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15
2부 3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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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입을 모아 나를 칭송했다.
“올해도 비와 바람, 햇살이 적당하여 풍년이 들었습니다. 환란이 든 해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나, 그 뒤로 3년째 계속 풍년이 들고 있으니 이 어찌 전하의 덕을 포상하는 하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연산군 시절부터 계산해도, 이렇게 연속으로 풍년이 든 건 처음인 것 같다. 특히 이번 생은 심했다. 왜란 터지기 전 8년 동안에 가뭄이 든 탓으로 흉년이 든 해가 5년이나 되었으니까.
가뭄에다가 북방에서 3번이나 난리를 치르느라 곡식 재고를 깎아 먹고, 그 위에 일본군까지 쳐들어오면서 전국의 식량이 텅텅 비었다. 주머니를 바닥까지 털어 가면서 강남과 동남아에서 식량을 들여오고, 감자와 옥수수를 전국에 뿌리다시피 한 덕에 겨우 기근은 피할 수 있었다.
기근은 피했다지만 전국의 창고는 텅 비었다. 한때는 수도 한양에서조차 저화를 태환해주지 못해서 저화 가치가 휴지보다 조금 값나가는 수준으로 폭락할 정도였다. 현실적으로 보복전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재정부터 재건해야 할 상황이었다.
다행히 그 뒤로 연달아 풍년이 들었다. 사실 전란이 터진 해인 경인년(1590년)에도 하늘은 좋은 날씨를 베풀어주었다. 전쟁통에 논밭이 망가지거나, 병력 동원 탓으로 일손이 부족해서 평년작 수준밖에 거두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쌀 수확을 앞두고 저화 시세도 평년 수치를 회복했다 하니 실로 다행한 일이옵니다. 비로소 관원들이 안심하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사옵니다.”
“실로 그러하도다.”
경인년과 바로 다음 해인 신묘년에는 원칙을 깨고 관리들 봉급으로 저화 대신 현물만 줬다. 주로 수입한 안남미였다. 그다음 해인 임진년 ? 참 기분이 묘했다 ? 에는 안남미 절반, 저화 절반을 지급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부터는 다시 전액 저화로 지급했다.
봉급이 줄어든 셈이 된 관원들은 차라리 안남미가 낫다며 반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화 지급과 통용이 겨우 자리가 잡혀가는 참인데, 그걸 뒤집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올해 농사가 흉작이었다면 상당히 암울한 결과가 나왔으리라. 하지만 풍년이 들어준 덕분에 반발은 수그러들었다. 전국에 있는 곡식 창고도 충실히 재고를 채우고 있다.
“올해 풍년으로 백성들 사는 형편이 좋아진 덕에, 세랍 판매가 늘어 시중에서 물량이 달릴 정도라 하옵니다. 다만 내수사에서 물건을 주지 않아 세랍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다고 하니, 내수사에다 명을 내리시어 시중에 물건을 좀 더 풀게 하심은 어떨는지요.”
세랍(洗蠟)은 비누를 말한다. 무종 때 이래로, 고래기름을 이용한 비누 생산은 내수사 독점 수익사업이다. 국내에도 물건을 좀 풀긴 풀지만, 태반은 명나라로 나간다. 그쪽이 시장도 크고 수익성도 더 좋으니까. 게다가 국내에서 비누장사를 크게 안 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내 직접 내수사 일을 관장하지는 않으나, 대국에 넘어가는 물량이 계약되어 있으니 함부로 그 물량을 빼돌려 저자에 풀 수는 없노라. 헌데 어찌하여 백성들이 세랍을 쓰는 양이 그렇게 늘었는고? 값이 비싸다 해서 세랍을 쓰는 백성은 거의 없지 않았느냐?”
전염병 예방을 위해 몸을 자주 씻고 청결을 유지하라는 캠페인은 전쟁 이후 수시로 벌였다. 물론 조선에서는 세균 개념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더러운 기운’이 병의 원인이라고 적당히 뭉뚱그리고 넘어갔고.
