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1
1부 061화
– 1 –
조선 임금들은 좀처럼 신하의 집에 가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임금이 안 와주는 편이 고마운 게, 자칫 임금이 잠이라도 자면 ‘임금이 유숙한 집에 신하가 머무름은 무엄한 일이다’라는 논리로 더 이상 그 집을 쓸 수 없게 된다. 재산을 고스란히 날리는 셈이다.
“전하, 감히 이런 청을 드리는 것만 해도 황송하오나, 신의 집에 하룻밤 유하시면 어떠시겠나이까. 비록 대궐에 비하면 오막살이에 불과하오나, 모든 가솔들이 성의껏 접대하겠사오니 부디 왕림하여 주시옵소서. 전하께서 한 번만 찾아주신다면 자손 대대로 영광이겠사옵니다.”
그럼에도 매일 머무르는 고을마다 이런 말을 하는 양반들이 한둘은 꼭 있었다. 그날 밤을 머무를 고을에서는 수령과 좌수가 고을 안의 유력자들을 대동하고 내게 예를 올렸는데, 그 자리에서 청을 올리는 것이다.
“네 뜻은 가상하나, 과인은 이곳 방 한 칸이면 족하니 여기 관아 객사에서 머무르겠다. 네가 정녕 과인을 모실 뜻이 있거든, 그 대신에 과인이 거느린 군사와 짐꾼들을 오늘밤 잘 돌보아 주도록 하여라.”
“아, 알겠사옵니다.”
분명 임금이 자기 집에서 묵어갔다고 하면 대대손손 자랑할 일이긴 하리라. 내가 머물다 간 별채를 집안 대대로 물려가며 빈집으로 남겨놓고 가문의 영광을 기릴 만큼 말이다. 하지만 난 딱히 그 에 협력하고 싶지 않았다.
왜 내가 낯선 동네에서, 얼굴도 모르는 ‘남의 집’에서 자야 한단 말인가? 나는 국가대계를 위해 도로를 건설하고자 순행에 나섰다. 지방에 친구 사귀러 나온 게 아니다.
물론 이번 순행을 나오기 위해 내세운 명분 중 하나가 민심파악이다. 하지만 그게 꼭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남의 집에서 잠을 자야 살펴지는 건 아니잖은가? 동헌에서 열리는 연회에서 이야기를 듣고, 길을 가다가 만나는 백성들의 말을 듣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병조판서 이계동 등 신료들은 나와 달리 동네 양반들 집에서 유숙했다. 다들 나를 따라 객사에 머무르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혼자서 편히 자고 싶어서 그냥 전부 등 떠밀어 보냈다.
신료들이 잘 숙소는 다들 쉽게 구했다. 설마 그럴 줄은 몰랐는데, 정말 지연, 학연, 혈연, 관연으로 얽힌 사람이 동네마다 최소한 하나씩은 다 있더라. 이번 순행은 조선 사회 사대부 네트워크가 얼마나 조밀하게 잘 짜여 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행이기도 했다.
“9일이나 걸렸는데 이제 겨우 홍성인가.”
홍성 관아에 있는 객사는 고즈넉하니 혼자 사색에 잠기기 좋았다. 물론 평소에도 이렇게 조용하진 않았겠지만, 평소처럼 국왕과 궁궐을 상징하는 위패만 덩그러니 있는 게 아니다. 국왕 스스로가 떡 버티고 있는데 누가 감히 범접하겠는가.
“차를 몰고 왔으면 두 시간이면 올 거리를 9일이나 걸리다니, 환장할 노릇이지.”
그나마 5년차로 접어들었으니 이 속도도 적응이 됐다. 처음 1년 정도는 미칠 것 같은 이동속도 때문에 궐 밖으로 나가기가 정말 싫었다. 그때는 승마도 궁궐 뒷마당에서만 했다.
하지만 외출을 피할 수 없는 날이 있었다. 서울 근교 왕릉에 제사를 지내러 가야 하는 날이 한 해에 몇 차례 있는데, 그거 안 가려고 하다가 신하들이랑 정말 지랄맞게 싸웠었다. 결국 아프다고 배 째고 누워버렸지만…요즘은 그냥 챙겨 다닌다. 쓸데없는 싸움이 싫어서 말이다.
“주상, 원로에 몸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 할미는 걱정이 되어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할마마마. 어디 바다 건너 이국에 가는 것도 아니고, 제가 다스리는 땅을 보고 올 뿐입니다.”
할머니인 인수대비는 겉으로는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상당히 떨렸다. 궁궐 안에서 태어나 오직 궐 안에서만 화초처럼(?) 자란 손자가 먼 여행을 떠난다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전하, 부디 무리하지 마시고 편히 다녀오시옵소서.”
“잘 다녀오리다. 대궐을 부탁하오.”
아직 젊은 중전은 감정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목소리도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했다. 나는 그저 눈치 채지 못한 척, 웃으며 손만 살짝 잡아주었다.
“출발하라!”
