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37
2부 4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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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도 관찰사의 청은 실로 타당하다. 대남도 수도대장 정준석의 품계를 정4품상 진위장군(振威將軍)으로 올리니, 그에 맞는 관복과 갑옷 한 벌, 전마 한 필을 내리도록 하라.”
이제 1594년 10월…정일한을 대남도에 보낸 지도 벌써 만으로 3년을 넘겼다. 내년에는 꼭 귀국하게 해주겠다고 작년에 그렇게 결심했는데, 결국 또 부도를 내고 말았다. 너무 일을 잘하니 선뜻 교대를 시킬 수가 있어야지.
사실 얼른 은퇴시켜야 할 만큼 정일한이 늙지는 않았다. 정일한은 경자년(1540년) 생이니까 이제 한국식 세는 나이로 55세다. 조선 사회 기준으로는 적잖은 나이고 외지로 돌면서 고생을 많이 해서 외모는 좀 삭았다만, 은퇴를 서두를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다.
난 적임자다 싶으면 최대한 오래 그 자리에 앉혀둔다. 대신 보너스도 두둑하게 챙겨준다. 그래서 정효신도 5년째 연해주에 가 있지만, 큰 불만은 없…는 듯하다. 헉, 갑자기 확신이 안 서네. 대놓고 말하지만 않는 거지 지금도 해삼위에서 툴툴거리고 있는 거 아닐까.
어쨌든 그것과 별개로 정준석에게 상은 내린다. 본래 법대로 하면 상피(相避)해야 할 사이라 절대 대남도에 가면 안 되는 사람이었지만, 고생하는 부친을 돕겠다고 벽지 파견을 자원한 참 기특한 녀석이 아닌가. 그리고 내 증손자이기도 하고.
정일한을 만났을 때는 아 이 사람이 내 손자구나 하고 인식은 했어도 친근감은 솔직히 별로 안 들었다. 내가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본 아들의 자식이니 아무래도 실감도 안 나고, 나이도 나보다 많으니까 후손으로 여기기에는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좀 들어갔던 탓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아들인 정준석 쪽은 조금 더 애착이 간다. 나보다 한참 연하 ? 경오년(1570년) 생이라고 했다 ? 라고 하니 아무래도 거부감도 덜하고,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기 시작한 탓이지 싶다. 그래도 전쟁 때 땡보로 빼준다거나 하지는 않긴 했지만.
사실 정준석도 처음부터 예뻐하진 않았다. 이 녀석이 내 눈에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한 때는 부친을 따라 대남도에 가겠다고 직접 자원하면서부터였으니, 경인년에 특별히 챙겨주지 않은 이유를 물어도 딱히 답할 말은 없다. 그전에는 본 적도 없고 당연히 관심도 없었다.
‘그러던 녀석이 이렇게 쓸만한 장수가 되다니….’
정일한이 올린 공적 문서를 보니 3년 동안 벌인 정준석의 활약은 확실히 뛰어났다.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토인들과 전투를 벌인 횟수만 46회, 베어 모은 수급은 284급, 포로는 58명.
언뜻 생각하면 적은 것 같겠지만 절대 적은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대게릴라전은 적과 만나 싸움을 시작하는 것부터 난관이니 말이다. 게다가 정준석만 나서서 싸운 것도 아니고, 가용한 군사 숫자도 넉넉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확실히 큰 성과다.
그래, 정4품 벼슬 정도는 얼마든지 내려줄 수 있지. 그런데 보고서 말미에 가니 뭣? 원주민 추장 딸과 결혼하고 싶으니 윤허를 바란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타얄이라는 부족은 그 기세가 얼마나 성한가?”
“그동안 대남에서 정세를 살펴 보고한 바에 따르면, 매우 성세가 강한 부족으로 전사만 2천 명을 동원할 수 있다 합니다.”
전사 2천이면 전체 인구가 1만은 되겠구나. 모든 성인 남자가 전사로 나선다면 말이지만. 혹시 노예가 있어서 노예는 싸움에 안 내보낸다면, 인구가 내 추산보다 더 많겠지.
