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76
2부 4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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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 굳이 숨길 이유가 어디 있으랴. 이항복은 함께 데려온 타치바나 무네시게를 이 자리에 불러다가 통변으로 앉혔다. 일본 내 사정을 빤히 아는 통역이 있으니, 저쪽에서도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하지는 못하리라.
“그래, 오사카에서는 다들 평안하시오? 태합 히데요시는 건강한지?”
이항복은 눈앞의 왜장이 우중문을 찾아간 을지문덕과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조선군 진영을 찾아왔으리라고 생각했다. 조선군의 형편을 살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심산이리라.
어차피 본대가 당장 오사카 공략을 시작할 것도 아니다. 하루 이틀 정도는 여기 더 머무를 테니, 요시타카를 맞아 이야기를 나눈들 지장을 받을 일은 없다. 이항복은 느긋하게 마음을 먹었다. 어디, 한번 실컷 들여다봐라. 그리고 계속 맞설 생각이 들면 덤벼도 좋고.
마침 경리 양호가 익숙하지 못한 선상생활 때문에 토사곽란을 일으켜 히로시마 앞, 창교도(구라하시시마)에 머물러 있는 것도 이항복에게는 호재였다. 만약 양호가 여기 있었으면 그를 회견에 참여시키지 않을 수 없는데, 낙오해 준 덕분에 마음대로 대화를 주도할 수 있게 됐다.
“그렇…소이다.”
“그래야지. 그래야 지난번 전란의 일을 우리 전하께 사죄할 수 있을 게 아니오? 한양까지 칼을 쓰고 여행하려면 보통 체력으로는 어려울 거요.”
“아직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그건 너무 심하신 말씀이 아니오?”
히데요시를 보고 칼을 쓰고 조선 국왕에게 직접 출두하여 사죄를 바치라고 했으니 구로다가 화가 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관복을 철저하게 차려입은 이항복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뭐 타당한 사유가 있으면야 이웃 국가끼리 서로 전쟁을 할 수도 있는 거요. 하지만 지난 경인년에 귀국에서 우리를 침공하면서 댄 이유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소. 세상에, 명나라를 함께 침공하자며 동맹을 맺으려고 우리를 침공하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그것은 노부나가 공께서….”
“누가 구상한 제안이건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소. 정 귀국이 우리 조선과 동맹을 맺고 명을 정복하고 싶었다면 사신을 보내 꾸준히 우리 조야를 설득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소? 물론, 우리는 그 제안에 동의하지 않았겠지만 말이오.”
솔직히 말하자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정 일각에서는 명나라를 예전처럼 절대적으로 크게 받들지 않는 분위기가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으니 말이다. 북방 정벌에서 강화된 군대의 힘을 실감하고, 견서사를 통해 세상의 중심이 중국이 아니라고 확실히 알게 된 탓이 컸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상감이 은근히 명나라를 경시하는 분위기를 조장했다. 노골적으로 직접 비하하지는 않았으나, 만력제의 태만을 개탄하고 명나라의 부패상과 약해지는 군사력을 비웃는 언사가 수시로 나왔다. 그 무엇보다 엄숙한 자리인 조회에서까지 말이다.
이런 식이니 명나라를 경시하는 분위기가 주상의 은근한 지원을 배경으로 퍼져나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특히 견서사로 다녀온 젊은 신하들, 그중에서도 지금 천주교 의군대대 향도로 재직 중인 김류를 중심으로 한 일부는 조선도 세상의 중심이라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다.
이런 식으로 20년만 더 흘렀다면 같이 중원을 정벌하여 영토를 나누어 갖자는 노부나가의 제안이 조선에서 먹혔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충분히 힘도 키웠고, 그동안 딱히 명나라에 빚을 진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경인년에 치른 전쟁이 그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만력제는 엄청난 돈, 어림잡아 1400만 냥에 달하는 막대한 은을 5년에 걸쳐 전비로 주었다. 교역을 허락받아 벌어들인 돈 말고 직접 준 돈만 그만큼이다. 그 은이 있었기에 천축에서 온 염초를 사들이고 중국에서 구리를, 남만에서 쌀을 사들였다. 이번 원정도 그 은으로 치른다.
