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23
2부 4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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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사 산하에 있는 여러 사업장 중 겨울에 가장 분주한 곳은 평양에 있는 사동 탄광이다. 이 탄광이 생산하는 석탄의 최대 수요처인 서해 일대 염전들은 겨울이면 조업을 중단하지만, 대신 민간에서는 겨울에 난방용 석탄 수요가 급증하기 때문이다.
“염전 하나가 100호(戶)에서 때는 만큼의 석탄을 쓰긴 하지요. 하지만 평양에 사는 민호가 2만 호가 넘는데, 이들이 구들장을 뜨끈하게 데우려면 염전 12곳이 쓰는 석탄을 다 갖다 써도 모자란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겨울에는 대동강이 결빙하니 해안에 있는 염전에 석탄을 공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평양성 성내로 석탄을 보내기는 훨씬 더 쉽다. 캐낸 석탄은 흙을 섞어 물에 적신 다음 구멍난 벽돌 모양으로 빚어 말리고, 다 마르면 썰매에 실어 얼어붙은 강을 지나 성내 시장으로 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겨울에 염전이 휴업하면 일이 없어 쉬는 염부(鹽夫)들이 한철 품팔이로 탄광에서 일하는 게 관례화되어 있을 정도다. 내년 소금 농사를 위해서 염전 설비를 손질하는 주요 인원 외에, 일이 없는 잡역부들은 모두 탄광에 온다.
어차피 염전이나 탄광이나 모두 내수사에서 운영하니, 염전을 맡아 경영하는 염두(鹽頭)들과 탄광을 담당한 점두(店頭)들로서는 일손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다. 염전에서는 일꾼들의 겨울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탄광에서는 계절적인 일손 부족을 해결할 수 있다.
“그래도 이제 2월이니 한창 바쁜 철은 다 지나갔습지요, 시장에 푼 석탄값도 다 걷었으니 장사 마무리는 잘한 셈입니다요.”
“올해도 수고가 많았네그려.”
염전에서 데려온 일꾼들도 소금 농사 준비를 위해 모두 돌아갔다. 이제 구들에 땔 석탄보다 대동강이 녹으면 배에 실어 하류로 보낼 석탄을 준비할 때다. 염전이 일을 시작하려면 석탄을 때서 증기기관을 돌려 염수를 퍼올려야 하니까.
보고를 마친 점두가 공손하게 저화 다발을 내밀었다. 황부현이 손을 뻗어 받았다.
“일단 지시하신 대로 저화 2만 석을 준비해 놓았습니다만, 이 정도로 되겠습니까?”
“일단은 충분허이. 다른 데서 또 돈이 들어올 것이고.”
평소대로라면 지금 급히 돈을 걷으러 내려올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주상께서 내탕금이 당장 필요하다 하시어 내려왔다. 저화는 호조에도 충분히 있지만, 아무리 나중에 다시 넣으면 된다 해도 전하께서는 호조 재정에는 손을 대지 않으셨다.
내수사가 작년에 25만석 가까운 수익을 올렸고 그 외에 기본 자산만도 300만 석은 되지만, 그 재물이 전부 도성에 있는 건 아니다. 전국에 있는 내수사 창고와 집무실에 흩어져 있다. 도성에서 어명에 따라 바로 지출할 수 있는 액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많지 않다.
“일단 필요하다 하신 액수는 도성에 있는 금고를 헐어 전하께 올렸네만, 썼으면 다시 채워 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대국에 간 배들이 돌아오면서 은을 싣고 오면 좀 상황이 낫겠지.”
요즘 시중에 풀리는 은은 대개 명나라에서 외수사가 벌어오는 은이다. 단천을 비롯한 국내 은광에서 캐는 은은 그 양이 크게 많지 않아서 내수사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고만 있다. 북쪽 지방에서 캐는 사금과 마찬가지다.
만력제가 하사하는 은만으로도 대포 만들 구리와 필요한 여분의 곡식을 사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에 인삼과 초피, 진주, 세랍을 팔고 받아오는 은은 대개 천축에서 오는 염초를 사는 데 쓰고, 일부는 고액거래수단으로 저자에 풀렸다.
다만 명나라나 서양에서처럼 제대로 된 은화가 유통될 정도는 아니다. 서양 선원들이 직접 돌아다니는 개성 일대에서는 서양 은화를 일부 쓰나, 다른 지역은 쇄은이 약간 도는 정도다.
“만약에 올해 삼남에 흉년이 들었다면 저화보다는 곡식을 챙겨야 했겠지. 하지만 풍년 덕에 전하께서 내탕금을 저화로 내리셔도 각 지방 관아에서 저화를 곡식으로 바꿀 수 있으니, 우리 처지로서도 무척 편하네. 아예 은이 돌면 더 편하겠지만.”
