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93
2부 471화
– 21 –
“왜적들이 나옵니다!”
“후퇴 명령을 내려라!”
역시 상대를 분노하게 만드는 데는 부모 욕 이상 가는 게 없다. 왜군이 측면에 있는 목책을 열고 쏟아져 나오자 아즈치성 바로 앞에까지 가서 욕지거리를 퍼붓던 결사대는 바로 말머리를 돌려 도주했다.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엇? 저놈들은?”
아즈치성 동쪽에서 쏟아져 나오는 왜병은 적어도 수천 명에 달했다. 문제는 보병들이 성벽 전면에 포진하는 사이 먼저 달려오는 기병 백여 기였다. 도주하는 아군 결사대의 진로를 앞서 차단하려고 질주하는 왜군 기병 중 다수가 왜인이 아니었다.
“왜군에 야인 기병이 있습니다!”
“흑전(구로다)이 말하기를, 수길이 내건 보수에 혹해서 이달(다테) 군에서 이탈한 야인들이 있다더니 저놈들인가!”
경인년 왜란이 종결된 뒤, 연해주에서 영지로 돌아가려고 준비하던 다테 마사무네는 본령에 남아있던 동생 마사미치가 모반했음을 알았다. 마사무네는 동생을 진압하기 위한 원병을 조선 측에 청했고, 조정에서는 그동안 맺은 우호를 고려하여 울라 기병 1천 기를 보내주었다.
다테에게 보내진 울라 기병 대부분은 다테 진영에 계속 남아있다. 하지만 일부 탈주자들이 일본 각지를 떠돌면서 이곳저곳에서 용병 노릇을 하고 있다고 했었다. 그놈들이 히데요시 군 진영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저 역적 놈들이!”
추격에 나선 적이 왜군 기마병이라면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화살을 날려 말에서 떨구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 따라붙는 적은 여진족, 말을 달리고 활을 쏘는 솜씨로는 아군에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 놈들이다. 게다가 조선에 대한 원한을 그동안 쌓고 또 쌓았다.
“젠장! 오도리 먼저 내보내! 중대 하나만!”
전군장 김응서가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 대응했다. 지금 준비한 기병이 그것뿐이었다.
본래 계획은 적이 출성하면 이쪽에서도 군을 움직여서 대진(對陣)한 후에 정석대로 일전을 치르는 것이었다. 일단 성문 밖으로 나온 이상 적도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카타 전투 때처럼 적이 급하게 달려드는 상황도 아니고 하니, 이번에는 기병 대신 보병을 주력으로 내세워 천천히 싸울 생각이었다. 저들은 조선 보병에게는 한 번도 제대로 패한 적이 없으니 서둘러 덤빌 테고, 이를 제대로 받아치면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적이 여진병을 내보내면서 오차가 생겼다. 왜군을 도발하고자 내보낸 아군 기병들이 먼저 적에게 붙잡히게 생겼으니, 일단 저들부터 구하고 봐야 했다.
달려나간 오도리 기병들은 총탄이 닿지도 않을 거리에서부터 권총을 난사했다. 다만 이것은 표적을 맞히려고 쏘는 게 아니다. 아군을 추격하는 적에게 이쪽에서 원군이 달려가고 있음을 알려주어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는 시위 행동이다.
하지만 적은 멈추지 않았다. 오도리를 보자 자기들 동족이면서 조선군 편에 서서 자기들을 짓밟던 옛 원한이 살아났는지 더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양측 기병들이 삽시간에 가까워지고, 총과 활이 서로를 겨눴다. 쫓기던 조선 기병들이 빠져나가자마자 양군은 정면으로 충돌했다.
총은 이미 다 쏴버렸으니 활과 칼이 서로를 노리는 주된 무기가 되었다. 화살이 날고 칼이 내리쳐지며 올가미가 공기를 갈랐다. 칼날은 갑옷 틈을 노려 파고들었고 화살에 맞은 사람은 피를 토하며 말에서 떨어졌다. 올가미는 갑옷을 입은 사내를 붙잡아 바닥에 팽개쳤다.
이 대결에서는 갑옷 덕분에 오도리가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울라 병사들이 쏜 화살은 겉이 둥그스름하게 생긴 남만갑 표면에 맞고 미끄러지기 일쑤였던 탓이다. 칼도 마찬가지였다.
“물러나라!”
오도리 기병들은 신호를 받고 신속하게 물러났다. 일부 사상자가 나기는 했지만, 큰 손해는 아니었다. 왜군에 속한 울라 기병들도 양군이 본격적인 접전을 벌일 기세를 보이자 더 덤비지 않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기병들이 먼저 접전을 벌이는 사이에 보병들이 열을 맞추고 진격을 시작했다. 숫자는 대략 1만. 일본군 역시 비슷한 규모로 아즈치성 정면에 포진했다.