명나라 은 없이도 전쟁을 치를 수야 있었겠지만, 이렇게 이른 시일 내에 전후복구를 마치고 보복원정까지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으리라. 아마 지금쯤 끙끙거리며 겨우 전후복구를 끝냈을지도 모른다. 만력제는 졸지에 엄청난 은혜를 베푼 고마운 천자, ‘조선천자’가 되었다. 예전에 주상께서 빈정거리듯 언급하신 대로 말이다.
황제가 이런 큰 은혜를 베풀었으니,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뒤집히더라도 명나라를 도모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여론이 득세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세상의 중심이 명나라가 아니라 조선일 수는 있지만, 그와 별개로 명나라가 베푼 도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난리가 날 거다.
노부나가의 섣부른 조선 침공이 장차 맺어질 수도 있는 동맹을 날려버린 셈이지만, 구태여 그런 이야기까지 해줄 필요는 없다. 경솔한 발언의 후과가 어떻게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까.
“우리가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우고 이를 핑계로 쳐들어왔으니, 이는 당당하지 못한 일이요. 차라리 귀국이 조선을 정복하겠다고 공표하고 쳐들어왔다면 우리도 혼선을 겪지 않았을 거요.”
이항복의 공박에 구로다 요시타카는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귀측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이 노부나가 공의 진심이었소. 허나 지금 귀공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잘못된 선택이었음도 사실이오. 우리는 조선을 공격하지 말았어야 했소.”
이항복이 고개를 끄덕이자 요시타카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는 조선을 공격했고, 패했소. 조선이 보복하려는 심리도 이해할 수 있소. 하지만 이제 충분하지 않소? 우리도 한양까지 올라가지는 못했고, 경상도 절반과 전라도를 잠시 점령했을 뿐이오. 귀측은 규슈를 점령했고 시코쿠와 주고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우리 수군을 몽땅 용궁으로 보냈으니 이만하면 분풀이는 충분히 하지 않으셨나 하오.”
이항복이 천천히 팔짱을 꼈다. 쓰고 있는 사모가 살짝 솟구치면서 묘한 위압감을 주었다.
“지금 그 말은, 우리가 여기서 진군을 멈추고 조선으로 물러가 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이오?”
“…그렇소.”
이항복의 직설적인 표현을 들은 요시타카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의 입을 통해 방문 목적을 확인한 이항복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원정군 30만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대가로는 무엇을 내놓으시겠소?”
“지금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내놓을까’가 아니라 ‘그대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생각하오. 귀측에서 원하는 바를 먼저 말해 보시오.”
요시타카는 이항복이 좀 더 시간을 들여서 협상 같은 협상을 하리라고 기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항복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마치 미리 준비해 놓았다는 듯이 거침없이 원하는 바를 죽 나열했다. 협상이 아닌 일방적인 요구였다.
“별거 없소. 아까 말했듯이, 태합이 칼을 쓰고 도성 거리를 걸어 광화문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 전하께 죄를 빌어야 하오. 내 생각 같아서야 동래부에서 도성까지 줄곧 영남대로를 따라 걸어오라고 하고 싶지만, 태합이 연로하니 특별히 벽란도까지는 배를 타고 오게 해드리리다.”
“지…진심이시오? 이미 말했지만, 그 원정은 순전히 노부나가 공의 뜻….”
요시타카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항복은 눈썹 한 가닥도 까딱하지 않았다.
“나라 간의 일인데 어찌 허언하겠소? 아무리 지난 침략이 죽은 대군 노부나가의 뜻이라고 하나, 군주가 그릇된 길을 가는데 죽음으로 간언하지 않은 신하들도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소. 그대의 태합과 그 측근들도 모두 노부나가의 뜻을 그대로 따랐으니, 모두 전범(戰犯)이오.”
“저, 전범?”
“잘못된 전쟁, 고로 범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전쟁을 일으킨 죄인들이라는 말이오. 우리 상감께서 직접 규정하셨소. 태합 외에도 핵심 중신 열두 명 정도는 따라와 줘야겠소.”
요시타카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잠시 화를 삭이던 요시타카가 가까스로 항변했다.
“그래도 그건 너무하지 않소? 우리 태합께서는 일본 천하를 통치하시는 분인데, 어찌 그런 굴욕을 안기겠다고 그리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거요?”
“그럼 전쟁에 이기지 그러셨소?”
이항복이 냅다 한 마디 던지자 요시타카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노부나가가 이겼으면 조선은 왕이 아예 임해군으로 갈렸을 거 아닌가.
