺼번에 어디로 몰려가는 건 아니고, 각자 로마 교외에 있는 별장이나 자기 본거지로 가는 것이다.
이들이 꼭 만나야 하는 인물인 교황 클레멘스 8세도 교황 전용 여름 별장 소재지인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로마에서 동남쪽으로 40리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이덕형이 지난번에 로마에 왔던 계절은 봄과 가을이었다. 그러니 이 휴가 풍습은 직접 보지 못한 탓으로 모를 수밖에 없었다.
“교황께는 제가 바로 사람을 보내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오실 것은 이미 아시고 계셨으니, 회답이 오는데 그리 긴 시간은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동안은 저의 집에서 여독을 풀며 로마를 둘러보시지요.”
“감사합니다.”
날도 덥고, 법왕과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도 모르니 함부로 로마를 떠날 수도 없다. 코르나로 추기경은 손님들을 응접실로 안내하면서, 아마 클레멘스 8세가 며칠 안으로 카스텔 간돌포로 부를 거라고 귀띔해 주었다.
“주변의 이목을 줄이면서 편안히 대화를 나누기에는 카스텔 란돌포가 바티칸 궁전보다 훨씬 낫지요. 정식 회견이야 9월에 바티칸이나 라테라노 궁전에서 열리겠지만, 성하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결심하시는 건 아마 카스텔 란돌포에서일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한동안 신세를 지겠습니다. 로마에 머물 동안 안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뭘요. 여러분을 손님으로 맞을 기회를 얻은 제가 영광입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살짝 웃으며 눈빛을 교환했다. 비록 며칠이긴 해도 로마에서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낼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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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만의 방문이다. 하지만 이덕형은 오르시니 주교로부터 들었던 교황청 미술관에 전시된 예술품에 대한 설명 내용을 다 기억했다. 뛰어난 기억력 덕분이다. 그래서 안내차 함께 나온 코르나로 추기경 대신 이덕형이 안내와 해설을 맡았다.
“이게 그 라오콘 군상이구먼.”
전시된 작품들 앞을 돌다가 커다란 뱀 두 마리가 아버지와 두 아들을 휘감아 죽이려 하는 조각상 앞에 선 이항복이 그 세부를 꼼꼼하게 들여다보았다. 1차 견서사 때 정곤수가 무겁고 흉측하기만 한 그런 돌덩이를 가져가서 뭣하겠냐고, 가치를 깎아내렸다던 바로 그 물건이다.
“형이 일리아드를 읽으셨던가?”
이덕형이 다가와 질문하자 이항복이 핀잔을 주었다.
“일리아드에는 라오콘과 목마 이야기가 안 나오네. 오디세이아와 아이네이스에 나오지.”
“그렇소? 사실 난 하나도 안 읽었소.”
이덕형은 3년 전 여기서 오르시니 주교로부터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들었을 뿐, 호메로스의 저작들을 직접 읽지는 않았다. 라틴어는 그럭저럭 익혔지만, 괴력난신이 난무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읽는 데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홍희동전은 괜찮고? 그건 말이 되는가?”
“괴력난신은 안 나오잖소.”
“아이고, 알겠네. 자네 취향은 존중하도록 하지.”
이야기를 멈춘 이항복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코르나로 추기경을 불렀다. 문성군부인 유씨와 함께 다니며 전시품들을 설명해주고 있던 추기경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부단장?”
“아,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이항복은 서슴없이 손을 뻗어 라오콘 군상을 가리켰다.
“우리 임금께서, 이 석상에 대해 들으시고 무척 선망하셨소. 혹시 양도해주실 수 없겠소?”
“아, 그건 좀 곤란합니다.”
뜻밖의 요구에 코르나로 추기경이 당황했다. 라오콘 군상은 교황청이 보유하고 있는 미술품 중 가장 귀중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닌가.
“그 조각은 90여 년 전에 율리우스 2세께서 수집하신 귀한 물건입니다. 조선 국왕께서 정녕 놀라운 안목을 가지셨음은 인정하나, 부탁을 들어드릴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첫 번째 사절단은 책만 산더미같이 가져가고 미술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어떻게 또 생각이 바뀌었는지 모를 일이다. 추기경이 대안을 제시했다.
“대신 복제품은 어떻겠습니까? 교황청 미술가들이 제작한 아주 훌륭한 복제품이 있습니다. 여기 원본처럼 부러진 팔을 이어붙이지도 않았으니 훨씬 모양새도 낫지요.”