이 싸움이야말로 서로의 기선을 제압하는 진짜 전초전이다. 오전에 벌어진 가토와 정기룡의 결투는 그저 여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조선 측이 욕설로 도발해낸 의도치 않은 싸움이지만, 이번 싸움은 일본군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여기서 조선군을 격파한다면 가토가 결투에서 패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사기를 다시 끌어 올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조선군으로서도 절대 패할 수 없다. 지금 이긴다고 해서 성을 함락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적의 사기는 완전히 꺾어버릴 수 있다. 무저갱 속에 파묻어버리는 거다. 게다가 저들은 과거 경인년에 조선을 휩쓴 원수들이 아닌가!
양측 모두 자기편 진영에서 화포를 쏘아 지원할 수 있는 거리 밖에서 충돌했다. 일본군이야 애초에 보유하고 있는 포 사정거리가 짧고, 조선군은 쉽게 움직이기 곤란한 대형 화포를 굳이 전초전부터 사용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조선군에서는 권율이 단밀현 싸움에서 사용했던 무기, 수레에 실은 자모포 ? 원정군이 출발하기 전, 상감께서는 이런 방식으로 운용하는 포를 자주포(自走砲)로 부르라고 하교하셨다 – 8문을 가지고 나왔다. 18근 포만한 위력은 아니지만, 조란환 정도는 무난히 쏠 수 있다.
“방포 준비!”
마상의 김응서가 환도를 치켜들며 호령했다. 지시에 따라 자모포를 다루는 포수들과 열을 지어 선 조총수들, 그리고 그 뒤에 선 궁수들이 일제히 발사 준비를 마쳤다. 적이 1백 보까지 다가오면 먼저 자모포를 일제히 쏜다. 그 뒤는 활과 조총 순이다.
“쏘아라!”
신호기가 나부끼자 자모포가 일제히 연기를 뿜었다. 멀리 보이는 왜군 대열이 마치 바람을 맞은 볏단처럼 쓰러졌다. 첫 포격에 쓰러진 인원만 적어도 2백여 명은 되었다.
이런 포격을 당하고 나서도 왜군은 멈추지 않았다. 2차, 3차로 연이어 포격이 가해지는데도 동요 없이 진격을 계속했다. 확실히 나름 정예병이긴 한 모양이다.
“그보다는 저들이 쓰는 전법 문제입니다. 70보까지는 달라붙어야 뭐를 해도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코끼리 등에 설치한 망루만큼 관전하기 좋은 자리도 없다. 권율은 함께 수루사의 등에 오른 이순신에게 왜군의 전법을 신나게 강의했다. 수전이야 이순신에게 비길 자가 없지만, 왜군과 육전을 치른 경험은 권율이 이순신보다 풍부했다.
“본래 왜군은 70보 거리에서 조총을, 50보 거리에서 활을 쏩니다. 그렇게 사격전을 벌이다 적진이 충분히 약해졌다 싶으면 전진해서 주력인 창병대를 들이밉니다.”
보통 왜병이 창칼을 잘 쓴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 전장에서 창칼에 맞아 죽는 왜병은 많지 않다. 왜군들이 자기들끼리 싸울 때도 활이나 조총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자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지금 왜군은 70보에서도, 50보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조총수와 궁수들은 잠시 발을 멈추고 사격했지만, 창병들은 계속 전진했다. 조선군이 빗발치듯이 쏘아대는 화살과 조란환을 맞고 줄줄이 쓰러지면서도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권율의 해설이 이어졌다.
“우리 총과 활이 왜군들이 쓰는 것보다 훨씬 멀리서도 정확하게 적을 맞히니, 저들이 본래 전법대로 싸우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창칼로 싸우는 재주에서는 우리 군사들보다 뛰어나니, 근접전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히데요시의 최고 참모였던 구로다 요시타카가 귀순해서 항왜가 되었다. 엄밀하게 하자면 항왜보다는 맹왜에 가깝지만, 적진에 남은 나가마사의 문제도 있어서 일단은 항왜 취급이다.
어쨌든 그 덕분으로 왜군이 무슨 전술을 펼 것인지는 모두 파악한 상태니까, 대처할 방안만 준비하면 된다. 근접전을 시도하는 적을 제압하기 위한 마지막 한 수도 준비해 두었다.
“전군장이 조총을 쏘라 하였군.”
