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12
2부 49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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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물에 걸리고 화살에 맞은 짐승이 무더기로 쌓였다. 아직 겨울이 한창이지만, 새해를 맞아 연 사냥대회는 건주위 내 여러 부족과 지파가 위세를 자랑하는 경연장이기도 했다.
요동 전역, 말 그대로 요동 전역을 휩쓸었던 ? 좁은 의미로는 요동도사가 지배하는 송화강 이서 땅만을 요동이라 칭하지만, 넓은 의미로는 여전히 요하에서 동쪽으로 펼쳐진 모든 땅을 요동이라고 부른다 ? 전쟁이 끝난 지 7년이다. 평화를 한껏 누리는 게 당연했다.
지금 건주위 인구는 남녀노소를 합쳐 대략 60만. 10년 전과 비교하면 정말 들판이 바다로 바뀐 것 같은 숫자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인구는 몇 년 안에 70만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지금도 매년 태어나는 어린아이 숫자가 만여 명이 넘는다.
“조선 국왕을 위하여 잔을 들자꾸나!”
누르하치가 웃으며 손에 든 술잔을 들었다. 그를 둘러싸고 앉은 장수들이 역시 웃으며 잔을 들어 건배했다. 원을 이루고 앉은 무장들 한가운데는 화톳불이 타고 있고, 토막을 낸 고기가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상태로 각자의 앞에 놓였다. 노예들이 부지런히 술과 고기를 날랐다.
“10여 년 전, 예허를 비롯해 해서 4부가 멀쩡히 존속하던 시기를 떠올려보니 실로 감개가 무량하다. 그때 우리가 어찌 이런 훗날이 올 줄 알았겠느냐?”
누르하치를 둘러싼 장수들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이들은 모두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뭉쳐서 오늘날의 건주위를 만들어낸 주역들이었다.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면 통쾌할 수밖에 없었다.
12년 전 갑신년, 해서부가 니탕개와 손을 잡고 처음 난을 일으켰다. 그때 이여송의 소집에 응해서 누르하치가 모을 수 있던 군사는 겨우 기병 3백 기밖에 없었다. 그나마 그보다 한 해 전에는 1백 기에 불과했다.
그때 여진을 제패하던 예허, 하다, 울라, 호이파 등의 해서 4부는 막강한 세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지금 살아남은 세력은 수만 군사를 동원할 수 있던 해서가 아니었다. 고작 3백 기를 움직이는 게 한계였던 건주위였다.
“기병 3백 기를 겨우 만들어내던 우리가 8만 병력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10년 뒤에는 10만 대군도 움직일 수 있을 거다.”
“모두 추장께서 노력하신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부하들의 악의 없는 아첨에 누르하치가 너털웃음을 웃었다.
“물론 나도 노력은 했지만, 조선이 해서부를 몽땅 두들겨 부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내 세력이 커지지는 못했을 거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누르하치가 언젠가 여진을 하나로 통일할 생각을 품기 시작한 때는 꽤 오래전이었다. 이를 이루자면 당연히 많은 준비가 필요했지만, 조선이 많은 부분을 대신 해치워주었다. 무엇보다 해서 4부를 무너뜨려 준 것이 가장 고마웠다.
“해서의 유민들은 내 땅을 갈고, 해서의 여자들은 내 전사들의 첩이 되었다. 이들로 인해서 내 전사들이 무예를 닦는 데 전념할 수 있으며, 훗날 더 많은 전사가 나올 것이다. 조선왕이 해서를 쳐부순 덕분에 이 모든 결과를 얻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추장, 이제 요동에 남은 제대로 된 위소는 우리 건주위 하나뿐입니다. 모든 위소를 하나씩 점거하고 있는 조선인들이 다음 차례로 우리를 노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염려는 없다. 걱정하지 마라.”
조선왕은 여진족을 쫓아내고 북방에 조선인을 이민시키는 계획을 진행하는 중이다. 저들이 건주위 땅에까지 욕심을 내면 여기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르지만, 누르하치는 그런 일은 아마도 없으리라고 보았다.
“이제까지 조선이 치른 전쟁을 보면, 매번 먼저 공격을 당한 후에야 반격을 가해서 상대를 쓰러트렸다. 100년 전 부여주를 처음 뺏을 때도 그랬고, 이번에 일본을 공격하면서도 그랬다. 그 말인즉슨, 조선을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된다는 말이다.”
더구나 건주위는 이미 멸망한 해서 4부와는 처신이 다르다. 그놈들은 자기 힘을 과신해서 수시로 거만하게 굴곤 했지만, 누르하치는 납작 엎드려서 늘 처신을 조심했다. 지금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꼬박꼬박 공물을 요양으로 보내고 있다.
