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68
2부 446화
– 8 –
하카타에서 데려온 왜인 길잡이는 능숙하게 뱃길을 안내했다. 장도(長島, 나가시마), 평군도(平郡島) 등 여러 섬을 지나서 눈앞에 길게 뻗은 옥대도(屋代島, 야시로시마)를 돌아 들어가니 넓은 만이 펼쳐졌다. 여러 섬이 주변을 삥 둘러싸서 보호하는 좋은 항구였다.
“저 북쪽에 광도(?島, 히로시마)성이 있다 하였는가.”
눈앞에 급히 북쪽으로 물러나는 왜선 10여 척이 보였다. 조선군이 내해를 동진하는 동안에 미리 연락을 받고 저기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적의 정탐선인 듯합니다.”
“본진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니, 저들은 전투를 회피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만약 모리가 조선 수군과 결전을 벌일 생각이었다면 이미 나와서 진을 치고 있었을 것이다. 조선 수군이 접근하는 건 이미 한참 전부터 알 수 있었을 테니까. 도중에 지나친 여러 섬에는 분명히 적의 초소가 있었을 터이다.
“봉화는 솟지 않았지만, 굳이 봉화를 피워올릴 필요도 없지.”
봉화는 양날의 칼이다. 자기편에게 바로 알릴 수 있는 대신 적에게도 보인다. 조선 수군이 그 신호를 보고 더 빨리 움직여 히로시마를 치게 만들 수도 있다. 아군이 바깥 바다를 도는 동안 신호기를 흔들거나 전령을 보내는 등, 안전한 연락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참모장. 모리 씨의 거성(居城)은 함포로 공격할 수 있는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길잡이가 말하기를, 바다에서 성까지 닿으려면 곧장 움직여도 10리가 넘는다고 합니다. 24근 포라고 해도 포환이 거기까지 날아가 맞지 않습니다.”
24근 포에 화약을 최대로 넣으면 5리, 약 1600보를 날아간다. 그 이상 멀리 떨어진 적을 공격할 수 있는 화기는 아직 없었다.
“대판(오사카)으로 가는 길을 여는 일이 우선이고, 야별기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으니 우리 손만으로 광도성을 공격할 수는 없겠구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리 군이 절대 히데요시를 지원하지 못하게 하는 게 야별기의 첫 번째 임무다. 여진족들이 지금 자기 영토를 휩쓰는데 어찌 모리가 군사를 오사카로 보내겠는가? 원래 히데요시와 같은 급의 영주였고, 딱히 충성스럽지도 않다고 했는데 말이다.
“허나 우리 군 수송로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라도 모리 수군은 격파하고 가야 한다. 곧 도착할 조방장 이운룡의 전선을 기다려 결전하겠으니, 오늘은 여기 옥대도에서 경야해야겠다. 각 전선에서 등선군을 차출하여 섬에 있는 적을 소탕하라.”
세심히 살폈지만, 옥대도에는 이미 인적이 텅 빈 마을은 여럿 보였지만 왜군이 세운 보루나 포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병력도 얼마 없을 것이다. 등선군 수백이면 충분히 평정할 수 있을 터였다.
“예, 대원수 대감.”
이운룡을 기다리는 이유가 전선이 부족해서는 아니다. 지금 이순신이 거느리고 있는 함선은 대전선 3척, 거북선 5척, 일반 전선 58척이다. 모리 씨의 본거지인 히로시마에는 왜선 2백여 척은 족히 있다는 게 이억기가 붙잡은 포로의 진술이었다.
이억기는 20척을 거느리고 왜선 70여 척과 정면으로 싸워 35척을 불태웠다. 그리고 나포한 6척은 당당하게 끌면서 귀환했다. 갑판 가득 태운 포로들은 덤이었다.
이번에 잡은 왜병들은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밑에 있던 병사와 격군들이었다. 이들은 모리 측이 처한 정확한 상황은 몰랐지만, 남아있는 모리 수군의 전선 규모에 대해서는 대략적이나마 알고 있었다. 2백 척이면 쉬운 상대다.