하지만 조선에서는 원체 안 씻는 문화가 정착된 뒤다 보니 씻어라 씻어라 해도 사람들이 잘 씻지 않았다. 씻는다고 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조두(?豆, 콩·팥·녹두 등을 곱게 빻은 가루)를 비누로 쓰지 비싼 내수사제 세랍을 사서 쓰지 않는 사람이 많다.
비누를 써서 몸을 씻는 사람들은 나한테 잔소리를 듣는 궁인들, 내 앞에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조정 중신들, 그리고 상희가 감시하는 도성 소재 각 의료기관 종사자들 정도다. 각 지방 향의원들도 비누를 안 쓸 정도다. 그런데 민간의 비누 소비가 갑자기 늘었다고? 도대체 왜?
“그것이…근래 여염에서 궁궐 내의 풍습을 본뜨는 경우가 늘었사온데…그러다 보니 세랍을 쓰려는 이들이….”
“궁인들의 본을 떠서 몸을 청결히 하고자 세랍을 쓴다는 말이냐? 실로 기특한 일이로다.”
내 칭찬을 받은 호조판서 김남수가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본뜻이 그게 아닌가?
“아뢰옵기 망측하오나…요즘 시중 여인네들이 따르는 궁중 풍습이란 것이…목욕이 아니라, 제모…이옵니다.”
제모(除毛)? 털 뽑기? 원래 비누 없이 하던 거잖아? 그런데 갑자기 왜 비누 소비가 늘어?
조선 전통 화장법에서도 털을 뽑는 게 있다. 이마를 넓어 보이게 하느라고 족집게로 이마의 잔털과 머리카락을 뽑는다. 얼굴에 칠하는 분을 잘 먹으라고 다른 부위의 잔털도 뽑는다. 이 정도는 비누 없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무슨 소리냐고 한마디 하려는 참에 ‘궁중 풍습’이라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뭐냐, 그래서 사대부가와 여염의 여인네들이 세랍을 사다 거품을 내어 겨드랑이와 다리에 바르고 삭도(削刀, 면도칼)로 털을 민다는 이야기냐?”
“그,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게 혀를 차고 말았다. 그게 이제 궐 밖에까지 나갔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조선에서는 남자고 여자고 몸에서 나는 털을 미는 관습 따위는 없다. 물론 남자들은 수염 손질을 하고, 여자들은 미용을 위해 족집게로 털을 뽑지만 그게 전부다. 그런데 궐내에서 제모가 시작된 건 나와 상희 때문이었다.
입궁한 후에 마음 놓고 여성스럽게 꾸밀 수 있게 된 상희가 제일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제모였다. 나중에 고백하기를, 나는 현대에서 왔으니까 말끔하게 제모한 자기를 더 좋아할 것 같았다나? 저번 생에는 남자인 척하며 사느라 제모를 할 수가 없었고 말이다.
정작 나는 그동안 여자 몸에 털이 있건 없건 별 신경을 안 썼었다. 물론 현대에서는 제모한 쪽을 선호했지만, 처음 연산군이 되어 조선에 적응하느라 애먹는 동안은 그런 걸 따질 엄두가 안 났다. 괜히 변태 취급받을까 봐 신경도 쓰였고. 그러다가 그냥 적응해버렸다.
처음에는 그렇게 상희 한 사람만 제모했는데…문득 신경을 쓰고 보니 다른 후궁들도 하나씩 몸에서 털이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닌가. 궁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상희한테 뻔질나게 드나드는 걸 보고, 제모가 총애의 비결이라고들 생각한 거였다.
사방에 눈과 귀가 있는 궁궐에서 상희가 제모했다는 사실은 애초에 비밀이 될 수가 없었다. 당연히 다른 후궁들은 물론이고 언젠가 승은을 입기를 희망하는 궁녀들도 몸의 털을 말끔히 밀고 지내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혹시나 해서 2명을 무작위로 벗겨봤는데 정말 다 깎았더라.
