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be a great soldier RAW novel - Chapter 721
2부 49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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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옛날 생각이 나네.”
조선에 와서 설경을 보며 머그잔에 담은 모닝커피를 마시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굳이 근원을 따진다면, 애초에 내가 커피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지만.
“맛있기는. 순전히 우유에 설탕 맛으로 먹고 있으면서.”
상희가 살짝 눈을 흘겼다. 하긴, 나는 상희 입맛대로 내린 커피는 도저히 못 먹겠다. 정말로 쓰고 진해서 혀를 대기가 무서울 지경이다.
“이런 거라도 마시지 않으면 밤을 새울 수가 없었어. 그나마 탕비실에 있는 커피는 과비로 사서 채우니까 내 돈이 들지는 않았지.”
교수들을 따라다니며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려면 낮에 혼자서 공부하고 연구할 시간 같은 건 전혀 없었다고 했다. 그걸 다 밤에 하려니 카페인 농축액에 가까운 진한 커피를 입에 달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차라리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그런 걸 마시려면 내 돈 주고 사야 했으니까.”
학부 졸업하기 전에도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려면 진한 커피는 필수품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우유도 설탕도 넣지 않은 블랙커피가 완전히 습관이 됐다고 한다.
“난 우유 좀 더 넣어야겠어. 거기 주전자 좀 줘.”
커피에 우유를 타는 건 궁궐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젖소 사육 자체가 어렵다 보니 시중에서는 아직 우유를 구할 수 없다. 심지어 양젖이나 염소젖도 구하기 어렵다. 조선에서는 소젖은 물론이고 양젖이나 염소젖도 먹는 문화가 없으니까.
하려고만 했으면 몽골에서 수입할 수 있지만, 그동안 염소는 수입대상이 아니었다. 육축인 소나 말이 먼저지 염소 따위를 왜 수입한다는 말인가? 펠리페 2세도 소, 말, 돼지, 닭은 잔뜩 보내줬어도 염소는 보내지 않았다. 역시 중요하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상희네 카페에서는 커피에 우유 대신 두유를 넣는다. 비린내를 잡기 위해서 땅콩을 섞고 설탕을 넣은 두유다. 다들 이 시커먼 서양 차에는 원래 이런 걸 넣는가 보다 하고 넣어 마신다고 한다.
“이항복이랑 가서 마셔보니까 두유 넣은 커피도 괜찮긴 하더라.”
“괜찮지? 나는 너무 연해서 별로 안 좋아하지만, 맛은 괜찮아. 조선에서는 블랙으로 마시는 사람은 사실 나밖에 없고. 그 맛을 못 잊어서 마시긴 하는데, 점심 전에만 마셔. 밤에 마시면 못 자는 게 당연하지만, 오후에 마셔도 밤에 잠을 못 자겠더라고.”
‘상희’의 혀는 카페인이 주는 자극을 좋아하지만 ‘소의 이씨’의 몸은 생전 처음 받아들이는 카페인 폭탄을 감당하지 못한다. 당연히 잠을 설칠밖에.
“원두 재고는 충분해?”
“지금처럼 팔리면 다음 배가 오기 전에 떨어질지도 모르겠어. 이런 걱정 안 하려면 주문을 더 늘려야 할 것 같아.”
조선에 오는 커피는 상당히 유통 경로가 복잡하다. 아라비아 모카 항구를 출발해서 인도로 가는 게 첫 단계다. 그러면 인도에서 배를 갈아타고 동남아를 통과해 마카오를 찍고 조선으로 들어온다. 안 그래도 비싼 물건인데, 당연히 중간 마진이 붙어 가격이 더 비싸진다.
커피값을 더 비싸게 만드는 요인은 우리밖에 사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동아시아 전체에서 커피를 매입하는 고객은 반촌다점 달랑 하나뿐이니 가격이 싸질 수가 없다. 시장이 대규모로 형성돼야 커피값이 싸지든 말든 할 거 아닌가.
지금보다 더 싸게 사고 싶으면 우리가 교역선을 직접 아라비아까지, 아니면 에티오피아까지 내보내서 생산지와 직거래를 트는 수밖에 없다. 그것도 지금 견서사로 간 선원들이 돌아와야 시도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말이다.
“연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온다면 그 친구들한테 주문하면 좀 더 싸질까?”
지금 조선에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서양 교역선은 마카오에서 1년에 4번 들어오는 포르투갈 배가 전부다. 예수회의 독점권 때문에 스페인은 조선에 못 오므로, 스페인 식민지 마닐라와의 교역은 우리가 가서 한다. 동남아에 다녀오는 배가 중간에 대남도와 마닐라를 경유한다.
