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4
1부 0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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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지끈거렸다. 전주에서 유명한 명주라며 대접받은 이강주가 좀 과했던 모양이다.
“음, 좀 덜 마실 걸 그랬군.”
전라감사와 함께 벌인 사냥은 비교적 흡족했다. 총을 선보여 상당한 찬탄을 받았고, 대물은 잡지 못했으나 사슴 십여 마리와 꿩 백여 마리를 잡았다. 이만하면 사냥에 참가한 군사들에게 상을 주고 뒤풀이로 주연을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거, 역군들에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밑을 조심하라 일러라.”
“예, 전하.”
사흘 전 눈이 왔다는데도 길에는 눈이 전혀 없었다. 주변 고을 백성들이 총동원되어 어가 행렬이 지나갈 길을 쓸었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확실히 민폐가 크긴 하군. 북도 순행을 갈 때는 꼭 눈이 오기 전에 마쳐야겠다.”
군대에 있을 때 모 정당 총재가 한 번 우리 섹터에 온 적이 있다. 하필이면 겨울에 왔고, 그것도 눈 내리는 날에 오는 바람에 밤새 미치도록 눈 쓸던 기억이 났다. 망할 놈의 새X, 생색내러 왔으면 그냥 소초에서 생색이나 내고 가지 미쳤다고 철책선은 왜 와???
가마를 타고 천천히 흔들리며 가고 있으려니 졸음이 왔다. 본래대로라면 왕이 타는 가마는 연(輦)이라고 해서 사방에 벽이 없고, 단지 구슬로 된 주렴을 드리우게 되어 있다. 하지만 계절이 겨울이다 보니 이번에는 송판에 누비솜을 붙여 탈착식으로 만든 벽을 준비했다.
방한용으로 붙인 벽이지만, 지금처럼 내가 남의 눈을 피해 쉬고 싶을 때도 쓸모가 있었다. 벽판에 기댄 자세로 잠시 몽롱해져 있는데 갑자기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놈이냐! 감히 누가 무엄하게 어가 행렬 옆에서 이리 시끄럽게 구는 것이냐?”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 참인데 쇠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니 짜증이 확 치밀었다. 연유를 따져볼 생각도 없이 고함부터 나갔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어떤 백성이 격쟁을 하고 있사옵니다.”
급히 달려갔다 온 도승지가 허리를 숙여 보고했다. 내 인상이 찌푸려졌다.
“격쟁?”
격쟁(擊錚)이란 임금이 거둥할 때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이 임금을 잡고 직접 민원을 넣는 행동이라고 아주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주의를 끌기 위해 꽹과리를 친다. 도성에서도 내가 말을 타고 나가면 적어도 한 달에 두 번 이상은 뭔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사오나, 지금 동부승지가 사정을 청취하고 있사오니 조금만 기다리시옵소서. 곧 정리한 문서를 가지고 오겠나이다.”
“아니, 과인이 직접 이야기를 듣겠다. 잠시 행렬을 멈추도록 하라.”
격쟁으로 들어온 민원은 담당 관리가 문서로 작성하여 보고하는 게 관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느긋하게 들을 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 기껏 이 먼 길을 왔는데 백성의 소원 정도는 직접 대면하고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한숨 잤는데도 속이 미식거리고 머리가 띵한 것이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흔들리는 가마를 잠깐이라도 세우고 쉬고 싶었다. 만약 쓸데없는 용건으로 날 세운 거라면 혼구멍을 내 줄 테다.
– 8 –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동부승지에게 이끌려온 사내는 땅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 아니다 보니 별 감흥은 없었다. 어차피 속도 메스껍고 해서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좀 더 기다려 주려고 했는데 내금위 무사들이 사내를 다그쳤다.
“네 이놈! 전하께 어서 대답을 올리지 못할까!”
“소, 소인은 정읍 고을에 사는 김, 김가라고 하옵니다.”
“그래. 무슨 연유로 과인이 지나가는 길에서 격쟁을 벌였느냐?”
어차피 이번 순행은 도로를 닦느라 경로가 사전에 다 알려졌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격쟁을 할 수도, 저격을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전주를 지날 때까지 행렬에 뛰어든 자는 아직까지 하나도 없었다.
사실 무리도 아니다. 지방관들도 바보가 아니지 않은가. 만약 임금에게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자가 하나라도 있으면 자기 목이 위험하다. 분명 자기 고을 안에서 뭔가 문제를 일으킬만한 자들은 사전에 압력을 가하거나 미리 붙들어 놓았을 게 분명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어가행렬이 지나가는 연도에 엎드리거나 늘어서 있는 백성들 사이사이에도 분명 일반인이 아닌 이들이 자주 섞여 있었다.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혹 이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살피는 눈길을 보건대, 분명 수령들이 배치한 인원이 분명했다.