승은을 입을 가능성이 없는 나이든 궁인들을 빼면, 궁궐 내에서 털을 안 깎는 사람은 오직 중전 한 사람뿐이다. 그런데 그 습속이 어느새 민간으로 퍼져나갔다니, 참으로 기가 찼다.
“정말로 올해 풍년이 들긴 든 모양이로구나. 그래도 털을 깎으려고 라도 세랍을 쓰다 보면 몸도 씻게 되겠지. 알겠다. 내수사에 명하여 등유로 내는 경유 출하를 줄여서라도 세랍을 좀 더 만들라고 하겠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무래도 호조판서 저놈이 데리고 있는 첩실이 ‘자기도 유행을 따라야 하는데’ 세랍 가격이 너무 비싸서 구하기 힘들다고 서방을 졸라댄 게 아닐까. 근거는 없지만 의심스럽다.
내 눈치를 느꼈는지 호조판서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조금 옆길로 빠졌던 회의 내용을 본 방향대로 끌고 나갔다. 올해 수확 이야기다.
“연이은 풍년 덕분에, 올해 추수를 끝내고 세곡을 거두면 전국에 있는 조창에 채운 곡식이 400만 석은 족히 될 듯합니다. 국내에서 거둔 곡식으로도 수요를 충분히 댈 수 있으니, 이제 내년부터는 강남에서 곡식을 들여오지 않아도 되겠사옵니다.”
지난 2년 동안은 풍년임에도 쌀 수입을 계속했다. 일단 비축이 너무 적다 보니 불안하기도 했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4도에 내린 면세 조치가 내년까지 남았기 때문에 풍년이라고 해도 실제로 국고에 들어오는 수입은 생각보다 적다.
양안 정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했다. 그리고 왜인 노비라는 공짜 노동력이 생긴 김에 남부 지방에서 대대적인 경지정리를 시행했다. 특히 전라도는 왜군이 경상도로 철수하면서 수차를 부수고 저수지를 허무는 등 온갖 파괴를 저지른 뒤라 대대적인 정비가 필요했다.
“전라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놈이 소조천(小早川隆景,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이었던가? 놈을 붙잡기만 하면 혓바닥을 뽑은 뒤에 사지를 결박해서 햇볕에 말려 죽일 테다.”
백각형은 보기에는 끔찍하긴 하지만 길어도 이틀이면 죽으니까 충분한 죗값이 되지 못한다. 그보다는 햇빛에 말라비틀어지고 기갈에 시달리면서 한 열흘쯤 걸려 죽어가는 쪽이 훨씬 자기 죄를 절감하게 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명나라에서 기술자를 초빙할 필요도 없다.
만약에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만끽하게 되었다면 굳이 보복전을 벌이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 줄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고바야카와군이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전라도 쪽 사회기반시설을 복구하느라 하도 골머리를 앓다 보니 복수심이 커지면 커졌지 줄지가 않았다.
“소조천뿐만 아니라 우리 땅에 쳐들어온 왜장들은 수길 이하 모두를 장대에 매달아 북어로 만듦이 가할 것입니다. 다만 당장은 우리의 손실을 복구하는 일이 더 급하니 상께서는 삼가 분노를 누르소서.”
“영상의 말이 옳다. 내 흥분하였구나.”
수리시설 복구만 해도 워낙 손댈 게 많다 보니, 왜인 노비뿐만 아니라 소집해제된 속오군과 전란 때문에 고향을 떠난 유민들까지 모아 투입했어도 끝나려면 멀었다. 내년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경지 구획정리에까지 이르면…그냥 목표 달성 시점을 안 정하는 게 나을 판이다.
시간도 걸리고 적어도 한 해 농사를 폐농하게 되지만, 그래도 경지정리는 필요하다. 원활한 용수 공급과 면적 파악, 경작의 용이성 등을 생각하면 꼭 해야 한다. 전란으로 무주지가 늘고 경작이 힘들어진 지금이 차라리 경지정리에 들어갈 최적기라고 할 수 있겠다.
