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09
2부 38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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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는 눈발이 날렸지만, 방안에서는 난로가 따뜻하게 열기를 발했다. 긴 탁자를 가운데 놓고 마주 앉은 양측 대표단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오시는 길이 힘겹지는 않으셨소? 멀리서 오신 손님들께 너무 수고를 끼친 건 유감이지만, 우리가 그쪽이 머물던 스페인 총독부로 갈 수는 없어서 말이오.”
“귀측의 사정은 알고 있소이다. 나사우 공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려 있다면서요?”
“맞소이다. 하지만 액수는 나도 모르오. 내가 타 먹을 수 있는 돈도 아니니까 말이지요.”
“오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웃음보가 터졌다. 탁자 양편에 앉은 이들은 한쪽은 조선인이고 다른 한쪽은 네덜란드인으로 스페인인은 하나도 없지만, 이들이 주고받는 언어는 스페인어였다.
“어쩌겠소이까, 여기 앉은 사람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는 이것 하나뿐이니.”
“라틴어를 사용할 수도 없으니 말이지요.”
이번 회견에 나선 네덜란드 측 대표 마우리츠 판 나사우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25살의 청년 장군이지만, 스페인군을 연파한 명장이다.
더불어 독립전쟁의 영웅 오라녜 공 빌렘 1세의 실질적인 후계자이기도 하다. 부친의 작위인 오라녜 공의 지위는 이복형 필립스 빌럼이 계승했지만, 스페인에 체류하면서 친스페인파가 된 필립스 빌럼 따위는 동포들에게 부친의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우리가 비록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누기는 하나, 우리는 펠리페 2세의 명을 받드는 신하가 아님을 분명히 해두겠소이다. 우리는 조선인이고, 우리 임금을 받드는 사람들이오. 여기에 온 이유도 귀공들에게 항복 권고를 하러 온 게 아니고 다른 용무가 있어서요.”
사전교섭에서 이미 서로 확인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항복은 회견을 시작하기 전에 이쪽의 입장을 한 번 더 분명히 했다. 마우리츠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부친께서 펠리페 2세께 몇 차례나 충성을 서약했건만, 국왕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우리를 몰아세워 부득불 반기를 들 수밖에 없게 만들었소. 그런 국왕이 새삼스럽게 지금 와서 당신들 같은 아시아인을 시켜 항복 권고를 보내거나 나를 암살하려 들지는 않겠지. 됐소.”
펠리페 2세의 부친, 카를로스 1세는 본래 네덜란드 태생이다. 카를로스 1세는 ‘고향 사람들’인 네덜란드 출신 신하들을 중용했다. 종교 문제 때문에 분쟁이 좀 있기는 했지만, 네덜란드 주민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군주인 카를로스 1세에게 기본적으로 충성을 바쳤다.
그 아들인 펠리페 2세 역시 당연히 충성해야 할 상대였다. 하지만 스페인 태생으로 스페인 출신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한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를 사랑하지 않았다. 스페인 군대는 철권으로 네덜란드를 통치했고, 그 결과가 수십 년에 걸친 반란이었다.
“그쪽에서 하도 간곡하게 요청하기에 만나기는 했지만…솔직히 좀 당황스러운 부탁이었소. 조선으로 사람을 데려가고 싶다고 했소?”
네덜란드에서도 조선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스페인 왕의 신하로서 동방을 오간 경험이 있는 자들도 있고, 지난번 견서사가 왔을 때 조선 사절단을 접한 이들도 있었다. 이미 펠리페 2세가 조선에 보낸 조선공 5명부터가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그렇소이다. 조선공, 항해사, 농부, 상인, 시계공, 대장장이, 군인, 학자 등 모두 환영이오. 우리 조선에 없는 새로운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이항복이 대답하자 마우리츠가 눈썹을 찌푸렸다.
“인구는 국가의 근본이오. 더구나 기술을 갖춘 전문가라면 더더욱. 그런데 어찌 바다 건너 세상 반대편에 있는 그대들에게 우리 시민들을 보낸단 말이오? 게다가 가족까지 함께?”