그런 부족을 혼인으로 묶는다면 대만 경략에는 확실히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한 가지는 신경이 쓰였다.
“전하, 이제까지 북변에 지방관으로 간 이들이 현지에서 야인 추장들과 혼사를 맺지 못하게 했음을 상기하소서. 훗날 어떤 후환으로 돌아올지 모르는 일이옵니다.”
“우상의 말이 옳습니다. 그나마 북변은 본국에서 육로로 바로 군사를 파견할 수라도 있으나 대남도는 바다를 건너야 합니다. 아무래도 통제가 더 약해집니다.”
영토가 넓어지면 지방 통제는 당연히 더 어려워진다. 지난 80여 년, 한양에 있는 조정에서 가장 우려한 것 중 하나가 북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군권을 쥔 지방관들이 현지 세력과 유착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낮추고자 혼사를 못 하게 한 것이다.
물론 사람 마음이 법대로 가지 않으니 서로 눈이 맞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도 첩을 들이는 정도나 허용돼왔고, 정식으로 ‘혼인’을 하고 싶으면 당사자가 퇴임하면서 상대를 도성에 데려오는 정도나 가능했다. 현지에 있는 동안은 어떤 연계도 맺지 못하게 했다.
물론 일반 병사나 백성은 여기서 예외다. 현감 이상 고위직에만 해당되는 제한이다.
“흠, 하지만 대남도는 북변보다 도리어 이동이 쉽다. 바다 건너라고는 하나, 양선을 보내서 움직이면 열흘 안에 도착하지 않느냐? 게다가 육로로 행군할 때보다 병기와 물자를 나르기도 훨씬 쉬우니, 변란이 일어난다 해도 진압이 어렵지 않다.”
일전에 꾼 꿈 내용이 불현듯 떠오르기는 했다. 내가 대남 정씨 왕조의 후예가 되어 한양을 공략하고 제위를 탈취했던 꿈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현실성은 전혀 없었다. 전함 1천 척에 10만 대군을 양성하는 거야 그렇다 치고, 그 많은 병력이 도성까지 오는데 어떻게 안 들켜?
게다가 대남도 식민지는 모든 주요 전략물자를 본국에 의존하고 있다. 또 이주민 대부분은 자신의 정체성을 임금의 백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터, 원주민 피가 절반이나 섞인 지도자 따위가 반란을 외친다고 해도 쉽게 따라가지는 않을 거다.
“설사 말하기 망측한 불상사가 터진다고 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우리 백성들이 어떤 백성들이냐? 충과 효를 제일의 가치로 놓는 백성들이 아니더냐?”
이것 때문이라도 성리학을 아예 버릴 수는 없겠다. 북방으로, 바다 건너로 이주한 백성들이 반기를 들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한겨레, 임금의 백성이라고 계속 세뇌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지금 그 세뇌의 수단으로 쓸 수 있는 이념은 오직 성리학 하나뿐이다.
왕권신수설을 내세워 왕을 신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한 유럽에서도 해외로 이주한 자국민의 반란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었다. 영국도 본국에서 돈과 자원을 퍼부어주는 동안은 미국을 식민지로 유지했지만, 세금을 올리려고 하니까 반란이 일어나 결국 떨어져 나가지 않았나.
자연과학적인 현상까지 포함하는 세상만사를 성리학적 관점으로만 해석하는 태도는 마땅히 골방에다 처넣어야지. 하지만 충효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성향은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영국이 13주 식민지를 잃어버린 것처럼 조선도 해외 식민지를 잃지 않을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일상에서는 서구적인 합리주의를 수용하면서 정치적으로는 기존에 해왔듯 충효를 강조하는 성리학을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로 가면…난 모르겠다. 그런 건 내 레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내가 이황이나 이이도 아니고.
이번 전쟁을 끝내고 나면 집현전에 명령해서 그런 논리를 제시할 ‘어용 성리학’ 연구라도 시작해야 하려나. 아, 그건 나중이고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용건이 눈앞에 있지.