소유주가 증발한 무주지는 몽땅 국유지로 편입했다. 그리고 정규군이건 속오군이건 가리지 않고 전공을 세운 군사들에게 각자 공적에 따라 경작권을 나눠주었다. 소유권이 아니라 종신 제공되는 경작권이다. 다만 이 경작권은 상속할 수 있다.
덕분에 전라도는 물론 경상남도 일대에서도 상당한 토지 재분배가 이루어졌다. 속오군에서 공을 세운 이들은 하류층이 많았던 덕이다. 애초에 정군이 아니라 속오군에 속했던 것부터가, 이들이 살림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는 방증이니까 말이다.
계속 풍년이 들어준 덕에 경지정리 비용도 충당이 됐다. 굳이 타도에서 거둔 세금을 영호남 양도에 퍼붓지 않아도, 도내에서 거둔 임시세만으로도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국세 징수를 면제한다고 했지, 해당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필요한 돈까지 안 걷겠다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영호남 지역의 세곡이 없어도 다른 지역에서도 계속 풍년이 들고, 중국과 동남아 양쪽에서 들여온 쌀 덕분에 식량은 넉넉했다. 도성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는 저화를 태환해줄 수 있을 정도로 준비곡도 쌓았다. 그리고 여기서 대박을 터트린 놈들이 나왔다.
“전하, 전란으로 인해 저화 가격이 폭락하였을 때 헐값으로 잔뜩 사들여두었다가 그 가치가 몇 배로 오르자 지금 환매하는 자들이 숱하옵니다. 이를 금지하고, 부정하게 치부하는 자들을 징치함이 옳지 않겠사옵니까?”
내가 직접 암행을 나갔을 때도 목격한 바지만…전사자, 부상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느라 일시금으로 푼 저화는 대부분 송상을 비롯한 대상인들에게 헐값으로 흘러 들어갔다. 저화를 받은 백성들이 한꺼번에 이를 시중에 내놓자 시세가 폭락한 때문이다.
세금으로 낼 때는 저화의 액면가를 100% 인정한다. 하지만 세금 중 가장 큰 비중인 전세는 전란 이후로는 오직 곡식으로만 징수하고 있고, 일반 백성들은 저화로 바칠 만한 세금 자체가 얼마 안 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세금으로 바치고 남은 저화는 시장을 맴돌 수밖에 없다.
나도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전상자들에게 아무것도 안 줄 수도 없었다. 무종 때 벌인 일본 원정 같은 경우에는 준비했다가 남은 군량미를 나눠줬지만, 이번엔 그럴 여유도 없을 만큼 쌀 한 톨이 아쉬운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저화가 풀렸는데 준비미가 부족해서 태환이 안 되니 저화 가치는 폭락했다. 여유가 있는 대상인들은 이를 헐값에 매집해 돈궤에다 차곡차곡 쌓아두었고, 연이은 풍년으로 저화 시세가 회복되자 그동안 기다리던 이익 실현에 나선 것이다.
“남에게 강탈한 것만 아니라면, 물화가 값이 쌀 때 사두었다가 비싸졌을 때 내놓는 행동을 어찌 그르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 도리를 따져보면 옳다고 할 수 없겠으나, 그동안 허용하던 일을 인제 와서 갑자기 벌할 수는 없다.”
저화 유통에 따르는 필요악이라고 생각해서 눈감았을 뿐, 계절에 따른 저화 투기는 솔직히 수십 년 동안 관행적으로 계속 이어져 왔다. 게다가 거상들이 차익을 노리고 저화를 사들이지 않으면 아예 민간에서 저화 유통이 안 된다. 이번에는 이윤을 얻는 정도가 좀 심했을 뿐이다.