구로다 요시타카가 어떤 자인지는 이항복도 대략 알고 있다. 히데요시 휘하에서 제일가는 책사로, 히데요시가 심복으로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경계할 정도로 무서운 책략가라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책략가라도 명백한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내세워 상대가 입을 다물 수밖에 없게 만드는 화법을 전하께서는 ‘진실폭력(眞實暴力)’이라고 부르곤 하셨다. 하긴, 진실만큼 강한 힘은 없는 법이니 전하의 표현도 꽤 그럴듯하다.
“귀측이 원하는 대로 현 전선에서의 정전과 우리 군의 철군에 동의한다면, 우리로서는 손에 거의 다 들어온 승리를 포기해야 하는 거요. 그렇다면 승리를 상징하는 전리품으로서 태합을 잡아가는 정도는 해야 하오. 생사를 불문하고 말이오.”
“그럼…귀국 국왕께 죄를 빈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요?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요?”
“그럴 리가. 전하께서 보시는 앞에서 모두 참형에 처하고 머리를 기둥 위에 매달아 도성의 모든 백성이 와서 확인할 수 있게 할 거요. 남은 사지와 몸통은 살을 발라 젓갈을 담근 뒤에 조선 팔도에 전시하여 백성들이 모두 보게 할 것이고. 아, 뼈는 잘 맞춰서 강무관에 두겠소.”
차마 머릿속에 떠올려보지도 못했을 모욕적인 언사다. 요시타카는 쩍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항복은 태연하게 요구사항을 계속 제시했다.
“대군을 잡았으면 그놈을 그렇게 처리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놈이 화약통을 안고 자폭하는 바람에 갑옷 조각밖에 건지지 못했소. 태합은 대군의 심복이자 후계자이니, 그 죄업도 마땅히 계승해야 하지 않겠소? 귀하들의 한패였던 역적 임해군은 이미 젓갈이 되어 팔도를 돌았소.”
요시타카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튕겨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이항복은 그 우당탕거리는 소리에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는 물러날 거요. 혹여 물러나는 우리 군사들을 암습하지만 않는다면, 살아남은 그대들은 평안히 전후를 수습할 수 있소. 괜찮은 조건 아니오?”
요시타카는 일어선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이항복은 팔짱을 풀고 두 팔을 활짝 벌려 보였다.
“좋소. 그 조건이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이렇게 합시다. 태합을 내놓지 않는 대신 귀국 땅인 규슈, 시코쿠, 주고쿠, 아와지까지 몽땅 내놓는 방안은 어떻소? 침략에 대한 배상으로 말이오. 음…주고쿠 11국에다가 하리마, 타지마까지 더해서 13개국이면 어떻겠소?”
이항복이 제안한 대로라면 조선이 주고쿠 전체를 먹고 수도권인 긴키 지방에서 2개국을 더 차지하는 결과가 나온다. 그런 조약을 맺고 조선군을 돌려보낸다면, 공표되는 그날로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히데요시에게는 진압할 능력도 없으리라.
이쯤 되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갈 법도 하다. 그런데도 요시타카는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항복의 시종이 의자를 다시 세워 주었다.
“만약 태합께서 그런 약조를 한다면, 귀국은 군대를 물리는 대신에 넘겨받을 지역을 직접 점령하겠지요?”
“그럴 리가. 조용히 기다릴 거요. 태합이 약속을 지켜 우리에게 넘겨줄 땅에서 다른 영주를 모두 몰아낼 때까지. 지켜보다가 그 작업이 늦어지면 우리가 직접 개입하겠고.”
“그건 우리가 망할 때까지 우리끼리 서로 죽고 죽이며 싸우는 꼴을 느긋하게 구경하겠다는 소리잖소?”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지요. 허나 태합이 진실로 ‘천하’를 지배하는 통치자라면, 휘하에 둔 영주들에게 영지를 내놓고 야인으로 돌아가라는 명령 정도는 쉽게 내릴 수 있을 것 아니오? 그런 정도도 못 한다면, 명목상 지배자일 뿐 그저 허수아비인 게요?”
구로다 요시타카는 반박하지 못했다. 지금 히데요시의 권력 기반이 얼마나 취약해졌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히데요시가 권좌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같은 급의 경쟁자들이 모두 병사, 전사하고 그 혼자만 살아남은 덕이 컸다. 노부나가의 남은 정예병도 모두 손에 넣었고, 손자를 돌봐달라는 유언까지 전달받았으니 당장 이의를 제기하고 나설 이도 없었다.