좋게 보자면 이들도 경호인력이다. 하지만 아마 그 임무 중 주된 부분은 자객 방지보다는 누군가 지금 이 사내처럼 임금 앞에 뛰어들지 못하게 사전에 제지하는 역할이겠지 싶다. 물론 내 심증일 뿐이니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고.
“쇠, 쇤네, 상감께서 베푸시는 은덕으로 살고 있사오나, 저, 아니, 그게, 뭐시기라 할까….”
임금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는 건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지금 내 컨디션은 그걸 다 이해하고 받아줄 상태가 아니었다. 말이 험하게 나갔다.
“어차피 예법대로 말하는 법도 모르지 않느냐? 그냥 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대로 말해라. 네가 성의껏 말하기만 하면, 네 태도를 보고 무엄하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 예!”
젠장, 이래서 격쟁을 하려는 백성이 나오면 임금이 직접 대하지 않고 담당자가 민원 내용만 적어오게 하는 거였군. 무식한 백성이 말실수를 해서 임금이 짜증나게 하는 사태를 막으려고. 나도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제, 제발 차 공납을 줄여 주시옵소서! 동리 사람들이 모두 호식을 당할 판이옵니다!”
뭣이라고? 차? 호랑이? 뜬금없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다소 횡설수설하긴 했으나 사내의 진술을 정리하면 이랬다.
본래 정읍에서는 특산품으로 녹차가 난다. 당연히 좋은 차를 모아서 도성에 진상하고 있다. 헌데 현감이 바뀐 뒤로 최근 2년 동안 진상하라는 녹차의 양이 계속 늘어났다. 올해는 3년 전에 비하면 무려 세 배 가까운 양을 바쳐야 했다.
차나무는 재배하지 않는다.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나무에서 잎을 따다가 손질해서 차로 만들어야 하는데, 요구량이 계속 올라가니 당해내는 재주가 없다. 양을 채우라는 닦달에 지친 몇몇 백성들은 아예 나무가 말라죽을 지경으로 잎을 훑어내기도 했다.
“아니, 그러면 내년에는 어찌 잎을 얻는단 말이냐?”
“내년이 되기 전에 소인들이 죽을 판이옵니다.”
그렇게 잎을 긁어모아도 양을 채우지 못하면 다른 길이 없다. 내장산으로 들어가 깊은 골에 있는 차나무까지 찾아서 잎을 따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날이 어두워져도 산에서 내려오지를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때 호랑이가 덮치는 것이다.
“지난 2년 동안 저희 동리에서만 여섯 명이 호식을 당했습니다요. 상감마마, 소인이 이렇게 빌겠사오니 제발 차를 예전만큼만 드시면 아니 되실는지요?”
이 백성으로서야 진상품으로 올라오는 차가 나 혼자 마시는 게 아닌 줄을 알 리가 없겠지. 애초에 난 녹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예 안 마신다(…).
내가 안 마신다고 해서 쓰임새가 없는 건 물론 아니다. 공물로 들어오는 녹차는 궁궐 내에서 소비되는 양도 있고, 각종 다례에서 쓰기도 한다. 신하들에게 하사품으로 내려주기도 한다. 차를 좋아하는 여진족 추장들에게 사여품으로도 약간 나간다. 용도는 다양하다.
문제는 공물로 받은 차를 어떻게 쓰느냐가 아니라 그 양이 멋대로 부풀려졌다는 데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공물을 기존에 바치던 양보다 더 많이 바치라는 지시를 내린 적이 한 번도 없다! 백성들에게 주는 부담이 전세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이다.
곡물로 내는 전세는 토지 면적에 따라 세액이 결정되는 재산세다. 하지만 공납은 가호(家戶)당 얼마씩 부담해야 하는 사실상의 인두세다. 게다가 특산물, 즉 구하기 쉽지 않은 물건들을 내기 때문에 마련하기도 전세보다 더 힘들다. 가난한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세금이다.
“만약 관아에서 요구하는 양을 바치지 못하면 어찌 되느냐?”
“사람이 호식을 당했으면 별 말 없이 넘어가지만, 호식도 당하지 않고 찻잎도 모으지 못하면 방납을 해야 한다면서 쌀이나 베로 대신 물어내야 하옵니다. 차를 따느라 농사도 제대로 못 짓고 길쌈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어찌 쌀과 베가 있겠사옵니까, 마마!”
이런 판이라면 백성들이 호랑이가 습격할 위험성을 무릅쓰고 산에서 찻잎을 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호랑이를 피한들, 관아에 있는 사또와 아전들은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어허,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 하더니 이게 바로 그 짝이구나! 도승지! 지금 정읍현감이 도대체 누구인가?”
