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696
2부 474화
– 28 –
“결전이다!”
날이 밝기 무섭게 성문과 목책이 열렸다. 히데요시가 악착같이 모아들인 10만 대군이 지금 조선군과 결전을 벌이기 위해 아즈치성 앞 벌판에 도열했다.
“조선군 전체 병력이 9만 명이라 했겠다.”
이에야스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7만 명이 오우미 북부를 향해 떠났다. 호수 위로 정찰선을 내보내 확인을 시도했지만, 가까이 접근하기는 어려웠다. 산꼭대기에 위치하는 조선군 포대가 수시로 포를 쏘아 접근을 차단한 까닭이다.
지금 히데요시 휘하에 남은 병력은 대략 12만. 원균과 구로다 나가마사가 각자 휘하 부대를 거느리고 북상했고 이키야산 방어를 맡은 4천 병력이 무너지면서 1만을 잃었지만, 이래저래 주변에서 추가로 소집한 병력이 있어서 12만 선은 유지했다.
“전하, 이키야산을 지나 북상한 적이 분명 구로다 공의 배후를 노릴 겁니다. 지원할 병력을 보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뿌리를 자르면 가지가 시드는 법이다. 어차피 지금 원군을 보내도 적을 따라잡기도 어려울 테니, 우리는 조선군 본진을 격파하는 데 전력을 쏟는다.”
천우신조로 적이 분산되었는데 아군을 일부러 분산시켜 굳이 균형을 맞출 필요는 없다. 이 기회를 최대한 살려 조선군 본진을 짓밟고 대장 이순신을, 또는 병조판서를 생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히데요시는 휘하에 남은 병사 12만 명 중 2만 명은 아즈치성과 호수, 동군 방면 산줄기에 늘어선 보루를 지키는 수비병으로 남겼다. 아무리 이에야스가 밀사를 보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한들,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 아즈치를 방어할 병력이 필요했다.
1만 명은 하치만야마 쪽으로 보내서 북쪽으로 올라간 조선군이 돌아올 길을 끊는다. 혹시나 하치만야마나 이키야산에 조선군이 남아있다가 본대를 지원하러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나머지 9만 명이면 조선군 본대를 충분히 격파할 수 있다. 조선군이 아무리 강한 화포와 기병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어찌 몇 배나 되는 대군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히데요시는 이에야스 쪽에서 제공한 정보를 완전히는 믿지 않았다. 대규모 조선군 대열이 북상하는 광경은 분명히 보았다. 하지만 본진에 남은 병사의 숫자가 이에야스가 말한 그대로 단 2만 명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정말 7만이 떠나긴 했는지부터 알 수가 없다.
정말 조선군이 2만 명뿐이라면 4만 명만 내보내도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이에야스가 조선군 숫자를 틀리게 알았을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속였을 수도 있다. 히데요시와 조선군이 싸우다 공멸하게 만들고, 그 뒤에 혼자 패권을 잡으려는 게 이에야스의 진의일 수도 있지 않은가?
“동원 가능한 모든 전력으로 일거에 조선군을 쳐부순다. 그리고 그대로 배반자들을 다시 내 앞에 무릎을 꿇게 한다.”
어차피 버텨 봐야 이제는 원군이 올 곳도 없다. 그리고 조선군과 히데요시가 공멸하는 게 이에야스의 진짜 목적이라면, 히데요시를 뒤에서 기습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니까 결전이다.
히데요시가 대군을 지휘해 조선군을 격파하는 모습을 본다면 세 명의 배반자도 분명히 갖은 변명과 함께 히데요시 진영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마 칙서 핑계를 대겠지.
당장 벌을 내리지는 않겠다. 오사카를 되찾고 시코쿠?규슈를 다시 자기 통제하에 넣으려면 병사가 필요하다. 그 싸움에서 얼마나 열심히 싸우고 충성심을 입증하는지, 그 여부에 따라서 세 반역자가 목숨과 영지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니와 군, 나가라!”
하치만야마 점령과 측면 견제를 맡은 니와 나가시게 휘하 1만 병력이 먼저 움직였다. 죽은 노부나가의 다섯째 사위로, 지난번 원정에서는 조선과 그만 화의를 맺고 물러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하지만 일본이 공격당한 이번 전쟁에서는 차마 화의를 논하지 못하고 있다.
“진군하라! 감히 일본을 넘보는 이순신과 조선군을 비와호에 수장하자!”