내가 커다란 가마에 오르자 구령 소리와 함께 광화문 안쪽에 대기하고 있던 순행 행렬이 출발했다. 취타대가 요란하게 음악을 연주하고, 형형색색의 옷을 갖춰 입은 군사들이 일제히 발을 내디뎠다. 무질서하게 걷지 않고, 요 몇 년 제식훈련을 하며 훈련한대로 발을 맞추었다.
사람 3천 명, 말 6백 필에 달하는 행렬이 줄을 지어 전진했다. 말이 많은 이유는 군사들 중 기병의 비중이 큰 탓이었다. 중도에 뿌릴 하사품이나 이런저런 물자를 실은 수레 예순 대는 소가 끌었다. 어차피 순행 대열의 전체 속도는 사람이 걷는 속도니까 별 영향은 없었다.
목표로 한 행군 거리는 매일 20km, 첫날 하루를 걸어서 도착할 곳은 인덕원이다. 그 다음날은 수원까지 간다. 자, 출발해 보자.
첫날 도성을 출발하던 순간을 되살려보고 있으려니 문득 중전 생각이 났다. 먼 길을 떠나는 지아비를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던 그 두 눈이 말이다.
한국에서라면 꼭 끌어안으면서 ‘다녀올게!’했겠지만 여기는 예법이 다르다. 게다가 나는 이 나라의 임금이고, 수백 명이나 되는 사람이 둘러싸고 있다.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면 곤란하기에 그저 손만 살짝 잡아주었다.
중전은 내게 있어서 어떤 존재일까?
지난 4년, 내가 선택한 아내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부로써 살아왔다. 그러면서 매일 적어도 한 번씩 얼굴을 볼 때는 떠올리지 못했던 것들이 떨어져 있으니 떠올랐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진 않는다. 옛날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현모양처이자 착한 왕비라 고맙지만, 그게 내가 그녀를 사랑해야 할 이유는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나는 중전에게 내 모든 것을 털어놓고 함께할 수가 없다. 내가 실은 진짜 연산군, 아니 조선 임금 이융(李?, 연산군의 본명)이 아니라 미래에서 온 아무개로, 몸만 연산군의 몸일 뿐 실상은 다른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중전이 좋은 여자라고 해도 이런 이야기를 듣고 태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분명 인수대비를 찾아가 ‘주상이 정신이 나갔다’고 울면서 고하겠지.
인수대비가 아무리 날 아낀다 해도 정신이 나간 손자를 계속 왕위에 둘 정도로 맹목적이지는 않다. 당장 사실 확인이 시작될 테고, 중전의 말이 사실로 인정되면 나는 곧바로 유폐되고 폐위가 논의될 게 분명하다. 그리고 내 ‘동생’인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리라.
내가 입을 싹 씻고 중전이 거짓말을 했다고 몰면? 아, 그야 당연히 중전이 폐비되겠지. 임금이 미쳤다고 주장하는 건 역모에 준하는 행동이니 말이다. 본인만 쫓겨나는 게 아니라 친정 집안까지 박살날 수 있다.
내가 한 말이니 사실대로 인정하고 내가 물러난다 해도 그걸로 끝이 아니다. 내가 추진하던 여러 정책들도 모조리 취소될 게 분명하다. ‘제정신이 아닌 임금’이 추진하던 정책들이 계속 유지되리라 믿는 쪽이 바보 아닌가?
드라마에서 보면 타임슬립한 주인공이나 여주인공이 잘도 연애를 한다. 다른 시대 사람인 자기를 이해해주는, 아니 받아들여주는 상대를 참 쉽게도 만나더라. 하지만 나는 차마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수가 없다.
이런 우려가 있는 이상 나는 중전을 완전히 내 반쪽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다. 다른 후궁들도 마찬가지다. 그녀들 쪽에서 나를 어떻게 인식하는가와 상관없이, 나는 중전과 후궁들 모두에게 거리를 두고 대할 수밖에 없다. 자칫 내 모든 게 무너질 수 있으니 말이다.
“흠, 죽기 전에나 한번 털어놔 볼까.”
아니면 비록을 저술해서 봉인한 뒤 후대에 남기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지금 조선에서는 차마 떠올릴 수도 없을 사건들을 글로 써 두면, 후대에 내가 실은 미래에서 왔다는 증명이 되지 않을까?
“제목은 이라고 지어 볼까.”
십년 잡고 매일 한 페이지만 써도 4천 페이지 가까운 대작이 탄생한다. 난 아직 젊으니까, 느긋하게 한 번 써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하아, 언제쯤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있을까.
– 2 –
포구를 출발한 전선들은 온갖 깃발과 장식을 걸쳐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내자 망대 위에 있는 기라졸이 깃발을 휘둘러 신호를 보냈다.
“이제 저 전선들이 학익진을 펼칠 것입니다.”
