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2
1부 062화
– 3 –
아침식사는 단출하다. 아 물론 일반 백성들이 먹는 밥에 비하면 진수성찬이겠지만, 내가 평소 먹던 수라상에 비하면 당연히 초라한 게 아니겠나.
예전 세상에 있을 때 같았으면 그냥 컵밥으로 때우면서 두 달 버티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 헌데 이젠 입이 고급스러워져서(…) 안 된다. 적어도 즐겨 먹는 반찬 몇 가지 정도는 늘 있어야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명색이 순행이니만큼 식사 준비를 할 인원은 정말 최소한으로만 데려왔다. 수라간 나인들을 줄줄이 달고 오고 싶지 않기도 했고, 모처럼 다른 동네에 가는 참이니 늘 먹던 밥이 아닌 다른 음식도 먹어보고 싶어서 말이다.
보령은 바닷가 고을이라서인지 상 위에 해물이 많았다. 찜으로 만든 생선은 숭어인가 싶고, 젓갈은 조개 같은데 도무지 무슨 조개인지 모르겠다. 음, 여기에다 고춧가루도 같이 버무려서 만들었으면 매콤하니 얼마나 맛있었을까.
“촌이라 좋은 음식이 없사옵니다. 존귀하신 전하께 고작 이런 음식밖에 바치지 못해 송구스럽기 짝이 없사옵니다.”
부름을 받고 방에 들어온 충청수사 우현손이 내게 용서를 청했다. 더 좋은 음식을 내놓지 못해 죄송하다는 의미겠지?
“아니다. 과인이 궐에서 먹는 음식을 그대로 먹고자 했으면 순행을 나왔겠느냐? 그리고 오더라도 숙수를 줄줄이 달고 왔겠지. 과인은 이번에 각 고을에서 만드는 음식을 직접 맛봄으로써 과인이 통치하는 나라와 백성을 더 잘 알고자 한다. 이곳 음식도 맛이 매우 좋구나.”
빈말이 아니었다. 내가 너무 잘 차리지 말라고 해서 반찬은 해물과 나물을 합쳐 일곱 가지밖에 없었지만, 그 일곱 가지가 모두 무척 맛이 좋았다.
“어제 충청 수영 전선들이 펼친 수조(水操)는 잘 보았다. 무척 잘 조련되어 있고 군사들의 사기도 높았으니, 그대가 얼마나 군사들을 잘 이끌었는지 알 만하다.”
“모두 전하께서 베푸신 은총 덕분이옵니다.”
우현손이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태도가 한층 더 마음에 들었다.
“도성에서 과인이 어떤 명을 내리건, 지시한 바를 실행하는 건 그대를 비롯한 지방의 관리들이다. 군사들에게 임금의 은혜를 깨우치게 하고 자신이 할 도리를 직접 깨닫게 하는 게 장수의 역할이 아니냐. 아주 잘 해주고 있는 듯하다.”
우현손은 사실 충청수사가 첫 수사 보직이 아니다. 이미 성종 때부터 경상우수사를 두 차례, 전라좌수사를 한 차례 역임하는 등 수군에서 도가 튼 인물이다. 당연히 왜선을 상대로 싸운 실전 경험도 여러 번이다.
“학익진을 원용하여 적에게 포화를 집중함은 새로운 전술이다. 군사들이 아직 익숙지 못할 텐데도 그리 능숙하게 기동함은, 수사가 열심히 조련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전하께서 지침을 내리지 않으셨다면 어이 그런 전술을 생각했겠나이까. 학익진은 본래 기병이 하는 전술이니, 수전에서 이를 적용한다는 착안은 가히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나이다.”
이순신 장군님, 죄송합니다. 제가 업적을 좀 가로채겠습니다. 제가 장군님께서 쌓아올리신 위업에 너무 영향을 크게 받았는지, 조선시대 수전이라고 하면 학익진으로 적을 포위하고 화포를 퍼붓는 것밖에 모르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뭔가 또 다른 방법으로 적을 무찔러주세요.