그런데도 이운룡을 기다리는 건 이운룡이 배에 가득 싣고 오는 등선군 때문이다. 이운룡은 전선은 12척밖에 거느리고 있지 않지만, 조운선 40척에 탄 등선군 3천 명을 데려오고 있다. 3천 등선군이 도착하면 이순신은 한결 더 자유롭게 군사를 움직일 수 있다.
잠시 지시를 멈춘 이순신은 하카타에서 받아온 지도를 펼쳐 들고는 주변 지형과 꼼꼼하게 대조해보았다. 대체로 지도와 맞았으나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하카타 왜인들은 자기들이 지도 따위 없어도 잘 돌아다니니,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는 일에 큰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다.
“혹시 지도에 없는 샛길이 있어서 그리로 움직인 적선이 우리를 기습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좌위에 속한 판옥선 12척을 빼서 주변을 돌며 적세를 살피게 하라. 그리고 부안에서 데려온 내달국 화공들에게 이곳의 수심을 재고 상세한 해도를 그리게 하라.”
“예, 대감.”
내달국(來達國)은 네덜란드를 말한다. 견서사로 유럽에 다녀왔거나 서양 말을 익힌 사람들은 그리 어색하지 않게 ‘네덜란드’라는 낯선 단어를 입에 담았지만, 조선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이 발음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온 비공식 한자 표기가 ‘내달국’이다.
산천과 바다의 형상 정도는 조선 화공들도 그려낼 수 있다. 하지만 항해에 쓸만한 정확한 해도를 제작하는 솜씨에서는 내달인들 솜씨가 훨씬 좋았다. 섬과 바다의 정확한 형상은 물론, 수심까지 꼼꼼히 재면서 배가 다닐 수 있는 경로를 확인했다.
내달인들은 꼭 화수분 같았다. 유용한 재주를 지닌 이들이 참으로 많으니 말이다.
어쨌든 조선 수군이 내일까지 진행할 계획은 이제 결정이 됐다. 이순신은 이운룡이 도착한 뒤의 계획에 관해서도 계속 지시를 내렸다.
“광도성을 지키는 왜 수군을 격파하고, 광도만에 우리 거점을 만들어서 광도성에 있는 적장 모리에게 언제라도 우리 수군이 놈의 성을 칠 수 있음을 똑똑히 보여준다. 그리고 물러나서 내해를 동진하면서 다음번 거점을 얻도록 한다.”
히로시마 만은 여러 섬으로 둘러싸인 좋은 항구다. 오늘 경야하기로 한 옥대도(야시로시마) 말고도 다른 섬들도 배를 대기 좋은 포구가 많다. 다만 육지에 가까운 요지인 만큼 적이 이미 아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을 공산도 크다.
“지금 우리에게는 광도를 공략할 거점이 아니라 대판으로 가는 길에 쉬어갈 곳이 필요하다. 뱃길에서 너무 멀리 돌아가도 곤란하니, 등선군이 오면 여기 창교도(蒼橋島, 구라하시시마)를 점령케 해서 거점으로 삼도록 하자.”
모든 섬을 공략할 여유는 없다. 하지만 언뜻 보아도 히로시마만 동쪽 절반을 완전히 막아선 창교도는 중요한 섬이었다. 저 섬을 차지하면 육지 쪽 움직임을 견제하면서 여러 섬 사이로 뚫려 있는 수로도 완전히 내려다볼 수 있게 될 터였다.
“어차피 놈들에게 퇴로는 없다. 천천히 몰아넣고 압박하도록 하라.”
히로시마만을 드나드는 주된 통로는 이미 이순신에게 막혔다. 샛길이 있다 해도 수백 척에 이르는 배를 일시에 빼낼 수는 없을 터, 조선 수군이 내보낸 척후선에게 포착될 수밖에 없다. 그럼 남은 배들은 샛길에 갇힌 채 섬멸당할 뿐이다.
