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38
2부 4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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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칙사 맞이하는 것도 참 오랜만일세. 만력제가 워낙 게으르다 보니 그동안 칙사를 보낸 적이 없었다. 전쟁 중에 누구더라,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병부 관리 하나가 우리가 노부나가랑 짜고 연극을 하는지, 정말 침략당했는지 확인하러 왔던 게 유일한 사례였지 싶은데.
“병부좌시랑 이지충이었습니다.”
“어, 그랬던가.”
벌써 4년도 더 지났다. 게다가 칙사가 왔을 때 나는 멀리 남쪽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고 칙사를 영접한 건 세자였다. 그러니 보지도 못한 칙사의 이름 따위가 기억에 남을 리 없다.
이번에 맞이한 칙사도 이름까지 기억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명나라 조정에서 크게 중요한 비중을 가진 중요인물도 아니고, 칙서 전달 외에 무슨 큰 임무를 띠고 온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칙사를 영접하는 일 자체는 익숙하다. 예전 연산군 때 해본 가닥이 있지 않은가.
의식을 갖춰 칙서를 받고, 모화관에서 칙사를 영접하는 잔치를 베풀고, 도성 주변 산천을 유람하게 해주었다. 번거롭지만 웃는 얼굴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칙사가 한양에 딱 이틀 머무르고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이다. 곧 겨울이 오면 바다가 거칠어질 테니, 그전에 돌아가야겠다나. 참으로 고마운 이야기였다.
칙사를 환송하고 돌아오니 이제 마음 편히 신하들과 원정에 대해 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칙서 내용을 언급했다. 칙서를 받을 때 참례한 중신들은 이미 다들 들어 알고 있겠지만, 너무 반가운 소식이라 내 입으로 한 번 더 읊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내년에 우리와 함께 출정하는 천장이 요동 총병관 이여송이 아니라 하니 참으로 기쁘다. 나뿐 아니라 우리 장수들도 실로 한시름 덜었도다.”
칙서에 따르면 이여송의 동생 이여백이 요동병 3백 기와 건주위가 낸 군사를 데리고 2월에 서울로 와서 우리 군사와 함께 출정하리라고 했다. 헌데 어떻게 이여백을 고르게 되었느냐고 칙사에게 물어보았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조선 국왕께서는 황제의 뜻에 의문을 제기하시는 겁니까?’
여기서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술 좀 따라주고 다른 질문도 해가며 슬슬 파헤쳐 보니 황제의 뜻은 개뿔, 그냥 자기가 상황을 모르는 거였다. 칙사 체면으로 차마 자기 입으로 칙서에 적힌 내용을 모른다고 할 수 없으니 황제의 권위를 방패로 내세운 거다.
왜 이여백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지만 뭐 어떠냐? 이여송만 아니면 됐지. 이여백도 이씨네 아들 중에 하나다 보니 보통 성격은 아니지만, 적어도 형보다는 덜하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형보다 벼슬이 낮다. 그만큼 설칠 수 있는 배경이 약하다.
“신이 생각건대, 그리 복잡한 이유는 없을 듯하옵니다. 요동총병관은 요동을 지켜야 하는데 어찌 임지를 비우고 멀리 왜국 땅에 가겠습니까? 더구나 파병하는 군사 숫자도 너무 적으니, 천장들이 그저 감군 노릇을 하러 가리라는 영상의 추측이 들어맞은 듯하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듯하다.”
윤두수가 자신을 칭찬하는데도 유성룡은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음, 이럴 때 으쓱대지 않는 사람이라서 유성룡이 좋다.
“대국 조정에서는 이여백과 별개로 중앙에서 장수 한 사람을 직접 보낸다고 하였다. 칙서에 적힌 경리왜국순무로 표하군 2백을 거느리고 온다는 양호라는 장수는 어떤 자냐?”
사신으로 중국을 자주 왕래한 이산해가 고개를 숙이며 고했다.