“어려울 것 없는 일이다. 왜적에 비해 우리가 가진 강점은 활과 화포인 바, 저들의 장기인 접현을 허용하지 않고 원거리에서 화기를 사용해 적을 제압함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화포는 적을 사방에서 둘러쌌을 때 더 효용이 크니, 학익진은 화기 사용에 참으로 적합한 진형이다.”
물론 학익진에도 취약점은 있다. 적이 학의 날개를 뚫고 이탈하면 아군이 역포위를 당할 수 있다. 그래서 적이 돌파를 시도할 때 저지할 수 있도록 날개를 두껍게 만들거나, 아니면 예비대가 꼭 있어야 한다. 충청수영은 이 부분도 잘 보완하고 있었다.
“헌데 어제 시범을 보니 포격을 시작하는 거리가 너무 가까운 듯했다. 실전이라면 적이 날래게 기동하거나 수가 많아 미처 화포를 집중시키기 전에 배를 붙일 수도 있다. 좀 더 떨어진 거리에서 방포함이 좋지 않겠는가?”
“어제 시범은 어전에서 하는 것인지라 포가 빗나가지 않고 확실하게 맞도록 신이 임의로 더 가까이에서 쏘도록 하였사옵니다. 실전에서는 마땅히 80보 이상 떨어져서 포를 쏘도록 할 것이옵니다.”
80보라면 96m, 거의 100m다. 그만하면 내가 상정한 포격 거리와 거의 같다. 내가 어제 괜한 억측을 하였구나.
“알겠다. 앞으로도 그대가 사직을 위해 크게 공헌하기를 바라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4 –
보령을 떠난 뒤에는 처음 상정했던 군산 대신 부여를 거쳐 논산 방면으로 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금강을 건널 수단이 부족했다(…).
하려고만 하면 수군 전선이든, 조운선이든 싹 긁어다가 배다리를 놓으면 된다. 한강을 건널 때는 그렇게 했지만 여기서도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배다리를 만들고 유지하는 비용도 비용이고, 끼치는 민폐도 엄청나니 말이다.
혹시 본래 계획대로 해안을 따라 목포까지 내려가게 되었다면 군산에서 배다리로 금강을 건넜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주를 들르기로 한 이상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논산을 거쳐 전주로 가는 거리와 군산을 거쳐 가는 거리가 비슷한 이상, 수고가 덜 드는 길을 택함이 당연했다.
수천 명이 걷고 있어도 길에서는 먼지가 거의 나지 않았다. 겨울이라 땅이 언 탓이다. 덕분에 주변에 백성들이 늘어서서 어가 행렬을 구경하는 모습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이런 곳까지 백성들이 늘어서 있다니, 의외로구나.”
“이 머나먼 남방에 사는 이들이 언제 어가를 볼 수 있었겠나이까. 저들 중 대다수에게는 평생 한 번 있는 구경일 것이옵니다.”
번화한 고을 한복판을 지날 때는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헌데 어가 행렬이 지나는 길에는 정말 백성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길가 뿐 아니라 주변 언덕에까지 사람이 빼곡했다.
“전하께서 이리 거동하심은 저들을 수고롭게 하는 일임과 동시에 평생 한 번도 뵙지 못할 존안을 저들에게 비쳐 주시는 은혜이기도 합니다. 저들이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느라 부역을 하는 동안은 고생스러웠겠지만 오늘 용안을 뵈었음은 평생 영광으로 기릴 것입니다.”
충청감사 민사건이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민사건은 어가 행렬이 충청도 지경에 접어드는 자리에서부터 나를 기다렸고, 전라도로 넘어갈 때까지 계속 수행할 참이었다.
“사대부라면 대개 과거를 보러 도성에 갑니다. 허나 일반 백성들은 가끔 군역을 지러 가는 경우를 제외하면 도성에 갈 일도, 전하를 먼발치에서나마 뵈올 일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고을 바깥, 일개 여울목에도 인근 백성들이 모두 몰려와 있는 것이지요.”