도승지 이세영이 잔뜩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김완구라 하옵니다. 이곳 현감으로 온지 거의 3년이 되어 이임할 때가 다 되었사옵니다.”
옆에서 잔뜩 얼어 있는 전라감사에게 정읍현감이 하고 있는 짓을 아느냐고 물어 봐야 대답이 나올 리 없겠지. 직접 가서 족쳐 보자.
“순행을 재개한다! 가급적 빠른 속도로 정읍 관아로 가라!”
헌데 정읍은 원래 내일 밤에 숙박할 예정지였다. 명령부터 내리고 나서 보니 이 긴 행렬을 이끌고 오늘 안에 도착하기는 좀 무리겠다 싶었다.
“겸사복장! 당장 그대가 거느린 군사들을 모두 몰고 달려가 정읍현령을 구금하고 아전들도 전원 관아 안에 가둬두도록 하라. 문서는 종이 한 장 없애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내일 과인이 도착하여 친국하겠다. 여기 증표로 과인의 마패를 가지고 가라.”
“예, 전하!”
겸사복장이 말을 달려 급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돌리자 아까 격쟁을 한 백성이 아직도 바닥에 엎드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과인이 직접 가서 전말을 알아보겠다. 만약 현감이 잘못한 바가 드러나면 마땅한 벌을 주고 네게도 상을 내리겠지만, 만약 현감이 무고하다면 네놈은 중한 벌을 받으리라.”
본래 조선에서는 지방민이 어떤 연유에서건 수령을 고발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유교적인 관념에 따르면 수령은 어버이고 백성은 그 자녀이기에, 수령을 고발한다 함은 곧 패륜이기 때문이다. 예외가 되는 경우는 종묘사직에 위해를 끼쳤거나 불법적인 살인을 저지른 때뿐이다.
다만 이 사건에서 정읍현령이 한 일은 유죄로 보인다. 마땅히 임금에게 바쳐야 할 공납품을 규정보다 부풀려 횡령했다면, 넓게 해석하면 분명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니까.
– 9 –
“어명이다!”
본래 통보된 대로라면 어가는 내일 오기로 되어 있었다. 임금을 맞이할 준비로 한창 바쁜 정읍 관아에 난데없이 기병 백여 기가 달려왔다. 붉은 철릭을 입고 말안장에는 활과 화살주머니를 달고 있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말을 세우며 거세게 고함쳤다.
“현감은 어디 있느냐? 당장 나와 오라를 받으라!”
“누구시기에 이리 행패십니까? 사또께서는 지금 바쁘십니다!”
이방이 나서서 정문을 막으며 따졌다.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또는 고을에서 제일가는 사람으로서 임금을 대리한다. 저렇게 아무나 마구 불러대도 되는 사람이 아니다.
“어디 아전 따위가 함부로 나서느냐? 내 어명이라 하였다! 여기 마패가 보이지 않느냐? 당장 현감을 불러오렸다!”
우두머리 기병이 내민 마패를 보고 아전들이 숨이 멎을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패에는 열 마리나 되는 말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보통 관리들이 가지고 다니는 마패에는 기껏해야 말 두 마리에서 다섯 마리가 있을 뿐이다. 열 마리가 새겨진 마패는…임금 전용 마패다!
경악한 아전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기병들의 우두머리가 호통을 쳤다.
“나는 겸사복장이다! 상감께서 내리신 증표를 확실히 보았으면 당장 현감을 불러오너라!”
아전들을 향해 호통을 치던 겸사복장은 곧바로 휘하 기병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희는 즉시 관아로 들어가 모든 문서를 확보해라! 모든 곳간 문을 봉쇄하고, 누구도 관아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라!”
“예, 나리!”
말에서 내린 기병 수십 명이 관아 안으로 쇄도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창을 들고 정문을 막고 있던 정읍 관아 군사들은 그대로 떠밀려 넘어지고, 이런저런 물건들을 나르던 관노나 관비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나, 나리, 어찌 이러시옵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옵니까!”
관아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문 부서지는 소리를 들은 이방이 사시나무 떨 듯 떨며 외쳤다. 겸사복장이 말 위에서 그런 이방을 내려다보며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너희 사또가 감히 상감마마의 이름을 팔아 나라의 재물을 훔쳤다. 네놈도 마땅히 같이 벌을 받아야 할 터! 얘들아, 이놈을 묶어라.”
남아있던 기병들이 삽시간에 이방을 결박했다. 마침 관아 안에서 기병 하나가 뛰어나왔다.
“나리, 현감을 잡았습니다! 월담하여 도망가려는 것을 잡아 끌어내려 결박해 놓았습니다.”
“잘 했다! 아전들도 모두 붙잡아 가두어 두라. 그리고 내일 전하께서 오실 때까지 엄중히 지켜라.”
“예, 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