1년에 4번씩 바치는 이 공물을 이성량이 혼자서 전부 먹는지, 일부라도 북경에 있는 조정에 보내는지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누가 주머니를 채우든, 건주위의 성의를 기특하게 보고 신경을 써주기만 하면 충분한 것이다.
“이제 우리 인구가 요동도사 산하에 있는 인구보다 많습니다. 병사도 더 많고요. 그럼 굳이 요양에 있는 이씨 일가를 향해 계속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아직 젊은 앙굴리가 패기만만한 언사를 내뱉었다. 14세 때부터 누르하치를 따라 종군하고, 그 용맹을 높이 평가해서 누르하치가 사위로 삼은 용사다웠다. 하지만 아직 젊다 보니 성급한 면이 있었다.
“이성량이 거느린 백성이 40만, 병사가 7만…분명히 요동도사만 본다면 우리보다는 열세다. 하지만 요동도사 뒤에는 명나라 전체가 있다. 수를 세는 동안 계속 아이가 태어나 영원히 그 정확한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한인(漢人)이 있단 말이지.”
숲에서 자라는 나무와 같이 세어도 세어도 끝이 없을 은자도 있다. 사람과 은자가 합쳐지면 그건 군대가 된다. 지금 요동도사를 상대로 싸움을 건다면, 그 뒤에 있는 명나라 본국과 싸울 각오도 해야 한다. 건주위에는 아직 그 싸움에 나설 충분한 준비가 안 되어있었다.
“우리는 좀 더 힘을 쌓아야 한다. 백성 숫자가 백만 명이 되고, 십만 대군을 무난히 편성할 수 있게 되면 그때쯤에는 이성량을 꺾고 요동을 장악할 수 있겠지.”
건주위의 힘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다. 사람 숫자만 늘어나는 게 아니다. 급료가 밀려 불만을 품은 요동군 병사들이 탈영해서 줄지어 귀순하고, 심지어는 대장장이들까지 넘어오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이다.
이렇게 넘어오는 이들에게 짝지어줄 여자와 나눠줄 땅은 얼마든지 있다. 해서부가 무너졌을 때 획득한 여자와 아이들이 잔뜩 있으니까. 그리고 조선에서 얻은 담저와 옥수수는 여자들이 아이를 몇 명씩 낳더라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작물이다.
“그러니 조선왕에게 감사해야지. 내 아들까지 돌보아주고 있지 않나. 이봐, 아우. 자네 이번 원정길에 다이샨을 보고 왔지? 그 아이가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좀 이야기해주게.”
혼자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슈르하치가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슈르하치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다. 요즘 들어 계속 기운을 차리지 못하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다른 무장들, 추장들이 이상하다고 수군거리는 가운데 슈르하치가 기운차게 외쳤다.
“조선왕은 다이샨을 자기 아들, 사위들과 똑같이 대하고 있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고관인 권율 집에 머물게 하고 있지요. 그리고 자기 딸을 주어 사위로 들이려는 눈치도 있습니다.”
“흠, 정말인가?”
다이샨의 측근인 동가신의 보고를 통해서 누르하치는 조선 국왕이 다이샨을 넘보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의도도 대충은 알만했다. 뭐, 이쪽에서도 나쁠 건 없는 일이다.
“그보다 이 아우가 여기서 알려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마 모두 놀라 자빠질 겁니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일본 원정 실패로 전사들과 발언권을 잃고 그동안 의기소침해 있던 슈르하치가 저렇게 원기 왕성한 걸까?
“제가 왜국에서 잡아온 포로 중에 대장장이 10여 명이 있습니다!”
사방에서 폭소가 터졌다. 대장장이 정도는 다른 부족들도 가지고 있다. 대장장이가 없으면 칼과 창, 갑옷을 어떻게 만들겠는가? 누르하치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우가 대장장이를 많이 얻었다니 기쁘군. 앞으로 잘 활용하기를 바라네.”
“아니, 단순한 대장장이가 아니라고요! 다들 진지하게 들어야 하는 이야깁니다!”
슈르하치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술에 좀 취하기도 했지만, 자기를 무시하려고 드는 좌중의 분위기에 화가 난 것이다.
“단순히 철을 두드릴 줄 아는 대장장이가 아니라, 광석에서 철을 뽑아내서 정련할 줄 아는 대장장이란 말입니다! 명나라와 조선에서 몰래 들여오는 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그런 저급 대장장이가 아니라고요!”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던 전원이 움찔했다. 철을 직접 정련할 수 있다면 엄청난 강점을 얻는다. 철을 만들 수 있는 대장장이 10명이라면, 전사 천 명보다 더 가치 있는 자산이다.