“양호는 본래 문관 출신으로, 달자들과의 싸움에 몇 번 나가 공을 세운 유능한 천장입니다. 단지 2백 기를 거느리고 온다고 하니, 그 역시 감군 노릇을 하러 오는 게 아닐까 합니다.”
경리 양호가 나온다니 정말 다행이다. 신하들 앞에서는 잘 모르는 척했지만, 솔직히 양호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다. ‘이순신은 정말 훌륭한 장수이니 벼슬을 높여 주고 상을 내리라’고 선조를 설득했던 사람이 바로 양호였다.
선조는 이순신을 핍박하면서도 명나라 장수들에게 온갖 아부를 떨었다. 양호는 그런 선조의 행동을 전부 알면서도 선조를 윽박지르거나 위협하지 않고 좋은 말로 설득했다. 그런 명나라 장수들의 관심 덕분에 이순신이 전쟁 말기에 그나마 고생을 덜 할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인 양호가 온다면 대환영이다. 필시 이여백이 뭔가 깽판을 치려고 해도 자기 선을 넘지 못하게 적당히 막아 주리라.
“칙명에 따르자면 건주위에 출병 일자를 통보하고 원병을 청해야 하옵니다. 사자로 누구를 보내시겠사옵니까?”
이번에 보낸 성절사 편으로 보낸 출병 계획은 100% 완성된 게 아니다. 아직 손질할 부분이 약간 남았고, 본래 예정에 없던 명군과 건주위군이 참전하는 만큼 이를 반영해서 수정해야 할 부분도 있다. 그래서 최종 완성본은 동지사 편으로 북경에 보낼 예정이다.
양호와 이여백은 그때 우리가 보내는 작전안을 받아들고 올 예정이라 우리가 그 둘을 직접 찾아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건주위에는 우리가 따로 사자를 보내 출병 일자를 통보하라는 게 명나라 조정의 명이었다. 우리가 ‘도움을 받는’ 거니까 사람을 보내 청하는 게 예의라나?!
어처구니없게 빡치는 소리였지만 할 수 없다. 매년 받아먹는 돈이 있으니 이 정도 꼬장은 들어줘야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날 귀찮게 하는 게 만력제 머리에서 나왔을 아이디어는 아닌 것 같지만, 일단 들어는 주자. 못할 것도 아니고.
“선전관 정여립으로 하겠다.”
나는 정여립을 왜란 종결 이후 오군영 소속 기병대대장으로 임명했다. 본인은 자기 보직에 불만이 많았지만, 워낙 능력이 괜찮다 보니 대대 지휘도 괜찮게 수행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내가 생각이 바뀌었다. 무재가 뛰어난 거야 넘어간다 치고, 정여립처럼 정무적인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재를 그저 단순한 군인으로 두고 전선에 내보내는 게 아까워졌다.
물론 금위사로 다시 복귀 ? 본인이 가장 원하는 ? 시킬 수는 없다. 내 옆에 두고 수족으로 부리고 싶은 거니까 지방관으로 기용하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골라서 내린 직책이 선전관이다.
선전관은 본래 왕명을 출납하는 관직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왕이 특별히 내리는 온갖 잡다한 임무를 다 맡아 수행한다. 정여립 같은 사람을 앉혀 놓고서 내 마음대로 활용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자리라고 할 수도 있다.
“선전관 정여립은 무재가 있을뿐더러 누르하치와 면식도 있고, 여진 말에도 익숙하니 실로 적절한 사자라 할 수 있다. 더 나은 이가 있다면 누가 추천해 보아라.”
정여립이 누르하치를 만난 건 무자년 때 일이다. 정여립은 그때 만주에서 속오군 지휘자로 돌아다닐 때였고, 누르하치는 칙명을 받고 원군을 끌고 왔었다. 정여립은 분명히 기억할 거고, 누르하치도 돌대가리가 아니라면 기억하는 척 정도는 할 게다.