라오콘 군상은 90여 년 전 발굴한 이래 유럽 전역에서 부와 명예, 권력의 상징으로 인기가 높다. 그래서 교황청에서는 수많은 복제품을 제작해서 각지의 유력자들에게 팔거나 선물했다.
그중에서 가장 특별한 복제품이라면 레오 10세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선물하려고 만든 물건이 있다. 복제였지만 너무도 잘 만들어지는 바람에, 선물하기 아까워진 레오 10세가 교황청 수장고에 집어넣어 버렸다. 프랑수아 1세에게는 다른 복제품을 만들어서 보냈다.
조선 사절단과의 회견이 잘 이루어진다면 그 복제본 정도는 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조선 국왕이 가톨릭으로 개종 선언이라도 한다면 개종 축하선물로 진품 라오콘 군상을 받아갈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감생심이다.
“자, 그럼 이만 휴게실로 가시지요. 시에스타 시간에 숨 좀 돌리시고, 판테온과 콜로세움을 보러 가면 될 것 같습니다.”
휴게실에 시종들이 시원한 포도주와 과일을 준비해놓았을 터였다. 군부인 유씨와 몸종에겐 별실을 마련해 놓았으니, 일행 모두가 편히 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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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에 자리 잡은 교황의 별장은 의외로 경비가 허술해 보였다. 은빛 갑주를 차려입고 큰 도끼날을 옆에 붙인 창을 든 병사들이 주변에 늘어서 있었지만, 그 수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교황 성하께서는 되도록 이번 만남을 간소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변 경비도 최소한으로 하셨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카스텔 간돌포에서 견서사 일행을 맞이한 이는 오르시니 주교였다. 광해군은 그와 면식이 없었지만, 이항복은 처음 교황 특사로 조선을 찾아왔던 그와 대면한 기억이 있었기에 반가이 인사를 나누었다.
“저도 귀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보다 라틴어가 훨씬 더 유창해지셨군요. 자, 안쪽으로 드시지요.”
광해군, 이항복, 이덕형 세 사람은 코르나로 추기경과 함께 오르시니 주교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교황과 교황이 특별히 불러모은 추기경 몇 사람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우리 임금께서 법왕께 보내는 친서를 전합니다. 상감께서는 법왕께서 모든 사람의 영혼을 구하고자 노력하심을 알고 계시며, 이에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고 하셨습니다. 이후로도 우리 왕국과 귀측 사이에 영원한 우호가 함께하기를 희망합니다.”
로마 법왕을 어느 정도의 격으로 대하는 편이 좋은가 하는 문제도 견서사 출발 전에 잠시 조정을 소란하게 했던 주제 중 하나였다. 로마 법왕은 군주인가, 아니면 승려인가? 승려라면 승단의 우두머리를 세속군주와 같은 격으로 칠 수 있는가?
논의 끝에 법왕은 외국의 군주, 즉 서반아 국왕과 같은 격으로 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법왕은 교회 기구 외에 그 자신의 영토를 보유하고 통치하니, 마땅히 군주라 할만했다. 한중 땅을 장악하고 10만 호에 달하는 백성을 거느렸던 오두미도 교주 장로와 같은 셈이다.
“세상 반대편에서 찾아온 그대들을 환영하오. 주님의 은총이 그대들 위에 있기를.”
이항복의 인사를 받은 법왕이 손을 내밀어 답했다. 그 옆에 앉은 추기경들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이덕형은 그중에서 기억에 남은 얼굴 몇을 발견했고, 눈인사를 나누었다. 다만 법왕은 그가 모르는 얼굴이었다. 유감이다.
‘4년 전에 추기경일 때는 법왕 특사로 폴란드에 가 있었다고 했지….’
안면을 익혀둔 사람이었다면 일이 더 쉬워졌을 것을. 아쉬워해 봐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앉으시오. 이곳은 별장이니 편안히 담화를 나눕시다. 그대들도 로마가 시원해지는 계절을 기다리기보다 이편이 좋지 않겠소?”
법왕이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세 사람은 감사의 뜻을 표하며 자리에 앉았다.
“이미 들었겠지만, 제사 문제를 정식 공의회에 올린다면 절대 승인받지 못할 거요. 아무리 긍정적으로 검토하려고 해도 귀신을 모시는 행사, 우상을 섬기는 행위가 아니라고 인정할 수 없소.”
법왕은 토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차분한 표정으로 관전할 뿐, 직접 토론은 카에타니 추기경을 비롯한 측근들에게 맡겼다.