결정적인 요소는 조선이 보복원정을 벌일 것이니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전 일본이 단결해야 막을 수 있다는 선동이었다. 조선의 보복이 두려웠던 영주들은 일단 히데요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막상 정말로 전쟁이 터지고 보니 그 단결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역시 태합은 허울뿐인 통치자가 맞는 모양이군. 그럼 이 문서를 보면 노골적으로 이탈하는 자들도 나오겠구려. 자, 읽어보시겠소?”
이항복이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주저하던 요시타카가 받아들었다. 죽 읽어내려가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항복을 노려보았다.
“이게 전부 사실이오?”
“그렇소. 귀공이 믿기 싫으면 믿지 마시오. 모두 우리가 꾸민 모략일지도 모르니까.”
요시타카에게 엄청난 폭탄을 안겨주었으면서도 이항복은 여전히 태연했다. 전혀 동요하는 기색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요시타가에게 보여준 편지 내용을 말로 천천히 설명했다.
“죽은 대군은 죽기 직전에 태합을 후계자로 한다던 구두 유언을 취소하고 내대신(이에야스)을 새 후계자이자 장손의 후견인으로 지정했소. 또한, 태합에게 내린 영지도 모조리 몰수하고 우리 전하께 그 땅에 영주를 임명할 권리를 넘기겠다 했지.”
요시타카는 진땀만 잔뜩 흘렸다. 조선군이 보여준 문서가 사실이라면 히데요시 정권은 아예 처음부터 수립될 명분조차 없었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이에야스라고? 그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잠깐, 이건 노부나가 님의 필체가 아니오. 이 문서는 가짜잖소.”
“우리가 만든 사본이니 당연히 대군의 필체가 아니지. 원본은 따로 잘 보관해 두었소. 당장 보여줄 수는 없으니, 알아서 판단하시오. 가짜 문서라고 생각하는 것도 귀공의 자유요.”
한동안 침묵이 길게 흘렀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향해 이항복의 비아냥 한 마디가 더해졌다.
“지금 부재중인 천장(天將) 양호 대인이 도착하면 귀공이 마주해야 할 대상은 2명이 되오. 본관 한 사람만 상대해도 될 때 얼른 마무리를 짓는 게 좋을 텐데? 뭐, 혹시 필요하면 오사카 본영으로 철수해서 수락 여부를 논의해도 괜찮소.”
“어떻게든 태합 전하를 죽이고야 말겠다는 거로구려.”
이항복은 답하지 않았다. 크게 한숨을 내쉰 구로다 요시타카가 고개를 들어 이항복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나도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를 해야겠소.”
“다른 방향이라?”
“포기할 부분은 포기하더라도 어떻게든 보다 나은 결과를 얻는 쪽으로 말이오.”
요시타카의 얼굴에서 아까와는 다른 광채가 비쳤다. 이항복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드디어 진심을 털어놓고 대화해볼 만한 마음가짐을 갖춘 모양이었다.
이항복과의 회견을 마친 요시타카는 조선군의 전송을 받으며 배에 올랐다. 이제 오사카에 돌아가서 회견 결과를 보고하면 히데요시가 길길이 날뛰리라. 조선군이 히데요시의 목을 얻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어찌 가만히 있겠나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구로다 자신은 노부나가의 배신(陪臣, 신하의 신하)이었던 터라 이항복이 말하는 이른바 ‘전범’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생각 같아서야 조선을 침범했던 왜장 전원을 전범으로 처형하고 싶으나, 그 수가 너무도 많은 관계로 다 죽이기 어려워 특별히 전쟁을 기획하는 데 참여한 자들만 넣기로 하였소.’
어차피 히데요시에게는 패배를 인정하고 목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 어떻게든 싸워서 위기를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생각이다. 그렇다면 요시타카 자신도 나름대로 살아날 방법을 물색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구로다 가의 영지는 지금 조선군이 차지한 부젠에 있다.
히데요시가 이기면 이기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살아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단 이항복은 요시타카에게 히데요시 진영 내에서 대놓고 반란을 일으키라고 요구하지는 않았다. 요시타카 역시 자신의 체면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그런 행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조선군은 구로다 가문이 협력하지 않아도 충분히 히데요시를 격파할 힘을 갖췄다. 과연 어떻게 해야 공적을 인정받아 가문이 존속할 수 있을지, 그것도 참으로 곤란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