그나저나 내년 봄까지 견서사가 돌아오기는 하려나? 이항복이랑 이덕형, 둘 다 필요한데…제발 도중에 무슨 일 안 당하고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 솔직히 이 시대 장거리 항해라는 게 절대로 안전하고 쾌적한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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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에서 오는 소시지는 맛이 괜찮았다. 워낙 갑자기 대량으로 만들게 한지라 품질관리가 잘 될까 싶었는데, 궁궐 수라간에서 만든 것만은 못해도 꽤 먹을만한 맛은 난다.
“그런데 어째 초리소 맛이 좀 이상하구나. 속에 든 고기가 돼지고기가 아닌 듯한데?”
“연해주에서 보고하기를, 돼지고기가 모자랄 때면 다른 고기를 좀 섞었다 하였습니다.”
“그러냐.”
망할 놈들. 그럼 상자에다 이건 무슨 고기로 만들었다고 적어야 할 것 아냐. 최소한 나한테 진상하는 물건이라면 더더욱. 애초에 병사들한테 먹일 걸 내가 시식하는 거니까, 진상용으로 따로 만든 걸 보내지 않은 점은 칭찬해주겠다. 하지만 내가 뭘 먹는지는 알고 먹어야지.
건주위에 정여립 보내고, 권율과 이순신을 시켜서 원정에 나갈 육군과 수군의 훈련상태를 점검하고, 슬슬 남부지방에 집적하기 시작한 보급물자 수량 확인하는 등으로 만사가 바쁘다. 그래서 세자를 또 끌어내서 내정을 분담시켰다.
세자가 의욕적으로 사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볼 때면, 이 녀석은 전쟁이 자주 일어나는 걸 은근히 반기지 않을까 하는 의혹이 들곤 한다. 전쟁이 한 번씩 발발할 때마다 내가 자기한테 국정을 다룰 권한을 주니 말이다. 무자년 친정, 경인년 친정, 그리고 이번 을미동정 준비까지.
녀석이 기대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번에는 나도 친정까지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원정군을 끌고 일본을 정벌하는 일 자체야 나한테도 로망이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조선은 임금이 중심을 지켜야 유지되는 나라다. 무자년과 경인년에는 어쨌든 내 나라 안에 머물렀지만, 이번에 나가면 꼼짝없이 바다를 건넌다. 그런데 내가 꼭 나가야 할 이유가 없다.
무자년에는 꼭 나갈 필요는 없었지만 내가 전쟁에 한번 나가보고 싶어서 나갔고, 경인년은 정말 나라가 위기라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이려는 심정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친정해야 할 당위성이 없다. 하다못해 일본을 멸망시켜 정복하려는 원정도 아니다. 그건 아예 텄다.
경리 양호의 직책이 ‘경리왜국사무’라는 것부터가 이번 전쟁에 임하는 명나라 측의 태도를 확실히 보여준다. 내 기억대로라면 실제 역사에서 양호는 ‘경리조선군무’였다. 당시 전쟁터가 조선이었으니 대장인 양호가 ‘조선군무’가 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여기선 상황이 달라졌다.
싸움터가 될 곳이 일본이니까 ‘왜국’이라고 한 건 맞다 치자. 직책이 ‘군무’가 아니고 ‘사무’인 건 양호가 할 일이 전투가 아니라 정치교섭이라는 의미가 된다. 역시 명나라 놈들, 싸움은 한 발 뒤로 빠지면서 우리가 피로 얻은 전과를 가지고 정치놀음을 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하다.
“이여송이라면 몰라도 양호처럼 점잖은 양반을 쓱싹해버릴 수도 없고.”
양호와 이여백 때문에라도 이항복과 이덕형을 원정군에 딸려 보내야겠다. 물론 총사령관은 이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해야겠지. 육군은 권율, 수군을 이순신을 사령관으로 해서 보낼 예정이다. 그동안 몇 년을 그렇게 관리하고 준비했는데 실행도 맡아야 할 게 아닌가.