“그대들이 스페인 국왕에게 반기를 들기는 했으나, 국왕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느라 반란에 동참하기를 거절하고 친국왕파로 남은 사람들도 상당수 있지 않소? 음, 작년에 귀공과 대결을 벌였던 귀하의 사촌 판 덴 베르그 공처럼 말이지요.”
마우리츠의 고모부인 판 덴 베르그(van den Bergh) 백작 빌렘 4세도 본래 반란군이었다. 하지만 1584년에 배반해서 스페인 편으로 돌아섰고, 이때 자신의 처남이자 마우리츠의 부친인 오라녜 공 빌렘을 붙잡아 감금하기까지 했다. 빌렘은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다.
백작은 불과 2년 뒤에 죽었으나 그의 아들 4명, 즉 마우리츠의 고종사촌 형제들은 여전히 스페인 편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둘째인 프레데릭 판 덴 베르그(Frederik van den Bergh)가 바로 작년 9월에 마우리츠가 함락시킨 쿠보르던 요새의 사령관이었다.
“이곳 정세를 제법 잘 아시는구려. 하지만 펠리페 2세에게 충성을 바치는 이들은 이미 저쪽 지역으로 대부분 넘어갔소. 전쟁에 관심이 없고 일신의 안녕을 원하는 이들 상당수는 해외로 떠나버렸소. 우리 내부에는 더 이상 충성파가 없소. 설사 가톨릭교도라 해도 말이오.”
가톨릭 신자라고 해서 모두 스페인 편에 서는 건 아니다. 반란군 쪽에 남은 가톨릭 신자도 많고, 지역에 따라서는 전체 인구 중 신교도 비중이 1할에 불과한 지역도 있었다. 신교도들이 목소리를 크게 낼 뿐이다.
이런 상황이 빚어진 건 네덜란드 반란이 순전히 종교 문제에서 비롯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장사에 종교는 그다지 의미가 없다. 억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자유를 억압한 스페인 당국에 대한 분노야말로 큰 원인이었고, 애초에 반란을 주도한 수뇌부 상당수도 가톨릭 신자였다.
“있어도 없다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겠지요.”
“아니, 정말로 없다니까요. 우린들 내부에 배신자를 남겨두고 싶겠소? 물론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소극적인 충성파가 좀 있을 수야 있겠지만, 그런 이들은 나오란다고 나오지도 않을 거요. 더구나 찾아서 조선 같은 곳에 보낸다고 하면 더더욱 안 나오겠지.”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조선에 갈 이주자 모집? 전투가 없어 한가한 겨울철만 아니었으면 귓등으로 들어넘겼을 이야기다. 물론 겨울은 겨울대로 곧 다가올 봄 전투를 준비하는 기간이지만, 휴식을 즐기면서도 협상에 나설 여유 정도는 있었다.
“난 도리어 이렇게 묻고 싶소. 왜 하필 우리 쪽에서 사람을 구하려는 거요? 펠리페 2세가 귀국에 호감을 품었음은 우리도 아오. 사람이 필요하면 그쪽에서 조달해도 될 게 아니오.”
펠리페 2세는 전제군주다. 그가 명령만 내린다면 제국 전역에서 필요한 만큼 인력을 소집할 수 있다. 그리고 국왕의 명령이니만큼 불평도 하지 않고 조선으로 갈 게 아닌가.
“거기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소이다. 첫째, 시간이 걸리오. 우리는 도움이 될 사람들과 함께 하루빨리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언제 국왕이 조치를 취해 주어 명령이 떨어지고 데려갈 사람이 모이기를 기다린단 말이오?”
펠리페 2세가 우유부단하고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거야 전 유럽이 알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스페인 쪽 인사가 한 명도 없다고는 하지만, 이항복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실을 입 밖에 냈다. 마치 자신은 순진한 외부인이라 말조심해야 하는 주제 따위 모른다는 투로.