“내일 이 조방장이 도착하면…이런, 이 조방장이 둘이나 있으니 혼동의 여지가 있군. 이제 함대를 재편하여 이운룡을 좌위장, 이억기를 우위장으로 하겠다. 그리 알고 전파하라.”
“예, 대감.”
이순신 본인도 이씨, 참모장 이시언도 이씨, 좌우 위장을 맡을 두 사람도 이씨, 그 외에 또 이씨 성을 가진 장수가 참 많기도 했다. 이순신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력 전선들에게 경야를 지시하고 선실로 들어갔다. 주변 경계는 늘 그렇듯이 철저했다.
– 9 –
또 말떼 하나가 왔다. 등에는 짐을 잔뜩 얹고, 목에 칼을 쓰고 두 손이 칼에 묶인 왜인들이 고삐를 잡았다. 그 옆에는 생선 두름처럼 줄줄이 묶인 여인네들이 묶여서 끌려오고 있었다.
“행군 속도가 느려진다. 노략질 좀 작작 해라, 이놈들아.”
정여립이 혀를 찼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욕심으로 눈이 뒤집힌 여진 추장들은 눈에 띄는 모든 마을을 습격해서 곡식과 가축, 여자를 빼앗았다. 저항이 심한 큰 마을이나 도시는 일단 피했지만 허술해 보이는 표적이 있으면 놓치지 않았다.
“어이, 통변. 거기 잡혀 온 왜놈에게 여기가 어느 지방인지 물어보아라.”
통변은 일기도 출신 왜인이라, 이곳 ‘중국’ 지방 왜인들이 고초를 겪는 데 대해서 동정심을 품지는 않았다. 그저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뿐이었다.
“이와미, 그러니까 ‘석견(石見)’이라 합니다, 나리.”
“그런가. 아직 석견국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이지.”
정여립이 인상을 찌푸렸다. 약탈에 눈이 뒤집힌 야인 추장들 때문에 자신이 상정한 것보다 이동 속도가 훨씬 느렸다. 오늘은 6월 6일, 일본 본주(혼슈) 땅에서 배를 내린 지 벌써 닷새가 지났다. 그런데 아직 이와미라니.
“나리, 그게 당연한 겁니다. 산을 넘어가면 또 산이 나오는 이 산인도(山陰道)에서 북방처럼 말을 달릴 수는 없습니다요.”
야인 추장 김파라속(金把剌速)이 옆에서 해죽거렸다. 화가 치솟은 정여립이 소리쳐 쫓았다.
“시끄럽다!”
아무리 길이 험하다고 해도 핑계가 안 된다. 정여립은 하루 100리만 움직여도 지금쯤이면 히로시마에 닿을 수 있다고 계산했었다. 그래야 이순신과 함께 히로시마를 칠 수 있으니까.
물론 정여립도 야별기 전체를 거느리고 하루 100리를 움직이겠다는 말도 안 되는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대동하고서 이동하는 정예 1천 기만이다. 나머지 9천 기는 모리 령 전체에 흩어져서 약탈을 자행하며 적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게 야인들의 특기 아닌가.
야별기는 북부에 남은 온갖 잡다한 부족 세력을 쓸어모아 편성한 부대다. 해서부 잔당들을 주로 하면서 여타 소부족 다수를 동원했다. 일본에서 거둘 재물을 미끼로 걸자 각 부족에서는 앞다투어 전사를 내보냈다. 남은 부락 대부분이 거의 비었을 정도다.
사실 부여주에는 이제 남은 여진 부족이 얼마 없었다. 3차에 걸친 대규모 전란으로 반란에 동참했던 많은 부족이 죽거나 도망치고 붙잡힌 이들은 노비가 되었다. 당연히 여진족 인구가 크게 줄었다.
조선을 배반하지 않고 충성을 지킨 이들이라고 해서 평화롭게 지낸 것도 아니었다. 해서가 완전히 망하고 나자 조선 관리들은 경계의 눈길을 내부에 있는 여진 부족들에게 돌렸다.