“한 사람이 태환할 수 있는 저화 수량을 제한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무 소용 없는 일이다. 여러 사람을 부려 각자 일정한 몫을 바꾸게 하고, 여러 날에 걸쳐 창고를 찾게 하면 어찌 이를 단속하겠는가?”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차명계좌가 되겠군. 게다가 공연히 태환에 제한을 두었다가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 하나 또 있다. 이건 나만 떠올린 문제도 아니었다. 영의정 유성룡이 이 문제를 침착하게 지적했다.
“돈놀이하는 전주(錢主)나 거간(居間)들이 부당한 이득을 얻지 못하게 함은 필요한 일이라고 신도 생각하옵니다. 하지만 지금 급작스럽게 태환을 억제하면, 관고에 충분한 곡식이 없어서 나온 조치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생겨 겨우 안정된 저화 값이 또 내려갈 수 있사옵니다.”
“신들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이원익, 좌참찬 윤두수 등이 모두 입을 모아서 동의했다.
“이후에 새로 법을 만들어 제약을 두더라도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올해 추수를 끝내서 저화 가격이 완전히 안정된 뒤에나 방안을 고려하도록 하소서.”
가장 능력 있는 신하들의 일치된 의견에 나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그 말이 옳도다. 나 역시 그대들과 이 문제를 대하는 뜻이 같으니, 일단 올해 안에는 저화 태환에 별도로 제한을 두지 않겠다.”
내가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했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정답을 알았으려나. 이건 나도 잘 모르는데 아직 조선에서도, 유럽에서도 조언을 얻기 힘든 문제라 참 답답하다. 이런 쪽을 다루는 경제이론은 18세기에나 나왔던가…?
“전하, 신 병조판서 아뢰옵니다.”
병조판서는 여전히 김명원이다. 벼슬을 더 높은 단계로 올려주지 못하는 대신에, 보너스를 수시로 내려주고 있다. 김명원을 승진시켜주자고 유성룡이나 이산해를 집에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이러다가 김명원이 조선 최장수 병조판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 병판. 요즘 왜구들의 준동은 어떠한가?”
2년 전부터 왜구들의 준동이 갑자기 늘었다. 전쟁에 패해서 기가 죽었을 줄 알았던 왜적이 갑자기 난리를 쳐서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었는데, 포로를 잡아 심문하고 나서야 이런 일이 생긴 이유를 알았다. 히데요시 그 개새끼가 해적금지령을 풀어버렸다는 게 아닌가.
일본 수군은 왜란 중에 막대한 손실을 본 때문에 원거리 항해능력이 격감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인력을 확보해서 조선 연해에 얼굴을 내미는 놈들이 있었다. 그놈들 탓에, 우리는 전 해안선에 수군 병력을 분산시켜서 해안을 경계하게 해야 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하고만 있는 건 아니다. 이제 8척으로 늘어난 갈레온 전함들은 보복으로 일본 연안을 쓸고 다녔고, 원양으로 나가서도 일본 배만 보면 덮쳤다. 생각 같아서는 일본에 교역하러 가는 남만선도 털어서 놈들을 아예 봉쇄하고 싶었지만 그건 참았다.
덕분에 작년까지 제법 극성이던 왜구들의 준동은 올해 들어서 거의 사그라들었다. 이제 8월 중순인데, 우리 연안에 왜구가 나타난 건 올해 들어 이제까지 딱 여섯 번이었다. 그나마 우리 해안을 실제로 턴 건 그중 두 패, 털고 도망치는 데까지 성공한 건 한 패거리뿐이었다.
“장수와 군사들이 물샐 틈 없이 경계한 덕으로 이번 달 들어 우리 해안에 범접한 왜구는 단 한 놈도 없었사옵니다. 북변에서도 평온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로다. 풍년과 더불어 왜적도 잦아들었으니, 이 어찌 천지신명이 이 땅을 돌보신 결과라고 아니하겠느냐? 다만 앞으로도 경계를 허술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외에 김명원이 실행을 맡은 공작이 하나 있었지. 지금 눈치를 보니 김명원도 그 보고를 어서 하고 싶은 모양이다. 조회를 얼른 끝내고 이제 비변사로 자리를 옮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