일부 고액거래 외에 일상적으로 은화를 쓰기에는 은 공급이 아직 부족했다. 조속히 동정을 마무리하고 더 이상 염초를 많이 사들일 필요가 없게 되면 은을 국내 시장으로 돌릴 수 있고, 저화도 쌀이 아니라 은과 연동해서 가치를 안정시킬 수 있을 터였다.
이곳 평양에서도 동정에 참여할 군사는 모으고 있다. 평안도 군사들은 예로부터 강병으로 명성이 높지만, 지난 왜란에서 왜적은 평양 근처에 오지도 못했다. 과연 적에게 침탈당하지도 않은 여기 백성들이 얼마나 의기에 차서 지원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 6 –
“경인년에는 뭐했소?”
서류를 앞에 둔 아전이 물었다. 복수군에 지원하러 온 사내는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함안 관군이었습니다. 그래도 열심히 싸웠습지요.”
“잘 다루는 무기는?”
“활은 제법 쏩니다.”
호패와 군적 문서를 번갈아 보며 틀린 부분이 없나 대조한 아전이 뒤쪽을 가리켰다.
“일단 통과. 들어가서 저쪽 말 탄 나리 앞에 서시오.”
일본 원정에 투입할 복수군 초모는 2월부터 이뤄졌다. 적어도 1년 이상 군사조련만 받아야 하는지라 사실상 생계는 포기해야 하고, 그래서 도감군에 준한 녹료 지급이 이루어진다. 매달 저화 1섬이다.
경상남병영 초모관으로 재직하게 된 곽재우는 자기 앞에 늘어서는 장정들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가 전란 중에 거느렸던 의령 속오군과 비교하면 어째 다들 비리비리한 것이 영 제대로 싸울 것 같지가 않았다. 얼굴도 다들 흐리멍덩해 보였다.
‘이놈들, 그저 1년 동안 농사 안 짓고 편하게 먹고 살겠다고 모인 놈들은 아닐까?’
곽재우 앞에 늘어선 장정들도 처음 만나는 상대를 보고 잔뜩 주눅이 들어있었다. 사실 언뜻 보아도 범상한 상대가 아니었다. 몸에는 은빛으로 번쩍이는 남만갑을, 그 위에는 붉은 전포를 덧입고 덩치 큰 백마를 탔다. 그리고 마땅치 않아 하는 눈빛으로 장정들을 내려다보았다.
키는 그다지 크지 않으나, 어깨가 떡 벌어진 장수가 마치 대원수쯤 되는 듯한 풍채를 하고 말에 탄 채 내려다보고 있으니 기가 죽지 않으면 이상할 일이었다.
“너희가 정녕 왜적과 싸우려 초모에 응하였느냐!”
“예, 예….”
전란이 끝난 지 이제 겨우 4년이 지났다. 이곳 경상남도는 전란의 중심이었고, 무고한 백성 수천수만이 왜적의 칼에 죽어갔다. 당연히 그 피맺힌 원한이 모두의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주상전하께서 꼭 왜국을 쳐서 이 원한을 갚아주실 것이라는, 기대감 섞인 소문도 이미 전란 직후부터 영호남 일대에 돌고 있었다. 그 기대가 드디어 현실이 되었는데 망설일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그런 의기와 별개로 지금 눈앞에서 이들을 다그치는 저 무서운 장수의 호통에 겁을 먹는 건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관(官)’이 가진 위세에 주눅이 든 장정들의 목소리가 자꾸 조금씩 약해졌다.
“어허, 이놈들! 목소리가 작구나! 네놈들 혹시 사내가 아니라 계집인 게 아니냐? 안 되겠다. 당장 네놈들의 바지를 벗겨 하초(下焦)를 검사해야겠다!”
“아, 아닙니다!”
곽재우는 자기 휘하 의령 군사들을 ‘목소리는 우레 같고, 위세는 태산 같도록’ 조련했었다. 병영군 초모관이 되었어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이유에서건 군사가 되겠다고 모인 자들이 자기 눈앞에서 좀스럽게 행동하는 꼴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럼 소리쳐 보아라! 자, ‘왜놈을 죽이자!’”
“왜놈을 죽이자!”
곽재우가 비친 서슬에 겁을 먹은 장정들이 사력을 다해 고함을 지르자 병영 지붕이 날아갈 듯했다. 곽재우는 그제야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좋다. 그러면 너희가 군병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었는지 보도록 하겠다. 맨 앞줄에서부터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서 거기 놓인 들돌을 들어 어깨 위로 넘겨라.”