필리핀 총독은 교류를 더 늘리고 싶어 안달이다. 하지만 조선에서 선교하고 싶어서 그러는 속셈이 빤히 보이니 허락할 생각은 없다. 스페인 왕실이 후원하는 도미니코회나 프란치스코회 같은 수도회들은 내가 보기엔 조선에 탈레반이나 다름없는 충격을 안길 놈들이다.
제사 문제야 교황에게 허가를 받았으니 별 고민이 없지만, 다른 문화를 상대하는 시각에서 그놈들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과연 도미니코회에서 보낸 수도사들이 예수회 선교사들처럼 조선말과 한문, 유교적 교양을 익히고 한복을 입을까? 점잖게 행동하기라도 할까?
빤히 상상이 되다 보니 필리핀 총독이 계속 청을 넣어도 계속 거절하고 있다. 예수회 쪽도 그런 내 대응을 은근히 반기는 중이다.
“소용없을 거야. 네덜란드 배들은 아랍 쪽으로 아예 안 가니까.”
내가 기억하기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희망봉에서 동남아시아로 직행했다. 그래야 항해 기간을 단축하고 그만큼 비용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커피 몇 자루 싼값에 실어다 주려고 일부러 아라비아에 들를 리가 없다.
“커피에 과도한 이윤을 붙이는 중간상인들의 농간을 피하기 위한 직거래 시도라니, 유럽이 향신료를 싸게 사려고 대항해시대를 시작한 행동이랑 다를 게 없네. 당장은 어렵겠지만, 커피 수요가 늘거든 배 직접 보내는 것도 고려해 줘.”
앞에서 말했지만, 아무리 잘 팔린다고 해도 결국은 카페 하나가 소비하는 분량이다. 화물선 한 척에 커피를 가득 싣고 왔을 때, 그걸 반촌다점에서 다 소비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그러니 아직은 커피 직거래가 수지가 안 맞는 시도라며 상희가 한숨을 쉬었다.
“상희야, 왜 커피 사 올 생각만 해? 중동에서 수입할 다른 물건도 있잖아. 그리고 중간에 인도에도 들를 텐데, 인도에서 면포나 염초 싣고 오면 배에 공간이 남을 일은 없을걸?”
“아, 그렇지.”
사실 아랍과의 교역은 한참 나중에나 시작하리라 생각하고 깊게 생각 안 하고 있었다. 커피 교역을 계기로 한다면 들여올 물건이 없는 건 아니다.
“고려 때 아랍 상인들한테 수입하던 물건이 뭐였더라. 수은, 향료, 산호였지? 그거 말고 또 사 올 만한 거라면…말, 양탄자, 대추야자, 역청, 염료 같은 게 있으려나.”
아랍종 말은 명마의 대명사다. 몸집은 작아도 속도가 빠르고 지구력이 강한 품종이라 승용, 경기병용으로 좋다. 양탄자야 뭐 설명할 거 없고, 말린 대추야자는 보존식으로 아주 유용하다. 우리 대추처럼 비타민C까지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는 못하다.
역청(瀝靑)은 원유가 지표면으로 저절로 배어 나온 뒤에 휘발성분이 다 날아가고 남은 천연 아스팔트 같은 거다. 아주 유용한 방수제로 쓸 수 있다. 다만 나무를 건류해서 뽑아낸 목타르, 역청탄에서 뽑아낸 콜타르 역시 같은 용도로 쓸 수 있으니 필요성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돌아오는 길에 동남아에서 후추 같은 향신료를 더 싣고 와도 좋겠네. 커피 직교역, 의외로 해볼 만하겠는걸.”
“그럼 다행이네.”
살짝 미소를 지은 상희가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봄 되면 유구에 사신 보낸댔지? 무슨 제안할 거야? 그런데 우리가 유구랑 직접 교류하면 제후국끼리 서로 모의하지 말라고 명나라가 뭐라고 할 텐데, 괜찮겠어?”
“괜찮게 해야지.”
다행히 지금 명나라 황제는 다른 사람 아닌 파업황제 만력제다. 우리가 적당히 조심하기만 하면 직접적인 제재는 아마 없을 거다. 그렇게 되도록 잘 계획했다.
만약 왜인들이 을미조약을 무시하고 유구국을 침공했을 때는 바로 본국에 연락할 수 있도록 유구의 도읍인 슈리에다 쾌속선을 상주시키고 싶다, 유구에서 유황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도록 장기 약조를 맺고 싶다, 남만으로 가는 조선 교역선에다 유구 상단을 태워주겠다.
예조에서 작성한 국서는 이 3가지 내용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2번째는 어차피 지금도 황을 잘만 수입하고 있으니 별 의미가 없고, 3번째 역시 지금도 시행은 하지만 우리 짐과 인원을 운반하는 게 최우선이라 딱히 바뀔 게 없다. 결정적인 조항은 1번이다.