“그리고 이게 전부인 줄 아십니까? 이 왜인들, 조총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직접 총을 만들 수 있고, 조선에서 몰래 산 조총 몇 자루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다!”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 슈르하치를 바라보았다. 제일 놀란 사람은 누르하치였다. 그는 손에 든 잔을 떨어트린 줄도 모른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총! 총과 화약을 건주위 내에서 자급할 수가 있다면…! 조선군의 화력을 본 뒤부터 항상 바랐지만 이룰 수 없었던 꿈이다. 누르하치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다그쳐 물었다.
“아우는 그런 재주가 있는 자들을 어떻게 손에 넣었는가? 조선인들이 그런 자들을 우리가 데려오게 허락할 리가 없지 않나?”
“허락 따위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두 제가 붙잡은 놈들이니까요. 조선인들은 제가 붙잡은 왜인들을 붙들고 저들이 무슨 재주를 가졌는지 일일이 물어서 확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솔직히 저도 모르다가 며칠 전에 알았습니다.”
몇몇 장수들은 슈르하치의 말을 의심했다. 하지만 그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자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슈르하치는 정말로 철 생산 능력과 조총 생산 능력을 손에 넣은 것이다.
물론 당장 조선이나 명나라만큼 철과 총을 쏟아낼 수 없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언젠가는 필요한 만큼 만들어낼 수 있을 터였다. 건주위가 장차 혼자 일어서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다.
“아우가 정말 큰일을 해냈군!”
“추장, 이는 압카이 한과 문수보살의 가호가 틀림없습니다!”
사방에서 축하의 술잔이 밀려들었다. 근래 들어 바닥까지 떨어졌던 슈르하치의 위상이 지금 이 자리에서 급상승하고 있었다.
– 14 –
“신이 전부터 궁금하게 여긴 바가 있사온데. 여쭈어도 되겠사옵니까?”
“무엇인가?”
“전하께서는 세계가 어찌 생겼는지 어찌 그리 정확히 알고 계시옵니까?”
새해를 맞아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유성룡, 이원익, 이항복과 마주 앉아 장차 우리가 나갈 방향을 논하던 중이었다. 물론 시대가 시대니 해외로 나가 식민지를 건설하자는 계획 같은 걸 털어놓을 타이밍은 아니다. 일단 제시할 목표는 지금보다 편리하고 이익이 남는 교역이다.
헌데 논의 도중에 이항복이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나도 모르게 등에 진땀이 흘렀다.
“이제까지 조선에서는 누구도 가본 적이 없고, 서양인들조차 가본 적이 없는 땅의 형상을 그려내시는 모습을 보면 실로 신인(神人)이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책을 통해 이를 배우셨다면 신에게 그 책을 보여주시어 신에게도 깨달음을 얻게 해주소서.”
역시 이항복이다. 다른 신하들은 감히 이런 거 물어볼 생각도 안 하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묻는 바람에 잠깐 놀랐다만, 곧 진정했다. 이런 질문은 이미 선교사들한테 잔뜩 받았었으니까.
“내가 그동안 읽은 서책이 한두 권이 아닌데 어찌 모두 기억하겠는가? 허나 내가 읽은 책 제목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하고 있음은 곧 그만큼 내가 배움이 깊지 못함을 뜻하니, 그대들 보기에 내 부끄러울 따름이다.”
“아니옵니다. 모든 것이 신의 불찰이니, 전하께서 심란하시게 만든 신의 불충을 벌주소서.”
“아니다. 의문이 있으면 풀어야 하지 않겠느냐?”
날 대놓고 의심하는 사람은 두 번째로군. 중전이 각성 초기에 한동안 그랬었지. 이항복은 중전과 달리 입장이 입장이라 그래도 바로 뭐라고 하진 않은 듯하지만….
아마 다른 신하들도 다 어느 정도는 이상하게 여기고 있긴 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공연히 해명하려고 하면 긁어 부스럼이 될 사안이니, 이대로 그냥 계속 뭉개고 가는 수밖에.
분명 후대에는 내가 대충 그린 지도를 놓고 한바탕 갑론을박이 벌어지겠지. ‘어떻게 XX는 가보지도 않은 땅을 그릴 수 있었는가’라고 말이야. 아마 그때 내가 또 각성하면 볼만하겠다.
“자,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 그대들도 알겠지만, 우리가 유럽인들에게서 사들이는 물자는 대부분 대동양을 건너오고 있노라.”