대열을 정비한 히데요시의 본진 9만 명이 들판을 빽빽하게 메운 채 진격을 시작했다. 병사의 물결이 적진을 향해 움직였다. 이만하면 조선군 화포가 1만 명쯤 휩쓸더라도 남은 병사만으로도 적군 2~3만 정도는 그대로 짓뭉개버릴 수 있을 것이다.
정면에 있는 조선군 진영에서는 아직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아마 지금 상황에 놀라 손발이 굳은 게 분명하다.
왼쪽을 보니 히노가와 건너에 있는 동군 진영에서도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역시 히데요시와 조선군이 서로 싸우다가 공멸하기를 바라고 있는 모양이다.
잠시 망설이던 히데요시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북쪽 하늘을 보았다. 그가 어젯밤 직접 본 숫자로만 따져도 적어도 수만 명에 달하는 적이 북쪽으로 움직이기는 했다. 과연 원균은, 구로다 나가마사는 무사할까?
자포자기 상태로 있다가 결전을 준비하는 데 바빠서 소중한 친구와 고마운 부하의 아들에게 제대로 된 도움은 하나도 주지 못했다. 전령을 보내 경고만 해주었을 뿐이다. 그 대군을 맞은 그 두 사람이 과연 버텨낼 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 29 –
화살이 빗발치듯 날았다.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는 병사들을 향해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일반 아시가루 병사들이 입은 허술한 갑옷은 물론이고 고위 무사들이 입은 더 견고한 갑옷도 그 화살에는 뚫렸다.
“젠장맞을! 건주위 놈들이 여기 왜 있는 거야!”
원균이 화살을 피해 바닥에 엎드리며 절규했다. 남쪽에서 잔뜩 일렁이는 횃불을 본 데다가 히데요시가 보낸 전령을 받은 나가마사가 가서 상황을 확인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이런 꼴을 맞이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조선군도 아니고 건주위를 만나다니…! 뭣들 하느냐? 어서 철포를 쏴라!”
원균의 닦달에 옆에 있던 철포조가 일제히 사격하자 정면에서 달려들던 기병 중에 2명이 말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전과는 그게 전부였고 바로 반격이 이어졌다. 전후좌우에서 덤벼든 적이 빗발치듯 화살을 날렸고, 순식간에 철포조 절반이 바닥에 쓰러졌다. 원균이 이를 갈았다.
“개 같구나, 정말 개 같은 일이야!”
원균 부대 1천여 명은 나름 주변을 경계하면서 움직였다. 원균은 왜국에서 왜장으로 전사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만약 간밤에 나타난 불빛의 정체가 조선군이라면 은근슬쩍 투항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금 거느린 잡병들은 원균이 조선인인 줄도 모르니까.
하지만 조선군 본대를 확인하기도 전에 측면에서 불쑥 나타난 건주위 기병들은 원균이 손을 들 기회도 주지 않았다. 조선군 것보다 무게가 많이 나가는 탓으로 사거리는 짧으나 위력은 더 강한 건주위 특유의 화살촉, 그리고 갑옷 형태만 봐도 그놈들이 건주위임을 알 수 있었다.
“저 거지 같은 놈들이…!”
욕지거리를 퍼붓는 순간 화살이 또 날아들었다. 원균은 급히 몸을 날려 바닥에 엎드렸다.
“으윽! 주, 주군!”
일부러 살을 찌워 키운 호위병 스케였다. 덩치가 훨씬 커서 그랬는지, 원균보다 스케 쪽으로 더 많은 화살이 날아든 것이다. 다시 보니 스케가 버티지 않고 엎드렸으면 원균에게 날아드는 화살도 더 많았을 게 분명했다. 원균을 위해 일부러 그대로 서 있었던 거다.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있던 스케의 얼굴을 향해서 화살이 하나 더 날아들었다. 얼굴 한복판에 화살이 꽂힌 스케가 마침내 넘어졌다. 원균 곁에 남은 마지막 호위병이었던 스케가 쓰러지자 원균은 완벽한 외톨이가 되었다.
“고맙다. 잘 가라, 스케!”
대신 적들의 시선을 끌어 준 부하에게 감사를 표한 원균이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었다. 망할 건주위 놈들, 저놈들이라면 잘 안다. 분명 약탈에 혈안이 되어있을 거고, 전장을 뒤져 재물을 얻을 욕심에 가득할 거다. 이제 곧 죽은 자들을 발가벗기기 시작하리라.