곽재우가 준비한 들돌은 쌀 한 섬 무게였다. 그리고 옆에는 두 섬, 석 섬짜리 들돌도 각각 하나씩 갖다 놓았다. 아까 아전은 지원자들의 인적사항을 보았을 뿐이고, 본격적인 시험은 이 과정에서 치러질 터였다.
“가장 작은 들돌도 들지 못한 놈들은 당장 집으로 가라! 아무리 의기가 높다고 하나, 쌀 한 섬도 들지 못하는 놈들이 어찌 군병으로 싸우겠느냐? 그 몸으로 어찌 병기를 들고 행군하며, 적과 드잡이질을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곽재우는 왜병과 수없이 싸워보았다. 그러면서 평생 싸움질만 한 왜병과 싸우려면 무엇보다 완력이 기본이 되어야 함을 알았다. 특별히 칼이나 창을 익히지 않은 일반적인 조선 군사들은 병기 다루는 솜씨로는 적과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오직 힘으로 후려치는 방법이 상수였다.
모여든 장정들 대부분은 곽재우가 준비한 들돌을 무난하게 들어서 어깨너머로 넘겼다. 너무 어리거나, 늙었거나 몸이 좋지 않았던 자들 10여 명이 영문(營門) 밖으로 쫓겨나고 남은 이들 100여 명이 곽재우 앞에 늘어섰다.
“다음 시험은 뜀박질이다. 저쪽 연병장 끝에 장작더미가 있으니, 가서 하나씩 들고 오너라. 내가 백을 셀 동안 돌아오지 못하면 탈락이다!”
곽재우는 곧바로 하나, 둘, 셋 하면서 크게 수를 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하면서 멈칫했던 장정들은 곧바로 미친 듯이 장작더미를 향해 질주했다. 장작개비 하나씩 들고 오는 데는 모두 성공했지만, 전원이 시간을 맞추지는 못했다.
“내가 백을 셀 때까지 돌아오지 못한 느림보들은 그 장작개비를 내려놓고 저기 영문을 나가 집으로 가라! 그리고 뜀박질 연습을 더 한 뒤에 다시 초모에 응하라!”
20명 가까운 지원자가 또 쫓겨났다. 곽재우는 원통해 하는 그들을 내보낸 후, 남은 80명을 4열 횡대로 세워놓고 그 앞에서 한껏 뽐내며 이들이 앞으로 세울 공훈에 관해 설명했다.
“너희는 장차 왜국을 징벌하는 선봉에 설 것이다! 이곳 창원 병영에서 1년간 훈련을 쌓은 뒤 전하께서 결단하실 때 왜국으로 가서 너희 친족과 친지들의 원한을 갚고, 왜적들에게 향후 조선을 또 건드리면 어떤 꼴을 겪게 되는지 알려주게 되리라!”
아까와는 달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 장정들이 원하는 바가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불탄 집과 살해당한 가족들의 원한을 갚는 것, 그것이야말로 복수군으로 지원한 이들 모두의 소망이었다.
“너희부터 시작이다! 이제 수천 군사가 모여 한마음 한뜻으로 조련을 받고, 전하의 깃발을 앞세워 왜국으로 갈 것이다. 내가 너희를 가르치며 끝까지 함께 하리라! 나와 함께 가자!”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아까 잠깐 비치던 소극적인 태도는 그사이 완전히 사라진, 기필코 복수하고 말겠다는 결의에 찬 목소리였다.
– 7 –
“그대들에게 알릴 일이 있어 불렀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거드름을 피우며 오사카성으로 불러들인 휘하 영주들을 내려다보았다. 겨울이 한창인 1월이기에 이들이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조선이 그 틈을 노려 쳐들어온다거나 할 일은 없었다.
“말씀하십시오, 전하.”
영주들의 좌장 격인 마에다 토시이에가 먼저 나섰다. 마에다는 도쿠가와와 더불어서 지난번 원정에 종군하지 않았고, 비용 부담은 좀 크게 졌을지언정 병력은 잃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히데요시와 본래부터 친한 친구였으므로 히데요시가 기댈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맹방이었다.
“전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셨는지는 모르겠으나, 후계를 든든히 하실 방안을 세우셨기를 기원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선대 천하인 노부나가의 유일한 친구이자 동맹자로서 명실상부한 오다 진영의 이인자였던 사람이다. 당연히 히데요시에게 유감이 있을 터이지만, 지금은 동쪽 멀리 떨어진 에도에 틀어박혀서는 오직 영지를 개간하는 데만 정신을 쏟고 있다.
“맞는 말이오. 나도 이에야스 공처럼 많은 아들을 얻어 후계를 든든히 하고 싶소만, 그대가 얻은 아내들만큼 좋은 여자를 얻지 못한 탓인지 영 소식이 없소. 아이를 한 셋쯤 낳은 미녀를 얻는다면 확실히 자식을 얻을 수 있을 듯한데.”