“전하, 불허하심이 옳다고 사료되옵니다. 관찰사의 아들이 혼인하고 싶어 한다면, 본국으로 돌아와서 장가들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직 많지 않은 나이에 이미 나라에 세운 공적도 적잖으니, 좋은 규수가 얼마든지 나설 것입니다.”
“정 그 처녀와 결혼하고 싶다면, 북방에서의 전례에 따라 처녀를 데리고 본국으로 들어오게 한 뒤에 도성에서 혼인하여 살라고 하소서. 그리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옵니다.”
두 방안이 다 그럴듯한 이야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양쪽 방안 모두 공통으로 문제점도 각각 하나씩 있단 말이지.
“정일한이 본국에서 아들을 혼인시키길 원했다면 혼인이 아니라 귀향을 허락해달라 청했을 것이다. 또한, 북방의 야인들은 우리를 알기에 혼인하여 도성으로 이주하라고 해도 거부감이 없지만, 대남의 토인들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원주민 입장에서는 자기 딸을 조선으로 데려간다고 하면 당연히 납치, 인질로 생각하겠지. 혼인을 거부할 우려가 크고, 당연히 정준석도 불만을 품을 거다.
설마 정준석이 장차 반란을 일으킬 기반으로 삼으려고 아타얄 추장의 사위가 되려고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부친 정일한이 내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데 무슨 반란이란 말인가.
도리어 혼인을 허락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이 더 크다. 빡친 정준석이 토인 부락에 합류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조선군 전술로 아타얄을 훈련한다면 진짜 악몽이다.
“전하, 정일한에게 일단 아들을 혼인시키라 허락하시옵소서. 그리고 적절한 때를 보아 정씨 부자를 도성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정씨가 대남에서 대대로 호족이 되어 사직에 누를 끼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영상의 말이 옳겠구나. 일단 혼인은 허하도록 하자.”
그래, 어차피 정일한을 곧 퇴임시켜 쉬게 해줄 참이었지. 어서 후임자를 파견해서 인수인계 시간을 갖도록 해야겠다. 정일한이 도성에 돌아오면 정준석이 혹시 토인과 손을 잡고 모반을 일으키면 어쩌냐는 조정 대신들의 걱정도 한결 덜어질 거다.
정준석도 언젠가는 귀국하게 해야 하리라. 유성룡의 말마따나, 부친과 장인을 뒷배경으로 삼아서 대만을 쥐고 흔드는 호족으로 성장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소환할 때까지는 대만에 있으면서 우리와 아타얄을 연결하는 가교 노릇을 충실하게 해주기 바란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에서 올 코끼리가 대만에 도착했을 때가 되었는데, 닿았을지 모르겠다. 섬라에서 물소와 쌀을 싣고 오는 선단 보고 광남에 들러 코끼리도 받아오라고 했다. 음, 혹시 나레쑤언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자기도 쌀 대신 코끼리를 내겠다고 하려나?
– 35 –
“양인들이 쳐들어온다! 모두 무기를 준비하라!”
“화포에 화약을 재라! 여자와 아이들은 성벽 안쪽으로 피해라!”
진남성은 난리가 났다. 처음 보는 깃발을 단 남만선이 7척이나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두에 선 큰 배와 그 뒤를 따라오는 배 2척은 상단은 황토색?중단은 백색?하단은 청색으로 된 삼색기를, 4번째 배는 하얀 바탕에 빨간 십자를 그린 깃발을 달고 있었다.
“그 뒤에 있는 3척은?”
“명확히 보이지는 않으나, 4번째 배와 같은 듯합니다.”
서반아나 포도아 배는 아니다. 깃발도 다르고, 척수도 너무 많다. 그 두 나라 배들은 왜국에 오가는 길에 가끔 여기에 들러서 물이나 연료를 보급하고, 간단한 수리를 하고 간다. 하지만 그런 배들은 1척 아니면 2척이지, 저렇게 많이 나타나지 않았다.
“성급하게 굴지 마라! 내가 명령할 때까지는 누구도 쏘지 마라!”
갑옷을 입고 성벽에 올라온 정일한이 크게 소리쳤다. 저들이 적의를 품었는지 아닌지 아직 알 수 없고, 섣불리 공격했다가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었다.