“둘째는 그 어떤 분야에서건 네덜란드에서 구할 수 있는 인력이 스페인보다 훨씬 더 우수한 역량을 갖추었다는 것이고, 셋째는 다수의 우수한 인력을 데려간다고 하면 스페인에서 부담을 느끼겠다는 거요. 그래서 ‘반란군의 역량을 줄이기 위해’ 이쪽에서 인력을 얻겠다고 했지요.”
“더더욱 이해가 안 가는군. 스페인에서 우수한 인력을 빼내는 건 스페인에 피해를 주니까 안 되고,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건 괜찮다고? 더구나 그런 소리를 우리 면전에서 하다니 이건 대체 무슨 배짱인지 알 수가 없군!”
마우리츠의 옆에 앉아 있던 네덜란드 측 대표 한 사람이 분개했다. 마우리츠는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조용히 이항복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물론 그건 우리 진심이 아니올시다. 우리가 원하는 건 우수한 네덜란드 기술진을 조선으로 데려가는 것뿐이고, 그러자면 펠리페 2세와 그 신하들이 듣기 좋을 만한 핑계를 들려주어야 했을 뿐이지요.”
“당신들이 어떤 의도를 품었건, 우리에게도 필요한 인력을 빼가겠다는 목적은 변하지 않는 거잖소! 지금 당신들이 털어놓는 소리를 다 듣고서도 우리가 사람을 내주리라고 믿는 거요? 하! 이거 정말 기가 막힌 사람들일세? 조선식 대화법이 원래 이렇소?”
마우리츠의 참모들이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이항복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마우리츠 역시 인상을 찌푸릴 뿐 자기 부하들처럼 조선인들을 힐난하지는 않았다.
“당장 돌아가시오! 나 원, 이런 황당한 협상은…!”
“아니, 잠깐. 아무래도 하실 말씀이 남은 것 같은데.”
마우리츠가 손을 들더니 얼굴이 시뻘게져서 화를 내는 부하를 저지했다. 그리고 이항복의 얼굴로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대가 머저리가 아닌 이상, 우리를 자극할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태연하게 지금 한 것 같은 소리를 지껄일 리 없소. 분명 우리가 그 요청을 받아들이게 할 다른 제안이 있겠지. 한번 내놔보시오. 그게 진짜 목적 아니오?”
마우리츠는 지금 조선 사절단이 뭔가 엄청난 미끼를 아직 드러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에 따라 오늘 교섭을 타결할지, 결렬할지 결정할 수 있으리라.
“흠, 좋소이다. 이미 시간을 많이 썼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내지요. 우리에게 필요한 인력을 내준다면, 네덜란드 측에도 분명히 이득이 될 거요. 그 제안을 하러 왔소.”
“구체적으로 어떤 이득이지요? 인력 손실을 벌충할 만한 제안이 있소? 혹시 인삼이나 모피 몇 상자로 우리 시민들을 사들일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겠지요?”
모를 일이다. 동방에서 온 야만인들이 아닌가. 재물 약간이면 노예 사듯이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페인 조정에서 귀측에 은화 한 닢도 지불해서는 안 된다고 조건을 걸었소이다. 그런고로 돈을 내고 귀국 백성들을 데려갈 수는 없소.”
“그럼 뭐요?”
“장래요. 우리는 네덜란드의 장래를 대가로 지불하고 귀국으로부터 인력을 구하려는 거요. 당신들이 거절하지 못할 조건을 제안하면서 말이오.”
점점 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되었다. 네덜란드 대표단은 일단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침묵했다. 그러자 이항복이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대들은 스페인 국왕의 산하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세계의 바다를 누비며 자유롭게 교역할 생각이겠지요?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까지?”
“물론이오.”
인도를 교역거점으로 하는 포르투갈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현지 유통망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상당한 양의 향료가 기존 교역망으로 들어가 베네치아를 통해 유럽에 풀린다. 네덜란드인들은 원산지인 향료 제도 자체를 차지해버릴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그대들은 분명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거요. 그리고 장사할 상품을 가지고 동쪽으로 오겠지요. 그때 조선에 수백 명 단위의 네덜란드인 공동체가 존재하면서 조선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과연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이 계속 조선과의 교역을 독점할 수 있겠소?”