콩볶는 듯한 총성을 들으며 이순신이 침착하게 중얼거렸다. 전진하면서 누더기가 된 왜군의 대열은 20보 거리에서 일제히 쏘아대는 조총 사격을 받고 그대로 녹아내렸다. 조란환과 화살 세례를 견디며 조선군 대열 앞까지 접근한 왜군이 무더기로 쓰러지는 광경이 똑똑히 보였다.
“근거리 사격은 빗나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확실히 좋은 듯하오.”
“우리 조총수들 숙련도가 낮은 편이라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싸움에 임한 조총수는 대부분 전투경험이 부족한 병영군, 복수군 소속이다. 아무래도 미숙하고, 최대유효사거리인 백 보 거리에서 쏘기 시작해봤자 긴장감 때문에 제대로 맞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건 훈련으로는 해결이 어려운 부분이다.
근거리에서 사격한 효과는 만족스러웠다. 겨우 20보 거리에서 발사된 탄환은 거의 빗나가지 않았다. 쏘아낸 탄환 대부분이 적의 갑옷을 부수고 왜병들의 몸통과 사지를 짓뭉개 놓았다.
“하지만 도감군만 계속 싸움에 동원하고 저들에게는 후방 경계만 맡길 수는 없지 않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지방군과 복수군도 싸움을 치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고, 충분한 준비도 했다. 저들에게는 이제 훈련받은 대로 싸워보는 과정만 남았고, 첫 경험 기회로는 이번처럼 큰 부담 없이 가볍게 치를 수 있는 전초전이 적당했다.
그리고 저들은 첫 전투를 훌륭하게 해치웠다. 대열을 유지한 채로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을 기다리다가 명령에 따라 활과 총을 쏘아 적을 쓰러트렸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발포를 마친 조총수들은 뒤로 물러났다. 만약을 위해 총창은 결합해 놓았지만, 적과 창칼을 맞대고 벌이는 근접전은 역시 살수들에게 맡기는 게 낫다. 이제 강철제 투구와 흉갑을 착용한 장창대가 앞으로 나가 지리멸렬해진 적군을 상대로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양쪽 병사들이 휘두르는 창은 같았다. 지난번 전쟁에서 대량으로 노획한 왜장창을 조선군이 여태껏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군이 창으로 상대를 후려치는 데 반해 조선군은 장창을 어깨높이로 들고 정면으로 찔렀다. 그리고 창날 밑으로 환도를 든 살수가 뛰어들었다.
양쪽 군대가 진형을 유지한 상태로 격돌했으면 좀 더 백중세로 싸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열 전면부에 있는 왜군은 조선군이 쏘아대는 조란환?화살?조총의 집중공격을 받고 대형이 거의 와해된 상태였다. 조직적인 싸움이 될 수가 없었다.
뒤쪽 대열에 있던 왜병들은 아직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포격과 총격도 멈췄다. 하지만 조선군 궁수들이 쏘아대는 화살은 아군 창병대의 머리 위를 넘어서 여전히 쏟아졌다. 그리고 전열에서 패주한 왜군이 후방으로 밀려들었다.
“적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전군장이 기병을 내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오도리가 아니라 조선 경기병이다. 패주하는 적을 사냥하다가 잽싸게 빠지기에는 조선 기병이 훨씬 낫다. 너무 파고들다가는 성과 보루에서 쏘아대는 포화를 맞을지 모르는데, 오도리는 그 기질 때문에 만만한 사냥감을 놓고 물러나는 일을 잘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첫 승리로군.”
몰려나온 적군을 대파하고 잔여 세력을 성안으로 밀어 넣었다. 상당한 전과를 올렸지만, 그 대신 아군이 치른 대가는 극히 적다. 이순신이 흡족하게 웃었다.
– 22 –
김응서가 지휘하는 조선군은 사상자 1백여 명을 내는 대신에 일본군 3천여 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군 본진에서는 환호하는 함성과 북소리, 나팔소리가 연달아서 울렸지만, 반대편에 있는 일본군 진영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낭패한 기색이 완연했다.
이겼으면 그 기세를 활용해야 한다. 이순신은 김응서에게 바로 본진으로 돌아오라고 명하지 않고 왜군을 견제할 수 있는 지금 위치를 조금 더 지키게 했다. 공성에 꼭 필요한 요충지인 하치만야마(八幡山, 팔번산)를 확보하고 그 위에 포대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하치만야마는 10리 가까이 떨어진 아즈치성을 공격하는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24근 포라고 해도 그만큼 멀리까지 날아가지는 못하니까 말이다. 이 산의 가치는 다른 부분에 있었다.
“팔번산 북쪽에 구축한 포대에서는 수로 북쪽 이기야산(姨綺耶山, 이키야산)에 구축한 왜군 보루에 화포를 쏠 수 있습니다. 서쪽으로 성에 접근하는 길이 열리는 셈입니다.”