“오라는 우리 배는 안 오고 엉뚱한 남만선들이….”
정일한이 한숨을 쉬는 사이 병방이 달려와 보고했다.
“지금까지 군사 절반을 소집했습니다, 대감.”
대남도에 이주한 백성 숫자는 이제 약 1만에 달한다. 그중 진남성에 거주하는 자의 숫자는 약 3천. 여기서 군사로 동원할 수 있는 장정의 숫자는 1천4백이다. 하지만 논과 밭에 일하러 나간 이들을 모두 소집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병기를 든 군사들은 각자 위치에서 대기하게 하라. 행여 저들이 상륙할 수도 있다.”
그동안 서양 나라들 이름 정도는 몇 개 들어 두었다. 하지만 저 깃발만 보고는 어느 나라가 보낸 배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해적이라면 마땅히 맞아 싸워야 하리라. 일단은 포를 쏘아 최대한 맞서고, 적이 상륙하면 군사들을 시켜 성문에서 치고 나간다.
“앗, 대감! 뒤쪽에 있는 남만선에서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태극기가?”
군선, 조운선을 비롯한 모든 조선의 관선(官船)은 태극기를 내건다. 배에 게양하는 태극기는 임금의 소재를 나타내는 어기인 태극 팔괘도에서 바탕의 붉은색을 백색으로 바꾸고 흑색으로 팔괘를 그리며, 태극도 적색과 청색으로 그렸다. 모든 관선은 임금의 소유라는 의미다.
“예, 대감! 자세히 보니 뒤에 따라오는 남만선 3척은 모두 우리 관선이 맞습니다! 남쪽에서 왔으니, 섬라나 광남에서 오는 보급선입니다!”
긴장이 풀린 정일한이 한숨을 크게 내쉬며 두 손으로 성벽 위 여장을 짚었다. 아직 진남성 성벽은 토성이지만, 그래도 문루에는 여장을 만들어두었다.
“그럼 함께 움직이는 저들도 적은 아니겠구나.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모은 군사들을 다시 흩지는 마라. 사정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예, 관찰사 대감.”
“대감들을, 그것도 여기서 다시 뵈올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몰랐다. 그것도 수백 명이나 되는 양인들을 데리고 올 줄이야.
“나도 관찰사 대감을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소. 여기 부임하고 3년이나 됐는데 전하께서는 대감을 아직도 이 섬에 묶어두시는 게요?”
이항복이 혀를 찼다. 이들은 말라카를 통과해서 북쪽으로 올라오다가 우연히 섬라에서 오는 외수사 선단과 만났다. 마침 제노바 출신 항해사가 외수사 교역선에 타고 있던 덕분에 이쪽이 내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깃발을 알아보았고, 잠시 난리를 치고 나서 서로를 확인했다.
그 뒤에는 숫자가 많은 편이 안전하겠고 뱃길 안내도 받을 겸 해서 함께 움직였다. 광남에 함께 들러 코끼리를 인수하는 장면도 보고, 대남에도 같이 왔다. 이제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귀로에 오르면 이제 그 긴 여정도 끝이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조선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이항복은 기분은 무척 좋았다. 지난 3년 동안 정일한이 여기서 겪은 갖가지 난관에 대해 들으면서도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허어, 설사병이 유행했을 때는 참으로 고생이 크셨겠소. 허나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다들 이곳 풍토에 익숙해지면 그런 장려(??)도 줄어들 것이니.”
“그래야지요. 안 그래도 요즘은 토인들의 약 덕분에 병이 많이 줄었습니다.”
장려(??)는 장독(?毒)을 쐰 탓으로 생기는 풍토병을 가리킨다. 당연하겠지만, 땅을 놓고 그동안 조선인들과 싸워 온 인근 부족들은 조선인들이 병에 걸려도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도리어 병을 최대한 퍼뜨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새롭게 친교를 맺은 산지의 아타얄족은 조선인들에게 자기들 의원과 약을 보내 조선 의원들이 어쩌지 못하는 이곳 풍토병을 치료하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은근한 골칫거리였던 풍토병은 더 이상 걱정거리가 되지 않았다.