이해는 확실히 갔다. 그래도 임금의 행렬을 구경한다는 게 편한 일은 아니다. 일단 이 시대는 일반 백성이 임금을 감히 길에 서서 바라볼 수도 없는 시대니까 말이다.
가까이서 어가를 구경하겠다고 길가로 몰려든 백성들은 바닥에 납죽 엎드려서 살짝살짝 눈만 치켜떴다. 나는 한양 백성들처럼 임금을 비롯한 높으신 양반들에게 흔들려 보지 않은 시골 백성들이 그런 것도 할 줄 몰라서 곤욕을 치르지 않을까 했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내가 보기에 가장 구경하기 좋은 자리는 도로와 약간 떨어져 거리를 두고 있는 언덕 위인 듯했다. 내가 지나가는 도로보다 높은 자리에 있으니, 엎드려서도 행렬을 관찰할 수 있다. 아예 서거나 앉아 있어도 딱히 올라가 붙잡을 수 없으니 대놓고 서서 구경하는 이들도 많았다.
“잠시 휴식을 하면서 점심을 먹도록 하라.”
나가다 보니 길가 한편에 기를 달고 있는 소달구지 십여 량이 보였다. 어가행렬을 이룬 군사들을 위한 점심을 싣고 온 달구지였다.
3천이나 되는 군사와 일꾼들을 위한 식사 마련은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실무자들을 고민하게 만든 과제였다. 결국 숙박하는 고을에서 도착한 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을 준비하고, 중간에 경유하는 고을이 점심을 준비하는 것으로 정했다.
들르는 고을마다 관청 마당에 큰 솥을 줄줄이 걸고 밥과 국을 준비하는 모습도 장관이었다. 일손이 모자라니 관노와 관비가 총동원되고, 대갓집 노비나 일반 백성들까지 일부 동원되어 군사들을 위한 밥을 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쌀과 장은 모두 관에서 보유한 분량을 썼다.
“이번 순행 과정에서 어가 행렬을 대접하느라 각 고을이 소모한 쌀은 내년도 조세에서 그만큼을 감하도록 하겠다.”
본래 내 계획대로라면 이 보상금도 저화로 줘야겠지만, 타협했다. 자칫하면 내년에 가뭄이라도 들었을 때 사또가 저화뭉치만 들고 고민하게 될 수도 있는지라…물론 정말 가뭄이 들면 조정에서 구휼곡을 내리겠지만 말이다.
점심은 시간을 아끼려고 미리 만들어놓은 인절미나 주먹밥을 길가에 대기시켜 놓도록 했다. 그런데 음력 11월이라는 점을 깜박해버렸다. 순행 첫날, 준비시킨 음식이 보온을 제대로 안 해서 반쯤 얼어버렸다. 군사들이 차가운 주먹밥을 먹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미안하던지.
첫날부터 이런 꼴이 나자 부끄러운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일단 이 지역에서 최고 책임자인 경기감사에게 한 마디 주의를 줬다. 그리고 곧바로 파발을 보내 다음 고을 수령들에게 그 문제를 주지시키고 나니 다음날부터는 적어도 차갑지는 않은 점심을 먹일 수 있었다.
“저기, 저 백성을 한번 불러와 보아라.”
행렬을 이루고 있던 군사들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쉬면서 지급받은 음식을 먹었다. 다행히 평년 겨울보다는 따뜻한 날씨라서 불만이 적은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웃고 떠드는 이들도 있었다.
“저기 소쿠리를 들고 군사들에게 밥을 나눠주고 있는 남정네 말씀이시옵니까?”
“그렇다.”
내 주변을 지키고 있던 내금위 무사들이 냉큼 그 백성을 잡아왔다.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중년 사내는 자기가 누구 앞에 있는지 알고 부들부들 떨며 곧바로 그 자리에 바짝 엎드렸다.