갑주 차림을 한 충청수영 장수 한 사람이 공손하게 내게 설명했다. 그의 상관인 충청수사 우현손은 지금 상선에 타고 함대기동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곧 수사 상선에서도 신호를 받았다는 의미로 기가 올랐다. 곧바로 상선에서 휘하 전선들을 향해 깃발을 올려 기동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좀 더 정확히 볼 수 있게 쌍안경이 있으면 참 좋겠는데.
포구 앞바다에는 낡은 조운선 한 척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뱃전에는 허수아비가 가득 세워져 있었는데, 이 허수아비들이 이번 훈련에서 가상적 역할을 맡은 셈이었다.
힘차게 움직인 전선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대열을 벌리더니 왜선 역할을 맡은 조운선을 정면에서 둘러쌌다. 반포위 상태로 적을 둘러싸자 상선에서 또 다시 신호기가 올랐다.
“일제히 방포하라는 의미이옵니다.”
옆에 서 있던 장수가 때맞춰 설명했다. 이를 입증하듯, 전선들이 일제히 포를 쏘았다.
“포성이 꽤 크구나.”
현대 화포에 비하면 위력이야 약하겠지만, 흑색화약은 소리는 꽤 크다. 게다가 초연이 무지막지하게 발생하기 때문에 시각효과는 더 컸다. 연이어 포성이 울리며 날아간 화살과 철환이 배 위를 휩쓸었다.
“왜적들은 화포가 없고, 맨몸에 칼만 들고 우리 배에 뛰어들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우리 수군은 활과 총통으로 저들을 멀리서 제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멀리서 제압한다는데 지금은 총통을 너무 가까이 가서 쏘지 않는가?”
“너무 멀리서 쏘면 총통이 잘 맞지 않아 화약을 낭비하게 됩니다. 지금은 가능한 근접해서, 적이 뛰어서 옮겨 타지 못할 정도 거리에서 일제히 방포하여 적에게 타격을 주도록 하고 있사옵니다.”
내가 보기에 충청수군이 화포를 발사하는 거리는 가상적선과 겨우 20여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왜구가 총이나 활 없이 창칼만 소지했다면 나름 괜찮은 전술이지만, 발사무기를 사용한다면 우리 수졸들이 상처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적이 키를 움직여 배를 조종하는 재주가 뛰어나다면, 아니면 수적으로 아군보다 우세하다면 제대로 포를 쏘기 전에 먼저 배를 붙여 버리고 올라탈 가능상도 있다. 20m라는 거리는 너무 가깝다. 내 생각에 적어도 100m 정도는 간격을 두어야 했다.
“충청수군 관내에 왜적이 나타난 지 얼마나 되었는가?”
“요 여러 해 동안 나타나지 않았사옵니다.”
역시 실전 경험 부족이 원인이다. 고려 말이나 조선 초와 달리 거의 나타나지 않는 왜구, 그리고 나타나더라도 기껏 배 한두 척 정도 소규모로 출현. 대규모 교전을 치른 지 너무 긴 시간이 지난 탓에, 그에 대응할 전술 같은 건 생각해보지 않은지 오래이리라.
충청수군의 움직임은 매우 좋다. 깃발로 신호를 내리는 데 따라 일사불란하게 함대가 움직이고, 화포를 집중시키는 솜씨도 좋다. 다만 적이 화력을 증강하거나 다수 병력을 동원해서 좀 더 과감하게 덤벼들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음, 그러고 보니 동차도 만들어야지.”
“뭐라 하명하시었사옵니까?”
“아니, 아니다. 혼잣말이었다.”
동차(童車)는 총통을 얹은 바퀴 달린 포가를 가리킨다. 서양 군함에서는 꽤 일찍 쓰였는데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한참 이후에야 도입되었다. 그 전에는 포를 쏠 때 튀어 오르지 않게 하느라 새끼줄로 포를 선체에 붙들어 맸다고 알고 있다.
동차를 쓰면 충격 흡수, 재장전, 각도 조절 등이 모두 훨씬 쉬워진다. 나무로 뚝딱거리기만 하면 되니 만들기도 쉬운 물건이다. 아이디어만 떠올리면 되는 것을, 수군이 총통을 쏘는 모습을 볼 때까지 이걸 떠올리지 못한 나도 참 대단하다.
비격진천뢰도 최근에야 생각났다. 실전에 나가기까지 아직 당분간은 여유가 있을 테니 큰 문제는 아니지만. 이것도 재정이 되는대로 열심히 만들어서 비축하게 해야겠지.
“전하, 함대가 돌아오고 있사옵니다.”
잠시 딴생각에 빠진 사이, 화력시범을 성공리에 마친 충청수군 함대가 천천히 해변에 도열했다. 갑판 위에 몰려선 수졸들이 일제히 손을 들며 함성을 질렀다.
“주상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나는 웃으며 손을 들어 그 인사에 답했다. 그래, 미흡한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자. 지금 본 훈련에서 충청수군이 잘 훈련되었고 사기가 높다는 사실은 알았으니까.
오늘은 칭찬만 해주기로 하자. 저들은 내 백성이며 내 군사들이고, 칭찬을 들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