“전하, 번국을 보호함은 대국에서 맡아서 할 일입니다. 우리 조선은 대명을 모시는 번국에 불과한데, 어찌 같은 번국인 유구를 지켜주겠다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무척이나 무엄한 일이며, 천자의 존엄함을 감히 넘보는 일입니다.”
이 결정에 관해 사전에 알지 못하던 대간들이 들고 일어났다. 예상대로의 반응이었고, 그에 대한 답변은 이미 준비해 놓았다.
“그대들에게 묻겠다. 만약 왜적이 유구를 범한다면, 천자께서 유구를 구원하시겠는가, 아니 구원하시겠는가?”
“당연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접한 번국인 우리에게 출병을 명하시겠는가, 명하지 않으시겠는가?”
“그야….”
“대답하기 어려운 모양이니 다시 묻겠다. 천자께서 우리에게 군사를 내어 유구를 구원하라 명하신다면, 따라야 하겠는가, 따르지 말아야 하겠는가?”
“마땅히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구에 최대한 빨리 원군을 보낼 수 있도록 준비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일본에서 노획한 잉여무기를 원조해서 유구가 스스로 국방력을 강화하게 돕는 방법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 경우 유구가 받은 무기를 제대로 활용할 역량이 있는지가 확실치 않을뿐더러 명나라에서 더 크게 의심할 수도 있다. 우리가 유구의 반란을 부추긴다고 말이다.
내가 이렇게 나가자 잔소리 좋아하는 대간들도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비변사에서 이미 의견 조율을 마친 중신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럼 예조판서는 국서의 문안만 좀 더 다듬도록 하라. 그리고 다음 성절사 편으로 대국에 표를 올려 ‘유사시에는 바로 유구로 출병코자 하니, 혹시 허가를 구하는 서한이 늦어지더라도 우리 조선의 깊은 충정을 생각하시어 부디 오해하지 말아달라’고 청하라.”
“예, 전하.”
유구를 지켜주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외교적인 우호세력을 확보할 수 있을뿐더러, 장차 우리 조선이 태평양으로 나가는 출구가 될 곳이니까. 그리고 전략물자인 황과 설탕이나 과일 같은 열대작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설탕 같은 건 이미 대남도에서 재배하고 있지만, 유구에서도 설탕을 얻을 수 있다면 나쁠 거 없으니까.”
“대남도 설탕이랑 시장에서 경쟁하게 되지 않겠어?”
지금 우리가 커피에 넣고 있는 흑설탕이 바로 대남도에서 수확한 물건이다. 외수사를 통해 들어온 이 설탕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다는 데서, 반촌다점은 확실히 어느 정도 특혜를 받고 있긴 하다. 설탕은 아직도 감미료가 아니라 귀한 약재로 취급받고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 설탕 재배를 우리 기술과 자본으로 해나가면 경쟁상대가 아니게 되지. 조선에서 좀 더 가까운 우리 제2 농장일 뿐이야.”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장차 명나라가 흔들리는 날이 오면 유구는 자연스럽게 조선의 산하로 들어온다. 그동안 유지하던 명분상 신하국으로 만들기는 좀 어렵겠지만, 적어도 형제지국으로 받아들이는 정도는 가능할 거다. 물론 형이 조선, 아우가 유구다.
“그러면 규슈에서 대만까지 죽 이어지는 선이 모두 우리 영역이 돼. 동아시아 해안 전체가 조선의 바다가 되고, 동중국해가 아니라 남조선해가 국제적인 명칭이 될 수도 있어.”
“동중국해, 오키나와…과연 그렇게 될까?”
잠시 과거를 되새기는 듯 상희의 얼굴이 아련해졌다. 하긴, 이쪽 세계에서는 미래지만 우리 둘에게는 지나간 옛일이니까. 뭔가 추억이라도 떠오른 걸까?
“혹시 전에 오키나와 가봤었어?”
“응, 조선에 오기 바로 전해에, 학회 때문에.”
“그때 로마 간 거 아니었어?”
상희의 얼굴에 짜증이 확 치솟았다. 내가 또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드린 모양이다.
“4월에 국제동양의학 연구대회 참석한다고 오키나와에 갔었고, 돌아오자마자 다시 준비해서 6월에 로마에 갔어. 교수들은 여행 한번 신나게 했고, 난 개인적으로 외출할 엄두도 못 내고 조수에 비서에 가이드 노릇까지 했었지. 그리고….”
상희가 이를 악물었다. 떠올리기도 싫다는 태도가 너무 역력해서 차마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볼 수가 없었다.
잠깐 생각하다가 머그잔을 내려놓고 아무 말 없이 상희를 꼭 안아주었다. 안고 있으니 차츰 호흡도 진정되고 맥박도 가라앉았다.