차츰 자신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토사구팽당할 위험이 커지고 있음을 깨달은 야인들은 다른 곳에서 살길을 찾았다. 송화강을 넘어 건주위로 도망가는 자들이 속출했고, 그들이 버려두고 간 땅은 남쪽에서 새로 내려온 조선인들이 차지했다.
예전처럼 당당하게 사는 야인들은 오도리와 왜인여진밖에 없었다. 생활이 어려워진 여진족 일부는 스스로 이들의 산하에 들어가 예속민이 되는 길을 선택할 지경이었다.
지금 왜국에 건너온 야별기는 그렇게 쇠락한 부여주 야인들이 쥐어짜고 쥐어짜서 만들어낸 병력이었다. 왜국에서 한몫 제대로 잡아 돌아가서 부족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말이다.
“과연 네놈들이 그 노략물을 가지고 집에 돌아갈 수는 있을 성싶으냐.”
진격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난 정여립이 투덜거리며 내뱉었다. 하지만 이건 그저 저주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야별기는 아마 절반도 돌아가지 못할 터였다.
왜인들이라고 당하기만 할 리는 없다. 함정도 팔 것이고 복병도 둘 것이다. 어쩌면 흩어져 움직이는 다른 야별기 부대 중에는 이미 매복에 걸려 큰 피해를 본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작은 무리로 흩어져 다닐 놈들이 아무래도 쉽게 당하겠지.”
큰 무리가 도적질하면 더 큰 목표를 노리기 쉽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각자가 분배받는 몫은 적어질 수 있다. 그래서 재물을 많이 챙기고 싶은 놈들은 따로 작은 무리를 만들어 움직이고 있음을 정여립도 알았다. 본대 격인 1천 기 중에도 3백 기가 벌써 그렇게 이탈했다.
왜인들은 본래 거칠고 사납다. 야인들이 많이 쳐들어오면 당연히 겁을 먹겠지만, 그 숫자가 생각보다 적고 머리가 오직 도적질할 생각으로 차 있음을 알면 분명 반격을 시도하리라.
“어쩌랴, 다 이놈들이 과욕을 부려 당하는 액(厄)인 것을.”
울면서 몸부림을 치는 왜녀들을 붙잡고 킬킬거리며 풀숲으로 끌고 들어가는 야인들을 보며 정여립이 혀를 찼다. 자신이 직접 따라붙은, 나름 정예라는 패거리도 이 꼬라지로 노략질에 미쳐 있는데 과연 다른 놈들은 어쩌고 있을지 빤히 보였다.
“장문국(나가토)이라도 벗어난 놈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래서야 모리 령 한쪽 모퉁이를 도적질할 뿐, 놈을 위압하여 도원수 앞에 엎드리게 한다는 애초 목표는 물 건너간 일이 되어 버리지 않는가.”
이순신이 수군으로 히로시마를 공격하면 모리 데루모토는 겁을 먹고 성에서 도망칠 공산이 크다. 그때 정여립이 히로시마 인근까지 도착해 있다면 놈을 사로잡고 모리 령 전역을 손에 넣을 수도 있었다. 만약 성공하기만 하면 이번 전쟁이 시작된 이래 가장 큰 공이 되었으리라.
“젠장, 그런데 저 도둑놈들 때문에!”
정여립은 괜히 혼자 욕을 했다. 망할 놈들, 평생 그 좋아하는 도적질이나 실컷 하라고 몽땅 왜국에 버려두고 가버릴까 보다. 저놈들이 없어지면 요동 땅이 비어서 우리 백성들을 사민할 수 있게 되니까 아마 상감마마께서도 기꺼워하시리라.
– 10 –
조선 수군은 야시로시마에 진을 치고 휴식에 들어갔다. 혹시 적이 그대로 지나치지 않을까 하면서 숨죽이고 기다리던 모리 수군은 꼼짝없이 히로시마만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기에 일찌감치 출항해서 가토 요시아키 군과 합류해야 했소!”