히데요시가 슬쩍 뼈 있는 말을 던졌다. 하지만 이에야스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아무리 미인이고 과거에 아무리 많은 아이를 낳았다 한들, 이제 달거리가 끊기고 여자로서 할 일인 후세 낳는 일을 못 하게 되었다면 품에 안은들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소인의 여러 사돈 중에도 이제 나이가 많아 그러하게 된 이들이 여럿입니다.”
이에야스가 누구라고 대놓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임석한 다이묘들은 모두 지금 언급되는 ‘사돈’이 노부나가의 여동생이자 그동안 히데요시가 수십 년 동안 탐내던 오이치임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신변을 지키는 사람이 이에야스의 둘째 아들 히데야스라는 것도 말이다.
“만약 그 사돈에게 아직 혼인하지 않았거나 홀몸이 된 딸이라도 있으면 자기 대신에 전하께 바치라고 조언해 보겠습니다만, 안타깝게도 하나도 없습니다. 세 딸 중에 장녀가 홀몸이 되긴 했습니다만, 바다 건너 먼 땅에 있어서 말이지요.”
차차가 조선왕에게 붙잡혀 있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뭔가 차차와 교환할 수단만 있었다면 히데요시는 어떻게든 차차를 데려다가 오이치 대신 아내로 삼았으리라.
하지만 ‘차차와 바꿔올 만한’ 선물이 없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히데요시는 오이치의 이름을 팔아 ‘딸을 만나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모정’을 애절하게 호소했다. 그 결과 작년 여름에 조선 측에서 온 회답은 간단했다.
‘원균을 송환하면 역적 이진의 처를 그 어미에게 보내주겠노라.’
아무리 오이치를, 차차를 가지고 싶다고 해도 친구를 배반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조선으로 송환하면 원균은 비참하게 처형될 게 분명했다. 원균과 한패였던 임해군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일본에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양자를 다시 얻기로 했소.”
히데요시는 이미 여러 양자를 두었다. 하지만 전공을 세우게 하려고 조선에 데리고 갔다가 다 전사해 버렸다. 그래서 귀환한 후에도 후계자가 없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올해 14살인 내 매형인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다섯째 아들을 내 양자이자 후계자로 하고, 히데토시(秀俊 : 히데토시는 한때 히데요시의 양자였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詮)가 본래 1597년까지 쓰던 이름입니다)라는 이름을 주겠소. 경들은 그리 알고 적절히 대우하시오.”
히데요시는 전주성에서 이름에 히데(秀)가 들어간 자기 동생과 양자, 부하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이 글자에 마가 낀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 글자를 쓴 자신이 천하인이 되었으니 그것도 기우라고 생각하고, 한 번 더 ‘히데’에 걸어보기로 했다.
“이로써 내 후계가 단단해졌으니, 그대들은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이 아이를 중심으로 뭉쳐 조선왕의 침공에 맞서야 할 것이오. 뭉치지 못하면 곧 일본이 망하는 것이니, 절대 다른 마음을 품지 말도록 하시오.”
“히데노부 님이 멀쩡히 살아계시는데 어디 무지렁이 놈을 데려다 놓고 그 뒤를 따르라니.”
모리 가문의 일족인 쿠마가이 모토나오(熊谷元直)는 뱃전에 서서 주군 모리 데루모토에게 전해 들은 히데요시의 건방진 행동을 욕했다. 히데노부 님을 보좌한다는 핑계로 권좌에 올라 천하인이 되었는데, 겨우 4년도 안 되어 히데노부 님을 제쳐놓고 자기 양자를 받들게 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도요토미가 그런 식으로 오다 가에 맹세했던 의리를 저버린다면, 모리라고 해서 도요토미에 대한 의리를 지킬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모리 데루모토는 자신을 향해 진군하는 히데요시의 오다군을 막기 위해서 조선에 구원을 청했던 전과가 이미 있었다.
“주군! 조선 남만선입니다!”
“마침내 만났구나. 백기를 올리고 다가가라.”
세키부네 한 척으로 출항한 이번 항해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리 가문 수뇌부에서도 극소수밖에 모른다. 이 배에 타고 있는 부하들도 몰랐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지금 모토나오의 지시는 ‘우리 모두 같이 죽자’는 의미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주군! 어서 도망치지 않으면 적에게 붙잡힙니다! 그런데 백기를 올리고 다가가라니요?”
“주군이신 데루모토 님의 명령이다. 잔소리 말고 내 지시를 따라라.”
백기를 보았으니까 조선 수군도 대뜸 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목소리가 들릴 거리까지만 다가가면 대화가 열린다. 그래서 통역을 맡길 조선 포로도 데려왔다. 제발 일이 잘 풀리기만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