이항복은 찬란한 미래를 눈앞에 펼쳐 보였다. 조선과 손을 잡고 동아시아 일대의 교역로를 독점하는 네덜란드 상선단의 모습을 말이다. 물론 조선 상인들에게도 적절한 이윤을 분배해야 할 것이고, 정치적으로는 조선 국왕의 통제를 따라야 할 것이다.
“스페인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겠소? 그러니 귀측을 직접 만날 때까지는 입을 다물고 있을밖에.”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기는 했다. 조선에는 향료는 없다. 하지만 인삼과 모피가 있고, 차와 도자기와 황금이 있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역내의 기존 교역망을 석권할 기회가 있었다.
“다만 이거 한 가지는 확실히 해둬야겠소. 지금 우리 조선에서 원하는 건 조선을 네덜란드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거지, 우리 국토 일각에다 네덜란드를 위해서 마카오를 만들어주려는 게 아니오. 이번에 조선으로 이주하는 네덜란드인들은 조선인이 되어야 하오.”
“조선인이 되라고?”
“그렇소. ‘네덜란드 시민’이 아닌 ‘조선 국왕의 신하’가 되겠다고 충성을 서약하는 사람들만 데려가겠소. 그 외에는 말도, 관습도, 종교도 모두 유지할 수 있소. 조선 법률만 지킨다면.”
장차 네덜란드가 중요한 존재가 된다면 섬 하나쯤 빌려주지 못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고, 지금 당장은 데려다 써먹을 인력이 필요했다.
“내가 듣기로 귀하가 네덜란드 총독으로 취임한 이래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지요. 하지만 승리와 별개로 종교로 인한 갈등은 계속 고조될 거요. 그러다 보면 공화국령에 남은 가톨릭 신자들도 대부분 스페인령으로 옮겨갈 텐데, 그 인원이 조선으로 간다고 생각해도 되잖소.”
골똘히 생각에 잠긴 마우리츠를 향해 이항복이 설득을 계속했다.
“귀공도 칼뱅파지만, 칼뱅파가 독선적인 면이 있어 다른 종파와 어울리기 힘든 점은 인정할 거요. 거래로 얽히는 때는 종교가 상관없지만, 한 나라에서 어울려 살자면 가톨릭을 신봉하는 이들이 적을수록 나라를 안정시키기에 좋지 않겠소?
공화국과의 연을 끊고 싶지는 않으나 칼뱅파와 어울리기는 힘겹고, 스페인 치하로 복귀하고 싶지도 않은 이들이 조선으로 이주하면 서로가 좋은 결과를 얻을 거요. 우리 임금께 충성을 맹세한다 해서 당장 네덜란드를 적대하게 될 것도 아니고.”
“잠시 생각 좀 해봅시다.”
마우리츠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다른 네덜란드인들도 일어섰다. 이들이 옆방으로 물러가면서 방안에는 조선인들 외에는 옆에서 회견을 관전하던 사람 하나만 남게 되었다. 아까 네덜란드 측에서 소개하기를, 귀국하는 길에 네덜란드에 잠시 들른 잉글랜드인이라고 했다.
“당신도 들었겠지요? 잉글랜드인들에게도 조건은 같소. 혹시 조선으로 이주할 생각이 있는 동포가 있다면 이 소식을 전해 주시오. 다만 칼뱅파 신교도는 제외하고 말이오. 자기 신앙만 알고, 우상을 파괴한다면서 함부로 방화와 파괴를 일삼는 이들은 사절하고 싶소.”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우리 잉글랜드인들은 고향인 저 섬을 떠나기를 희망하지 않소이다. 혹시 떠나더라도 이미 사람이 가득한 동쪽 땅보다는 서쪽 신대륙을 이주지로 더 선호할 거요. 모험과 부를 찾아 개인적으로 조선 국왕께 고용되기를 원하는 사람이야 있을 수 있겠지요.”