“아니, 주군을 버려두고 함대만 빼돌려서 무엇을 한단 말이오?”
이들도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연합함대가 조선 수군에게 패했음은 알았다. 도주하던 요시아키가 연락선 한 척을 보내서 자신이 패했음을 알리고, 모리 수군도 서둘러 만 밖으로 나와 합세하자고 제안했다. 한 척이라도 많은 함대를 모아 이순신과 싸우자며 말이다.
‘내 영지 동쪽에 있는 도쿠이 미치토시 공은 본래 수전의 명가인 구루지마 가 출신이오. 그 전력과 합세해야 우리가 좀 싸워볼 전망이 보일 테니, 어서 나오시오.’
연락은 받았지만, 모리 수군은 출격하지 않았다. 이유는 있었다.
“조선 수군은 오사카로 직행할 거라 했잖소! 태합 전하를 목표로 온 자들이니 우리가 싸울 태세를 보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냥 지나가리라고 말이오! 그대들이 주장한 바에 따라서 우리 수군이 포구에 머물렀는데도 적이 왔으니, 이 일을 어쩔 거요?”
“우리라고 일이 이렇게 되기를 바랐겠소!”
아직도 조선과 히데요시 중 어느 편을 선택할지 결정하지 못한 데루모토는 이 문제에서도 왔다갔다 하는 결정을 내렸다. 함대를 내보냈다가 외양에서 조선 수군과 조우하면 끝장이라는 생각이 들어 잡아두었는데, 이렇게 되고 보니 후회막급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소! 결전이오! 모든 전선에 최대한 병사를 태우고, 에다지마에 구축해 놓은 포대까지 동원해서 적과 결전을 벌여야 하오!”
지난 조선 원정에서 당주인 모리 데루모토는 수전에 나서지 않았어도 휘하에 있던 무장 중에는 수전에 차출된 경험이 있는 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조선 수군과 정면으로 대결하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 잘 알았지만,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역설했다.
정찰선이 목숨을 걸고 다가가 센 적선 숫자는 대략 70척. 게다가 그 안에는 메구라부네까지 섞여 있다. 지금 모리 군이 보유한 200여 척으로는 분명히 상대도 안 되지만, 결사의 각오로 싸운다면 뭔가 성과를 거둘 수도 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사절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합시다. 그리고 오사카 공격에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히는 거요!”
“그게 무슨 소리요!”
히데요시의 직신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가메이 고리노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에 찬 칼을 잡았다. 주변에 있던 모리 군 무장들도 급히 칼자루를 잡았지만, 다행히 가메이는 칼을 뽑아 겨누지는 않았다.
“쿠마가이 공! 제정신이시오? 태합 전하께 반역하겠다고? 데루모토 님! 모리 가에서는 저런 반역적인 언사를 두고 보기만 하실 겁니까!”
당황한 데루모토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신하들의 얼굴에 떠오른 기색을 보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베어라…!”
가메이 고리노리가 미처 칼을 뽑을 여유도 없었다.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모리 군 무장들이 칼을 뽑아 사방에서 찔렀다. 가메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가메이 군 병사들에게는 절대 비밀로 해라. 그리고 싸움에는 놈들을 선두로 내세워라.”
“주군! 항복하시려고 가메이 공을 죽인 게 아닙니까?”
깜짝 놀란 쿠마가이 모토나오가 소리쳤다. 그 역시 피 묻은 칼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니다. 생각할 시간을 얻…기 위해서 한 일이다.”
조선 수군이 공격을 개시하려면 내일 아침은 되어야 한다. 데루모토는 그때까지 조금이라도 더 고민하고 싶었다. 하지만 가메이 고레노리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한은 철저항전 외에는 다른 답이 나올 수 없었다. 가메이의 죽음이야 어떻게든 덮을 수 있다.
주군이 아직도 결단하지 못했음을 확인하자 곧 중신들은 두 패로 나뉘어 설전을 재개했다. 결론은 쉽게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