한 가지 고민이 되는 건 이들 두 사람을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을 별도로 임명하는가, 아니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우위에 두는가, 아니면 두 사람을 동격으로 두고 서로 협력하여 싸우게 하는가다. 사실 내 마음이야 바로 이순신을 임명하고 싶지만, 조정 반응을 확신할 수가 없다.
품계는 두 사람 다 똑같은 종1품 비변사 제조다. 조선에서는 관리들의 승진과 강등이 워낙 다이내믹하다 보니 누가 먼저 과거에 붙었는가 같은 문제로 연공서열을 따질 수도 없다. 굳이 따진다면 임오년(1582년)에 붙은 권율보다 병자년(1576년)에 합격한 이순신이 선임이긴 하다.
나이는 또 권율이 8살이나 많지만, 장수의 자리는 나이로 정하는 게 아니다. 능력에 따라서 결정하는 거지. 그런데 사실 생각해 보면 이런 원정에서 총사령관은 굳이 직접 전투를 지휘할 필요가 없다. 전투는 휘하 장수들이 하니, 총사령관은 행정과 조정만 맡으면 되지 않나?
내가 친정을 나갔을 때도 내가 실제로 병사를 지휘하지는 않았다. 그럼 군사행정 능력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는 김명원을 도원수로 앉혀서 수송과 병참 같은 행정을 맡기면 어떨까? 그럼 권율과 이순신은 부원수를 맡아 각기 육지와 바다에서 마음 편히 전투에만 주력할 수가 있다.
서열상으로도 김명원은 병조판서니까 두 사람에게 명령권이 있다. 품계가 낮다지만 그거야 위쪽에 자리가 없어서 못 올라간 거고 말이다. 돌아온 이항복과 이덕형을 체찰사로 임명해서 옆에서 보좌하게 하면 행정 지휘부로서는 완벽할 것 같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사람이 너무 유순해서 아랫사람을 잘 다루지 못한다는 평을 받는 건데, 그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이번 원정에서 김명원이 다뤄야 할 중요한 아랫사람은 딱 2명뿐인데, 권율과 이순신은 상급자한테 함부로 굴 사람이 아니니까 말이다.
“전하, 도원수를 맡길 만한 장수라면 유극량이나 신각도 있지 않습니까?”
“영상의 말도 옳으나, 본국에도 쓸만한 장수를 좀 남겨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무슨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어찌 모든 장수를 왜국으로 보내겠는가?”
유극량과 신각은 경인년에도 내 옆에서 경군을 지휘했다. 이번 원정은 내가 참가하지 않고 도성에 머무를 거니까, 이들 두 사람도 마땅히 내 옆에 남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사람들이 예비대 끌고 나가지.
“나는 병조판서 김명원을 도원수 겸 토왜사로 세워서 왜국에 보내면 좋을 것 같다. 이 일에 대한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중신들이 웅성거리며 각자 논의를 시작했다. 당사자인 김명원은 뭐라고 입을 열지도 못하고 난처한 표정으로 마룻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과연 내가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마음껏 토의해보라고 끼어들지 않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 오늘은 논의를 그만두고 내일 계속해야겠구나 하는 참인데 도승지가 급히 들어왔다.
“전하, 통영에서 파발이 왔습니다! 견서사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무엇이? 벌써?”
신묘년(1591년) 8월에 출발했으니 딱 3년하고 2달 만에 돌아왔다. 길이 잘 풀리지 않으면 유럽까지 편도여행 딱 1번 하면 끝날 수도 있는 시간인데, 벌써 임무를 모두 마치고 돌아왔단 말인가? 가는 길은 10개월밖에 안 걸렸다더니, 오는 길은 또 바람을 얼마나 잘 만났기에?
“그래, 지금 통영에 와있느냐?”