초석 같은 거야 동남아를 거쳐 남쪽에서 오지만, ‘진짜 유럽에서 오는’ 물건들은 멕시코에서 마닐라 갈레온을 타고 온다. 아니,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은이 온다. 남미와 멕시코에서 채굴한 은이야말로 태평양을 건너오는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그러하옵니다. 신서반아에서 보낸 은은 여송을 거쳐 벽란도로 오고, 거기서 인삼?모피?차?도자기로 바뀌어 다시 바다를 건너가고 있습니다.”
유성룡이 차분히 답했다. 이 교역로가 움직이기 시작한 지는 몇 년 되지 않아서 아직 그리 큰 이윤을 낳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만력제의 하사금이라는 화수분이 끊어진 이상, 어딘가 돈이 나올 만한 구멍이라면 하나도 남기지 말고 파헤쳐야 할 상황이다.
“그 길에 우리도 배를 띄운다. 우리 물건을 벽란도에서 팔 게 아니라 신서반아에 가서 직접 팔면 훨씬 비싼 값을 받을 게 아닌가.”
“하지만 전하, 대동양을 건너는 길은 서반아인들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동양을 건너는 교역로는 마닐라에 있는 서반아 총독이 독점하고 있는데, 이를 침해하면 저들이 항의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안내를 청하지 않고 스스로 바다를 건넌다면 전자는 문제가 될 게 없다. 후자의 문제는 우리가 서반아령 아메리카 북쪽, 비어 있는 토인들의 땅을 개간하여 백성들을 살게 한 후 우리 백성들에게 물자를 보내는 형식으로 하면 역시 문제가 될 일이 없다.”
“잠상(潛商)을 유도하시려는 것이옵니까?”
“결과만 보면 일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내가 기억하기로, 스페인 식민지는 본국 외에 외부와는 교역할 수 없었다. 본국이 이익을 얻기 위해서 내린 조치였으므로 스페인에서 공급되는 물건 가격은 엄청나게 비쌌다. 본국에서 폭리를 취하는 데 대한 현지인들의 대응은 당연히 밀수였다.
영국인,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등이 노예, 일용품, 사치품, 무기 등 수많은 짐을 카리브해 일대의 스페인 식민지로 싣고 와 팔아댔다. 우리는 대륙 반대편, 태평양 연안에서 그 비슷한 일을 할 뿐이다. 당장 식민지까지는 무리겠지만 상업거점 정도는 만들 수 있으리라고 본다.
“그동안 스페인 국왕이 전하께 보인 호의를 생각하면 잠상을 통해 은을 벌어들임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만….”
이원익이 한마디 했다. 틀린 말도 아니고, 예상한 질문이기도 해서 나도 조용히 답했다.
“나도 그 점은 알고 있다. 하지만 서반아 국왕에게 받은 호의는 인삼과 모피, 산 호랑이를 보내 충분히 갚지 않았느냐? 올해 여름에는 3차 견서사가 갈 것이니 그편에 또 선물을 보낼 것이니라.”
펠리페 2세의 개인적인 호의는 나도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익은 국익 아닌가. 조선은 은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넉넉하게 말이다.
“언제까지 우리 백성들이 무거운 쌀과 포목, 언제 가치가 폭락할지 모르는 저화만 사용해서 물건을 매매해야겠느냐? 이제 대국에서 은을 퍼줄 일도 없으니, 교역으로 은을 구해올 수밖에 없다. 그대들도 내 마음을 헤아려주기 바란다.”
이미 조선 내에서 은이 돌기 시작했다. 명나라가 군사원조로 보내준 은이 일부 국내 시장에 풀린 탓이다. 하지만 추가로 공급이 안 된다면 곧 모두 사장될 게 빤하다. 귀한 은을 시장에 들고 나가기보다 궤짝에 쟁여 놓는 놈이 당연히 더 많을 테니까.
“전하께서 이순원과 바렌츠를 북으로 보내신 데도 신서반아로 가는 수로를 찾고자 하시는 바가 있었는지요?”
“그런 의도가 없지는 않다. 무척 춥고 험한 길을 거쳐야 하지만, 적어도 방향은 잃지 않을 경로니까.”
당연하지. 캄차카에서 동진, 알류샨 열도를 따라 알래스카로 가면 길을 잃으려야 잃을 수가 없잖아. 알래스카에 도착하면 그대로 북미 서해안으로 남진하면 되고. 캘리포니아를 통과하면 바로 멕시코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 기본이 되는 조건이 사할린 확보다. 태평양 횡단 항로는 홋카이도에서 바로 출발하면 되지만, 알래스카 쪽은 사할린과 캄차카를 거쳐야 하니까.
그런데 이 길을 탐사하라고 보낸 이순원과 바렌츠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이거, 봄이 오면 구조대를 보내야 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