“제사는 신주(神主)라 하는 패를 중심으로 하는데, 이는 신(神)이 내리는 곳을 의미하오. 그 신은 당연히 그대들이 말하는 조상신, 토지신, 나라신 등이니, 우리 교회로서는 당연히 제사를 우상 숭배로 볼 수밖에 없소.”
조선인들은 상대방이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풀어놓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왜 제사를 허용할 수 없는지, 그 이유가 다 제시되고 나자 천천히 대응을 시작했다.
“걱정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 이미 여기 코르나로 추기경께서 여러분께 여러 번에 걸쳐 조선의 제사 관습에 대해 잘 말씀드렸다고 알고 있으니, 저희가 가진 풍습을 소개하느라 굳이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겠습니다.”
이항복은 필요 없는 대화는 과감하게 생략했다. 저들도 이미 들은 이야기를 또 듣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서로에게 필요한 건 추가정보가 아니라 상황을 해결할 대책이다.
“조선에서 조상을 공경한다는 건 중요한 사회적 관습이자 도리입니다. 그리고 귀신 문제를 살피자면, 죽은 이가 귀신으로서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죽으면 만사가 끝, 영혼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토지신, 국신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대들도 귀신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소?”
“모두가 귀신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문제가 될 게 없지요. 하지만 귀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고, 양쪽을 오가는 이도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일률적으로 강제할 수는 없지요.”
20여 년 전에 사망한 퇴계 이황은 귀신의 문제는 쉽게 논하기 어렵다고 했다가 그런 것은 없다고 했고, 나중에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사람의 귀신은 있을 수도 있다고 물러섰다. 8년 전에 사망한 율곡 이이 역시 귀신이 있다고 믿으면 있고, 없다고 믿으면 없다고 주장했었다.
“그리고 귀신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가톨릭의 천주 역시 없다고 믿지요. 그러니 그 논리로 제사를 없애라고 하면, 천주교도들이 신에게 바치는 예배 역시 금지하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여러분께서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무슨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카에타니 추기경이 이를 악물었다. 이항복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야 하나뿐인 유일신을 섬기니 다른 귀신, 신령이 모두 잡신, 악마로 보이겠지요. 하지만 그대들이 말하는 이교도, 우리 눈으로 보자면 가톨릭에서 천주라고 일컫는 신도 여러 신령 중 하나입니다. 특별히 다른 존재로 여길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요.”
방안은 조용했다. 이항복의 말을 듣고 인상을 살짝 찌푸리는 추기경이 몇 있었으나, 대놓고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코르나로를 통해 미리 전달받은 정보로 이런 반응은 예상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리라. 하지만 불이 너무 거세게 타오르기 전에 기세를 낮춰야 한다.
“성서에 십계명이 나오듯이, 조선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기본적인 계율입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지요? 제사를 가리켜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라고 일축하기보다, 효를 표현하는 행위로 간주하신다면 훨씬 일이 원활할 겁니다.”
이덕형이 나섰다. 이항복이 추기경들의 화를 돋워 놓았으니 그가 식힐 차례였다.
“본래 제사 풍속은 가가례(家家禮)라, 가문 풍속에 따라 방식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습니다. 천주교 교리에 부합하는 제사 방식을 새로이 만들어 보급하는 것도 괜찮다는 이야기지요. 혹 원하신다면 불교 승려들이 하는 방식을 참고하셔도 됩니다.”
절에서는 돈을 받고 대신 제사를 지내준다. 말 그대로 이교(異敎)인 불교의 방식을 교회가 따를 리는 없지만. 이덕형도 이건 그냥 참고사례를 제시한 것뿐이라고 말한 뒤에, 차분하게 조선 측의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저희 임금께서 이 문제로 천주교회에 바라시는 조건은 단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형식이야 어떻건 조상을 기리는 행사를 제날짜에 꼭 치를 것. 굳이 제물을 진설하고 신주 앞에서 향을 피우지 않아도 됩니다. 누가 보더라도 조상을 공경하는 행동이라고 보이기만 하면 됩니다.”
“두 번째는?”
“관리는 나라에서 치르는 제례에 꼭 참석하라는 겁니다. 관리는 제례에 참례함으로써 군주 앞에서 충성을 서약하는 것이고, 유럽인들이 천주의 이름을 걸고서 주군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행위와 다를 게 없습니다. 그게 싫다면 관직을 그만두면 되는 것이지요.”
“알겠소이다. 고려해 보겠소.”
이덕형은 당장 선택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교회 측에서도 지금 이 문제의 결론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조선인들이 처음 겪어보는 로마의 더위 이야기가 새 화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