“이제 새해가 왔잖아. 새해 벽두부터 화딱지 나는 옛날 일 같은 건 떠올리지 말고, 즐겁게 눈싸움이나 한 판 어때?”
“좋아.”
“그럼 후궁에 총동원령을 내려야겠군.”
왕실에서 눈싸움하는 날은 궁에 있는 식구들이 모두 한 자리에서 어울리는 날이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옷을 든든히 입고, 제비를 뽑아서 내 편과 중전 편을 나눈다. 그 외에 별다른 규칙은 없다. 나를 맞히더라도 상관없다. 어디, 오늘 시합에서 누가 날 가장 많이 맞힐까?
– 14 –
“부원수 유극량과 중추원 지사 이일이 새로운 군역 체제에 관한 안을 제출하였나이다.”
“어디 들어보자.”
두 사람 모두 실무 경험이 풍부하고, 이일은 군사이론도 빠삭하다. 이일이 뭔가 시스템을 창안한다면 유극량은 이를 보완, 현실화하는데 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들 두 사람이 연구한 결론은 무엇일지, 참으로 기대가 되었다. 자, 과연 어떤 안이 나올까?
“그동안 우리나라는 모든 군정이 소집에 응하여 번갈아 복무하는 번상병제를 채택하였는데, 늘 복무하는 상비군에 비해 훈련과 전비가 미비한 점이 있어 군의 주력을 상비군으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전쟁도 끝났고, 딱히 긴급하거나 비밀스럽게 처리해야 하는 일도 아니고 해서 이번 발표는 비변사가 아닌 보통 조회에서 행해졌다. 급이 낮은 신하들도 자유롭게 내용을 듣고 의견을 낼 수 있다.
“허나 오직 용병에게만 나라의 군무를 맡긴다면 유사시에 군사가 부족할 수 있으며, 군역을 수행하는 백성의 의무도 지킬 수 없게 됩니다. 이에 모든 군정으로 하여금 군무를 수행하게 하는 제도를 고안하여 보았습니다.”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 국민개병제의 냄새가. 속오군 말고 뭔가 시행하려는 모양인데?
“16세가 된 사내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군영에 들어가 3달 동안 군무를 익히게 합니다. 이후 매년 1달씩 입영하여 이미 익힌 바를 반복하여 숙달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일과 유극량의 제안은 모든 병역 대상자에게 정식 복무를 시키자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훈련소 과정만 거치게 한 뒤 곧바로 예비역으로 편입시키는 쪽에 가깝다. 그러면 기본은 갖춘 예비전력 다수를 적은 비용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전란이 발발하면, 이 군사들을 즉시 소집하여 부대로 편성합니다. 그리고 각 지방의 성과 보를 방어하고, 필요에 따라 상비군 군영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하는 용도로 활용하면 됩니다. 그러면 군사가 부족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운영을 시작한 강무관에서도 내년부터 매년 300명의 졸업생을 내놓는다. 그러면 이 많은 군사를 지휘할 장교단도 확보가 되는 셈이니, 예비전력 확보에도 가속도가 붙는다.
“내 보기에는 괜찮은 듯하다. 비용도 많이 들지 않고, 매년 훈련이 법규대로 시행만 된다면 지금의 180만 속오군이 모두 정예병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대들은 어떠한가?”
속오군이 늘어난 건 정군이 사실상 폐지된 탓이 크다. 아니, 이젠 사실상 속오군과 정군을 구별할 의미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겠구나.
몇 가지 질문과 지적이 나오긴 했지만, 다른 중신들도 큰 이의는 없었다. 역시 최근에 치른 왜란과 일본 원정 때문에 군비를 확충할 필요성을 절절하게 깨달은 덕분에 그런 듯하다.
올해는 법제를 정비하고 실질적인 준비를 해야 하니, 이 제도는 좀더 조정을 거쳐 내년이나 내후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토의를 마치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니, 예조판서가 누르하치가 봄이 되면 몽골 원정에 나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보고를 했다.
“그래서 화약과 탄환이 필요하니 원조해 달라는 청을 올렸사옵니다.”
몽골과 건주위는 모두 총을 가지고 있지만, 화약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약점도 공유하고 있다. 몽골은 명나라에서 훔치거나 밀수해서 화약을 조달해야 하고, 건주위는 우리한테 몰래 공급받는 수밖에 없다.
“납환 2만 개와 화약 500근을 보내 주어라. 혹시 요동군에서 알고 추궁이 들어오거든, 총과 화약 모두 왜국에서 노획해 온 물자인 듯한데 우리는 그 사연을 알지 못한다고 답하라.”
“알겠사옵니다.”
이걸로 우리가 옛날에 보낸 조총도 자연스럽게 묻어버릴 수 있게 됐다. 마침 우리가 넘겨준 총도 왜조총이니 말이지. 과연 이번에 저 녀석들이 어떤 전과를 거둘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