지금 입은 갑옷이 화려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공연히 화려한 갑옷을 입었으면 놈들이 고위 왜장이라고 생각하고 노략질하려고 몸에서 벗겼을 게 아닌가? 그랬으면 꼼짝없이 목숨이 붙어 있는 게 드러나 붙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입은 갑옷은 보통 중급 사무라이나 입는 물건이다. 저 도둑놈들도 별로 볼 게 없는 허름한 갑옷을 굳이 힘들게 벗기려고 하지는 않을 테니, 죽은 척만 잘하면 된다. 그러면 저놈들한테 붙잡혀 끌려가는 일은 피할 수 있다.
필사적으로 기는 사이 싸움이라고 할 수도 없던 싸움이 끝나버렸다. 원균의 부하들은 전부 죽거나 도망치거나 항복한 듯, 싸우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원균은 필사적으로 바닥에 널린 시체 사이를 기면서 천지신명께 기도를 드렸다.
“제발, 제발 여기서 빠져나가게 해주소서! 그러면 이 투구와 갑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깊은 산속에 숨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조용히 살겠나이다!”
필사적으로 기어가던 원균의 귀에 가까이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당장에 움직임을 멈춘 원균이 시체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제발, 제발 저놈들이 저를 이미 죽은 시신이라고 생각하기를! 하지만 그 기원이 무색하게도 천지신명은 원균을 버린 모양이었다.
“으아아아악!!”
생존자 수색이라면 도가 튼 건주위 병사들은 땅에 엎드려 있는 원균의 사타구니를 서슴없이 걷어찼다. 다리 사이에 늘어져 덜렁거리는 살덩어리가 정통으로 발에 맞았다.
원균은 창칼이 등에 박히더라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고 결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창자를 산채로 뽑아내는 듯한 그 고통까지 참아낼 수는 없었다. 신음을 토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몸부림치는 원균을 향해 비웃음과 욕설이 쏟아졌다.
건주위 병사들은 일말의 자비도 보여주지 않았다. 사타구니를 부여잡은 채로 뒹구는 원균을 일으켜 세우더니, 얼굴을 한 대 후려갈겨서 정신을 들게 한 다음 허리에 찬 칼을 뺏고 다른 포로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거구의 시체 한 구를 말에 싣는 일을 시켰다.
‘이건 스케잖아…?’
이미 다른 포로 4명이 달라붙어서 낑낑거리고 있었지만, 스케가 워낙 무겁다 보니 제대로 올릴 수가 없었다. 통증이 좀 가신 원균까지 합세하자 겨우 스케의 시신을 말 등에 얹을 수 있었다.
감시하던 건주위 병사는 이들이 일을 마치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포로들 옆에 앉혀두었다. 원균은 급히 주변을 살폈지만, 피와 먼지로 얼굴이 워낙 지저분해진 덕분에 다행히 자기를 알아보는 자는 없는 듯했다.
일단 살았다고 생각하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내일은 또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 30 –
거의 10만 대군이 눈앞에 있는 벌판을 가득 메우고 밀려왔다. 창이 숲을 이루고 총과 활이 덤불을 형성했다. 이미 예상한 광경이긴 하지만 역시 직접 보니 중압감이 상당했다. 그런데도 조선군 군사들은 허둥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찾아 바쁘게 움직였다.
“어서 대열을 정비하라!”
10만이 안 되는 적에 맞선 아군 병력은 8만. 다만 적은 것은 보병 숫자뿐, 화포와 기병은 압도하고 있다. 왜군은 사실상 화포가 하나도 없지만, 조선군은 수십 문에 달하는 18근 포, 12근 포, 무종야포, 자주식 자모포, 신기전기 화차가 방포할 준비를 마치고 늘어서 있다.
기병도 마찬가지다. 적이 탈영한 울라 기병을 포함해서 겨우 2~3백 기의 기병을 투입한 데 반해서 이순신과 권율 휘하에는 1만 기에 달하는 기병이 진영 좌우 양쪽 끝에서 싸울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오도리 6천 기, 족친위를 포함한 비호군 3천 기, 조선 경기병 1천 기다.
보병은 중군에 5만, 후군에 2만을 두고 있다. 후군은 상황에 따라 움직일 예비대다.
이만한 전력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모르고 진격하던 적은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삽시간에 진영에서 나와 정렬하는 조선군을 보고 발길을 멈췄다. 필시 소스라치게 놀랐으리라.
“겨우 2~3만 정도 있는 줄 알고 단박에 짓밟으려고 달려왔을 텐데, 우리 대군을 보았으니까 어찌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순신과 함께 망대 위에 올라온 이항복이 호쾌하게 웃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항복도 남만갑을 챙겨입었다. 논산에서 주상전하를 모시고 싸움을 관전할 때 입었던 그 갑옷이다.