월터 롤리라 하는 이 잉글랜드인은 이미 아메리카 북부 해안에다 정착지를 세웠다고 했다. 1차 견서사가 방문한 누에바 에스파냐보다는 한참 북쪽, 스페인인들의 영역 밖에다가 말이다.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곧 다시 찾아가서 계속 규모를 키울 거라고 했다.
“우리는 여왕 폐하의 신하로서 계속 남고자 하오. 조선 국왕을 섬기는 조건으로만 이주자를 모집한다면, 아마 가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요. 네덜란드에서도 그리 많은 희망자가 나서서 자원하리라 보이지는 않는구려.”
이항복과 롤리는 한참 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이항복이 손뼉을 쳤다.
“마침 잉글랜드인을 만났으니 잘 됐군. 책 좀 구해다 주시겠소?”
“책이요?”
“그렇소. 셰익스피어라는 극작가가 유명하다고 알고 있는데, 그 작가의 작품집을 좀 구해다 주시면 좋겠소. 값은 후하게 쳐 드리리다.”
롤리라는 잉글랜드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말씀이신가? 내가 알기로 그자는 극작가가 아니라 시인인데….”
“그렇소? 난 극작가라고 들었는데. 동명이인인 모양이구려.”
“흠, 한번 확인은 해보겠소. 혹시 내가 원정을 나간 사이에 극작가로 전업했는지도 모르니.”
봄에 돌아와서 책을 전해주겠다고 롤리가 약속하는 동안 밖에 나갔던 마우리츠 일행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논의한 결론을 알려주었다.
“그대들이 건넨 제안에 동의하기로 했소. 장차 조선에서 암스테르담까지 이어지는 교역망을 만들려면, 반대쪽 종점이 될 조선에 우리 네덜란드 시민들이 미리 정착해서 거점을 형성하는 것도 좋겠지.”
이주자들이 조선 국왕의 신하가 된다 해도 상관없다. 뿌리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그들 모두 네덜란드에 호의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할 테니까 말이다.
“이주할 인원은 각 분야에 능통한 전문 기술자와 학자, 군인 등 여러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 중에서 가톨릭 신자로서 조선으로 이주할 의사가 있는 사람 200명을 모집하겠소. 가족과 함께 타고 갈 배도 우리가 조달하겠소.”
“저희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배를 빌려도 됩니다만.”
“한때 펠리페 2세를 향해 칼을 든 전과가 있는 우리 시민들을 사자 아가리에 처넣으라는 말이오? 귀하를 의심하려는 건 아니지만, 만약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직접 수송하겠소. 그대는 펠리페 2세가 직접 서명한 안전 통행증만 받아오시오.”
네덜란드 측이 비친 의도는 명확했다. 이번 ‘거래’를 체결하는 김에 조선으로 가는 항로까지 확보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이항복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나 더 부탁드리지요. 저희는 네덜란드 외에 보헤미아에서도 사람을 좀 모아 데려갈 계획이올시다. 그 사람들도 암스테르담으로 모이게 해서 여기서 배에 태워도 되겠소? 당연히 추가로 투입할 배에 필요한 비용은 우리가 내리다.”
롤리가 끼어들었다. 벌이가 되리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 배는 내가 조달하리다. 한 척 정도는 마련할 수 있소.”
“좋소이다. 그럼 계약의 성립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모두 건배를.”
‘슈냅스(Schnapps)’라고 하는 독한 증류주가 잔을 채웠다. 쭉 들이켜 잔을 비운 이항복이 기세 좋게 외쳤다.
“모두에게 평화와 번영이 있기를! 그나저나, 술이 들어가니까 옆구리가 허전한데 네덜란드 미인이라도 구경시켜주시지 않겠소?”
“그럽시다. 연회가 준비되어 있으니 가시지요. 그리고 장차 이뤄질 거래에 대해 우리 역시 한 마디 해두자면, 조선인들이 우상을 섬기건, 가톨릭을 신봉하건 교역에는 아무 영향이 없을 거요. 신앙은 신앙, 거래는 거래니까.”
“그건 참 반가운 이야기올시다.”
이항복이 팔짱을 끼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