아즈치성은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철옹성이다. 조선군으로서는 성 자체를 정면으로 쳐서 무너뜨리기보다는 저들에게 포위당했다는 두려움을 안겨주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편이 더 낫다. 게다가 성을 정면으로 공격하려고 시도하면 측면에 있는 적에게 양면공격을 받는다.
“저들이 이런 중요한 산에 왜 군사를 두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군.”
이순신의 질문을 받은 구로다 요시타카가 웃으며 대답했다.
“수로 때문일 겁니다. 하치만야마와 바로 북쪽에 있는 이키야산 사이에 있는 수로 때문에, 서로 지원하거나 물러서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포기했겠지요. 보루를 세울 생각을 했더라도 시간이 부족했을 테고 말입니다.”
더불어서 지금 히데요시가 부하를 믿을 수 없다는 문제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구로다와 호소카와가 배반했음을 알기 전에도 히데요시는 이미 심한 의심증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히데요시가 자기한테서 명백히 떨어진 곳에 병사를 파견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이 문제에 대해서 구로다 요시타카는 자신의 사견임을 전제로 이렇게 말했다.
“태합이 만약 이 산에 성을 쌓았다면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을 겁니다. 수비병도 기껏해야 몇천에 불과했을 테니, 싸웠다고 하더라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겠지요. 성이 항복하건 함락되건 나머지 군사들의 사기는 급하락했을 것을 생각하면 아예 포기할 법도 합니다.”
김응서가 적을 위압하는 사이 하치만야마는 완전히 조선군 손에 들어왔다. 아직 산 위에다 포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내일 날만 밝으면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12근 포 12문, 문종화차 6기 정도면 적절할 듯합니다.”
너무 큰 포는 끌고 올라가기도, 끌고 내려오기도 어렵다. 게다가 12근 포만 있어도 나무와 흙으로 허술하게 만든 왜군 보루 정도는 부술 수 있다.
“해가 뜨는 대로 팔번산에 화포를 올리고, 서쪽 수로를 건너 이기야산 공격을 시작하시오. 최종적으로는 적이 움직이는 양상을 보아 결정해야 하겠으나, 일단은 서쪽으로 호수를 우회해 안토성(아즈치성) 북쪽으로 접근하는 방향으로 가겠소.”
지금 히데요시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있다. 조선군이 아즈치성 북쪽으로 이동함으로써 오우미 북부 지방으로부터 히데요시를 고립시킬 기세를 보이면 그로 인한 압박감은 더 강해질 것이다. 적이 평정을 잃고 군사를 움직이면, 그때가 바로 결전을 벌일 시점이다.
“안토성 일대 지형을 보면 적은 병할산(?割山, 카메와리야마)과 산산(?山, 기누가사야마), 석기산(石崎山, 샤키잔) 사이 평지에 주력을 두고 있을 거요. 안토성을 공격하는 우리 측면을 노리기에 좋은 장소고, 수만 군사를 너끈히 둘 수 있을 만한 넓이요.”
넓기는 기누가사야마 북쪽이 더 넓지만, 적이 그쪽에다 병력을 둔다면 조선군의 움직임에 제때 대응할 수 없다. 가장 적절한 장소가 세 산 사이의 평지다. 물론 확인할 필요는 있다.
지금 상황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아니지만, 왜인들은 똑같은 산(山) 자를 ‘산’,‘잔’, ‘야마’라는 전혀 다른 세 가지 발음으로 읽는다. 조선말에서도 ‘메’와 ‘산’을 뜻은 같지만 다르게 사용하는데, 아마 그 경우와 비슷한 모양이다.
“오늘 팔번산을 손에 넣어서 안심하고 안토성 주변 소호(小湖)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으니, 왜별장은 밤중에 탐보인들을 풀어 소호 건너편 적세를 살피게 하라. 그리고 등선군은 그동안 마련한 뗏목을 사용해서 이기야산 북쪽, 대호(大湖) 연안을 탐색하고 교두보를 만들라.”
“예, 대감.”
임꺽정과 사노부가 일시에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이미 대략적인 작전은 기획이 끝났다. 하지만 이들이 오늘 밤 수집하는 첩보에 따라서 세부적인 사안은 바뀔 것이다.
“가강군은 아직 움직일 기색이 없는가?”
“내일 아침 일찌 이달(다테)군을 선봉으로 해서 내려오리라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그러한가. 놈은 정말 의뭉스러운 자로군.”
이에야스는 아직도 속내를 명확히 드러내지 않았다. 과연 어찌 움직이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