“하지만 수길로서도 다시 들어갈 수는 없을 거요. 아예 출성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성문을 나선 이상은 결전을 감행할 수밖에 없소. 수길이 비록 간악한 왜적의 수괴라 하나, 그 정도도 깨닫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을 거요.”
여기서 싸움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단순한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적과 결전을 벌이겠다고 한껏 군사들의 사기를 고양해 끌고 나왔는데, ‘적이 생각보다 많다’는 이유로 철수해서 성으로 도로 들어가자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주장(主將)이 적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모든 군사가 알게 된다. 당연히 군사들의 마음속에도 공포감이 자리를 잡고, 용기를 잃은 군사들은 전열을 벗어나서 자기가 살 궁리부터 먼저 하게 된다. 그러면 스스로 무너지고 만다. 마치 비수대전에서 사라진 전진의 백만대군처럼 말이다.
“아마 저들은 성문, 목책 앞에서 자기들끼리 뒤얽혀 온갖 추태를 보일 거요. 그리로 뛰어든 마군장과 휘하 기병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수급을 거두게 되겠지.”
적이 싸우지 않고 퇴각하면 곧바로 황진이 지휘하는 기병들이 추격에 나선다. 한 전장에서 기병 1만 기가 질주하며 적을 짓밟는 광경은 구경 값을 내고서라도 보고 싶을 광경이리라.
물론 경인년에도 그런 광경은 여러 차례 선을 보였다. 하지만 여기 비와호 연안에 펼쳐지는 벌판은 단밀현이나 논산보다 훨씬 넓다. 그만큼 여유를 가지고 움직이며 적과 싸울 수 있다.
“송 군관, 가강군은 어찌하고 있는가?”
“아무 움직임이 없습니다.”
호소카와 군 외에 구로다 군, 타치바나 군 등 다른 왜병 부대들도 모두 이에야스 군에 보내 합세하게 했다. 아예 조선군에 편입된 왜별기야 굳이 뺄 필요 없지만, 이들은 사정이 다르다.
구로다나 호소카와는 애초에 왜군으로서의 편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깃발만 바꿔서 들었던 자들이다. 완벽한 왜군이라 조선군과 함께 싸우기는 어딘가 까다롭다.
타치바나 역시 마찬가지다. 본령으로 귀환한 뒤, 영지에 남아있던 병사들을 포함해서 다시 부대를 재편하여 왜군 편제를 제대로 갖췄다. 그러니 이들도 마땅히 맹왜로 부름이 옳겠으나, 대장인 무네시게가 이미 항복한 탓에 취급은 여전히 항왜였다.
구로다 요시타카도 맹왜가 아니라 항왜다. 다만 그 이유는 그자가 경인년에 지은 죄가 너무 크다는 점, 그리고 요시타카가 조선 편이 되었음을 드러내놓고 알리면 아즈치에 남겨두고 온 나가마사의 목숨이 당장 위태로워진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구로다도 명목상으로는 항왜다.
“가강이 움직이면 바로 기패관을 통해 보고하게 하라.”
“알겠습니다, 대감.”
하지만 이제 벌어질 결전으로 모든 싸움이 끝날 판이니, 그런 경계도 큰 의미가 없어졌다. 왜군 틈에 들어가면 저들도 모두 자기 가문 깃발을 내걸고 싸울 수 있다. 사기를 올려서 적을 쳐부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 정도야 쉬운 일이다.
“대감! 부원수께서 보내셨습니다. 왜추 수길이 직접 갑주를 입고 싸움에 나선 듯합니다.”
부원수 권율은 코끼리를 타고 좀 더 앞까지 나가 있다. 천리경을 들고 적진을 직접 살피던 권율이 진격을 재개한 왜군 대열에서 히데요시를 발견하고 연락군관을 보내 알린 것이다.
“18근 포가 닿을 만한 거리인가?”
“그보다는 한참 멉니다.”
“아쉽군.”
경인년, 대구성에서 버티던 아군이 노부나가를 18근 포로 쏘아죽일 뻔했었다. 히데요시도 그 사실을 기억하고 조선 화포 사정거리 밖에 머무르는 모양이었다.
“적이 1천 보를 넘어섰습니다!”
참모장 이시언이 보고했다. 이순신은 고개를 끄덕여 지시를 내렸다.
“방포하게!”
“예, 대감!”
잠시 후 전열 앞에 늘어서 있던 18근 포들이 어마어마한 포성을 울리며 불길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람 머리통만 한 쇳덩이들이 연달아 날아가 적진을 파헤쳤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아시아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음 직한 대결전, ‘비와호 전투’가 막을 올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