“그대는 어디 사는 누구인고?”
사내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떨기만 했다. 내금위 무사들이 대답을 독촉했지만 사내는 벌벌 떨기만 할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뒤늦게 달려온 현감이 사내를 재촉했다.
“이놈! 주상전하께서 묻고 계시지 않느냐! 어서 대답하렸다!”
“쇠, 쇠, 쇤네는 석성 고을에 사는 김, 김, 김가라 하옵니다.”
역시 얼굴도 모르는 높으신 분이 얼러대는 것보다 얼굴이라도 아는 현감이 한 마디 하는 게 더 효과가 크구나. 저 농부는 현감보다 저 내금위 무사가 품계가 더 높다는 사실을 알까?
“과인이 그대를 부름은, 뭔가 들어줄 일이 없을까 해서이다. 과인에게 청할 일이 없느냐?”
내가 임금으로서 일반 백성들과 격의 없는 대화 따위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조선 사람들에게 임금이란 말 그대로 신적인 존재, 마주보지도 말을 걸지도 못할 존재니까 말이다.
하지만 임금은 어버이다. 백성은 자식이다. 따라서 백성은 임금에게 소원을 청할 수가 있고, 나도 그 소망을 들어줄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말해 보라. 청하고 싶은 바가 없느냐? 평소 저기 현감이 들어주지 않던 일이라거나, 동네에서 사람들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하거나 그런 일이 없느냔 말이다.”
현감의 얼굴에 바짝 긴장감이 흘렀다. 하긴 당연하다. 저 백성이 말 한 마디 까딱 잘못했다간 자기 모가지가 날아갈 테니 말이다.
“사, 사또께서는 고을을 잘 다스리셔서 조, 좋사옵니다. 다, 다, 다, 다만.”
“다만 뭐냐?”
임금 앞에서 고작 현감을 더 높이다니. 압존법은 어디다 갖다 팔아먹었는지 한 마디 하고 싶지만 애초에 배우지도 못했을 가능성이 크니 그냥 뒀다.
“보, 보를 만든다고 부, 부역을 너무 심하게 시, 시키옵니다. 크, 크고 튼, 튼튼한 보를 만드는 건 조, 좋지만 쇠, 쇤네는 너, 너무 힘이 드, 들었사옵니다.”
그건 내가 시킨 일이잖아. 각 고을에서 보와 저수지를 가능한 많이 만들어 물을 저장해 놓으라고 시킨 장본인이 바로 나다. 이건 질책할 일이 아니라 칭찬할 일인데.
그래도 현감은 혹시라도 임금이 자기를 야단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바짝 얼어 있었다. 긴장하는 태도를 보면 적어도 국왕과의 인터뷰를 대비해 미리 교육시킨 백성은 아닌 듯하다. 그 얼굴을 잠시 살핀 뒤 나는 웃으며 사내를 도닥였다.
“그게 다 현감이 너희를 위해 하는 일이다. 내년에 비가 충분히 오면 필요치 않겠지만, 행여 가뭄이 들면 그 보가 너희 목숨을 구할 게다. 자, 이만 가 보거라. 여봐라, 과인이 묻는 바에 솔직하게 답한 이 백성에게 사여품으로 준비한 부채를 하나 내려 주거라.”
임금이 물건을 내린다고 하자 주위에서 찬탄의 눈길이 쏟아졌다. 부채를 손에 든 채 여전히 부들거리며 떨던 농부가 물러가자 나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높은 소리로 선언했다.
“누구든, 말하는 이가 천한 백성이라 할지라도 언로는 보장되어야 한다. 그 누구건 할 말이 있는 자는 과인 앞에서 거리낌 없이 말할 지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으음, 그동안 대간들 말 숱하게 씹은 건 양심에 좀 걸리는군(…).
어쨌든 필요한 행사였다. 앞으로도 들르는 고을이나 연도(沿道)에서 만나는 백성들을 종종 무작위로 집어서 이것저것 질문을 좀 던져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