“아닙니다. 유구에서 황을 싣고 온 관선 2척이 통영으로 들어와서 알렸을 뿐이고, 견서사가 탄 배들은 뱃길 안내를 맡은 다른 관선 1척과 함께 벽란도로 직행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수군이 소비할 화약이 많고, 어차피 화약은 부산에서 배로 실어낼 예정이다 보니 통영으로 가져간 유황이 더 많은 거다. 도성으로 직행하는 배에 실은 유황은 군기시로 온다.
“경기수영과 충청수영, 전라우수영에 파발을 띄워라. 만에 하나 견서사가 타고 오는 배들이 사고를 당해 난파하면 최선을 다해 구호하고, 배를 두어서 위험한 여울은 가까이 가지 않도록 안내하라 이르라. 특히 경기수영은 벽란도로 들어가는 안전한 뱃길 안내에 만전을 기하라!”
“예, 전하.”
통영에서 온 통제사 정걸의 장계를 펼쳐보니, 견서사가 몰고 온 배가 무려 4척이나 된다고 했다. 3척은 네덜란드, 1척은 잉글랜드 배라고 했다. 타고 온 유럽인 숫자는 600명에 달했다.
“그중에 선원 200명은 금방 돌아간다지만.”
모를 일이다. 과연 바로 돌아갈지, 조선과 아시아에서 뭐나 돈벌이를 찾으려 할지. 녀석들이 무슨 궁리를 하건 나는 나한테 이익이 되도록 놈들을 써먹을 방법을 고민해야겠다.
“도원수를 정하는 일은 며칠 후에 결론을 내리자. 일단 개성에 행차할 준비를 해야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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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조선인가요.”
롤리타가 갑판에 서서 육지를 바라보았다. 스페인과는 다른 형상의 땅, 다른 모양의 나무가 자라고 다른 모양의 집이 있었다. 그녀가 탄 갈레온 옆을 지나가는 작은 어선들도 유럽과는 무척 다르게 생겼다. 옆으로 다가간 이항복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그렇소이다. 그대가 선택한 나라요. 전에도 일렀지만, 혹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전하께 청하시오, 세뇨리타 롤리타. 분명 전하께서 배편을 마련해주실 거요.”
“제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돈 항. 돈 덕이 이미 결혼했고, 부인이 살아있다면야 당연히 저는 기다릴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이건 제가 선택한 길이니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어요.”
배를 타고 오는 동안 나이를 먹은 덕분에 롤리타는 18세가 되었다. 나이를 더 먹어서인지 키도 좀 커졌고 태도도 카디스에서 이항복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침착해졌다. 이덕형에게 던지는 굳은 애정도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음, 그 문제라면 그것도 전하께 도움을 청해 보시오. 저 머저리가 여인의 마음을 알아줄 줄 모른다고 말이오. 뭔가 대책을 세워 주실 게요.”
이항복이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임금이 이 사연을 알면 글쎄, 이덕형에게 롤리타를 첩으로 삼으라는 어명을 내리는 정도로 해결하지 않을까 싶었다. 일이 그렇게 되면 이덕형의 장인인 이산해 대감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혼자 키득거리며 웃던 이항복이 뒤쪽 갑판으로 가자 롤리타는 다시 해변을 바라보았다.
조선으로 오는 뱃길은 꽤 즐거웠다. 같은 배에 탄 네덜란드인들은 모두 가톨릭 신자들이라 스페인 귀족인 그녀와 어울리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덕분에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과연 이 동방의 나라에서는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과연 이덕형은 자신을 받아들여 자기 집으로 들일까? 설마 이 먼 곳까지 따라왔는데 유럽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는 않겠지?
조선에 적응하기 위해서, 오는 동안 이항복에게 조선말도 열심히 배웠다. 조선 예절도 조선 국왕 앞에서 실례를 범하지 않을 정도는 익혔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조선 수도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