“아직 배필이 없는 우리 백성 중 여럿이 아타얄 처녀나 저들이 잡아다 준 다른 부족 여인을 맞아 혼인했습니다. 그랬더니 저들이 우리는 이제 일족이나 마찬가지라며 의원과 약을 보내서 도와주었지요. 물론 공짜는 아니어서, 섬라에서 오는 배를 기다리던 참이었습니다.”
아타얄족은 병을 치료해준 대가로 물소를 받고 싶어 했다. 그들은 물소를 아직 많이 가지지 못했고, 조선인들과 거래해서 더 많은 물소를 얻기를 원하고 있었다. 외상으로 약과 의원을 얻어온 셈인 정일한이 목이 빠지라 하고 물소를 싣고 올 배를 기다리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코끼리는 정녕 뜻밖입니다. 저 큰 짐승을 어찌 다루어야 할지….”
“마부, 아니 상부(象夫)가 같이 왔으니 다루는 법을 잘 배워 보시오. 내가 듣기로 코끼리는 무척이나 힘이 세다 하였으니, 수레라도 끌게 하면 되지 않겠소?”
광남에서 받아온 코끼리는 수컷이 3마리, 암컷이 2마리였다. 체구가 작은 한 쌍은 대남도에 두고, 몸집이 큰 수컷 2마리와 암컷 1마리는 도성으로 데려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대감들께서 데려오신 저 양인들은 무엇입니까? 천 명은 되겠지 싶은 인원에, 함께 싣고 온 말과 소와 돼지에 닭까지…고을 하나를 채우고도 남을 규모가 아닙니까?”
“모두 우리 전하의 덕을 흠모하여 조선 백성이 되겠다면서 온 자들이라오. 멀리 유럽에서도 전하가 성군이심을 알다니, 실로 대단하지 않소?”
정일한의 뒤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조보를 펼쳐서 읽던 이덕형이 잠시 고개를 들어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 이항복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뭐라고 꼬집지는 않고 다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 눈빛을 보지 못한 정일한은 열성적으로 이항복의 그 발언에 동조했다.
“옳습니다, 옳습니다. 이역만리 서양에까지 전하의 덕을 전하느라 두 분 대감께서 고생하신 바가 정말 큽니다. 그런데 광해군께서는 어디 계시는지요? 혹 몸이 아파 배에 계십니까?”
“음, 광해군께서는 전하의 명으로 유럽에 남아 우리 동방의 도를 저들에게 전하게 되셨소. 군부인께서도 함께 남아 조선 여인들이 가진 미덕을 저들에게 전하시게 되었으니. 실로 우리 모두 그 기상을 전범(典範)으로 삼아야 할 거요.”
정일한이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 있는 이덕형은 그저 앉은 채로 한숨을 쉬었을 뿐이었다.
“모레 외수사 배들이 출발할 때 우리도 같이 갈 거요. 잠시 쉬는 동안 양인들이 상륙하게 해도 괜찮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런데 외수사 배들은 바로 조선에 돌아가지 않고 유구에 들러서 유황을 싣고 갑니다. 그만큼 귀국이 늦어질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네덜란드 선원들이 이쪽 뱃길에 익숙하지 않으니, 조금 돌더라도 외수사와 함께 움직이는 편이 낫소. 걱정해주어서 고맙소.”
좀 더 이야기를 나눈 뒤 두 사람은 일어섰다. 정일한이 견서사 일행을 환영하는 잔치를 열 생각이라고 했지만, 그건 저녁에 하고 일단 배에 돌아갔다 오겠다고 했다.
단정에 오르며 보니 코끼리들은 아직도 부둣가에서 사람들의 경탄을 받고 있었다. 이항복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도로 한 마디 던졌다.
“관찰사가 여는 연회에 자네가 세뇨리타 롤리타를 동반하면 그 처자가 참 좋아할 텐데.”
“그렇게 좋거든 형께서 데려가시구려.”
“저렇게 절개가 깊은 여인을 유혹하여 탐할 만큼 색에 굶주리지는 않았네.”
이덕형은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렸다. 이항복이 박장대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